악당의 아빠를 꼬셔라 3권



 목차

악당의 아빠를 꼬셔라 3권

Ch 5.빙빙돌아맞닿는것



Ch 6. 평온의 반대말은 폭풍 전야

Ch 7.눈에는이,이에는눈(1)


 Ch 5. 빙빙 돌아 맞닿는 것

나는그날이후로도한참을더쉬었다.벨고로트궁의모든사용인은내가방에서한발짝만걸어나 와도당장픽쓰러질것처럼온신경을곤두세웠다.물론내가움직일수있는반경이고작궁의3층밖 에는 안 되니 혹시라도 그 범주를 벗어날까 노심초사하는 마음은 알겠는데.


“.......”

나는 슬쩍 방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최대한 조심한다고 했는데도 한쪽으로 느슨하게 땋아 내 린 분홍색 머리카락 끝이 문밖으로 불쑥 튀어나왔다. 내가 고개를 내밀기가 무섭게, 대기하고 있던 시


다.

웃어

과보호다. 과보호. 나는 한숨을 쉬며 도로 침대로 가 푹 드러누웠다. 하루 이틀이면 몰라도 본궁 사 람들의 눈치를 보며 방 안에만 칩거한 게 벌써 일주일째였다. 일주일을 넘어가면서부터 시간 개념이 고뭐고전부없어져서,나는오늘이대체며칠인지도정확하게알수가없었다.

심지어 밤에는 잠도 잘 못 잤다. 며칠째 생활 패턴이 불규칙한 데다 방 밖에는 나가지도 못하니, 이 정도까지 회복한 게 기적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침대를 뒹굴었다.

[쯧쯧. 게으름으로는 지상에서 네가 제일이구나.]

이 지경이니 나를 콕콕 들쑤시는 라울루스의 음성마저도 반가웠다. 나는 실실 웃으며 대꾸했다.

“그러게요. 이러다가 진짜 침대에 뿌리라도 내리면 어떡하지?”

아무래도내가진짜미쳐가는게틀림없어.이얄미운목소리에이렇게흔쾌히반응해주다니.정말 로나는어디한곳에만갇혀있으면안되는종류의인간임이틀림없었다.

“이건 사람 사는 게 아냐.......”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본궁의 후원이 유독 푸르고 예뻐 보였다. 그림의 떡이다. 그림의 떡. 나는 침대 기둥을 붙잡고 침을 흘릴 기세로 후원을 내려다보았다. 나가고 싶은 열망이 보

녀들

였다

의눈

“좋은 아침이에요, 모두......!”

부내

로쏠

는활

.

그리고 방문을 닫고 131번째로 좌절했다.

그러니까, 이건 좀 심한 거 아니냐고......!


 글보글 끓어올랐다.

다행이라면 다행으로, 내 이성은 아직까지는 착실하게 기능했다. 함부로 돌아다녔다가 정말로 객사 할지도 모른다는 게 적어도 내게는 과장된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래서 방구석에서 할 수 있는 거라도 찾아보려 했건만.

“대필해 드릴까요, 공주님?”

르보브니에 편지라도 보낼까 하고 펜과 종이를 부탁하자 돌아오는 말이라곤 이런 말뿐이었다.

“괜찮아요!”


대필은 무슨. 저는 손을 다친 게 아니에요, 록산느......! 하지만 막상 편지를 쓰려니 앞이 캄캄했다. 쓸 말이야 많지만, 일단 이걸 르보브니로 부칠 수 있을지부터가 미지수였다.


그럼 운동이라도 좀 할까? 아무래도 벨고트로 와서 얻은 거라곤 개복치력과 나태함밖에는 없는 것 같으니까. 그래, 운동이라도.......

“공주니이임!”

물론 눈에 불을 켜고 내 일거수일투족을 확인하는 시녀들의 눈을 피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공주님! 이런 건 저희를 시켜 주세요!” 아령대신작은화분이라도들어볼까하면귀신같이알고선빼앗아가고.

“세상에, 공주님! 바닥에서 뭘 하고 계세요!” 팔굽혀펴기라도해볼라치면기겁해서침대에눕혀놓고.

“공주님, 땀이! 열이 나는 게 틀림없으셔요. 당장 주치의를!”

이마에 땀 한 방울 맺힌 것으로 주치의까지 헐레벌떡 달려왔다.

“공주님. 아직 기력이 온전치 않으셔서, 과도한 운동은 금물입니다. 절대! 금물이요!” 공주님, 안 돼요. 멈추세요, 공주님. 공주님, 이것 해 드릴까요? 저것은 어떠세요, 공주님? 그놈의 공주님.......

“그냥 가만히 있을게요.......”

망할.결국엔내가할수있는건아무것도없었다.


 그러면 에우레디안이나, 하다못해 디에리고, 아니면 마리안느라도 옆에 있으면 좋을 텐데. 애석하 게도그셋중당장내곁에와줄수있는사람은한명도없었다.

에우레디안은 몹시 예민하고 냉정하게도 벨리룩 궁의 사람들을 본궁에 들이는 것을 불허했다. 아무 리 내 몸으로 직접 확인을 거쳤다 한들 이미 주인을 제대로 모시지 못한 바, 본궁에 들일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해고되지 않은 게 그나마 정상 참작해 준 거라고 하니, 그 단호한 낯에 대고 내가 더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정말로 선을 넘어갔다 싶으면 찬바람 쌩쌩 불도록 냉랭하게 변하는 남자였다. 뭐, 그 사실을 몰랐던 것은 아니었으므로, 나는 그를 더 설득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리고 디에리고는 사실 애초에 내가 부른다고 바로 올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엄연히 바리샤드 의부주교인걸.바쁜사제님을매일같이나랑놀자고불러댈수도없지않은가.


그러면 남은 사람. 에우레디안 벨고트. 약간 벌레의 삶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는 나를 구원해 줄 사람은 그 남자밖에 없는데.


“......바쁘니까.”

나는 괜히 중얼거렸다. 사실은 그건 핑계였다. 에우레디안이 바쁜 거야 1년 365일 내내 있는 일일 테 니까. 게다가 나는 대충 그가 어느 시간에 일을 하고 어느 시간에 쉬며 어느 시간에 식사를 하는지 알 았다.

에우레디안은 가끔 너무 정확해서 껄끄러울 정도로 시간을 칼같이 계산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모 르기가더어렵다.그가이삼일에한번쯤시간을내는게불가능한일은아니란걸. ......알지만.

문제는 나였다. 나.

“젠장.”

나는 우울하게 중얼거리며 무릎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그 남자를 그냥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 박동이 서서히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거, 중증이라고!

한번 에우레디안 벨고트에 대해 떠올리기 시작하면 주체할 수 없이 기억이 줄줄 흘러나왔다. 딱 일 주일 전의 새벽에 나를 안아 줬던 일.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던 것. 그 후로 가끔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 다 꼼꼼하게 내 상태를 확인하곤 하던 것. 그래서 내가 점점 더 비정상적으로 뛰는 가슴을 느끼게 된 것.

거기다그가내게손끝이라도닿아올라치면곧장귀끝이달아올랐다.그상태로더그를마주보고 있다간얼굴은물론이요목까지전부새빨개질것같아서도망치듯방으로돌아온게한두번이아니 었다.


 그 지경이니 이제는 내 쪽에서 먼저 에우레디안을 피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어떻게 그렇게 줄 기차게 들이댔을까 싶을 정도로.

그리고그대단한남자는내가저를찾지않으니따라나를찾지않았다.나는거기서살짝서운해하 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는 헛숨을 내뱉었다. 먼저 피하는 주제에 안 찾아 줘서 서운하다고? 바보냐!

“.......” 어쨌든그래서오늘의상태가된것이다.음침한방한구석에서반쯤썩어가고있는한마리바퀴벌

레처럼.

[테라스라도 나가서 바람 좀 쐬어라, 아가야. 그러다 산 채로 미라가 되겠어.]


오죽하면 라울루스조차 이렇게 말을 하냔 말이다. 나는 침대에 푹 퍼진 채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아무래도 그렇죠?”

[응. 너 요새 사는 것이 굼벵이만도 못하다.]

늘 깐족거리기나 하던 라울루스가 퍽 진지하게 답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마음을 굳혔다. 그래. 뭐가 됐든 이대로 벌레처럼 살다가 르보브니로 강제 송환되느니, 뭐 하나라도 더 하는 편이 낫겠어!

“.......”

그 결심의 대가로 나는 중앙궁 3층의 복도를 걷는 내내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려야 했다. 내 등 뒤에 길게따라붙는숱한시선들과,한걸음내디딜때마다꼭한걸음씩따라붙는사용인들의발소리들때 문에.

나는힐끔뒤를돌아보았다가내뒤를줄줄이따르는시녀와시종들의2열종대에기겁해서도로고 개를 돌렸다. 부, 부담스러워......! 며칠째 방 밖을 나올 때마다 겪는 일인데도 부담스럽다. 설마 이것 도 에우레디안이 시킨 건가? 저번에 멋대로 시녀들을 협박해서 중앙궁을 빠져나갔다고 지금 이러는 건가......!

어쨌든 그 지경이었으니, 마침 계단을 올라오고 있던 남자를 발견한 것은 일단은 몹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폐하!”

나는 일단 반갑게 그를 불렀다. 뒤를 따르던 보좌관에게 무언가를 지시하던 그가 내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불그스름한 자줏빛 눈과 시선이 딱 마주쳤다. 에우레디안이 천천히 나를 불렀다.


 “공주.”

그리고 나는 반갑게 그를 부른 게 무색하게도 다시 어색하게 눈을 깜빡였다. 오늘의 에우레디안은 평소보다 살짝 덜 풀어진 모습이었다. 은빛 머리카락은 자연스럽게 흐트러진 모양이었지만 깔끔한 흰 셔츠에 얇은 리본 모양 크라바트까지 제대로 매고 있었다.

크라바트나 타이라면 질색을 하는 그가 저렇게 단정한 차림이라는 건 귀족들의 알현을 받았거나, 중요한 회의를 하고 나왔다는 얘기다. 짧은 순간에도 그 정보들이 휘리릭 머릿속을 스쳤다.

“어쩐지얼굴을보는게며칠만인것같은데.”

반듯한 낯에 그림 같은 호선이 걸렸다. 나는 뒤에 따라 늘어선 시종들의 행렬 탓에 뒤로 물러서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서서 그가 내게 다가오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그, 그런가요? 저는 딱히.......”


“왜, 며칠간 열심히 나를 피해 다니더니.”

얼핏 장난스러운 어조였지만, 나는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시는 듯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쓸데없

는부분에서감이좋아,이사람은!

그래도 일단은 부정한다.

“아니거든요. 제가 피하긴 뭘 피해요? 폐하께서 바쁘셨던 거지.”

“글쎄. 복도 끝에서 나만 보면 도로 방으로 쏙 들어가던데. 몇 번이나.”

“.......”

그리고 여지없이 실패한다. 하지만 죽었다 깨어나도 내가 당신만 보면 가슴이 뛰어서 못 살겠어요! 라고 이실직고할 수 없는 나는 끝까지 뻔뻔하게 부정했다.

“제가 언제요? 잘못 보셨어요.”

“그래, 뭐. 그럼 그렇다고 칠까.”

에우레디안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일주일 전의 그 밤에 내게 보였던 날카롭고, 예민하고, 그러 나어딘지씁쓸해보였던낯은전부흔적도없이사라진상태였다.에우레디안은내가그간가슴을부 여잡고 고민한 게 민망할 정도로 평소와 똑같았다. 그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점심은?” “......먹었어요.”


 “차는?”

“차는.......”

어쩐지 억울하다. 나를 그 밤에 그렇게 이상한 기분에 휩싸이게 만들어 놓고 혼자만 평온하다 이거 지. 그렇다면 나도 아무렇지 않아 주겠어! 나는 단단히 다짐하고 활짝 웃었다.

“아직 안 마셨다고 하면, 식후 티타임에 초대해 주시려나요?”

나를 발견한 순간부터 줄곧 여유를 잃지 않았던 에우레디안이 처음으로 멈칫했다. 반듯한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가더니, 자줏빛 눈에 이채가 스쳤다. 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귀가 빨개지지 않았기만을

간절히 빌었다.


이윽고 그의 대답이 떨어졌다. 

“그래.”

“어?”

예상외로 순순한 답에 놀란 것은 내 쪽이었다. 에우레디안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차, 마시고 가.”

어느새 평온하게 돌아온 표정과 느릿한 목소리에 다시 귓가가 달아오른 것 역시 내 쪽이었다. 나는 결국 에우레디안의 셔츠 두 번째 단추로 시선을 미끄러뜨리며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만이렇게과민반응하는건역시좀억울해......! 물론내가혼자억울해하든북을치든장구를치든변하는건없었다.어어하는사이에나는황제의

집무실 안에 들어와 있었다.

“와.......”

에우레디안의 집무실에 들어와 보는 건 처음이었다. 침실은 황제의 가장 사적인 공간답게 화려하고 다채로운 색감의 공간이었는데, 집무실은 정반대였다. 벽과 천장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지도 않았 고, 하나쯤은 놓여 있을 법한 조형물이나 사치품 하나 없었다. 깔끔한 상아색 공간은 몹시도 정적이었 다. 나는 집무실을 한 바퀴 휘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이런 곳에서 일하시는구나.”

“아. 처음 들어와 보던가?”

에우레디안은 그제야 그 사실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창가 앞의 책상 위를 정리하던 그가 약간 당황


 한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어리둥절해서 고개를 갸웃했다.

“처음이죠. 침실은 한 번 들어가 봤었지만.......”

이렇게 말하니 어쩐지 어감이 이상했다. 나는 아주 부자연스럽고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아니야. 이 상하긴 무슨. 혼자 괜히 의식하지 말란 말이야......!

“애초에저는본궁에서가본곳이별로없는데요,뭐.”

각고의 노력 끝에 평소답게 대꾸하는 데 성공했다. 에우레디안은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 보는가 싶

더니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렇죠.”


“그런데 왜 이렇게 황궁이 점령당한 것 같지.”

“네?”

나는 어리둥절해서 되물었다. 에우레디안은 창밖의 후원을 흘끗 내다보는가 싶더니 헛웃음을 지으 며 내게 손짓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거기 앉지. 차를 내오라고 시킬 테니.”

뭐야, 싱겁게. 나는 중앙에서 오른편 책장과 가까운 쪽의 테이블 앞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에 우레디안은 창문 걸쇠를 만지작거리다 한쪽 창만 열어 놓은 뒤 내 맞은편으로 와 앉았다. 나는 그가 습관적인 동작으로 크라바트를 헐겁게 풀어내는 모습을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어쩐지 제가 생각했던 거랑은 좀 다르네요.”

“뭐가?”

“집무실이요. 저는 좀 더 편안한 분위기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대체로 권태로운 인상의 남자가 일하는 곳이니 일하는 공간도 그렇지 않을까, 하고 막연히 생각했 었다. 물론 내 예상은 애초에 전제부터 엇나갔다. 겉으로만 느슨해 보일 뿐이지, 누구보다 선을 단호 하고 냉정하게 지키는 사람이니까. 그런 면으로 보자면 그와 꼭 어울리는 공간이기도 했다. 물론 그다 지 내 취향은 아니었다. 나는 애매하게 웃었다.

“어쩐지 좀 갑갑한 느낌이 들어서.” “그래?”


 에우레디안에게서는 잠시 답이 없었다. 불그스름한 자안에 또다시 이채가 스쳤다. 그러다 이내 희 미하게, 잘생긴 낯에 허탈한 웃음이 스쳤다.

“그대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 모양이지.”

“음. 조금요.”

창문을 열어 놓아 다행이지, 창문마저 꽉 닫혀 있었다면 정말로 답답했을 것 같다. 휴식이나 여유라 는 것은 완전히 배제해 버린 공간이었다. 나는 에우레디안의 얼굴을 꼼꼼히 뜯어보았다. 딱히 피곤한 기색이라거나, 예민한 구석이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쩐지, 묘하게.......

“과로는 좋지 않아요.”


왜 그 말이 툭 튀어나왔는지는 모르겠다. 딱히 바쁘거나 여유가 없어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는데도. 사람을 갑갑하게 만드는 이 집무실의 분위기 때문인가? 그는 오늘따라 더 어깨가 무거운 사람처럼 보


였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폐하랑저랑딱반반씩섞어놓으면좋을텐데.”

“뭐?”

“제 생활이 요즘 좀 많이 나태해서요. 여유롭다 못해 게을러지고 있어서.”

똑똑. 나는 때마침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말을 멈추었다.

“들어와.”

에우레디안의 허락이 떨어지자 문이 열렸다. 시종이 찻주전자와 찻잔, 간단한 다과를 올린 트레이 를 끌고 안으로 들어섰다.

“놓고 나가 봐.”

“예, 폐하.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공주님.”

에우레디안은 건성으로 손짓하며 시종을 물렸다. 시종이 차를 따라 주기를 기다리던 나는 약간 당 황했다. 그가 주전자로 손을 뻗었다. 조르륵. 찻잔에 따끈한 차가 따라졌다. 향긋한 차향이 확 퍼졌다.

나는약간당혹스럽게그모습을바라보았다.생긴것만으로도세상을좀더살만하게밝혀주는남 자가 완벽하게 차를 따르는 모습은 황송할 정도로 그림 같은 광경이었고, 그리고 실제로도 정말로 황 송한 일이었다.


 나는 멋쩍게 중얼거렸다.

“제가 해도 되는데.......”

“별로 상관없어.”

그리고 나는 졸지에 벨고트의 주인이 직접 따라 준 차를 마시는 사람이 되었다. 황제에게 직접 차를 받아 마신 사람이 제국에 얼마나 될까......?

“......감사합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에우레디안은 차를 딱 한 모금 마시나 싶더니 테이블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나


는 그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덜 풀린 크라바트 쪽으로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다. 저 남자, 겉으로는 온 대륙을 손바닥 안에서 여유롭게 주무르는 주제


에 속은 복잡하게 꼬여 있음이 틀림없다. 여기서 좀 더 심사가 뒤틀리면 그런 표정이 나오는 건가? 다 가가기 힘들 만큼 예민하고 냉랭한 표정이.

지금은 다정하기만 한 저 눈에 얼마나 날이 설 수 있는지 나는 기억했다. 에우레디안은 집요하게 뜯 어보는내시선을금세눈치챈모양이었다.아래로반쯤내리깔고있던붉은자줏빛눈동자가나를향 했다. 심각한 내 표정을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한 건지, 그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게을러졌다는 건 무슨 소리야?”

“음....... 활동량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달까요.” “활동량이라.”

“저를 굼벵이 비슷하게 보더라고요.” “굼벵이?”

나는 생각 없이 요새 라울루스가 나를 놀리는 별명을 내뱉었다가 헙 입을 다물었다. 에우레디안의 눈썹이 휙 치켜 올라가는 게 보였다. 그가 손가락으로 소파 팔걸이를 톡톡 두드리며 혼잣말처럼 말했 다.

“말버릇이 좋지는 않군. 누굴까, 그런 말을 하는 게.”

“음.제안의두번째자아?” 내가댈수있는변명은저따위것이최선이었다.나는내실수를무마하기위해생글생글웃었다. “말이 그렇다는 거죠, 말이. 방 안에서 운동이라도 좀 할까 봐요. 역시 일주일이 넘어가니까 좀이 쑤


 시긴 하네요.”

“.......”

“그렇다고 뭐 불만이 있다거나 한 건 아니고요.”

황급히 덧붙이자 에우레디안이 한숨처럼 웃었다.

“그대가 그렇게 말하면 내가 죄책감이 드는데.”

“그런 의도 아니에요. 에이, 아시면서.......”

“글쎄.......”


그가말을흐렸다.그는짙은푸른빛크라바트를더헐겁게풀고목끝까지잠근단추를하나풀어내 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 땅에서 그대가 망설여야 할 것은 무엇도 없을 거라 단언했었는데. 그러고 보면 나는 딱히 약속 을 잘 지키는 남자는 아니군.”

“그,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시라고 한 말은 아닌데.......”

나는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그의 낯을 살폈다. 분위기 반전을 시도할 때인가? 나는 금방 얼굴 표정을

바꿔 생긋 웃었다. “아,그러고보니까.폐하께서해주실수있는게있긴한데.” “......?”

붉은 자안에 금세 의문이 떠올랐다. 나는 찻잔을 내려놓고 그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어차피 소파와 소파 사이가 꽤 떨어져 있어 여전히 에우레디안과의 거리는 멀었다. 나는 내 귀가 속절없이 빨개지지 않을 정도로만 상체를 숙이고 작게 소곤거렸다.

“폐하.”

“응.”

에우레디안은 순순히 대답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할지 가만히 기다리는 눈치였다. 나는 기대감을 잔 뜩눌러담아물었다.

“저 이제, 이름으로 불러 주시면 안 될까요?”

붉은 자안이 조금 크게 뜨였다. 그러나 에우레디안은 이내 곤란한 듯이 웃었다.


 “그건 안 되겠는데.”

“왜요!”

나는 인상을 팍 구겼다.

“그 새벽에는 잘만 불러 주셨으면서......!”

내가기억못할줄알았나본데,그대목만은똑똑히기억한단말이지!

“기억에 없어.”

이남자는오늘도해괴한부분에서철벽을쳤다.설마오리발을내밀줄이야......!나는입을꾹다물 

고 그를 뾰쪽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좀 말랑해졌나 싶으면 다시 딱딱해진단 말이지. 언제나처럼 이리 저리 흔들리고 갈팡질팡하는 건 나였다.


“특별히 폐하께만 허락해 드리는 건데. 이렇게 단호하게 거절하실 거예요?”

“응.”

맘에안들어.나는기울였던몸을뒤로훅빼버렸다.에우레디안의표정은종전까지와는달리몹시 엄격하고 단호했다.

저망할철벽때문에우리관계가늘거기서거기아닌가?코앞까지가까워진것같다가도순식간에 훅멀어지고.대체줄을당기는건왜항상이남자야?

내가 짜증스러운 한숨을 삼키는데, 에우레디안이 지나가는 말투로 툭 물었다. “저번부터 궁금했는데. 왜 ‘내게만’ 허락한다는 거지?”

“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아나?”

왜냐니? 당신이랑 더 가까워지고 싶으니까. 내가 황제인 그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 댈 수는 없으니, 그라도 나를 공주가 아니라 이름으로 불러 줬으면 좋겠다. 이름을 불리는 것에 집착하는 성격은 아닌 데자꾸만회피하는남자를보니점점더오기가생겼다.

하지만그렇다고내속내를솔직하게줄줄말해버리고싶지는않았다.오늘은안끌려갈거야.이미 마음이 상한 상태라 대답은 퉁명스레 나갔다.

“폐하는 잘생기셨으니까요.”


 “그건합당한이유가못될텐데.”

“폐하는 벨고트의 주인이시니까요. 못 할 게 없으시니까.”

“벨고트의주인은더더욱내키는대로할수없는게많은데.”

에우레디안은 이제 아주 여유가 넘치다 못해 나를 보며 빙글빙글 웃기까지 했다. 그에 짜증이 확 솟 구치는 바람에 냅다 대꾸해 버렸다.

“제가 폐하를 좋-.”

그러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오기에 휙 증발했던 이성이 날아갈 때만큼이나 빠르게 돌아


온 탓이었다. 나는 지레 놀라 숨을 들이켰다가, 에우레디안의 눈치를 보았다. 그는 내가 하려던 말을 눈치채지 못한 듯 여전히 평온한 낯이었다.


“그대가 나를 뭐?”

“......제가.”

저잠잠한내면에작은풍랑이라도일으켜보려면역시직구가좋지않을까.나는용기내어다시입 을 열었다.

“제가 폐하를 좋아하니까......?”

시험 삼아 던져 본 말인데 이상하게 가슴이 쿵쿵 뛰었다. 수줍고 서툰 고백이라도 하는 느낌이었다.

분명 평소 내가 했던 것처럼 능글맞게 던져 보는 것뿐인데....... “그대는 아직도 그 이야기를 하는군.”

“아.......”

“진심없는말은취급안해,공주.”

그런데, 이상하게, 에우레디안이 피식 웃으며 가볍게 대꾸하는 말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러시구나.”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농담조의 말에 농담조의 대답이 돌아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기분이 이상했다. 에우레디안은 이제 팔을 괴고 머리를 살짝 손끝에 기댄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잔잔하게 웃음기가 도는 낯이었다. 나는 속이 어지러운 와중에조차 그 모습에 잠시 시선을 뺏겼다. 불그스름한 자줏빛 눈에 홀리기라도 하듯이.

“나는.”


 에우레디안이 느리게 입을 열었다.

“그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가끔 궁금할 때가 있어.”

“.......”

“가끔이 아니지. 사실은 꽤 자주 그래.”

그는 몹시 헷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갈피를 못 잡고 헷갈리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에우레디안 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벨고트에서 이름을 허락한다는 것이 갖는 의미는 생각보다 커, 공주.”


어쩐지 ‘공주’라는단어에힘이들어가있는것같은건내착각일까? 아니면이남자나름대로의반 항,혹은거부의표현인가?나는점점더꼬여가는사고를정리하지못하고일단내뱉었다.


“그냥 제가 듣고 싶다고 하면.”

“.......”

“폐하께서 저를 이름으로 부르는 게 듣고 싶다고 말하면. 그것만으로는 이유가 안 되나요?”

분명히 이 이야기를 처음 꺼낸 이유는 분위기 전환이었는데, 이제는 제대로 오기로 변했다. 어리광 에 가깝다는 건 알지만 여기서 아, 그렇구나, 하고 수긍해 버리면 절대 이 이상으로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나는 자세를 바로 하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태도를 확실히 해. 벽을 세울 거면 내가 더 이상은 다가가지도 못하게. 상처 입어서 다신 도전해 보 지도 못하게 제대로 쳐. 그게 아니면.......

“그대는 나를 이 이상으로 건드리면 안 돼, 공주.”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에우레디안이 말했다. 내가 이미 몇 번이고 들었던 말이었다.

“저번 일로 알았을 텐데. 이곳이 그대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못하다는 것.”

“......그런데요?”

“이곳에 미련을 두지 않는 게 좋아.”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했다. 그래. 그렇구나. 이제 당신에게 다가갈 이유가 거의 없어지다시피 한 거 니까.그걸알고서저런말을하는게아닐까싶을정도로가슴이푹푹파였다.

에우레디안이 옅게 웃었다.


 “귀한 이름을 이런 곳에 두고 가기에는 아깝지 않나.”

내가 지금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이 남자가 안다면, 이렇게는 말 못 할 거였다. 나는 본능적으 로 직감했다. 이 사람은 끝까지 이럴 거야. 내가 결국은 르보브니로 돌아갈 때까지. 끝까지, 다정하고 상냥하게 나를 밀어내겠지.

상처를 주었다가, 다시 저 다정한 눈으로, 상냥한 말투로 혹시 하는 희망을 갖게 했다가. 그렇게 나 를 흔들다가 결국에는 밀어낼 거야. 어느 쪽이 진심인지 저 입으로 내게 말해 주지 않는 이상 나는 절 대짐작할수없을거야.......에우레디안벨고트는,나를불러주지않을거야.

그래서거기서내가더할수있는말은없었다.



[뭘 그렇게 생각하니?]

라울루스가 무척 궁금하다는 듯이 물어 왔다. 나는 방긋 웃으며 차를 따라 준 록산느에게 인사를 건

넸다.

“고마워요, 록산느.”

[정말로 돌아갈 셈이야?]

“차향이 좋네요. 레몬 향 같기도 하고....... 아니, 라임인가.” “네, 공주님. 라임 티랍니다.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이에요.”

록산느가상냥하게웃었다.나는찻잔에입을대고김이모락모락나는차를한모금머금었다.달콤 한 라임 향이 도는 차가 입안 가득 퍼졌다. 록산느의 차 우리는 솜씨는 냉정히 말해서 마리안느보다 한수위였다.끝맛이쓰지도않고,온도도딱알맞다.

[얘, 부스러기야. 이제는 대답도 안 해 주려니?]

“.......”

아무래도 라울루스는 유데타 너머에서 정말 할 일이 없는 게 분명하다. 툭하면 부스러기 소리만 일 삼으면서 꾸준히 이렇게 말을 걸어오는 걸 보면. 안 그래도 마음이 뒤숭숭해 죽겠는데....... 나는 록산 느가 보지 못하도록 고개를 돌리고 인상을 팍 찌푸렸다.

** *


 “몰라요. 모른다니까.”

[너, 그 앨 가지고 싶다면서?]

“제가언제요?저는그런말한적없네요.”

하필이면깊게생각하고싶지도않은주제였다.나는앞으로뭘어떻게해야하나,에대한주제.

[나는 네가 진심인 줄 알았는데.]

라울루스가 굴하지 않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흥미가 식었다는 투였다.

“진심이긴 했는데.......”


진심이었지. 나는 록산느가 뒤돌아 테라스 문을 닫고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몸에 힘을 뺐다. 

[그런데?]

“그런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고나 해야 할까.......”

[왜,그아이가네이름을불러주지않아서?]

라울루스는 제법 날카롭게 정곡을 찔렀다. 나는 한숨을 쉬며 대꾸했다.

“그것도 그렇고요. 그냥, 상황적으로 그렇잖아요.”

내 감정을 배제하고 봐도 정말로 상황이 그랬다. 내가 에우레디안에게 들이댈 명목이 사라져 버린 탓이었다. 내가 벨고트로 납치되어 오면서 세웠던 계획의 본 뼈대는 이거였다.

‘에우레디안 벨고트와 솔레이아 엘라드의 결혼을 막는다.’

여기에내하찮은숨을더부지해보고자그를어떻게든꼬셔보겠다는원대한포부가더해지기는 했지만 어쨌든 일차적인 목표는 그거였다. 원작대로 흘러가려는 이 세계의 흐름에 반기를 들고, 에우 레디안의 결혼을 막아 악당 데카르브의 탄생을 막는다.

그런데 에우레디안 벨고트와 솔레이아가 결혼하는 일은 이제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가 솔레이아 를 흑마법사라고 의심하고 경계하는 한은.

“굳이 제가 결혼해 달라고 조르지 않아도, 에우레디안이 그 여자랑 결혼할 일은 없을 거잖아요.”

말을 할수록 생각이 차곡차곡 정리되고 있었다. 미쳤다고 그가 흑마법사인 걸 뻔히 아는 여자와 결 혼하겠는가? 그럴 확률은 이제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결국 내 돌진 작전은 의미가 없어진 거나 다름 없었다. 일단 솔레이아와 결혼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소기의 목적 중 일부는 달성한 거나 마찬가


 지니까.

기분이축가라앉았다.그럼에우레디안쪽은일단급한불을끈셈이고,남은건.

“이제 정말 걱정해야 할 건 저인데.......”

그래. 나다, 나. 이 세계에서, 특히 이 벨고트에서 오래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는 신성력이 필수적으 로필요한나.

[으음. 그렇지. 바람 불면 날아갈 홀씨 같은 몸이니.] “부스러기에 이어 홀씨예요?”


[퍽 잘 어울리는걸.]

나는 라울루스의 장난스러운 어조에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었다.


“저, 당신 사제가 되려면 정말로 꼬박 5년을 기다려야 해요? 정말로?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잠시만 내려오시는 것도 안 되나요......?”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니라니까, 홀씨야.]

“어헝. 단호해.”

[유데타의 금기라니까. 내 자의로는 지상에 함부로 발 디딜 수가 없어, 아가야. 먼저 금기를 깼다간 득달같이 달려올 놈이 있다니까.]

“누군데요, 그게!”

[있어.재수없는놈.하여튼안돼.]

라울루스가 몹시 허울만 좋은 빈 깡통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긴 했지만, 확인 사살당하니 정말로 맥이 쭉 빠졌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나는 정말로 이 위험한 땅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었 다.

내 이 하찮은 목숨을 보전하려면 하루빨리 르보브니로 돌아가서 라울루스가 말한 5년을 어떻게든 버텨 보며 신전에 칩거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이미 솔레이아 엘라드에게 미움까지 샀는데, 여기 있 으면 그 여자의 먹잇감이 되기밖에 더하겠어? 안 그래도 팍팍한 인생, 살해 위협까지 당하고 싶은 마 음은 없었다.

의식하지 못한 새 한숨이 나왔다. 반짝이는 은빛이 머릿속에 자꾸만 둥둥 떠다녔다. 평소에도 머릿 속의 반을 넘게 차지하고 있는 남자이기는 했지만, 요새는 특히 더했다.


 사흘 전의 그 짧은 티타임 이후로 다시 그를 보지 못했다. 나는 다시 방에 콕 틀어박혔고, 나 스스로 도인식할수있을만큼과하게그를피해다녔다.평소처럼아무렇지도않게마주할자신이없었다고 나 할까. 나는 울적하게 중얼거렸다.

“그래, 뭐....... 사실 진짜로 나랑 결혼해 주기를 기대한 것도 아니잖아.” 일단은,이한몸조금희생해서세기의결혼을막기는했으니잘한일이지! -라고아무리스스로를

위로해봤자별도움은되지않았다.

사실 나는 그날 또 한 번 차인 거나 다름없었다. 에우레디안은 결국 그날 끝까지 내 이름을 불러 주

지않았다.꼭다시듣고싶었는데.이름.


“아, 머리 아파.”

결국 나는 테이블에 이마를 꽁 박아 버렸다. 당장 르보브니로 돌아가는 게 내가 조금이라도 더 안전


한 길인 건 맞는데. 심지어 에우레디안도 나를 돌려보낼 궁리를 하는 게 뻔한데. 정작 나는 돌아가고 싶지않은것같았다.대차게차인후에도!

[흐음. 생각보다 끈기가 없는 아이였구나, 너.]

이와중에라울루스는내속을아주박박긁었다.

[좀 더 당차고 씩씩한 아이인 줄 알았는데.]

나도내가그런줄알았는데.나는시무룩하게양볼을테이블에번갈아짓눌렀다.타의추종을불허 하던 적응력과 행동력은 대체 다 어디로 증발해 버린 것인가?

[흐음.]

라울루스는 맥없이 엎어진 나를 보며 뭔가를 곰곰이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내가보기엔그아이,영진심은아닌것같은데말이지.]

“네?”

나는 얼굴을 테이블에 마구 짓누르다 말고 눈을 끔뻑였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애가좀더목을맸으면좋겠는데말이야.]

“음......?”


 목을 매긴. 지금 마구 휘둘리는 게 누군데. 나는 김샌 얼굴로 다시 왼쪽 볼을 사정없이 테이블에 짓 눌렀다.

“뭐래.......” 라울루스가실없는소리를하는건하루이틀일이아니었다.나는다시생각에골몰했다.밤에잠을

못 자서 그런지 정신이 흐릿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더라......?”

아무래도마음이어딘가단단히고장나버린게분명했다.하루에도몇번씩심장이주체할수없을 만큼 뛰었다. 아마도 솔레이아의 악몽에 된통 당하고 에우레디안의 침실에서 눈을 뜬 그날부터일 것


이다.

수도 없이 엉겨 붙던 지난날들의 접촉이 파노라마처럼 주르륵 떠올랐다. 지금까지 줄곧 멀쩡했던


심장이 이렇게 갑자기 날뛰어 대다니! 이 생체 반응이 대체 뭘 의미하는 것인가? 에우레디안이 내 이 름을 불러 주지 않았다고 이렇게까지 충격을 받은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나는 대체 뭘 바라고 있는 가?

나는 팔을 휘저어 테이블 위를 굴러다니는 깃펜을 잡았다. 이미 구석에 잔뜩 쌓여 있는 종이를 하나 끌어다 의미 없이 끼적여 나갔다. 내 머릿속에 공식처럼 박혀 있던 플랜들이 종이 위에 줄줄 나열됐 다.

플랜 A. 벨고트의 르보브니 침략을 막는다.

플랜 B. 테제비아 언니가 벨고트로 납치되는 걸 막는다. “......에라이.”

이것들은 먼 옛날 옛적에 실패한 작전이잖아. 벅벅. 나는 깃펜 촉이 부러지도록 새카맣게 칠해 지워 버렸다. 그리고 플랜 C. 에우레디안을 꼬셔 결혼을 막는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그 항목 역시 박박 지 워버렸다.이건,어느정도는달성한플랜.그럼이제플랜D.......

“.......”

-를짜야하는데.펜은전혀다른내용을끼적이고있었다.삐뚤삐뚤.맥락없는단어몇개가아무렇 게나 휘갈겨졌다. ‘에우레디안 벨고트.’ ‘신성.’ ‘인간 강장제.’ ‘급속 충전기.’ ‘부딪히면 아픈 철벽.’ ‘튕 겨 나가기는 싫다고.’ ‘그럴 거면 애초에 다정하지나 말든가.’ ‘왜 자꾸 설레는 거야.’ ‘무슨 의미?’

라울루스가 피식피식 웃으며 지적했다.


 [그게 글로 쓴다고 될 일일까, 부스러기야?]

“.......”

결국 그 종이 역시 내 손에서 형편없이 구겨진 105번째 종이가 되었다. 나는 기운 없이 종이를 공 모 양으로뭉쳐휙던져버렸다.종이는테라스난간에맞고저아래로톡떨어져버렸다.

[어,너그거그렇게막던-.]

“아, 모르겠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집무실 문이라도 쾅쾅 두드리고 싶었다.


“귀한 이름을 이런 곳에 두고 가기에는 아깝지 않나.”

그건 무슨 의미냐고, 대체! 왜 사람을 이렇게까지 헷갈리게 하는 건데......! 힘없이 내려놓은 펜이 테


이블 위를 데구루루 굴렀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러 고민이 겹치고 겹쳐 제대로 잠을 못 잔 지 벌써 사흘이었다. 밤에는 도저히 잠이 오질 않아 낮 에 눈을 붙이는 걸 몇 번 반복하고 났더니 이젠 시도 때도 없이 잠이 왔다. 나는 비척비척 일어나 테라 스문을열고방안으로들어섰다.

진짜 모르겠으니까, 우선 잠이나 자자. 자고 나서 생각하자....... 라울루스의 음성이 당황스럽게 끊겼다는 것은 이미 내 안중에도 없었다.

** *

툭.

하늘에서 떨어진 공 모양의 종이 뭉치가 머리를 때렸다. 톡. 데구루루. 머리를 가볍게 때린 종이 뭉

치는어깨를한번더치고는바닥으로튕겨나갔다.

“......뭐야, 이건.”

등허리까지 구불구불하게 늘어뜨린 적갈색 머리카락이 햇살에 반짝 빛났다. 솔레이아는 멈춰 서서 제 머리를 때리고 발치에 떨어진 종이 뭉치를 내려다보았다.

시선이휘릭옮겨갔다.웬종이부스러기가떨어진곳이어디인지알아채는것은어렵지않았다.바


 로그녀의머리위, 3층의테라스너머에눈에익은연분홍빛이살랑이고있었다.그러다가쏙.약올 리듯이 시야에서 벗어난다.

“......여전히 깜찍한 공주님이시네.”

대체 몇 번이나 이런 식으로 자신을 톡톡 건드리는 건지. 깜찍하고 앞뒤 없는 건드림에 늘 기가 찼

다.

‘뭐, 그러니 소장 가치가 있는 거겠지만.’

붉게 칠해진 입술이 짙은 미소를 머금었다. 솔레이아는 허리를 숙여 땅에 떨어진 종이 뭉치를 집어 들었다. 종이는 참 야무지게도 공 모양으로 꼬깃꼬깃 접혀 있었다. 솔레이아는 어렵지 않게 종이를 펼


쳐 들었다.

원래 글자를 알아볼 수도 없이 새카맣게 색칠된 잉크 자국이 종이의 반을 넘게 뒤덮고 있었다. 흑요


석같이 빛나는 눈이 그 밑에 끼적여진 삐뚤삐뚤한 글자들을 읽어 내려갔다.

“......아하하.”

그리고 오래지 않아 화려하고 아름다운 여자의 만면에 서서히 비뚠 미소가 떠올랐다. 황제가 어쩐 일로 저를 황궁까지 불렀는지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가 어떤 의심을 하고 있을지도. 물론 황제의 손 아귀에순순히잡혀줄마음은손톱만큼도없었지만,그렇다고그남자를포기할마음을먹고온것은 아니었다.

바스락.

희고 부드러운 손안에서 구겨진 종이가 반듯하게 접혔다.

“어쩌면 생각보다 쉬울지도.......”

꽃처럼 아름답고 뱀처럼 교활한 여자는 기껍게 중얼거리며 접은 종이를 옷자락 속에 넣었다. [거슬려.]

불쑥, 탁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솔레이아는 살풋 인상을 찌푸렸다.

[거슬려....... 뭔가가. 자꾸. 저것, 그냥 죽여 버려. 왜인지는 몰라도 재수 없으니까.]

“지금 죽이기에는 아까운 공주예요. 쓸데가 있어서.”

솔레이아는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목소리’가 신경질적으로 튀었다. [이렇게재수없는기분이들때면늘일이틀어지곤했었지.]


 “기분 탓이에요.”

[됐으니까 서둘러, 솔레이아.]

딱. 딱. 까드득. 해골이 부서질 것처럼 흔들리며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귓전에 아스라이 메아리쳤다. 이어 속삭이는 말은 하나였다. 서두르라고. 마치 누군가에 쫓기기라도 하듯이.

솔레이아는 골치 아프다는 얼굴로 관자놀이를 꾹 짚었다. 무려 5년이나 공들여 온 일을 여기서 서둘 러서그르칠수는없다.게다가괜찮은거래조건까지막얻은차에.

솔레이아는 어렵게 주인의 속삭임을 무시했다. 사박. 무겁고 진득한 발걸음이 다시 떨어졌다. 머리 카락 색만큼이나 강렬한 핏빛 드레스가 풀밭 위로 길게 늘어졌다.


해가 서서히 기울고 있었다. 

** *

지는 해는 황제의 집무실에도 긴 노을빛을 드리웠다. 널찍한 집무실 안이 온통 주홍빛으로 물들었 다. 창가 언저리에 등을 기대고 비딱하게 선 남자 역시 머리부터 발끝까지 노을에 푹 잠겨 있었다. 모 든 빛에 쉽사리 물들곤 하는 깨끗한 은발이 불그스름하게 빛났다.

팔락팔락. 고요하게 가라앉은 집무실에 느리게 서류를 넘기는 소리만이 유일한 소음이었다. 에우레 디안은 창가에 기대선 채로 손가락 두 마디만 한 서류 뭉치를 넘겼다. 글루카만 삼국 협약 건에 관련 한 문서였다.

끝날듯끝나지않는삼국간의미묘한신경전은이제점차끝을향해치닫고있었다.물론거기에는 더 이상 인내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벨고트 측의 강경책이 한몫했다. 평화 동맹 조약마저 이미 깨 버린차에물불가릴게뭐있냐는생각이었다.애초에에우레디안벨고트는남이나타국의눈치를볼 필요가 없는 군주였다.

라이거의 동부를 죄 손아귀에 쥐고 있는 지배자인데, 서부로까지 영토를 확장하겠다 선포한들 그 누가 감히 반기를 들겠는가?

그러나 사실 본 성정대로라면 이렇게까지 강경하게 나가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에우레디안은 외 교 정책에 관대한 편이었다. 주인의 성정이 그랬으니 그의 나라 역시 대외적으로 자비롭다 평판이 난 것이 당연했다. 라이거 평화 동맹 조약의 수호국이라는 위명은 그가 재위에 오른 뒤 벨고트의 수식어 로 완전히 굳어졌다.


 그런 그의 인내심과 관대함에 최초로 금이 간 것이 르보브니가 글루카만 로드를 2년간이나 봉쇄해 버린 사건이었다. 오죽하면 직접 나서서 무려 르보브니의 공주를 납치해 오는 무뢰배 같은 짓거리까 지 감행했겠는가. 그러나 고작 몇 달 지난 지금, 에우레디안은 그때 끊어져 버린 자신의 인내심을 후 회했다. 한숨 섞인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그때 한 번 참을걸.”

아니, 참지는 못했어도 르보브니의 공주를 납치해 오지는 말았어야 했는데. 차라리 그때 르보브니 의 요구를 들어줄 것을 그랬다. 그랬더라면 아제키엔이 지금처럼 덩달아 거래 조건을 상향해 달라 기 어오르지도 않았을 테니까.


게다가 예레니카가 이곳까지 와서 죽을 위기를 몇 번이고 넘나들지도 않았을 테고. 그리고 솔레이 아 엘라드도 이렇게까지 그를 고뇌에 빠지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한들 무슨 소용이랴. 이미 벌어진 일인데. 게다가 사실은 그렇게라도 예레니카 를 만난 것에 안도하는 자신이 마음 한구석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데.

르보브니의 공주는 존재 자체로 어마어마한 파장이었다. 에우레디안에게 그 정도의 영향력을 발휘 하는 사람은 지금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녀가 유일할 거였다. 그리고 바로 그 한 사람과 관련한 일이 크게 터진 뒤 에우레디안의 여유는 전부 증발했다.

긴 손가락이 서류를 느리게 넘겼다. 그 서류 안에 든 내용의 무게가 어마어마한 것을 모르지는 않았 다. 무려 글루카만을 둘러싼 삼국 간의 대립 관계에 대한 서류였으니까. 그러나 그 대립국들을 무력으 로 전부 쓸어버리고픈 충동이 일 정도로, 지금의 그에게는 여유가 없었다. 이딴 일에 오래 신경을 쏟 고싶지도않고,쏟을여력도없다.

에우레디안은 서류의 맨 끝장을 펼쳐 놓고 책상 위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조심성 없이 책상 끝머리 를 더듬어 황제의 인장을 찾았다. 주먹만 한 크기의 순금 인장은 금세 손에 잡혔다. 에우레디안은 망 설임없이자신의승인만을남겨둔서류에인장을찍었다.하늘을향해울부짖는자줏빛늑대가서류 하단에 선명하게 찍혔다.

방금 그가 승인한 서류는 벨고트의 주인이 지금 얼마나 예민하게 곤두서 있는지 여실히 드러내는 내용이었다. 에우레디안 벨고트는 삼국의 협상을 제안했다. 장소는 무려 그의 제국, 벨고트였다.

사실 말이 제안이지 소환령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더 이상 이 건에 대해 할 말이 없으니 벨고트로부 터 뭔가를 얻어 가고 싶다면 어디 직접 와 보아라. 그럴 용기가 있다면. 고상한 어투로 포장하긴 했지 만 속내는 뻔히 드러났다. 일부러 그렇게 적으라 명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여기까지 와서도 시건방지게 굴면.......”


 딱히 대륙 정복 따위를 꿈꾼 적은 없는데, 불사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지. 사절의 손에 친히 선전 포 고가 담긴 서신을 쥐여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에우레디안은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서류 를 한쪽으로 치워 버렸다. 당장 급한 일을 해치웠으니 그다음 건을 처리할 차례였다.

에우레디안은 창가 밑을 흘끗 내려다보았다. 오전 중에 기별을 넣었으니 이제 슬슬 올 때가 되었다. 마탑의 임무를 끝내고 어젯밤 귀환했다는 여자, 솔레이아 엘라드가.

과연 그의 감은 틀리지 않았다.

“폐하, 엘라드 영애께서 오셨습니다.”

에우레디안은 이마 위에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한 차례 뒤로 쓸어 넘겼다. 어디, 어떤 뻔뻔한 얼굴 

그리고 그가 말을 내뱉자마자, 집무실의 커다란 문이 소리도 없이 열렸다.

“폐하.”

적갈색 머리카락을 길게 풀어 내린 여자가 미소와 함께 집무실로 들어섰다. 에우레디안은 천천히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왔나, 엘라드 영애.”

“부르심을 받고 기뻤답니다. 평생 먼저 불러 주시지 않을 줄 알았는데.”

솔레이아가 매력적으로 웃으며 한 발 한 발 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집무실 안에 울려 퍼졌다. 지나치게 큰 것 같기도 한 소리였다. 에우레디안은 여전히 창가에 기댄 등을 떼지 않은 채 가까워오는 여자를 냉소적인 낯으로 바라보았다. 솔레이아는 책상 한 걸음 뒤에서 멈추었다. 그녀가 나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며칠 전부터 계속 찾으셨다지요?”

“그랬지.그대,내가원치않을때는잘만찾아오더니내가찾을때면얼굴보기가참어렵더군.”

“바빴답니다. 용서해 주세요.”

솔레이아가 살짝 눈을 접었다. 전혀 용서를 구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에우레디안은 답지 않게 빈정 거렸다.

로 들어오나 볼까. “들라 해.”


“용서라, 글쎄. 그대가 내게 용서를 빌어야 할 부분은 그쪽이 아닌 것 같은데.”


 솔레이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고 그를 보기만 했다. 입꼬리는 여전히 올라가 미소를 짓 고 있는 채였다. 그녀는 오늘도 변함없이 아름다웠다. 딱히 그 사실을 부정해 본 적은 없다. 솔레이아 는벨고트의모든여성들을다불러모은대도가장화려한미색을뽐낼여자였다.

그러나 전혀 감흥 없는 아름다움.

에우레디안은 솔레이아를 본 짧지 않은 시간 내내 그녀의 아름다움이 꼭 껍데기 같다고 생각했다. 단 한 번도 마음이 동한다거나 그녀를 매력적이라고 느껴 본 적이 없다. 분명 아름답지만, 속이 시커 먼것을어느정도알고있으면서도그의심을잊게할만큼의아름다움이냐하면,글쎄.

에우레디안은 사물이든 사람이든 외적인 모습에 크게 감흥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군주에게 가장 크 

게요구되는것이겉모습에현혹되지않는통찰력인탓도있었고,성정자체가여색에딱히관심을두

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게다가 그의 기준에서 외형이나 실력보다 중요한 게 인성인데, 그 점에서

솔레이아의 점수는 바닥을 쳤다. 

솔레이아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러나 여전히 책상을 사이에 둔 만큼의 거리였다.

“허면 제가 어떤 것에 용서를 구해야 하나요?”

에우레디안은 잠시 그 흑요석같이 반질한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투명한 빛이라곤 단 한 점도 없이 새카만 눈이었다. 감이 좋다 자부하는 그조차 속내를 단번에 꿰뚫기 어려울 만큼.

에우레디안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몇주전에,그대가벨리룩궁앞에있는것을보았었지.”

“어머나. 제게 그리 관심을 두셨을 줄은 몰랐는데.”

“말 끊지 마.”

이번에는 사나운 일갈이었다. 에우레디안은 평정을 가장하려던 것을 전부 집어치웠다. “벨리룩 궁에 대단한 짓을 해 놨던데.” 솔레이아의입가에드리워져있던미소가살짝걷혔다.에우레디안은한자한자씹어뱉었다. “감히 내 궁에서.”

“.......”

“내가 금지한 마법을.”

“.......”


 “그것도 내가 보호하는 사람에게.”

이 세 마디 중에 어느 쪽이 가장 중요한지 도무지 구분이 가질 않았다. 마지막 말에는 결국 억눌린

분노가 거칠게 묻어 나왔다.

“내가이것을뭐라판단하면될지그대입으로말해봐.”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놀라울 정도의 자제력이었다. 물론 그의 몸을 휘도는 신성은 그렇지 못했다. 수십 개의 칼날처럼 뻗은 무형의 기운이 그녀를 포위하듯 겨누었다.

솔레이아는 황제의 신성이 얼마나 야생적으로 들끓고 있는지는 인지하지 못했으나, 본능적으로 위 험을 감지했다. 드러난 어깨를 신성이 갈퀴처럼 할퀴며 작은 생채기를 냈다. 솔레이아는 제 어깨를 흘


끗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폐하께서는 늘 저를 의심하셨지요. 끊임없이 경계하시고, 밀어내시고.”


그것은 그에게 건네는 말이라기보다는 혼잣말에 가까웠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저를 저지하신 적은 없으시지요.” “.......”

“지금도, 방법이 틀리셨네요.”

이제는살짝비웃는것같기도한어조였다.솔레이아엘라드가걸음을떼었다.책상을빙둘러천천 히 그에게로 다가갔다. 에우레디안은 미동도 않고 창에 기대서서 제게로 다가오는 여자를 노려보았 다.

“저를 사악한 마법사로 확신하고 계신다면, 이리 부르실 것이 아니라, 당장 체포령을 내리고 사형대 로 보내 버리셨어야죠. 안 그런가요?”

그들 사이의 거리는 이제 채 두 발자국이 되지 않았다. 솔레이아가 손을 뻗었다. 묘한 열감이 어린 손끝이 에우레디안의 뺨에 닿았다. 에우레디안은 즉시 인상을 구기며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려 했으 나, 솔레이아가 손을 거두는 게 더 빨랐다. 그를 놀리듯 빠져나간 솔레이아가 은밀하게 속삭였다.

“그러지 않으시고 저를 이렇게 따로 불러냈다는 것은, 아직 증거도 확신도 없으신 거겠지요. 제가 당신의 나라에 해가 될지, 아니면 득이 될지 판단할 만한 척도도 없고요. 아닌가요?”

“득이라. 자신만만하시군. 마탑의 권력자께서는.” “바로 그 때문에 저를 지금껏 곁에 두셨죠.”


 “.......”

“저는 마탑의 차기 주인. 벨고트의 마법사들을 통솔하는 자. 늙은 제 스승이 죽고 나면 벨고트의 모

든 마법적 권력은 제 손 아래 들어오겠지요.”

긴 속눈썹이 유혹적으로 내려앉았다가 다시 떠올랐다. 솔레이아는 어떤 비밀이라도 고하듯 속삭였

다.

“하지만 말이에요, 폐하. 참 이상한 것은 당신의 태도랍니다.”

불그스름한 자안에 번뜩이는 빛이 스쳤다. 이따위 말장난이나 하려고 이 여자를 황궁까지 들인 것 이 아니었다. 그러나 에우레디안은 이어진 솔레이아의 말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제가 그 공주님께 해를 입히지 않았다면, 폐하께서 이리 과민하게 반응하셨을까요?” 

그것이야말로 말문을 틀어막는 말이었다. 할 말이 없어서는 아니었다. 방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의 격한 감정이 목구멍 바로 아래까지 세차게 차올랐다.

솔레이아가 그것 보라는 듯 짙게 웃었다.

“폐하, 저는 폐하를 생각보다 더 잘 안답니다. 당신 곁에 머무른 시간이 결코 짧지 않은걸요. 당신은

제가 흑마법사라는 것을 눈치챈 그 즉시 저를 사형대로 보내셨을 테죠. 평소 같았다면.”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에우레디안은 창가에 기대 있던 몸을 바로 했다. 허공에서 자줏빛 눈과

새카만 눈이 강렬하게 맞부딪혔다. 솔레이아가 속삭이듯 물었다. “무엇이 두려우신가요?”

무엇이 두려우냐고? 그것은 퍽 명확했다.

에우레디안은 자신의 손으로 완벽하게 예레니카를 보호해 줄 수 없다는 것을 절감했다. 정말로 그 녀를 제 울타리 안에 단단히 가둬 두지 않는 한. 하지만 예레니카는 어느 한곳에 갇혀 있는 모습이 어 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방 안에만 있으니 좀이 쑤신다고 말하던 낯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애초에 마음 이기운것도얽매여있지않은모습때문이었으니,그가그녀를가둬놓을수있을리는없었다.

비틀린 어조의 말이 튀어나왔다.

“그래. 제국의 주인으로 사는 생에 무엇도 두려워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대

가감히눈에뵈는것없이저지를지도모르는일이두렵기가이루말할수없군.”

자신을 이만큼이나 뒤흔드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자만할 만큼 그는 강한 인간이 아니었다. 신성과 완벽히 대척점에 있는 힘을, 도리어 신성을 위협할 정도까지 키워낸 게 바로 역대


 벨고트 황제들이었고 바로 그 자신이었다.

지금당장이사악한여자를포박하라명할수없는그의위치에환멸이날지경이었다.마탑은벨고 트 황실에 귀속되어 있으나 자치권을 당당히 요구해 올 정도로 영향력을 가진 집단이었다. 그 집단의 실세가 흑마법사라면. 대체 벨고트의 마탑은 얼마나 깊은 어둠에 발을 담그고 있는 것인가?

벨고트는 조금 과장해서 마광석과 마탑의 마법사들로 인해 움직인다고 봐도 무방했다. 선택받은 자 들만이 가질 수 있는 신성보다 더 이 제국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힘이 마력이었다. 그래서 당장 이 여자를지하감옥으로보내버릴수가없는것이다.벨고트를둘러싼대외상황이어지러운와중에내 부를 지탱하는 마탑을 적으로 돌릴 수가 없어서.


에우레디안은 짧게 탄식을 토해 냈다. 그로서는 드물게 느껴 보는 무력감이었다. 솔레이아는 빙긋

웃으며 짜증과 분노로 얼룩진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톱이 붉게 칠해진 손이 그의 턱을 가볍게

쓸었다. 

“폐하께서는 가진 패가 아무것도 없으시지요. 약점만 있으실 뿐.”

“.......”

“어차피이기는건저예요.이번일로아셨지요?제가그사랑스러운분께손을뻗는건정말간단하 답니다.”

그리고 비웃는 듯한 웃음.

“물론 그것도 제가 정말 사악한 흑마법사일 때의 이야기겠지만.”

그에게 거짓 사랑이라도 속살거리던 여자는 온데간데없었다. 에우레디안은 이를 악물고 으르렁거 리듯 내뱉었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뭐야?”

그녀는 그 말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름다운 낯에 종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짙고

위험한 미소가 깔렸다. 이 시대의 가장 강대하고 사악하며 교활한 흑마법사가 달콤하게 속삭였다.

“그러니 폐하, 제게 목줄을 채우세요. 예정되어 있던 대로 저와 결혼해 주세요.”

날카롭게 벼려진 날것의 신성이 거칠게 그의 주위를 휘돌았다. 정반대되는 기운끼리 부딪치며 희미 한 수증기 냄새가 피어올랐다. 솔레이아 엘라드의 마지막 말이 떨어졌다.

“그러면 폐하의 나라와, 폐하의 공주님께는 아무런 해가 가지 않을 테니까.”


 ** *

이거, 지금 무슨 상황이야......? 문고리를 잡은 손이 순식간에 차갑게 굳었다. 사고가 정지했다. 나 는 황제의 집무실 문고리를 잡은 채로 뻣뻣하게 얼어붙었다.

“그러니 폐하, 제게 목줄을 채우세요. 예정되어 있던 대로 저와 결혼해 주세요.”

에우레디안의 집무실 안에서 나긋하게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면 폐하의 나라와, 폐하의 공주님께는 아무런 해가 가지 않을 테니까.” 

보지않아도알것같았다.이안에누가있으며,어떤이야기를하고있고,그남자의표정이지금어 떨지.


나는 문고리를 놓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열이 뻗쳐 잠도 자지 못하고 집무실 앞까지 찾아온 건데, 그 안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 니까, 결국은 이렇게 되려는 거야? 결국은, 내가 뭘 어떻게 해도 원작대로 흘러가게 되는 거라고?

“공주님?”

나와마찬가지로집무실앞에대기하고있던보좌관,펠릭도나와같은것을들은모양이었다.그역 시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었다. 나는 마구 흔들리는 눈으로 펠릭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떨구었다.

“미쳤어.”

가는 중얼거림이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저 여자는 미쳤어.......”

미치지 않고서야, 내 목숨을 걸고 에우레디안과 거래를 하려고 하다니.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에 우레디안 벨고트는 저 사악하고 교활한 제안을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저 남자는 황제니까. 마탑을 손 아귀에 쥔 여자를 내칠 수가 없으니까. 그 사실은 저 여자가 내건 내 목숨 따위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무거운 사안이었다. 머릿속이 온통 뒤엉켜 제대로 된 사고를 하기가 힘들었다. 결국 나는 집무실을 등 지고 돌아섰다.

“폐하께는, 제가 여기 있었다는 거 비밀로 해 주세요.”

펠릭에게그렇게간신히속삭이는게내가그자리에서할수있는전부였다.나는차마내발소리가 문 안쪽에 들릴까 달음박질치지도 못한 채로. 아주 천천히, 경악스러운 대화가 오가던 그 방 앞을 벗


 어났다.

** *

[내가 그랬지, 아가.] 나는그대로내방으로돌아와황급히문을닫았다.시녀두엇이내일그러진표정에놀라따라들어

오려는 것을 막고, 문에 기대 스르륵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탁 풀려서 도저히 침대까지 걸어갈 수 

가 없었다.

[나조차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있다고.]


머릿속을 왕왕 울리는 목소리에 대꾸해 줄 여력도 없었다. 나는 그대로 주저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 었다.

“정말 그런가 봐요.”

스스로도 깜짝 놀랄 만큼 낮은 목소리였다.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목소리가 거칠게 잠겨 있

었다. 그간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탓일지도 모른다.

“정말로바꿀수없는게있는걸까......?”

하긴, 이 세계의 절대자조차 원작에 의해 설정된 존재가 아닌가? 엑스트라 중의 엑스트라, 원작의 귀퉁이를구성하는나같은부속품이원작의큰흐름을바꿀수있을리가없다.

테제비아 언니 대신 내가 벨고트로 왔다. 에우레디안과 솔레이아의 결혼을 방해할 마음이 가득한 내가. 거기에서 이미 원작은 분명 어딘가는 바뀌었겠지만, 결국 달려 나가는 방향은 똑같았다.

망할그결혼.

에우레디안 벨고트가 솔레이아를 얼마나 의심하고 경계하는지는 애초에 그리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설마, 설마 제국 전체와 나를 걸고넘어질 줄은......!

나는 울컥하는 마음을 다스리려 애쓰며 생각했다. 이렇게까지 에우레디안을 갖기 위해 수단과 방법 을 가리지 않는데, 이쯤 되면 이건 결혼을 막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일종의 대결 구도가 된 셈이었 다.이세계에가장취약한개복치와이세계의가장강대한흑막간의갈등구도.


 나는 결국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말이돼?밸런스가안맞아도너무안맞잖아!”

[깜짝이야.]

그리고라울루스,망할유데타너머의절대자는오늘도참도움이되지않았다.나는아픈머리를움 켜잡고 도로 고개를 숙였다.

“이제 저 어떡하죠......?” [흠.]


라울루스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잠시 답이 없었다. 내가 머리카락을 잔뜩 쥐어뜯다 결국 제풀에 지쳐 발랑 드러눕고 나서야 라울루스가 천천히 음성을 냈다.


[일단은 아가, 신전으로 들어오는 게 어떠니?]

“신전으로요?”

[그래.너거기있어봐야미끼밖에더되겠어?]

냉정한 판단이었다. 엉엉. 여기서 더 민폐가 되지 않으려면 당장 황궁을, 더 크게는 이 벨고트를 벗 어나야 했다. 그래야 에우레디안이 나를 신경 쓰지 않고 솔레이아를 상대할 수 있을 테니까.

“......망할.”

나는 욕설을 내뱉었다. 그냥 아름답지만 사악하고 교활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는데. “제게 목줄을 채워 주세요.”

“진짜 미친 여자였어.......”

미친년은 어떻게 상대해야 하죠?

[작전상 후퇴해야지 뭐.]

라울루스는 무척 해맑게 말했고 나는 속이 터졌다. 이 신은 정말로 지상과 유데타의 아득한 거리만 큼이나 인간을 잘 몰랐다. 나는 쑤셔 오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어쨌든 저 대화를 고스란히 들어 버린 이상 이대로 궁에 버티고 있을 수는 없었다. 결국 내가 내려야 하는 결정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거 였다.


 ** *

그날 밤도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일부러 눈을 말똥하게 뜨려고 마음먹은 건 아니었다. 사실 요 며칠밤에제대로잔적이드물었다.

밤낮이 뒤바뀐 데다 기본적으로 땅이 무겁다 보니 피로가 누적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지난번 에 악몽을 꾸고 크게 앓고 미처 회복할 새도 없이 연속으로 충격타를 맞았기 때문일까. 몸이 힘없이 직직 늘어졌다.

결국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역시 밤에 잠드는 건 아직 좀 무서웠다. 방 안은 어두웠다. 나는 

이불을 젖히고 침대 아래로 내려섰다. 푹신한 털 슬리퍼를 대충 꿰어 신고 얇은 카디건을 걸쳤다. 어 차피 방 밖으로 나가 봤자 이 층밖에는 돌아다닐 수가 없으니, 아쉬운 대로 테라스에라도 나가 볼 생


각이었다.

드르륵. 유리문을 젖히자 따듯한 봄바람이 살랑이며 불어왔다. “춥진 않네.......”

나는 여몄던 카디건 자락을 놓고 테라스로 발을 디뎠다. 동그랗게 돌출된 형태의 테라스에는 오후 에내가잔뜩구겨서던져놓은종잇조각들이그대로널려있었다.아까그렇게도망치듯방으로돌아 온 후 시녀들을 들이지 않았으니 정리할 새도 없었겠지.

“......후.”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렇게 끝없이 걱정만 하는 건 정말 나랑은 맞지 않는데. 나는 작은 테이블 앞의 의자를 치우고 테라스 난간 앞에 섰다. 밤의 후원은 캄캄했다. 곳곳에 작은 등불이 켜져 있는 것 을 제외하면 사위가 온통 어둡게 내려앉아 있었다.

밤. 몸이 흠칫 떨렸다.

[나랑 가자, 은서야.]

“......아. 정말.”

나는 따갑게 아파 오는 눈을 깜빡였다. 고개를 흔들어 떠오르는 기억들을 쫓아냈다. 바로 이게 문제 였다. 밤만 되면 새록새록 되살아나는 그때의 기억. 그 밤의 악몽.

솔레이아의 악몽은 다시 나를 찾아오지는 않았다. 그러니 그 뒤로 밤마다 나를 괴롭히는 것은 그 흑 마법은 아니었다. 이건 그냥 글자 그대로의 악몽이었다.


 아무래도 몸이 허해지니 마음까지 약해지는 게 분명했다. 평소였다면 아무렇지도 않게 개꿈이라며 귀 한번 후비고 끝내 버렸을 일을 대체 며칠째 질질 끄는 건지. 나는 고개를 최대한 거세게 붕붕 휘저 었다. 나 자신에게 수십 번씩 되뇌면서.

“물렀거라, 삿된 것. 물렀거라, 삿된-.”

“공주?”

“꺄아아아악!”

그리고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괴성과 함께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뭐, 뭐, 뭐, 뭐야!”

심장이 바닥까지 쿵 메다 꽂혔다. 나는 벌렁벌렁 뛰는 가슴을 부여잡고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


개를 돌렸다. 상대를 확인하자마자 작은 탄성이 터졌다. “아.”

어두운밤중에도홀로반짝이는은빛이거기있었다.내방의테라스바로옆쪽의테라스에.나는멍 하니 눈을 깜빡이다 슬쩍 중얼거려보았다.

“내가 헛것을 보나.......”

“헛것이라니.”

어이없다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헛것이 말도 한다! 나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테라스 난 간에 등을 기대고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부드럽게 흩어져 봄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은발. 어둠에 묻혀 거의 검은색처럼 보이는 붉은 자안. 가 볍게쥔투명한와인잔.에우레디안이손을가볍게돌릴때마다잔안에담긴와인이찰랑거렸다.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폐하......?”

나를 보고 놀랐던 건 그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에우레디안이 놀란 표정을 천천히 가다듬으며 물었다.

“이밤중에안자고거기서뭐해?” “자,잠이안와서.......그러는폐하야말로안자고뭐하세요,이시간에?”


 시간은 자정을 훌쩍 넘긴 한밤중이었다. 그가 설핏 웃는 것도 같았다.

“글쎄.나도잠이안왔다고해둘까.”

“음, 그러실 수도 있겠다.”

나는 금방 납득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솔레이아의 말을 듣고 나까지 이렇게 혼란스러운데, 그 대 화를 나눈 당사자의 속은 시끄럽다 못해 다 무너졌을지도 몰랐다.

나는 걸음을 옮겨 그와 가장 가까운 쪽의 난간으로 다가갔다. 우리 사이의 거리는 가까운 듯하면서 도생각보다멀었다.나는난간에팔을대고손등에턱을괸채그를올려다보았다.


내가 그에게 차였던 짧은 티타임 이후로 또다시 사흘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심장이 다시금 도근도

근 뛰기 시작했지만, 오늘은 오후에 경악할 만한 대화를 엿들은 탓에 설렘보다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

섰다. 내 마음을 까맣게 모를 남자는 평소와 다름없는 다정한 말투로 물었다. 

“그대는왜잠이안와?”

“음. 아직 정신이 좀 너덜너덜해서랄까.”

에우레디안이 잔을 기울이다 말고 멈칫하는 게 보였다. 나는 손등에 턱을 괴고 생글생글 웃었다. 반 쯤은 습관적인 웃음이었다. 에우레디안이 짧게 혀를 찼다.

“오늘은 괜찮다고 안 하는군.”

“전거짓말안해요.괜찮다고하면괜찮은거고,안괜찮으면안괜찮은거거든요.”

“그런가.......”

그는딱히믿지는않는얼굴이었다.탁.에우레디안이손에들고있던와인잔을테이블위에내려놓 았다.

“공주, 뒤로 세 걸음 물러서.” “네?”

“얼른.”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뒤로 물러났다. 한 발짝. 두 발짝. 세 발짝. 내가 정확히 세 걸음 물러서자마자, 테라스에 비스듬히 기대서 있던 에우레디안이 몸을 바로 했다. 곧바로 난간을 잡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은빛 머리카락이 바람을 타고 훅 휘날렸다.

분명 난간 너머에 있던 사람이, 눈을 한 번 깜빡한 사이에 내가 방금까지 서 있던 난간을 훌쩍 넘었


 다. 멀찍이 떨어진 데다 난간으로 막혀 있어 좁혀지지 못할 것 같던 거리가 순식간에 한 걸음으로 줄 어들었다. 단정하고 청량한 체향이 코끝에 훅 끼쳤다.

나는 나도 모르게 숨을 헉 들이쉬었다가 찰랑이며 끌어올려지는 기력에 숨을 멈추었다. 내 키 정도 는 되어 보이는 거리를 가볍게 넘어온 에우레디안이 입꼬리를 슥 끌어 올렸다.

“왜 오늘은 괜찮지 않은 걸까.”

“어...... 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눈앞에 선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어둠에 반쯤 먹혀들어 가 있는 것 같던 붉은 자안이 또렷하게 빛나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반쯤은 느슨하고, 나른하고, 어딘


지 무방비하게 풀려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눈매에 어린 약간의 피로감만 아니었더라면, 그리고 내가 오후의 그 대화를 듣지 못했더라면 정말


로 평소와 다르지 않은 얼굴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애매하게 시선을 떨어뜨리며 중얼거렸다. “그냥요. 며칠 잠을 못 잤더니 머리가 좀 아프.......”

“잠을 못 자?”

대번에 그의 목소리가 심상찮게 튀었다. 밤공기에 살짝 식은 두 손이 내 볼에 닿았다. 숙인 고개를 도로 들어 올린 에우레디안이 내 얼굴을 샅샅이 뜯어보았다. 붉은 자안에 온통 내가 담겨 있었다. 이 느낌이 더없이 좋았을 때가 있었는데....... 저 눈에 나만이 비치는 모습이.

나는 씁쓸해지려는 마음을 감추기 위해 부러 방긋 웃었다.

“잠이 잘 오면 이상한 거죠. 꿈에서 그렇게 잔뜩 혼쭐이 났는데.”

“그런가.......”

“대신 낮에 많이 자니까 괜찮아요.”

“그렇다기엔 눈이 빨간데.”

역시 이 남자는 눈치가 빨랐다. 제대로 숙면을 취하지 못해 눈이 뻑뻑하고 아픈 지도 벌써 며칠이었 다.겉으로티가많이나나?나는손을들어눈을비볐다.

“이런 건 괜찮아요. 밤에는 시간이 좀 늦게 간다는 것만 빼면, 사실 조용하니 좋기도 하고.......” “밤낮이 바뀌었군. 좋은 상태는 아닌데.”

“아예 잠도 줄이고 일하시는 누구보다는 더 좋은 상태일걸요......?”


 볼에 닿은 손이 서늘했다. 평소보다 훨씬 낮은 온도였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 서늘함을 잡아 주려 다내손이더차다는걸깨닫고손을거두었다.

“그런 건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 것 때문이 아니면.”

낮지만 다정한 목소리가 천천히 이어졌다. “뭐 때문에 괜찮지 않은데?”

나는 이번에야말로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불그스름한 자안이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음. 오후에 

당신이 솔레이아랑 한 대화를 들었는데, 아무래도 제가 여길 떠날 날이 정말로 머지않은 것 같아서요. 나는 첫 마디를 빼고 뒷말만 밖으로 내뱉었다.


“저당분간신전에가있으면안될까요?”

“뭐?”

느슨하게 풀려 있던 낯에 순간적으로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나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움직여 말을 이었다.

“무리한 부탁이라는 건 알아요. 신전에 민간인이 함부로 오래 머물 수 없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잠 시뿐이니까요.”

에우레디안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짧은 침묵이 우리 사이에 내려앉았다. 어색하기까지 한 적막이 흐른 뒤 먼저 입을 연 것은 에우레디안이었다.

“잠시뿐이라.”

“네.”

이때인가 보다. 내가 오늘 저녁 내내 생각했던 것을 그에게 말해 줄 때가. 생각보다 빨리 닥친 상황 이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어쩌랴. 달리 수가 없는 것을. 게다가 사실은 이미 이 남자도 염두에 두고 있 었을 생각이고. 나는 마음을 다잡고 씩씩하게 말했다.

“저, 르보브니로 돌아가려고요.”

“.......”

“약속하셨죠. 르보브니의 왕이 글루카만 로드를 개방하는 즉시 저를 돌려보내 주시겠다고.”

내가 차분하게 말을 잇는 동안 에우레디안은 한마디도 내뱉지 않았다. 나는 끝까지 침착한 어조로


 말을 맺었다.

“이제 때가 된 것 같아요. 어차피 르보브니야 언제든 글루카만 로드를 개방할 준비가 되어 있을 테 니까. 아제키엔이 조금 문제가 되긴 하겠지만, 저와 하신 약조는 르보브니 측에 국한한 약조였잖아요. 르보브니가 호의적으로 나오는 한 제 인질로서의 가치는 이제 없어지다시피 한 거죠. 아닌가요?”

이상할 정도로 들려오는 답이 없었다. 나는 말을 이으며 슬쩍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니까 이제 제가 르보브니로 돌아가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폐하?”

느슨하고 부드럽게 풀려 있던 낯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린 듯 조각한 듯 잘생긴 낯이 확연히 알아챌 수있을만큼딱딱하게굳어있었다.


“어.......” 

내가일전에스치듯이몇번이고본적있는낯이었다.눈매에어려있던피로감은금세날카로운빛 으로변해있었다.나는나도모르게다시한번손을뻗었다.

“왜 그러세요?”

손끝에 날카로운 눈매가 닿았다. 나는 그 깜짝 놀랄 만큼 찬 살갗에 흠칫 놀랐고, 뒤이어 내 손목에 닿는 손에 또 한 번 놀랐다. 손을 잡았다거나, 손목을 잡았다거나 하는 접촉은 아니었다. 그냥 닿았을 뿐이다. 그의 손이, 내 손목 언저리에.

“그대가 벨고트로 온 지 얼마나 됐지?”

어딘지 가라앉은 목소리로 에우레디안이 물었다. 나는 그의 붉은 자안에 홀리듯 꼼짝없이 사로잡힌

채 말을 더듬었다.

“이,이제두달반정도.......”

“두 달 반이라. 시간 빠르군.”

내 대답을 잠시 곱씹은 에우레디안이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그린 듯한 미소였다. 보기에는 그렇게 이상하지 않은 미소라, 나는 조금 안심하고 평소처럼 발랄하게 대답했다.

“그쵸.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뭔가 일이 많았던 것 같기는 한데. 벌써 시간이 이만큼이나 지났다니 까 좀 놀랍기도 하고.”

“.......”

“아무튼, 허락해 주시면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돌아가 볼게요.”


 일전에 약속한 바가 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다시 르보브니로 돌아가려면 그의 허락이 필요했다. 일 단은 인질 신세니까. 우선 그의 허락이 떨어지고 나면 아버지께 날 도로 데려가 달라고 편지라도 좀 써야.......

“허락 안 한다면?”

할것같은......데.나는멍하니눈을깜빡였다.방금내가무슨말을들은거지?

내 손목에 닿아 있던 그의 손이 살갗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내려가서, 내 손을 잡았다. 손가락 하 나하나를 얽어서, 그 손가락들에 희미하게 남은 온기가 온전히 전해져 오도록 꽉. 입술 새로 당황 섞 인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허락을 왜 안 해주세요......?” 맹세코,그의입에서튀어나올줄은몰랐던말이었다.이남자는바로며칠전까지만해도내게르보


브니로돌아가는편이더좋을것이라단호하게말했던사람이었다.끝까지내이름따위는불러주지 도 않을 것처럼 굴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내가 당황을 감추지 못하자, 에우레디안의 낯에 순간적으로 균열이 일었다. 그리고 그제야 나는 공

기를 타고 희미하게 전해져 오는 와인의 향을 맡았다.

“실언했군.”

그가 낮게 중얼거리며 잡았던 손을 놓았다. 온기가 떠난 자리를 바람이 휘감았다. 나는 눈을 깜빡이 며 아래로 시선을 미끄러뜨리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어쩐지 가슴이 뛰었다. 두근두근. 며칠 전, 그 날 밤처럼.

“실언......이라니.”

아래로 떨어지려는 손을 다시 잡은 건 나도 모르는 새 튀어나온 행동이었다. 닿자마자 어김없이 맑 은 신성이 찰랑이며 흘러들었다. 눈의 뻑뻑함이 사라지고, 정신이 서서히 맑게 깨었다. 우울하게 가라 앉아있던기분이순식간에차오른기대감에위로통튀었다.나는눈을똑바로뜨고에우레디안을올 려다봤다.

“실언이라니,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무슨......?” 가면과도같던느슨한낯이깨진에우레디안은조금전의나처럼당황으로가득찬얼굴을하고있


 었다.어쩔줄몰라하는것같기도하고이대로속을들킬까안달하는것같기도했다.내가그에게몇 번이나 다가서려 할 때마다 발견하기를 원했던 바로 그 얼굴이었다.

언제나 풍랑 없는 호수처럼 고요한 남자가 평정을 놓치는 순간. 그를 둘러싼 높고 견고한 벽에 균열 이가는순간.그가장솔직한순간의얼굴.

본능적으로 바로 지금이 에우레디안 벨고트가 가장 솔직해지는 순간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저녁 내내고민하던모든상념을다집어치웠다.이성과현실따위는잠시집어넣어두고그에게가까이다 가섰다. 이제 우리 사이의 거리는 반걸음도 채 못 되었다. 평정이 전부 깨져 버린 붉은 자안을 올려다 보며,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가지 말까요?”

에우레디안이 작게 흠칫했다. 뒤로 물러나려는 것처럼 그가 움직였다. 그러나 그가 간과한 점이 있


다면, 그의 바로 뒤에는 테라스의 난간이 버티고 있다는 점이었다.

두근두근.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이남자는때로는꿀이떨어질것처럼다정하게손을뻗지만때로는매정하다싶을만큼냉정하게 나를쳐낸다.도무지종잡을수없게행동하는사람의속내를전부꺼내볼수있는,앞으로언제다시 올지모를순간이,바로지금인것같았다.

지금만큼은 두근거리는 내 심장 소리가 그에게 닿았으면 했다. 내가 이만큼의 진심을 다해서 묻고 있으니까 당신도 이번만큼은 솔직해 달라고. 그 마음을 담아 다시 속삭였다.

“돌아가지 말까요?”

“공-.”

“이름.”

나를 부르려는 그의 말을 잘랐다. “이름, 다시 불러 주세요.” “......예레니노비카 공주.”

“그거 말고요.”

늘 반듯하고 견고하던 남자의 낯이 일순 흐려졌다.

“공주, 나를 이렇게 자꾸 건드리지 않는 편이 좋다고, 일전에 말을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런 주제에 에우레디안 벨고트는 또다시 나를 밀어내려고 했다. 내게 잡히지 않은 쪽 손으로 그가 내 어깨를 밀었다. 그러나 전혀 강압적이지 않은 힘이었다. 그 모습에 왈칵 서러움이 차올랐다. 또, 또!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사납게 일갈했다.

“폐하께서도 이제 더는 도망가지 않는 편이 좋아요.”

“공주.”

“제가 싫으면 싫다고 명확히 이야기해 주세요. 제가 돌아가길 바란다고. 그게 당신이 정말로 바라는 거라고. 이번에도 자꾸 이렇게 애매하게 피하시면.......”

내 남은 용기를 전부 끌어모아서 이렇게 말하는데, 이래도 당신이 피해 버리면. 그래서 정말로 내가 

르보브니로 돌아가고 나면, 어쩌면 앞으로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

낮게 억눌린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가 내 어깨를 붙잡은 손으로 나를 끌어당겼


다.

“예레니카.”

봄바람에 가볍게 흩날리는 은빛 머리칼이 바로 눈앞으로 가까워 왔다. 그의 입에서 나온 내 이름에 정신이 아연해진 것도 잠시, 나는 그 품에 한가득 끌어안겼다. 정갈하고 깔끔한 체향과 희미한 와인의 향이 들이쉬는 숨결에 죄 섞였다.

에우레디안의 목소리가 귓가에 한숨처럼 내려앉았다.

“그대는 그렇게 말하면 안 돼.”

“.......”

“나는 언제가 되었든 그대를 밀어낼 수가 없으니까.”

내가 그토록 바라던 말들이 거짓말처럼 들려왔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남자가 혼잣 말처럼 중얼거렸다.

“가지 말까, 라고 물으면 가지 말라고 말할 수밖에 없고.”

“.......”

“싫은가, 라고 물으면 싫지 않다고밖에 말할 수가 없지. 당연한걸.”

봄바람이 불었다. 종전까지의 한기는 어디로 가고, 나를 끌어안은 이의 온기가 내 몸으로, 공기 중으 로잔뜩번져가고있는것같았다.에우레디안이다짐하듯말을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대는 돌아가야지. 그대가 여기 있어서 좋은 것이라곤 내 욕심밖에 더 있나.”

두근두근.

심장이 여전히 거세게 뛰고 있었다. 몸을 맞대고 있는 상대에게 그대로 전해지기에 충분한 크기의 울림이었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입을 열면 목소리가 전부 떨려 나올 것만 같아서, 나는 입술 을 꾹 깨물었다.

에우레디안이 조용히 말했다.

“그러니 이쯤에서 그만둬 줘.”


“.......”

“내 손으로 밀어낼 수가 없으니 이렇게 부탁하는 수밖에 없군.”


마지막 말에는 다소 자조 섞인 웃음이 배어 있었다. 그 말에 눈앞이 결국 흐려졌다. 나는 더듬더듬 나를 끌어안은 남자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그를 붙들듯 안았다.

뭐라고말을해야하는데.나는사실은돌아가고싶지않다고.나는아직도당신에게더다가가고싶 은데....... 그게 안 된다는 걸 나는 바로 오늘 오후에 알았다. 결국 나는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겨우 내뱉었다.

“나쁘다.......”

짧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할 소리를.”

“제가, 뭘요.......” “내입에서결국은이런말이나나오게한게누군데.” 크고 다정한 손길이 내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처음부터, 그렇게 말이나 해 주든가.......”

그랬으면 갈 땐 가더라도 이렇게까지 마음고생을 하진 않았을 거잖아......! 서러운 눈물이 뺨을 타 고 흘렀다. 이때까지 수도 없이 달려들었다가 튕겨 나오기를 반복한 모든 순간에 누적된 서러움이었 다. 등을 토닥여 주고,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 주는 그 손길이 좋아서. 그리고 동시에 그가 나를 그저 밀어내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해서. 그리고 그 사실에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의 움직임을 막을 길이 없어서.


 그래서나는한참동안을그의품에안겨울었다.

“예레니카.”

그리고 그가 내 이름을 부르는 순간에야 나는 마침내 실감했다. 나는 여기에 존재하고 있는 거구나. 내가 지금 서은서든, 예레니카든, 아니면 그 무엇도 아니든. 어쨌든 나를 커다란 애정으로 불러 주는 사람이 있어서. 그 부름이야말로 마침내 나를 이 자리 이 순간에 잡아 두었다. 그것은 서은서였던 이 전생에서는단한번도겪어보지못한깨달음이었다.

지척에서 흔들리는 반짝이는 은빛으로 온 하늘이 가득 물들던 밤이었다. 나는 내가 앞으로 어디에 있든 아마도 이 밤을 잊지는 못할 거라고 확신했다. 벨고트에 있든, 르보브니에 있든. 그 순간에는 그


냥 그것만이 가장 중요했다. 

** *

원 없이 펑펑 울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축 늘어져 있던 몸에 신성이 가득 찼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 만, 어쨌든 그날 나는 평소보다 일찍 잠이 들 수 있었다. 에우레디안은 비몽사몽인 나를 보고 짧게 웃 는가 싶더니 나를 침대로 옮겨 주었다.

내기억의마지막까지그은빛이가까운시야에서반짝이고있었던걸보면,아마그는내가잠들때 까지 옆을 지키다 간 모양이었다.

여전히 참 쓸데없이 다정한 사람. 나는 황제궁을 한 번 돌아보았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그러니까 그 새벽으로부터 이틀이 지난 오늘은 내가 신전으로 가게 된 날이었다.

“아무래도 신을 모시는 곳이다 보니 황궁보다는 훨씬 검소하고 누추합니다. 괜찮으실는지.......” 나를 데리러 직접 온 디에리고가 걱정스럽게 말을 흐렸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충분하던걸요. 제게는 이 황궁이 지나치게 컸던 거라서.”

“그렇다면 다행이긴 합니다만.”

디에리고는 계속해서 내게 뭔가를 묻고 싶은 눈치였다. 슬쩍슬쩍 기색을 살피는 게 척 봐도 묻고 싶 은 것이 오만 가지는 되는 얼굴이었다.

“......가요.”


 평소 같았으면 ‘왜요, 뭐요? 물어보고 싶은 거 있으면 물어봐요!’라고 발랄하게 먼저 말을 건넸겠지 만 지금은 딱히 그러고픈 기분은 아니었다. 나는 어색하게 디에리고의 시선을 피하며 걸음을 옮겼다.

사박사박.발밑에정갈하게깎인잔디가밟혔다.내가지난두달반간수도없이들락거렸던후원의 잔디였다. 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아, 무슨 생각을 자꾸 하는 거야?”

고작두달반있었으면서이황궁에정이라도들어버린건가?아니면언제다시올수있을지알수 없는 곳이라 그런 걸까. 어쩌면 이 고요하고 나른한 평화로 가득 찬 황궁이 주인을 너무나 닮아 있어 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

그러나 뭐든 지금의 내게는 쓸데없는 미련일 뿐이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걸음을 빨


리했다. 이왕 결정을 내린 거 머뭇거릴 이유는 없었다.

“가요, 디에리고.”

“......네, 공주님.”

디에리고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을 하면서도 끝까지 내게 무언가를 묻지는 않았다. 눈물 나게 고 마운 배려였다.

사박사박. 우리는 정갈하게 다듬어진 후원을 지나 내게도 익숙한 길을 따라 걸었다. 벨리룩 궁 앞을 지나가 황궁의 남쪽 문으로 나가는 길이었다. 그래도 거의 석 달간 지냈던 궁인데, 마지막 모습 정도 는 보고 가야지. 하얀 양파 모양의 궁이 가까워져 올수록 내 기분도 점점 우울해졌다. 마리안느, 잘 지 내고 있는 걸까......?

“헉.” 그리고벨리룩궁을막눈에담았을때,나는그대로입을딱벌렸다. “뭐....... 무슨 일이......?”

옆에서 디에리고가 애매하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고 벨리룩 궁을, 정확 히는 궁 앞의 정원을 바라보았다. 정원은 그야말로 초토화되어 있었다. 심지어 함부로 출입할 수 없도 록 붉은 띠가 정원 앞에 잔뜩 처져 있었다. 나는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커다랗게 파인 정원을 보 며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폐하의 명에 따라 정원을 정화했습니다. 삿된 마법이 씨도 남지 않을 때까지요.”


 이게, 이렇게 담담하게 말할 일이 아닌 것 같은데....... 나는 입을 딱 벌리고 디에리고를 올려다보았 다가 다시 정원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에우레디안이 내가 깨어나던 날 정원을 전부 정화해 버리라고 명령하던 것이 떠올랐다.

“아니, 그래도....... 정도가 있지.......”

“혹시 모르니까요. 전부, 싹, 깨끗하게 정리하라는 지시가 있으셨습니다. 제가 좀 고생을 했지요. 폐

하가 만족하실 때까지 갈아엎다 보니.......” “허어.”

정말로 평소엔 관대하기 그지없던 사람이 핀트가 나가면 막을 수가 없는 거구나. 나는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상냥한 에우레디안도 다시 보자. 응.......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벨리룩 궁 앞을 지나쳤다. 저거 제대로 다시 복구하려면 대체 얼마나 걸릴까, 따위의 생각을 하면서. 벨리룩 궁과의


작별은 그렇게 조금 이상하게 끝이 났다. 마침내저멀리황궁의남쪽입구가보였다.나는벨고트황궁으로발을들인지두달반만에,황궁

을 떠났다.

** *

황궁에서 신전까지는 거리가 꽤 있었다. 나는 디에리고와 많이 떨어지지 않게 조심하며 마차를 타 고 수도를 가로질렀다. 에우레디안과 바리샤드 시내로 나가 보았을 때 이동했던 경로 그대로였다.

나는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지나치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보니 한 달 전의 일이라곤 믿어지 지 않을 만큼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마차는 서서히 시내로 들어섰다. 일직선으로 쭉 뻗은 도로 양옆으로 고풍스럽고 우아한 느낌의 건 물들이 하나둘씩 나타나더니 이내 거리 양쪽에 빽빽하게 들어찼다.

이 거리 끝에 닿으면 유겔 광장이 나온다. 그 자체로 하나의 문화 예술이었던 광장. 이 나라의 두 번 째 심장. 에우레디안을 끌고 온갖 잡동사니와 간식거리들을 전부 하나씩 들여다보았던 그곳. 십자가 를진울부짖는늑대동상과,벨고트건국신화가그려진벽화가있던.

그리고 언제나 나른하고 여유롭던 남자가 예민하고 날카로워지던 순간을 처음으로 목격한 곳. 솔레 이아가두번째로내게위협을가했던곳.


 황궁에서 멀어지고 있는 지금은 어쩐지 그 기억까지도 그리웠다. 내가 생각해도 바보 같은 생각이 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때는 뭣도 모르고 신나서 뽈뽈 잘도 돌아다녔지 않은가.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곧이어 창문 밖으로 나타날 풍경을 기다렸다. 그러나 거리의 끝에 다다른 후에 내가보게된풍경은내기억속의모습과는한참이나달랐다.당황에가득찬물음이튀어나왔다.

“어....... 광장은 또 왜 저래요?”

와글와글한 인파로 반 이상이 가득 차 있던 광장은 텅 비어 있었다. 광장 가장자리에 빙 둘러 있던 가판대들은 온데간데없고, 분수대 주위에 몰려 있던 관광객 무리도 없었다. 있는 것이라곤 중앙의 울 부짖는 늑대 동상과 분수대. 그리고 건국 신화가 그려진 벽화뿐이었다. 게다가 골목골목은 출입할 수


없도록 빨간 줄이 드리워져 있었다. 저 빨간 줄, 어쩐지 익숙한데....... 나는 미간을 찡그리며 디에리고를 돌아보았다.


“이게 뭐....... 그새 무슨 일이 있었어요?”

“아.”

디에리고가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곤란하게 웃었다.

“그게.......”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디에리고는 잠시 말을 고르는 듯한 기색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몇 주 전에...... 폐하께서 광장을 봉쇄하라 명을 내리신 탓에 그렇습니다.”

“광장을 봉쇄요?”

“네.” 나는입을딱벌렸다.몇주전에광장전체를봉쇄할만한일이라면,딱한가지사건밖에는없잖아! “이건 좀....... 과하잖아요.......”

입은 그렇게 내뱉고 있었지만, 가슴은 왠지 모르게 다시 쿵쿵 뛰고 있었다. 흑마법이 걸린 마광석이 이광장에서발견되었던것은,그러니까내가에우레디안과이곳에왔었던날은벌써한달가까이지 난 일이었다.

걱정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 정도였구나, 그때도.

아주 사랑스러운 깨달음이었다. 나는 어쩐지 울 것 같기도, 그러나 정반대로 하늘로 그대로 두둥실


 떠오를 것 같기도 한 기분이 되어 우스꽝스럽게 얼굴을 구겼다.

“신경을 많이 쓰셨지요, 폐하께서.”

디에리고가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가까스로 텅 빈 광장에서 시선을 뗐다. 그 이상한 철벽을 구사하는 남자는 이런 조치를 취했다고는 내게 입도 뻥끗 안 했다. 생각해보니 벨리룩 궁도 마찬가지였다. 정원을 그렇게까지 다 뒤집어 놨을 줄은 정말로 상상도 못 했다.

“진짜 이상한 사람이야.”

“그럴지도요.”


디에리고가내혼잣말에대답해주며싱긋웃었다.나는흔들리는눈으로그를마주보았다.그선량

한금빛눈이마치 ‘그것보세요’라고말하는것같아서, 나는어쩐지쥐구멍에숨어들어가고싶어졌

다. 

마차는 그러고도 몇 분을 더 달려 마침내 신전 앞에 도착했다. 이전에 처음 신전에 발을 들였을 때 느꼈던 숨 막히는 듯한 위압감은 이번에는 훨씬 덜했다.

나는 마차에서 내린 뒤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람 같던 한 달도 시간이긴 시간 이라고,사방에흰꽃이활짝피어있었다.이제5월도다지났으니서서히여름이가까워져오는시기 긴했다.사방에정갈하고맑은신성과더불어푸른풀향이가득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디에리고가 한 달 전에 그랬던 것처럼 나를 이끌었다. 나는 라울루스가 강림한다는 까마득한 계단

위 제단을 슬쩍 올려다보았다.

[이제야 좀 눈에 잘 보이는 곳으로 왔구나, 부스러기야.]

때맞춰웃음기도는음성이머리를때렸다.왜입을안여나했어.나는디에리고에게들리지않도록 조심해서 입을 열었다.

“여긴 진짜 안전한 거 맞죠?”

[네가 두려워하는 것들로부터 가장 안전한 곳 중 하나지.]

어쩐 일로 주는 확언이었다. 나는 하늘을 슬쩍 올려다보았다. “신전에서는좀잘보인다는건,여기선좀더자유로워지시는거예요?음,아니면지상에좀더빨리


 내려오실 수 있다든가.......”

돌아온 답은 이번엔 그리 달갑지 않은 확언이었다.

[그건 너보고 당장 레모르디 아래로 내려가 보라는 말이랑 비슷해, 아가야.]

그럼 그렇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한테 빙의자 버프라거나, 엑스트라 버프라거나 그런 게 주어질리가없지.아마도나는예레니카로사는이평생내내개복치신세를벗어나지못할모양이었 다. 우울해. 우울하다고! 내가 한창 땅을 파며 디에리고를 종종 뒤쫓아 가던 중,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공주님?”


낯선 목소리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추고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머나, 역시!”

처음 보는 얼굴의 귀부인이 나를 바라보며 작게 탄성을 질렀다. 굉장히 단정하고 고급스러운 인상 의 미인이었다. 미인이라면 일단 웃고 보는 나는 이번에도 반사적으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단정한 상앗빛드레스를입고밝은금빛머리칼을틀어올린귀부인이활짝웃으며내쪽으로가까이다가왔 다. 그녀는 마치 나비가 사붓이 내려앉듯이 예를 갖추었다.

“이렇게 또 뵙게 되네요, 공주님.”

“어, 어.......”

나는 당황해서 따라 허리를 숙였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르보브니식 예법이었다. 물론 내가 벨고 트식의 예를 알 리도 없었으므로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동작이기도 했다. 귀부인이 우아하게 웃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클라리스 아이벤이라고 합니다. 공주님께서는 아마 저를 처음 보실 테죠.”

“아....... 안녕하세요.”

부인이 상냥하게 웃었다. 나는 얼떨떨하게 그 미소를 받으며 기억을 더듬었다. 아이벤. 어쩐지 귀에 익은 성인데?

“당장그대를볼일이없으니돌아가봐,아이벤백작.”

에우레디안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퍼뜩 떠오른 건 그 순간이었다. 아. 나는 작게 탄성을 내뱉었 다. 그때, 벨리룩 궁에서 에우레디안에게 잡혀 중앙궁으로 돌아오던 때. 황궁 1층에서 보았던 남자!


 나는 여전히 생글생글 웃고 있는 미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 아이벤 백작님의 부인 되시는 분인가요?”

“어머나, 백작님을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부인이 굉장히 기쁘다는 얼굴로 외쳤다. 아,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러나 내가 뭐라 다급히 변명할 새 도 없이, 아이벤 백작 부인이 활짝 웃었다. 진심으로 기쁘다는 얼굴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남편이 이야기해 주셨답니다. 황궁에서 공주님을 뵈었다고요.”

그때 내가 어떤 꼴이었더라? 나는 심각하게 기억을 더듬었다. 그때가 아마, 에우레디안에게 안겨서


본궁으로 끌려오던 때였을 텐데....... 아이벤 백작 부인이 우아하고 다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저번에도 신전을 방문하셨을 때 먼발치서 뵈었답니다. 저로서도 며칠 만에 다시 신전을 방문한 것


인데, 이리 우연이 겹치기도 하네요.”

“아, 그때도.......”

허억. 그때도? 나는 결국 눈을 부릅떴다. 나, 대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얼굴을 얼마나 팔고 다닌 거 야......?

백작 부인이 온화하게 웃었다.

“우연이 겹치면 필연이라 하지요. 안 그래도 공주님을 언젠가는 한 번 꼭 뵈었으면 했는데. 아무래

도 라울루스께서 도우시는 모양이에요.”

[음, 그건 아닌데.]

바로 그 라울루스가 콧노래처럼 내 머리에 대고 흥얼거렸다. 나는 허허롭게 웃어 보였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공주님!”

내 말은 다급히 나를 부르는 부름에 의해 끊겼다. 오늘 왠지 나를 부르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네. 고 개를 돌려 보니 앞서가던 디에리고가 허둥지둥 가던 길을 되돌아오고 있었다. 아마 중간부터 내가 따 라오지않고있다는걸뒤늦게눈치챈게분명했다.

“제 심장을 멎게 하려고 작정하셨습니...... 아이벤 백작 부인?”

백작 부인은 디에리고와도 안면이 있는 사람인 모양이었다. 나는 이제 대체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하 는지 모를 지경이 되었다. 디에리고에게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아이벤 백작 부인이 다시 입을 열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나. 이번에도 신관님과 함께 계시던 중이었군요.”

“아, 네. 당분간 신전에 머무르게 되어서요. 죄송해요, 디에리고. 제가 잠시 한눈을 팔다가.......”

“아닙니다. 제가 주의를 하지 못한 탓이지요. 전 또 넘어지시기라도 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백작 부인께서는 이 이른 시간에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어머나, 신전에 머무르시나요? 왜 황궁에 계속 계시지 않고요?” “저 안 넘어졌어요. 그리고 신전에는.......”


대화가꼬였다.나는눈을이쪽저쪽굴리다가백작부인을보며다시입을뗐다. “사정이 그렇게 되어서요.”


“아, 설마 엘라드 영애께서 무슨 위해라도 가하셨나요?”

그리고 이어진 부인의 말은 내가 얼렁뚱땅 넘기기 어려운 말이었다. 찍었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

로정답을딱맞혔다.놀란눈으로그녀를보자부인이알만하다는듯혀를찼다.

“보나 마나 뻔하지요. 엘라드 영애께서 공주님께 어떻게 행동했을지는.”

“그런가요......?”

세상에. 솔레이아, 이미지가 별로 좋진 않구나. 하기야 그 도도한 콧대며 오만함이 가린다고 딱히 가 려질것같지는않았다.애초에그런본래성격을감추고사람을대할것같지도않고.......

백작 부인이 다정다감하게 말을 이었다.

“그분의 태도를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마셔요. 그저 한 귀로 듣고 흘려버리는 게 좋답니다. 게다가

어차피 공주님께는 든든한 방패가 있으시잖아요.”

그게 뭔데요......?

나는 멍청한 얼굴로 그녀를 보다 그 방패가 에우레디안을 말한다는 것을 금세 깨달았다. 그리고 이 어 사교계에 내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다는 사실까지 떠올렸다. 나는 이번에야말로 애매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맞다, 나 사방팔방 소문난 여자였지. 그 방패의 유효 기간이 이제 며칠 안 남았다는 걸 알면 어떻게 반응할까나......?


 백작 부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의외네요. 계속 폐하께서 곁에 두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갑자기 신전으로 오시다

니.......”

“아이벤 백작 부인.”

백작 부인의 말을 막은 것은 디에리고였다. 내 체질과 신전으로 거취를 변경하게 된 계기는 비밀에 부친 사항이었다. 디에리고가 선하게 웃으며 부드럽게 그녀의 말을 잘랐다.

“담소는 나중에 나누시는 것이 어떠실까요? 공주님께 신전을 마저 안내해 드려야 해서요.” 

“어머, 제가 방해를 했군요. 죄송해요. 공주님을 뵈어 너무 반가운 나머지.......” “아니에요. 저도 만나 뵈어서 반가웠어요, 부인.”


수도 귀족들은 다 이렇게 고상하고 예의 바른가? 나는 속으로 감탄하며 그녀의 인사를 받았다. 다정 하게미소지은그녀가어쩐지기대에찬눈을하고물었다.

“다시 이야기 나눌 날이 올 거라 믿어도 될까요, 공주님?”

“아.......”

그밝은갈색눈에어쩐지꿀이뚝뚝떨어지는것같은건,내착각인가......?

나는 무례가 되지 않는 선에서 클라리스 아이벤의 얼굴을 꼼꼼히 들여다보았다. 이제 서른쯤 되었 을까. 고상한 귀부인의 얼굴에는 경계심이나 미심쩍은 기색 같은 것은 없었다.

나는 흘끗 디에리고를 쳐다보았다. 그는 조금 당황한 기색이긴 했지만 나를 뜯어말리지는 않았다. 그럼 해를 끼칠 사람은 아니라는 뜻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야말로, 이야기 나누어 주신다면 기쁠 거예요.”

사람을겉만보고판단하면안되는것이긴하지만,어쩐지괜찮을것같았다.디에리고와도아는사 이고, 아이벤 백작은 에우레디안에게 직접 보고를 올리기 위해 황궁을 찾았던 사람이 아닌가? 벨고트 의귀족계에대해전혀무지한나로서는한번쯤얘기나눠볼만한상대였다.뭐,어차피곧있으면르 보브니로 돌아갈 거긴 하지만.......

‘아,또왜자꾸!’

생각이 돌고 돌아 계속해서 같은 곳으로 귀결되니 큰일이었다. 나는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꾹 누르 고부인에게인사했다.뭐,어차피신전에서도할일이없는건마찬가지일텐데.말동무가한명더생


 기는 건 반가운 일인 것 같았다. 게다가 어쨌든, 미인이니까! 미인은 항상은 아니지만 대체로 옳아! 잠시뒤나는다시한번내가지나치게얼굴을밝히는것은아닌가하는고민에빠져야했다.

** *

어쨌든그날부로나의신전생활이시작되었다.솔직히말하면이제야좀살것같았다. [훨씬 낫지? 그러게, 너는 애초에 여기로 들어왔어야 했어.]


나는라울루스가것보라는듯하는말을차마부정하지못했다.정말로신전밖에있을때와는기본 적인 몸의 컨디션 자체가 달랐다. 몸 자체가 밑 빠진 독이니 아무리 에우레디안으로 급속히 충전한들


본질적인 해결책이 될 리가 없었다.

게다가 자꾸만 컨디션이 마이너스와 플러스를 오가니 그 간극에서 오는 피로감도 상당했는데, 신전

에서는 그런 걸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와, 진짜 이런 기분이었구나.”

나는 새삼스럽게 르보브니에서의 시간들을 떠올렸다. 땅의 무게가 없다는 게 이렇게 날아갈 듯 가 벼운 느낌을 줄 줄이야. 나는 속으로 그간 수도 없이 괜찮다고 주위를 안심시켰던 것을 전부 철회했 다. 신전으로 와 보니까 알겠다. 그동안 내가 정말로 전혀 안 괜찮은 상태였다는 걸......!

“안색이 확실히 다르시네요, 공주님.”

그리고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확연히 티가 났던 모양이었다. 디에리고가 제단 앞을 빗자 루로 쓸다 말고 나를 보며 감탄했다. 나는 붉은 자줏빛 눈을 가진 늑대 동상을 반질반질하게 닦으며 배시시 웃었다.

“그쵸? 사실 저도 매일 아침 느끼고 있어요. 잃었던 미모가 다시 빛을 찾는 느낌이랄까.”

디에리고와 나는 기도실을 청소하는 중이었다. 신전은 신성한 데다 만인이 평등한 곳이라, 신전에 머물기 위해서는 나도 다른 사제들과 똑같이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내가 며칠 디에리고를 졸라 얻어 낸 일감이었다.

[잘좀닦아봐,부스러기야.거기,털사이덜닦였다.] “잘 닦고 있습니다아.”


 “네? 뭐라고 하셨습니까, 공주님?”

“아무것도 아니에요.”

까탈스럽기는.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정교한 늑대 동상의 털 사이사이까지 깨끗하게 닦았다. [야.눈은함부로닦지마.눈이영혼의창이라는거모르니?]

나는 늑대의 불그스름한 자줏빛 눈동자를 보며 짧은 순간 격렬하게 고심했다. 확 찔러 버려? 그러나 무려 신전에서 신전의 주인에게 불경하게 굴다 신벌이라도 받으면 곤란했으므로, 나는 다시 얌전히 눈 주위를 피해 반질반질 윤이 날 때까지 동상을 닦았다. 시도 때도 없이 잔소리하던 라울루스도 내 정성에 마침내 탄복하고는 잠잠해졌다.


“으랏차차. 다 했다.” 

나는부드러운마른수건을들고허리를쭉폈다.동상을다섯개째닦는중인데도기운이팔팔했다. 평소였다면 이 작은 일에도 금방 비실비실해졌을 텐데 장족의 발전이다. 그러나 디에리고는 아무래 도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공주님. 정말로요.”

“무리 안 해요. 기운이 이렇게 펄펄 솟는데, 해소할 곳이 있어야죠.”

어디 또 닦을 게 없나? 보이기만 해봐라. 먼지 한 톨 없이 싹싹 전부 닦아 주리라! 나는 눈을 빛내며 기도실 안을 둘러보았다. 민간 기도실은 내가 지난번에 잘못 찾아들어 갔던 사제들의 기도실보다 훨 씬 크고 넓었다.

“폐하께서 아시면 저를 대체 뭘로 보실지.......”

디에리고가 작게 한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의욕에 불타 맞은편을 향해 걸음

을옮겼다.그러다어느한곳에시선이묶였다.

“어.......”

기도실의거대한제단을가려놓은자줏빛커튼사이로,언뜻커다란그림비슷한것이걸려있었다.

[가서 볼래?]

자신의 신전이 깨끗해져 가는 것이 만족스러웠는지, 라울루스가 나른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디 에리고가 듣지 못하게 소곤거렸다.

“저게 뭔데요?”


 [나.]

“네?”

[나라고. 가서 한번 보렴. 너도 너랑 이렇게 매일같이 놀아 주는 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정도는 알아 야 하지 않겠니?]

“으음.......”

딱히 알고 싶진 않은데, 라고 말했다간 또 며칠을 토라져 있을 것이다. 나는 한 달 만에 이 변덕스럽

고 제멋대로인 절대자의 성향을 대강 파악했다. 신들이라는 자들이 전부 이런지는 모르겠지만, 라울

루스는약간아이같은면이있는편이었다.


“와아....... 세상에, 궁금하기도 하지.” 

나는영혼없이웃으며슬며시걸음을옮겼다.마침디에리고는잠시자리를비운중이었다.나는주 위에아무도없는지확인하고커튼사이로머리를쏙집어넣었다.커튼뒤에걸려있는것은천장까지 닿을만큼거대한한폭의그림이었다.나는그림속존재를보고입을벌리며감탄했다.

“워, 라울루스 님. 저렇게 생기셨어요?”

도무지 여자인지 남자인지 가늠하기 힘든 음성만큼이나 그림 속 인물도 성별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건, 그 존재가 입이 떡 벌어지게 아름답다는 점이었다. 바닥까지 끌리는 매끄 러운 은발에 붉은빛에 가까운 자안. 예스러움이 묻어나는 복식. 성별이 모호한 체형. 나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엄청 미인이시네요. 인간의 모습이실 줄은 몰랐는데.......”

[내 모습 중에 하나지. 뭐, 인간들이 생각하기에 가장 친숙한 모습으로 내려가는 건 내 하해와 같은

은덕 중 하나랄까.]

어쩐지 라울루스가 어깨를 으쓱하는 모습이 그려지는 것 같았다. 저 경건하고 엄숙한 얼굴로 이런 경박스러운 말들을 줄줄 내뱉는다니, 어쩐지 안 어울리는데....... 하지만 어쨌든 미인이었구나! 당신 도 합격! 나는 실없이 그렇게 생각하며 시선을 내리다가, 제단 아래쪽에 시선이 묶였다. 벽에 깨알 같 은 글씨체로 무언가가 잔뜩 새겨져 있었다.

라울루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아마 저기도 있을걸, 부스러기야. 잘 찾아봐.] “뭐를요?”


 [네가마음에둔아이말이야.지상에서나와가장가까운아이.그아이의이름.]

“이름......?”

에우레디안의 이름? 내가 모르는 이름이 또 있었나? 나는 어리둥절해서 그 깨알 같은 글씨들을 읽기 위해 몸을 최대한 제단 아래로 기울였다. 라울루스의 말대로 그건 이름들이었다. 내가 모르는 이름들. 그러나 나는 첫 줄을 읽자마자 그게 누구의 이름들인지 알았다.

“헉.”

벨고트 역대 황제들의 풀 네임이었다. 그냥 풀 네임이면 모르겠는데.......


[내가 직접 내린 이름.] “세례명.......”


나는입을딱벌렸다.맨첫줄맨앞에쓰인이름이뇌리에선명히와박혔다. 라카이스 루 엘리자드 아드레아 벨고트. 벨고트의 초대 황제의 풀네임. [아드레아였지. 내 첫 아이 이름이.]

라울루스가 마치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듯이 물었다.

[내가 내린 이름이 가진 의미를 아니, 부스러기야?]

내가 세례명에 대해 아는 거라곤 보통 평생의 반려자에게나 알려 주는 가장 비밀스러운 이름이라는 것뿐이었다. 원작에서 알렉시오가 브리즈니에게 고백할 때 세례명을 알려 주는 신이 있었더랬다. 명 실상부한 내 최애 장면이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내가떠올린바를톡내뱉어보았다.

“음, 고백할 때 쓰는 이름?”

[......지상에는 이제 그 의미밖에는 안 남았나?] “저야 모르죠......?”

무슨 다른 의미가 있어?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라울루스가 느릿하게 대답했다. [세례명은, 나를 지상에 불러낼 수 있는 이름이지.]

뭐야? 나는 눈을 부릅떴다. 라울루스의 말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유데타의 금기가 있다고 말했지, 아가.]

“네에. 금기 때문에, 함부로 못 내려오신다고.......”

유데타 너머의 신계와 레모르디 아래의 지하 세계는 함부로 지상의 섭리에 간섭할 수 없다. 그것이 유데타와레모르디의금기였다.지상이완전한절대침범불가의중간지대로유지될수있게하는이 세계의 금기.

라울루스가 가벼운 어조로 폭탄을 던졌다.

[10년에 한 번, 내가 지상으로 내려갈 때, 내 아이들은 내가 내린 이름으로 나를 소환한단다.] 

“헐,왜말씀안해주셨어요!” 나는즉각소리낮춰꽥외쳤다.


“그럼 저도 당신을 소환할 수 있어요?” [넌못해.]

“왜요! 저도 세례 받았는데!”

[네 세례명이 뭔데?]

그 물음에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입을 다물었다. 세례명, 모른다. 부모와 본인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이름이고, 불리지도 않는 이름이고, 그리고 무엇보다 내 세례명은 원작에 안 나왔으니까.

라울루스가 혀를 차며 말했다.

[게다가어차피너는못해,부스러기야.너는나를지상에묶어놓을만큼의신성력이없지않니.]

“아.......”

[있던 신성까지 죄 뺏기고 죽어 버리지나 않으면 다행일까.]

저주다. 저주나 다름없었다. 젠장. 나는 아주 잠깐 솟았던 희망이 도로 바닥으로 처박히는 처참한 심 정이 되어 입을 내밀었다.

“진짜 꼼짝없이 기다려야 하는 거구나, 그럼.” 그래.그런손쉬운방법이있었으면진작라울루스가말을해줬겠지.나는한숨을내쉬며벽을다시

훑었다. 시선이 벽 하단으로 내려갔다. [그렇다니까. 그런데.......]


 이렇게 된 거, 에우레디안의 세례명이나 훔쳐보고 갈까. 막 가장 마지막 이름을 눈에 담으려는 순간, 라울루스가 알 수 없는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며 경고했다.

[너, 일단 숨어야겠구나.]

“네......?”

덜컹. 내가 어리둥절해서 반문함과 동시에, 닫혀 있던 기도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으앗......!”

나는 기절할 듯 놀라 후다닥 커튼 안쪽으로 숨었다. 저벅저벅. 발소리가 들렸다. 곧장 이쪽으로 다가 

오는 소리였다. 나는 움켜쥐었던 커튼을 놓고 소리 낮춰 몸을 움직였다. 게걸음으로 슬금슬금.

아무리 신전의 주인인 라울루스가 허락했다지만...... 함부로 역대 황제들의 세례명을 엿본 건 딱히


잘한 짓은 아니었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건 보지도 못했다. 에우레디안의 세례명! 그, 그걸 못 봤으면 된 거지. 아직 지은 죄 없어. 나는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느리고 신중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다가오는 발소리가 더 빨랐다. 나는 딱딱하게 얼어붙어 커튼을 도로 꼭 말아 쥐었다. 이건 꼭 내가 어디 있는지 알고 다가오는 것 같은데.......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라울루스는 킥킥대며 혼자 흥얼거리고는 입을 다물었다. 웃으며 또 홀연히 사라진 것 같았다. 나는 망할 신의 긴 머리채를 쥐고 탈탈 흔들어 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속이 그렇게 바짝바짝 타 들어가는것도잠시.

“......어.”

나는얼떨떨하게입을벌렸다.익숙한기운이훅끼쳤다.언제나어디에서나내가모를수없는기운 이었다. 주인이 분명한 맑고 정갈한 체향.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그리고 내가 미처 마음의 준비를 하 기도 전에 커튼이 양쪽으로 홱 젖혀졌다. 짧은 웃음소리가 터졌다.

“거기서 뭐 해, 공주?”

나는 멍하니 커튼을 젖히고 나타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내 감은 틀리지 않았다. 에우레디안 벨고 트. 라울루스의 신성으로 가득 찬 신전에서조차 홀로 묘하게 그다운 체향을 두른 남자가 다정한 낯으 로나를보고있었다.나는더듬더듬입을열었다.

“제가 여기 있는 줄은 어떻게...... 아셨어요?” “그대는 어디 있든 눈에 튀거든.”


 그가 여상하게 대꾸하며 내 볼을 살짝 건드렸다. “어딘가에 숨는 것에 능숙하지도 못하고.”

보, 보였나....... 나는 머쓱하게 웃었다.

닷새만에보는얼굴이었다.그는언뜻보기에평소와다를바없어보였다.여상하고어딘지느슨하 게 풀려 있는 얼굴. 그러나 나는 곧 그가 평소보다 격식을 갖춘 차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바리 샤드 시내로 함께 나가던 날과 비슷하게 빈틈없이 완벽하게 성장한 차림이었다.

몸에딱맞게떨어지는흰색제복에금장.왼쪽가슴에달린십자가모양브로치가유난히반짝였다. 늘 반쯤 흩어져 있던 은빛 머리카락도 깔끔하게 뒤로 쓸어 넘긴 모양이었다.


그래서인가. 원래도 감탄 나오게 잘생긴 얼굴이 오늘따라 유난히 더 조각 같았다. 흠잡을 데가 없이 완벽하게 정교한 조각상. 온기 어린 두 손이 내 양 뺨에 닿았다. 에우레디안이 내 얼굴을 가볍게 잡고


면면히 살피며 중얼거렸다.

“역시 훨씬 안색이 좋군.”

“그런 말 많이 들었어요.”

나는 어색하게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이 남자의 체향을 느낀 그 순간부터 가슴이 다시 빠르게 뛰 고 있었다. 게다가 오늘따라 더 해로운 얼굴이라.......

“이럴줄알았으면진작신전으로보내줄걸그랬어.”

“아하하. 그렇게 말씀하시면 서운한데.”

내 웃음소리가 내가 듣기에도 부자연스러웠다. 나는 나를 꼼꼼히 살피는 불그스름한 자안을 피해 이리저리시선을굴렸다.왜이렇게어색한기분이들지?그날새벽이후로처음보는거라그런가?당 황하거나 할 말이 없어지면 헛소리를 내뱉는 내 습관이 또다시 튀어나왔다.

“폐하는 오늘도 잘생기셨네요.”

“그런가?”

에우레디안이 짧게 웃었다. 정말로 대리석 조각처럼 표정 없이 담담하던 낯에 미소가 스쳤다. 어쩐 지귀끝이빨갛게달아오르는것같았다.나는정신을차리기위해눈을부릅떴다.홀리면안된다,예 레니카! 잠시의 정신 세뇌 끝에, 나는 그나마 정상적인 물음을 내뱉는 데 성공했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오신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글쎄.......”

에우레디안이 답지 않게 말을 흐렸다. 붉은 자줏빛 눈동자 속에 순간적으로 여러 감정이 스쳐 지나

갔다. 나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무슨 일 있으세요?”

에우레디안이 대답을 아끼는 것은 그리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내 한쪽 뺨을 만지작 거리고 있는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


“......무엇이?”

“폐하께서 아무 이유 없이 먼저 저를 찾으실 리가 없는데.”


딱히 자조적인 어투로 내뱉은 말은 아니었다. 스스로에게 세운 기준이 엄격한 이 남자는 분명 어떤 이유든 만들어서 여기까지 왔음이 분명했다. 에우레디안이 피식 웃으며 내 뺨을 놓고 대신 검지로 이 마를 쿡 찔렀다.

“그대 머릿속에 내가 대체 어떻게 각인되어 있는지 궁금하군.”

“음. 거짓말쟁이?”

나는방긋웃어준뒤에우레디안의손을잡고앞뒤로흔들며줄줄말을이었다.

“엄청 튕기시는 황제 폐하. 어차피 함락될 거 엄청 비싸게 구신 분. 남은 피곤해서 죽어 가는데 혼자 태평하기나 했던 냉혈한.”

“.......”

“음,더말해드려요?저한50가지는말할수있을것같은데.”

에우레디안은 잠시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이내 나른하게 웃었다. 완벽히 평소의 그가 짓던 표 정이었다.

“부정할 수 있는 부분이 없군.”

“그럼요. 저는 생각보다 폐하를 잘 안답니다.”

그리고 나도 이제는 완벽하게 평소의 나로 돌아와 있었다. 가슴은 여전히 빠른 엇박자로 뛰고 있기 는했지만,그래도어쨌든지금이사람과마주하고있는게좋았다.


 사실 그거면 됐지. 닷새 만의 이 짧은 만남에서조차 앞뒤를 걱정해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래 서나는그냥내기분에충실하기로했다.장난스럽게잡은손을흔들며물었다.

“그래서 뭐예요, 진짜? 설마 그냥 제가 보고 싶어서라고 하실 리는 없고. 아, 물론 그게 실은 가장 큰 이유이려나?”

“못 말리겠군.”

허탈하게 웃은 에우레디안이 내 손을 놓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몸이 번쩍 들렸다. “어?”


당황해서 소리를 채 다 내뱉기도 전에 나는 제단 위에 올라앉아 있었다. 눈높이가 순식간에 높아졌 다.


“여, 여기.......”

신성한 제단인데......! 그러나 에우레디안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얼굴이었다.

“라울루스께서는 관대하시니까.”

“뭐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톡 튀었다. 관대하긴 개뿔....... 나는 무심코 생각하다, 혹시라도 라울루스가 어딘가에서 훔쳐보고 있을 것 같은 느낌에 슬쩍 제단 뒤를 흘끔거렸다.

“호, 혹시 모르죠. 생각보다 속이 좁고 유치하실 수도.......”

“꼭 아는 것처럼 말하네. 공주.”

그리고 에우레디안은 오늘도 쓸데없이 촉이 좋았다. 나는 결국 제단 뒤를 살피는 것을 포기했다. 뭐, 보라면 보라지. 게다가 제단을 먼저 봐도 된다고 한 건 라울루스니까, 뭐. 게다가 까불거리는 음성이 들려오지않는걸보면지금은보고있지않은걸지도몰랐다.나는애써라울루스에게서생각을거두 었다.

그러고나서보니잘생긴낯이바로아래에있었다.내가그를내려다보는일은흔치않았다.위에서 내려다보니 얼굴 전체에 어려 있는 피로감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잠을 제대로 못 잔 건지, 요새 과 로를 하는 건지. 눈가가 살짝 불그스름하게 물들어 있었다. 물론 그것조차 묘하게 잘 어울려서 심장이 좀 뛰긴 했지만 걱정스러운 마음이 먼저였다.

“으음. 그래서 무슨 일이 있으셨을까요, 제가 없는 닷새 동안?”


 그의 버릇 같은 말투를 비슷하게 따라 하니 에우레디안이 느슨하게 웃었다.

“늘 똑같지, 내 일상은. 똑같이 답답하고, 처리해야 할 일은 많고. 약간 피곤하고.”

“.......”

“하지만 그건 늘 있었던 일이니까. 거창하게 무슨 일이 있었다고는 말 못 하겠군.”

정말로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목소리가 담담하게 이어졌다. 나는 그 빈틈없이 견고한 낯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언젠가 디에리고가 했던 말이 어렴풋이 머리를 스쳤다.

“예전부터 얽매여 있는 게 많으셨지요.”


“그렇구나.”

나는 희미하게 붉은 기가 도는 눈매를 조심스럽게 쓸었다.


“갑갑하셨겠다.”

“.......”

“자꾸 이상한 것들이 당신을 괴롭히니 참 큰일이네요. 제가 있었으면 위로라도 해 드리는 건데.”

불그스름한 자안이 몇 번 깜빡이더니 느리게 아래로 내리깔렸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나는 짐짓 발랄하게 말을 이었다.

“오늘 오신 건 잘한 일이에요. 제가 요즘 기운이 팔팔 넘쳐서, 아마 폐하께도 좋은 기분을 전해 드릴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그래? 그거 다행인데.”

“아, 그러면 이제 반대가 된 건가?”

“응?”

그가다시시선을들어나를보았다.붉은자줏빛눈동자에의문이떠올라있었다.나는웃으며그를 향해 팔을 벌렸다.

“역할 바꿔요.”

“뭐?”

“오늘은 제가 할게요. 인간 강장제. 다른 말로는 급속 충전기.”


 “......?”

에우레디안은 그 말의 의미를 얼른 알아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찰나였다. 피로감이 드리워져 있던 무표정한 얼굴에 천천히, 어떤 표정이 떠올랐다. 놀란 얼굴 같기도 했고, 굉장히 생소 한 말을 들었다는 표정 같기도 했다. 나는 딱히 그를 기다릴 생각은 없었다. 허리를 숙이고, 그대로 그 의 목을 끌어안았다.

물론나는가진신성따위는없었으므로,그리고설령있다고해도이남자에게비할바가못되었을 것이라, 이건 순전히 마음으로 하는 위로였다.

내게안긴에우레디안이흠칫하며굳는것이느껴졌다. 내가이남자를먼저안아준적이있었던 

가?굳이기억을더듬을필요도없었다.항상안겨들고품을찾는것은내쪽이었으니까.나는약간반 성하며그를좀더바짝끌어안았다.


“오늘도 고생하셨어요.”

손끝에 휘감기는 은빛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음. 그리고.......”

나는 조금 망설였다. 그날 새벽, 에우레디안은 내게 이쯤에서 그만둬 달라고 말했다. 내가 다가가면 물러나지 못할 것 같으니까, 여기까지만 해 달라고. 하지만 그 말 때문에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을 온 전히속으로삭이는게맞는걸까?

어쩐지 그건 아니라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누구의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심장 박동 소리를 들 으며, 나는 가만히 중얼거렸다.

“보고 싶었어요.”

작은 소리였지만 귓가에 속삭였으니 그가 듣지 못했을 리는 없었다. “진짜로. 보고 싶었어요.”

말로 내뱉어야만 그제야 확실해지는 것들이 있다. 그간 미처 절감하지 못하고 있었더라도. 아. 내가 실은 그러했구나. 요 근래 기운이 펄펄 넘쳐나는데도 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던 이유가 그거였구나. 이 렇게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이남자가단지내가구해야할사람이고,앞으로의비극이예정된사람이고,그리고이세계에서유 일할 내 구명줄이고. 그 사실들만이 내가 느끼는 감정의 전부였더라면 신전에 와서까지 그를 보고 싶


 어 하지는 않았을 거였다. 그래서 나는 퍽 담담하게 인정했다.

응. 좋아하는구나.

지금까지 수없이 잠을 설쳤던 밤들이 무색할 정도로 간단하고 명료하게 떨어진 답이었다. 내가 많 이 좋아하고 있구나. 왜 지금까지 빙빙 돌아왔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단지 이 남자가 나를 살게 하는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정해진 그 운명이 가여워서가 아니라.......

“역시 못 당하겠어.”

에우레디안이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내 등을 마주 안는 손길이 있었다. 애매하게

조금 떨어져 있던 몸과 몸 사이의 거리가 순식간에 바짝 가까워졌다.


그 순간 나는 나를 안은 남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까지는 미처 알지 못했지만, 그래도 맞닿은 몸에서 전해져 오는 심장 박동이 나만큼이나 빠르고 불규칙적이라는 것만은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백마디말보다더큰만족감이었으며,바로이남자를닮은나른한쾌감이었다.

** *

“그래서, 진짜로 왜 오신 건데요?”

나는 뒤로 쓸어 넘긴 반짝이는 은발을 살살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우리는 신전에 마련된 내 방 안에

있었다. 방을 구경시켜 주기 위해 막 끌고 들어온 참이었다.

그러나에우레디안은딱히내방에는관심이없는것같았다.곧바로나를도로창틀에앉힌채로다 시 시선을 마주해 오는 걸 보면. 풀어 내린 긴 연분홍빛 머리카락을 손안에서 이리저리 휘감아 보고 있던 그가 천천히 답했다.

“말했잖아. 답답했다고.”

“그게 다일 리가 없는데.”

나는 미심쩍은 어조로 붉은 자안을 들여다보았다.

“당신이 나를 만나러 오면서 다른 이유를 하나도 만들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에우레디안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눈을 들어 나를 보았다.

“그대가 이렇게 예리했었나?”


 “이 사람이 진짜.”

즉시미간에줄세개가잡혔다.나는그를가볍게흘겨보며톡쏘아붙였다.

“목표물을 사냥하려면 목표물의 특징부터 파악하는 게 우선 아니겠어요?”

“목표물을 사냥한다라.”

에우레디안은 내 말을 잠시 되뇌는가 싶더니 픽 웃었다.

“그대는전혀말이되지않는말을말이되게하는재주가있단말이지.”

“그게 제 매력 아니겠어요?”


이번에 튀어나온 말은 헛소리에 가까웠다. 나른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리는 그 얼굴이 심각하게 심 장에 해로워서였다고는 죽어도 말 못 해. 으응. 나는 고개를 털어 그의 마수에서 빠져나온 뒤 눈에 힘


을 주었다.

“자꾸 말 돌리지 마시고요. 왜 오셨어요?” “그대에게 줄 게 있어서.”

에우레디안은 이번에는 순순히 대답했다. 몸을 바로 한 그가 제복 안쪽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나는 그게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버들잎이 교차한 모양의 녹색 인장이 찍힌 얄팍한 서신이었다. 눈 이 즉각 휘둥그레졌다.

“어, 르보브니에서 서신이 도착했나요?”

“그래.”

나는 빠르게 그것을 받아 들었다. 인장을 뜯고 봉투를 열자 지난번보다는 확연히 얇은 서류 종이가 들어 있는 게 보였다. 내게 온 편지라기엔, 반듯하게 접힌 서류에 더 가까운 종이였다. 나는 고개를 갸 웃하면서도 봉투에서 종이를 꺼냈다.

“어.......”

깔끔하게 삼등분으로 접힌 종이를 펼쳐 읽자마자 곧바로 당황스러운 신음이 터졌다.

내게 온 아버지나 어머니, 테제비아 언니의 자필 편지는 아니었다. 서류에 실린 것은 명단이었다. 벨 고트로 오는 제18대 르보브니 사절단의 명단.


 “사절단......? 허억.”

나는 그 명단의 꼭대기 부근에서 눈에 익은 이름을 몇 개나 발견했다. 사절단의 대표란에 쓰여 있는

이름은.......

“혀, 형부다.”

“형부?”

에우레디안이 작게 반문하든 말든, 나는 놀란 얼굴로 명단을 몇 번이나 훑었다. 사절단의 대표는 레 바논 공작, 즉 테제비아 언니의 남편이었다. 게다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페르난디스에...... 헐, 세르게이까지.”

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중얼거렸다. 아니, 이 사람들이 전부 줄줄이 벨고트로 온단 말이야?


“전부 남자 이름이군.”

에우레디안은 어딘지 심기가 불편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나는 맹렬하게 머리를 굴리느라 그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세르게이는 모르겠지만 레바논 공작과 페르난디스가 벨고트로 오는 건 어딘지 걱정이 되는 일이었 다.그둘은원작에서테제비아언니를되찾기위해벨고트원정을떠났다가참사를당한인물들이아 닌가? 그런데 또 벨고트로 오게 되었다고? 설마 그 둘도 원작을 따라가려는 건 아니겠지. 아닐 거야. 나는 불안한 마음을 감추고 슬쩍 에우레디안에게 물었다.

“이거, 당연히 친선 사절이겠죠?”

“글쎄.”

그리고 비딱한 반응이 돌아왔다. 에우레디안이 입꼬리를 비스듬히 추켜올렸다. “벨고트에 협조적이라면 친선 사절이겠지.”

“아이, 무섭게 하지 마시고요. 뭐, 혹시 다른 생각 있으신 건.......”

“다른 생각이라면, 예를 들어 뭐?”

“뭐....... 진짜 르보브니 따위는 한입에 삼켜 버리실 생각이라거나.......”

어쩐지 신빙성 있는 얘기다. 르보브니 같은 작은 왕국 따위, 벨고트가 한 번 툭 건드리기만 해도 와 르르 무너질 테니까. 게다가 아직까지도 르보브니 측에서 글루카만 로드를 개방하지 않은 것 같 고.......


 나는 최대한 예쁘게 웃어 보였다. 내 얼굴이 곧 르보브니의 얼굴이다, 라고 세뇌하면서. “저를 봐서라도 설마 그러진 않으시겠죠. 폐하?”

“그대가 그렇게 말하니 반항심이 드는데.”

에우레디안이 심술궂게 답했다.

“벨고트의 향후 대외 정책은 이번 삼국 협상에서의 르보브니의 태도에 달렸지.”

왜갑자기또마음이상한거야?진지하게기억을더듬어봐도딱히짚이는부분이없었다.

“제가 당신 손에 있는 한은 르보브니가 먼저 칼을 들이밀 일은 없어요. 아시면서.” 

“흠.” 

“그리고 제가 르보브니로 돌아간대도 우리 아버지가 이번처럼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리실 일도 없 을 거고요.”

“그래, 뭐.”

“진짜예요.”

그건 거의 나 자신에게 하는 다짐이었다. 돌아가자마자 아버지에게 온갖 어리광과 눈물의 호소를 쏟아부을 작정이니까. 다시는 과한 욕심 부리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아 낼 때까지. 내 말을 듣는 둥 마 는둥하던에우레디안은영생뚱맞은것을물었다.

“세르게이는 누구야?”

“아. 제 소꿉친구요. 우리 언니 부군의 동생이기도 하고요.”

세르게이가 오는 건 정말로 의외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인상을 팍 구겼다. 이놈 새끼, 세르게이 레 바논. 내가 이놈만 믿고 있다가 기습적으로 납치당했지. 그러나 눈앞의 남자를 다시 보고 나자 입꼬리 가 절로 배시시 풀어졌다.

“어쨌든 결론적으로는 잘된 일인가, 아닌가. 모르겠다.......” “.......”

“좋은 게 좋은 거죠, 뭐. 오랜만에 르보브니 식구들 얼굴 보겠네요.”

나는 손을 뻗어 반짝이는 은빛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러나 깨달음은 금방이 었다. 르보브니에서 사절단이 온다는 사실이 뜻하는 바는 따로 있었다. 에우레디안이 굳이 그 소식을


 내게직접전해준건,아마도내가돌아가야할때를간접적으로알려주기위함이틀림없었다.

“.......”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나를 잠깐 담았다가 도로 아래로 내리깔리는 자줏빛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몽실몽실하게 부풀어 올랐던 기분이 금세 가라앉았다. 어렴풋이 생각만해왔던돌아가는날이이제완전히확정된것이다.

내게 말을 하지 않는다 뿐이지 에우레디안 역시 뭘 생각하고 있는지는 뻔했다. 며칠간 일부러 뒤로 미뤄 놓았던 생각들이 우르르 도로 떠올랐다. 이렇게 가면 정말로 끝인가?

“요새 이것 때문에 바쁘신 거구나.”


나는 의식적으로 생각을 차단했다. 한번 생각해 버리면 정말 한도 끝도 없이 기분이 가라앉아 버릴 것 같아서. 게다가 이 남자는 여기에 쉬러 온 셈인데, 우울한 얘기를 꺼내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아무


렇지도 않게 활짝 웃었다.

“삼국 협상이면 아제키엔 쪽에서도 오겠네요. 어우, 그쪽 동네는 마광석이 많이 나는 나라잖아요.

무서워라.”

“......응.”

“그러고 보니 갑갑하실 만하네. 50년 만이던가요, 글루카만 협약 재조정은?”

에우레디안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려 다른 화제를 찾았다.

“음. 엘라드 영애는 요즘 어때요?”

그리고 적절한 화제를 찾아내는 데 실패했다. 나는 말을 내뱉자마자 속으로 꽥 비명을 질렀다. 멍청 하게, 여기서 그 여자 이야기를 꺼내면 어떡해, 바보 예레니카!

“......관심을 두고 싶지조차 않지만.”

느슨하게 풀려 있던 얼굴이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었다. 에우레디안이 씹어 뱉듯 말했다.

“그래도 꼬리를 쫓아가야겠지. 그 덜미를 잡아 지하 감옥에 처넣을 수 있을 때까지. 그렇게 생각하 니 기분이 더럽군.”

그답지 않게 과격한 어조였다. 나는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역시 얘기를 잘못 꺼냈나? 하지 만 어차피 언젠가는 해야 했을 이야기였다. 그때가 지금일 뿐이지. 나는 에우레디안의 양 뺨을 잡고 눈을 맞추었다.


 “혹시 말이에요, 폐하. 절대, 절대, 절대, 절대.” 나는한글자한글자에힘을꽉꽉줘가며말했다. “절대, 그분하고는 결혼하시면 안 되는 거, 아시죠?” “내가 미쳤나?”

즉답이 돌아왔다. 에우레디안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인상을 사납게 일그러뜨렸다. 하 지만 나는 곧바로 안심할 수가 없었다. 원작도 원작이지만, 일단 솔레이아 엘라드가 에우레디안을 상 대로내건게무려제국과내가아닌가?


내 생각에, 에우레디안 벨고트는 그 여자의 생각대로 움직일 가능성이 아주 농후했다. 솔레이아는

에우레디안이 매력적인 선택지라고 느낄 만한 지점을 명확히 찔렀다. 자신에게 직접 목줄을 채우라

고. 손안에 두고 감시하라고. 

나는그의뺨을꾹누르며다시입을열었다.

“절대요. 그 여자가 뭘 내걸어도. 무슨 짓을 한대도요. 절대 결혼은 안 돼요. 약혼도 안 돼요. 아셨어

요?”

불그스름한 자줏빛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그는 무언가를 더 말하려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내가 더 빨랐다.

“위험한 여자니까 적으로 두느니 차라리 곁에 두고 감시해야겠다, 뭐 이딴 말도 안 되는 생각 하시

지말라는얘기예요.제가두눈뜨고살아있는동안엔그꼴두고못보니까.”

“.......”

“대답하셔야죠.” 에우레디안은잠시내심중을읽어내려는듯보였다.그러다이내,짧은탄성같은신음이터졌다. “아, 처음부터 그걸 걱정했나?”

“네?”

내가 기다리던 답은 아니었다. 나는 어리둥절해서 그를 보다 그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처음부

터....... 내가 당신을 처음 보던 순간부터.

“어쩐지, 뜬금없이 청혼할 때부터 이상하더라니.”

나는 이어진 에우레디안의 중얼거림에 조금 안심했다. 잘못 짚으셨어요, 폐하. 제 처음은 그때부터


 가 아니었답니다....... 좀 더 됐어요....... 나는 속마음을 숨기고 생글생글 웃으며 답을 독촉했다. “아무튼요. 대답, 해 주세요.”

“그래.”

에우레디안은 뜻밖에도 선선히 대답했다. “그여자가바라는대로해줄생각도없어.내게뭘바라는지는모르겠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알았다. 솔레이아가 원하는 건 지상에 존재하는 가장 강대한 신성이었다. 그 신성 을이용해유데타너머의아득한신들의세계에닿기위해서.그사실을곧이곧대로말할수는없었으


므로 나는 장난스럽게 지적하는 편을 택했다.

“당신이 너무 잘생겨서 그런 거겠죠, 뭐. 게다가 폐하께서 자꾸 친절하게 구니까 넘보는 거 아니에


요.저한테치셨던철벽의딱열배만치세요.”

“원래도 열 배가 넘었어.”

에우레디안은 그제야 표정을 풀고 한숨처럼 웃었다. 그는 내 머리카락을 계속해서 만지작거리다가,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얼핏 자연스럽게까지 보이는 행동이었다.

“어.......”

그리고 그 짧은 접촉으로, 내 모든 잡념은 전부 날아갔다. 귀뿐만 아니라 얼굴까지 온통 달아오르는

게느껴져서,나는그냥그를꼭끌어안아버렸다.

** *

에우레디안은 그날 이후로 꼭 사흘에 한 번씩은 신전을 찾았다. 딱히 명확한 이유는 없었는데도 계 속. 이 남자가 먼저 나를 찾아오는 일은 처음 있다시피 한 일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조금 어색했지 만 역시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나는 금방 그가 신전을 방문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사실 사흘에 한 번이라고 해도 내가 벨고트에 머무르는 남은 기간으로 계산해 보면 몇 번 남지도 않은 만남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자주 신전을 방문하면서도, 여전히 에우레디안은 내가 르보브니로 돌아가는 것에 대 한 화제를 꺼내지는 않았다. 하긴, 그 이야기를 꺼내서 뭐 하겠어? 어쨌든 황궁을 떠나는 순간부터 끊 어지리라 생각했던 만남이 간헐적으로나마 이어지는 건 반가운 일이었다. 게다가 왜인지는 모르겠지 만, 꾸준히 지속되기 시작한 만남은 에우레디안과의 만남이 전부는 아니었다.


 “오늘은 폐하께서 안 오셨나 봐요, 공주님.”

요즘 에우레디안만큼이나 신전을 자주 방문하는 이는 바로 클라리스 아이벤 백작 부인이었다. 나는

나와티테이블을사이에두고앉은그녀를마주보며어색하게웃었다.

“이틀 전에 오셨었으니까, 아마 내일쯤 다시 오시지 않을까요......?”

“어머나.”

나는 곧바로 순순히 대답한 걸 후회했다. 맑고 연한 갈색 눈동자가 과하게 반짝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가 상기된 얼굴로 중얼거렸다.

“지금 한창 삼국 협상 준비로 바쁘시다 들었는데, 역시.......”


역시, 뭐요......? 어쩐지 되묻기가 무섭다. 나는 하릴없이 다과만 깨작이며 슬슬 그녀의 시선을 피했 다.

아이벤 백작 부인과의 이 이상한 만남이 이어지기 시작한 것은 딱 일주일 전부터였다. 그러니까, 에 우레디안이 처음 신전에 들렀던 그다음 날부터.

아이벤 백작 부인은 아름답고 고상한 미모만큼이나 성격도 사근사근하고 다정했다. 게다가 일주일 에 서너 번은 꼭 신전에 들러 라울루스에게 기도를 드리고 가는 신실한 신도였다. 화술도 좋아 처음 마주한상대와도어려움없이대화를이끌어나가는능력이있었다.몇차례에걸친티타임이후나는 그녀와 한결 친해진 참이었다.

아이벤 부인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공주님께서도 사절단 환영식엔 당연히 참석하시겠죠?”

“아.”

이때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절단 환영식에 참석? 내가? “어, 꼭 그래야 할까요......?”

“어머나, 물론이죠. 공주님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 아니.”

빠르게 말을 이으려던 부인이 멈칫하며 말을 끊었다. 어쩐지 이어질 말을 알 것 같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차를 홀짝였다. 대체 왜,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나는 지금 벨고트 수도 사교계에서 꽤 뜨거운 감자가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황제와 지속적으로 만나는 여자는 내가 처음일 테니까. 나는 무심결에 그렇게 생각하다가 혼 자 화르륵 달아올랐다. 세상에. 더더욱 사교계에 나가기가 두려워졌다. 못해도 수십여 명의 이목이 쏠 린다니. 그 엄청난 시선들의 중심에 섰다간 입장하자마자 몸이 녹아 버릴지도 몰라.

그러나 이어지는 부인의 말에 나는 방금 전의 생각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르보브니에서도 사절이 온다 들었어요. 타국의 사절이 신전에 출입할 수는 없으니, 공주님께서 직

접 참석하셔야 하지 않을까요?” “헉.”

그런가! 나는 눈을 부릅떴다. 형부며 페르난디스며 세르게이를 보려면 어쨌거나 환영식에 참가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에우레디안은 그런 말은 하지 않았는데......? 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렇네요. 폐하께서는 그런 말씀 없으셨긴 하지만.......”

“그럼요. 그럼요.”

백작 부인의 얼굴이 환하게 피었다. 왜인지 몹시 기뻐하는 얼굴이었다.

“사교계라 해서 부담 가지실 것 없답니다. 귀족들 대부분 공주님께 호의적이니까요.”

“어, 그런가요?”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소식이었다. 부인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

“네. 게다가 폐하께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지켜보실 테니까, 엘라드 영애께서도 공주님께 위해 를 가하지는 못할 거랍니다.”

나는 마침 하고 있던 생각을 콕 집어내는 그녀를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요 며칠 클라리스 아이벤 과 마주한 채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클라리스가 때때로 꽤 예리한 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참이 었다. 그녀가 다정하게 눈을 찡끗했다.

“게다가 저와 제 남편도 당연히 참석하니까요. 오시면 제가 곁에 있어 드릴게요.”

“그, 그래 주시면 감사하지만.......”

나는 말끝을 흐렸다. 냉정하게 거절하기 어려운 맑은 갈색 눈이 기대감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무해 한 호의였다. 그러나 왜 내게 이런 호의를 베푸는지까지는 알 수가 없었다.

“저....... 아이벤 백작 부인.”


 결국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내가 운을 떼자마자 부인이 작게 손사래를 쳤다.

“클라리스라고 불러 주세요, 공주님.”

“크......을라리스.”

어색하게 이름을 부르자 그녀가 활짝 웃었다. 아니, 사실 클라리스는 나와 마주하고 있는 내내 사람 좋게웃고있었다.그다정하고상냥한낯에힘입어,나는요며칠죽궁금했던것을물었다.

“네, 말씀하세요.”

“저한테 왜 이렇게 잘해 주세요?”


클라리스가 눈을 크게 떴다. 나는 민망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 처음 뵈었을 때부터 너무 친절하게 대해 주셔서....... 아, 그렇다고 부담스럽거나 하다는 뜻


은 아니고요!”

클라리스 아이벤은 그야말로 고상하고 우아한 귀족 부인이었다. 말씨나 몸짓, 태도 등에 전부 자연 스러운 예법이 녹아 있었다. 게다가 백작 부인이면 결코 낮은 지위도 아니지 않은가? 지체 높은 벨고 트의귀족이굳이내게친절하게대해줄이유는사실없었다.

“저는, 그러니까. 따지자면 사실 인질이고....... 어차피 곧 있으면 르보브니로 돌아갈 텐데.”

“돌아가신다고요?”

클라리스의 목소리가 확 높아졌다. 어쩐지 놀라는 핀트가 약간 어긋난 것 같은데? 나는 의아하게 여 기면서도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번에 오는 르보브니 사절단과 함께 돌아갈 예정이에요.” “아.......”

클라리스가 탄식 같은 신음을 흘렸다. 몹시 안타까워하는 표정이었다. “좀 더 머무르실 줄 알았는데, 이렇게 일찍 돌아가시나요?”

“사정이 그렇게 되어서요.”

“폐하께서도 허하신 일인가요?”

“네. 아마도......?”

직접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 이미 거의 확실시된 일이었다. 내가 다시 고개를 끄덕이자 클라리스


 의 얼굴이 눈에 띄게 흐려졌다.

“그럼 얼마 남지 않았네요....... 어쩐지 슬픈 일이에요. 공주님과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했

는데.......”

그 얼굴이 가식이나 거짓을 말하는 얼굴이라곤 믿을 수 없었다.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간지러웠다.

“처음 먼발치서 뵈었을 때부터 공주님과 가까워지고 싶었답니다. 너무 사랑스럽기도 하시고, 벨고 트의 영애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갖고 계시기도 하고요.”

나는 사랑스럽다는 말에 반사적으로 얼굴을 붉혔다가 이어진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클라리스가 잔잔하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벨고트는, 뭐랄까. 예법과 품위를 조금 과도하게 중시하는 분위기라서요. 물론 제국의 귀족으로서 위엄을 갖추는 것은 응당 해야 하는 일이지만, 가끔은 조금 과하게 딱딱하고 빈틈이 없어서 갑갑하다


고 해야 하나.”

“아.......”

어쩐지 알 것도 같았다. 에우레디안이 종종 ‘갑갑하다’고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 원 인도 방금 클라리스가 말한 벨고트 자체의 분위기와 조금은 닿아 있는 걸까?

클라리스가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

“르보브니는 벨고트보다 훨씬 자유롭고 개방적인 분위기라 들었어요. 꼭 공주님 같은 나라가 아닐

까, 하고 짐작만 할 뿐이지만.”

“그건 그냥 왕국이 작아서 그런 게 아닐까요.”

나는 애매하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손톱만 한 왕국에서 예법을 챙기고 품위를 지켜 봤자 뭘 하겠 는가? 그러나 나는 금세 생각을 바꾸었다. 확실히, 원작을 떠올려 보면 르보브니는 자유분방한 나라이 기는 했다. 무려 공가의 하나뿐인 딸이자 왕국의 공주 태생인 브리즈니가 호위 기사인 알렉시오와 이 어졌으니말다했지.

“그래도 벨고트에 비하면 확실히 그런 것 같기도 해요.”

“그렇지요? 바로 그런 점이랍니다. 제가 공주님께 호감을 느끼는 부분은요.” 클라리스가 다정하게 웃었다.

“아마 폐하께서도 그런 부분에 반하신 게 아닐까요?”


 “반하.......”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나는 귀 끝까지 빨개졌다. 목덜미서부터 열기가 확 피어올랐다. 와, 다른 사람 에게서 이런 말을 들으니까 진짜 부끄럽구나......! 나는 작은 찻잔으로 얼굴을 가리기 위해 애쓰며 아 무렇게나 대답했다.

“그냥 신기하셨던 것 같아요. 제가 워낙 좀...... 실례되는 짓을 많이 했는데....... 그렇게 다정하신 걸 보면.......”

“어머나. 폐하께서 많이 다정하신가 보아요.”

나는 의미심장하게 웃는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속으로 장담했다. 이런 대화가 계속 이어지면 틀림


없이 몇 분 안에 내 얼굴은 다 없어지고 말 거야. 몹시 다행스럽게도, 클라리스는 다시 화제를 돌려주 었다. 묘하게 웃고 있던 얼굴이 살짝 흐려졌다.


“그리고 사실은, 엘라드 영애가 폐하께 구애한 시간이 길어서요.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로 폐하께서 그녀를 받아 주시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 엘라드 영애가 생각보다 더 적극적이셨나 보네요.”

“네.그분께당한영애만벌써몇명인지알수없을정도니까요.”

클라리스가 말을 흐렸다. 나는 내심 혀를 내둘렀다. 역시 그 여자는 사교계에서도 본인의 야망을 부 러 숨기거나 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무서운 사람.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만큼이나 에우레디안 과 결혼하고 싶은 건가? 그 이유야 그의 신성이 탐나서라고 쳐도 생각해 보니 좀, 석연찮은 점이 있기 는 했다. 나는 불쑥 떠오른 생각에 미간을 찌푸렸다.

인간의몸으로유데타너머에닿아서얻는게뭔데......?어차피인지할수도없는힘을손에쥐어서 뭐하려고?유데타너머로가면,가서뭘하려고?인간이그신들의세계에서뭘할수가있어서......?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차라리 에우레디안을 사로잡아 흑마법사들을 억압하는 벨고 트의체제를싹갈아치운다거나,더는흑마법이배척받지않게수를쓴다거나하는쪽이더현실감있 는 거 아닌가? 왜 그렇게, 아들까지 현혹해 가면서 유데타에 닿으려고 기를 썼을까......?

어쩐지 묘한 찜찜함이 잔재처럼 남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알 수가 없는 여자다.

“뭐 어디 약점이라도 잡혔나......?”

“네?”

클라리스가 차를 들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고개를 흔들며 웃어 보였다. 응, 모르겠다. 내


 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건 그녀가 정말 무서운 언니라는 것뿐이었다. 다음에 잘못 걸리면 그때는 진짜 나를 죽여 버리겠지. 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르보브니 사람들은 그냥 돌아가는 날에 봐도 되니 까, 역시 환영식은 참석하지 않는 편이 낫지 않으려나......?

“어쨌든, 그러니 공주님께서 환영식에 와 주시면 감사할 거예요.”

그러나 클라리스의 생각은 나와는 전혀 다른 모양이었다.

“사실 이렇게 생각하는 게 저뿐이 아니라서요. 안 그래도 폐하께서 사교계에는 잘 걸음 하시지 않는 데, 이번에도 그런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답니다.”

“그건 저도 좀.......”


솔레이아가 에우레디안에게 달라붙는 상상을 하니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물론 에우레디안에게 단단히 주의를 시켰으니 걱정하는 최악의 상황은 없겠지만, 이건 내 기분의 문제다.


그렇잖아? 좋아하는 사람에게 싫어하는 사람이 달라붙어 있는 걸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잖아!

“확실히 기분 좋은 상상은 아니...... 헙.”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떠오르는 감정대로 내뱉었다가 입을 헙 다물었다. 물론 이미 늦었다. 클라리스 가 또다시 묘하게 웃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또다시 이상한 말을 하기 전에 얼른 먼저 입 을 열었다.

“새, 생각해 볼게요. 제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서요. 폐하께도 여쭤 보고요.”

사실 환영식에 참석하는 건 정말로 내 의사에 따라서 결정되는 일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는 여전 히 마력에 취약한 마력 부적응자이기 때문에....... 삼국의 요인들이 우글거리는 곳에 나섰다가 쓰러 지기라도하면그때야말로삼국협약이고뭐고다파탄이나는날이다.이런개복치뺨치는몸뚱이같 으니라고.

나는밝게웃는얼굴을향해애써마주웃어주었다.환영식,갈수있으려나.......


 Ch 6. 평온의 반대말은 폭풍 전야

솔레이아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래서, 내가 그대의 목줄을 쥐면.”

그날, 그녀가 제 목의 목줄을 그에게 주겠다 제안했을 때, 에우레디안은 비소와 함께 그렇게 내뱉었 다.


“내 발아래 엎드린 충실한 개가 되어 주겠다, 그 뜻인가?” 

길고 날카로운 붉은 손톱이 창문 언저리를 일정하게 두드렸다. 창밖에는 비가 오고 있었다. 대체로 날이 맑은 편인 벨고트의 늦봄에 비가 오는 날은 흔치 않았다. 공기가 습했다. 무겁고 음울했다. 솔레 이아는 비가 쏟아지는 유겔 광장을 내려다보았다.

비가 오는 날이면 늘 머릿속 한켠을 차지하고 들어앉는 기억이 있다. 그녀의 진짜 부모가 성기사들 에게 잡혀 화형당하던 날, 꼭 이런 비가 왔었다. 음지에서 가장 활발히 어둠을 연구하던 솔레이아의 옛 가문이 무너지던 날에.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에서도 꺼지지 않고 불타오르던 정화의 불꽃을 솔레이아는 똑똑히 기억했다. 언뜻 푸르스름한 빛을 띠는 은빛 불길이 그녀의 부모와 동료들을 집어삼켰었다.

“왜?”

추적이는 빗소리 사이로, 황제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왜그런짓을하지?나에게뭘바라서?”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한 어조였다. 고귀한 조각 같은 낯이 선명히 떠올랐다.

“왜라.......”

당연히 그 몸에 깃든 신성을 손에 넣고 싶으니까. 제 손에 넣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그와 저 사이에 서 태어나는 아이를 통해서라도 손에 넣어야 하니까.

톡, 톡.

그때 솔레이아는 황제의 물음에 소리 내어 답하지는 않았다. 답할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제가 내민


 제안은 금방 뿌리치기엔 매혹적이었을 테니.

솔레이아 엘라드는 에우레디안 벨고트라는 남자를 잘 알았다. 지켜본 기간의 햇수가 배는 차이가 나니기실당연한일이었다.솔레이아는벨고트마탑에처음발을들이던열살무렵에우레디안을처 음 보았다. 막 그녀의 부모가 신성 기사들에 의해 화형당한 직후, 체르나타 로셀에 의해 간신히 빼돌 려져 엘라드 후작가의 적녀로 둔갑하던 해에. 그리고 마탑에 자리를 잡게 된 그해의 겨울에.

그때 그녀는 아직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흑마법을 제대로 다루지도 못했던 어린아이였다. 그리고 그 때의 에우레디안 벨고트 역시, 그녀와 동년배인 어린 황자에 불과했다.

그들이 스쳤던 시간은 아주 잠시였다. 선황제를 따라 마탑을 시찰하러 온 어린 황자는 나이에 맞지 

않게 고요하고, 조금은 귀찮은 듯한 낯을 하고 있었다. 그 은발의 휘황한 빛을, 그녀의 동족들에게는 저주와도 같은 불그스름한 자줏빛 눈동자를 잊을 수가 없다.


어린 솔레이아는 선황제와 황자의 그 여유로운 낯을 보고 속으로 칼을 갈았다. 내 부모와, 스승과, 스승밑의수많은제자를산채로태워죽인성기사들을부리는자.그녀의힘과는정반대되는상극의 힘을가진자.자신과같은이들을지상에서도록허락하지않는족속들.자신의천적.

그래서 그날 솔레이아는 열 살의 치기 어린 마음과 들끓는 복수심에 휩싸여 결심했다.

아, 다음 대의 황제. 저 끔찍하게 아름다운 소년. 지상에서 가장 강대한 신성을 지닌 자. 언젠가는 내

발밑에 무릎 꿇리리라.

그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장장 10년 하고도 4년에 이르도록 그 남자를 봐 왔다. 속속들이 파악하

지 못하는 것이 외려 이상했다.

에우레디안 벨고트는 그녀가 내민 달콤한 유혹을 거절하지는 못할 것이다. 제 조건을 전부 수락하 지는 않더라도, 그 나름의 합의점을 찾아내겠지. 제 울타리 안으로 들어온 것들에 조금이라도 흠집이 나는 것에 치를 떠는 남자니까.

에우레디안 벨고트는 신뢰라고는 단 한 점도 없는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내게 복종하는 개가 되겠다고. 그대가?”

“다르지 않지요.”

솔레이아는 진심이었다. 그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겠다. 하다못해 개처럼 짖으래도 짖어 주마. 그 강대한 신성을 두 손 가득 쥘 수 있다면. 그래서 저 유데타 너머 아득한 신들의 세계에 닿을 수만 있다 면그녀는못할것이없었다.

사실 솔레이아의 목적은 하나였다. 유데타. 그녀 같은 족속들이 몸담은 세계와 대척점에 있는 세계.


 레모르디 아래의 세계와 상극인 유데타 너머의 세계. 솔레이아의 목적은 그 유데타 너머 세계에 닿는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그녀의 역할이자 가치이기도 했다. 일단 유데타 너머에 닿고 나면 그녀는 계약으로 지 워진 그녀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그 뒤에 남은 건 그녀의 계약자가 이행해야 할 의무다. 이 땅에서 은빛과붉은자줏빛색채를전부몰아내는것.그녀의주인이지켜줄계약조건.

그러면최후의최후에결국발치에무릎꿇는건그빛나는남자가될테다.그때를위해서라면야지 금잠시스스로목줄을매어주는것정도는할수있었다.

그런데 요즈음 들어, ‘주인’이 유달리 그녀에게 보챘다.


까드득. 솔레이아는 고막을 찢는 불쾌한 소음에 혀를 찼다. “왜 그러세요, 또?”


[.......]

“정말 희한하게 과민 반응 하시네요. 요즘따라 더.”

들려오는 답은 없었다. 대신 으드득거리며 둔탁한 무언가가 부딪히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뭐 가 부딪히고 있는지는 사실 뻔했다. 서로 간신히 대롱대롱 매달린 해골 뼈들이 와르르 무너졌다가 다 시 덜그럭거리며 이어 붙어 가는 소리였다.

[......급해.]

성별을 짐작할 수 없는 탁한 울림이 몸 전체를 울렸다. 솔레이아는 아름다운 낯을 살짝 일그러뜨렸

다.

“무엇이요, 우리의 계획이?”

[재수 없는 기분....... 들키면, 일이 복잡해져.]

까드드득. 간신히 해골 모양을 갖추었던 뼈들이 도로 아래로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유데타와 레모르디의 금기, 들키기 전에.......]

“당신께서 처음 레모르디를 넘으신 게 벌써 5년이나 되었어요, 하이데스. 새삼스럽게 금기 운운하 실때는아닌것같은데요.”

그녀가 지상에선 제 형체조차 구성하지 못하고 툭툭 부서져 내리기 일쑤인 지하의 주인과 계약한 건 이미 5년 전의 일이었다. 지상과 지하의 경계인 레모르디를 넘을 수 없는 존재가 금기를 어기고 지


 상을 더듬기 시작한 것 역시 5년 전부터였다. 그 5년 동안은 잠잠했으면서. 왜 이제 와서 무언가에 쫓 기기라도하는것처럼구는지도통이해할수없다.그러나시체와망령들의주인은그녀의말을듣고 있지도 않은 것 같았다.

[이번에야말로 죽여 버려.]

으득. 솔레이아의 발밑으로 조각조각 난 손가락뼈가 굴러왔다. 그것들은 일시에 부르르 떠는가 싶

더니천천히모여다시하나의온전한손모양해골을이루었다.

[거슬리는 것은 죽여 버리고.......]


“.......”

[필요한 것은 취해.] 

공주는 죽여 없애고 황제를 취해라. 그 말과 다르지 않았다. 그리 말하는 음성이 험악해서, 솔레이아 는표정을굳혔다.에우레디안벨고트에게그거부하지못할제안을한지채열흘도지나지않았다.

지하의 주인이 이죽거렸다.

[고지가 눈앞인데. 너는 항상 기다리라고만 하지, 솔레이아. 내가 언제까지 네 장단에 맞춰 줘야 하

나?]

“하지만 이제는 정말로 그 남자가 제 손을 잡을 날이 머지않았-.” [조잡한 변명은 듣지 않아. 빠른 시일 내에.......]

“.......”

[거슬리는 것은 죽이고, 필요한 것은 취해. 그렇지 않으면.]

허공으로 떠오른 손가락뼈들이 까딱이며 솔레이아의 턱을 치켜들었다. 턱에 닿는 차갑고 날카로운 뼈의 감촉에 아무리 솔레이아라도 흠칫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비웃듯, 마지막 선고와 같은 말이 떨어 졌다.

[내가 직접 나설 테니까.]

“하이데스.”

[너도 네 몸은 보전하고 싶겠지, 솔레이아?]

솔레이아는 붉은 입술을 깨물었다. 애초에 주인이 그녀에게 명령한다면 그녀로서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공들여 쌓아 놓은 계획이 비틀리기 시작했다. 솔레이아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파괴적이고


 지저분한 방향으로.

그러나 사실 에우레디안 벨고트가 이미 솔레이아 엘라드의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놓고 본다면, 어쩔 수 없이 닥쳐와야 하는 미래이기도 했다. 하여 하루하루가 평온을 가장한 폭풍 전야와 같았다.

** *


클라리스가내게사절단환영식에대해귀띔해주고간뒤로며칠이또흘렀다.나는그동안신전구 석구석을 쓸고 닦으며 계속해서 고민을 거듭했다.


환영식. 참가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안 그래도 삼국 간의 외교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데 르보 브니의 공주인 내가 마음대로 불참해도 되는 건가?

그러나 애초에 그 고민은 굳이 할 필요가 없는 고민이었다. 클라리스와의 짧은 티타임 이후 채 사흘 도지나지않아황궁으로불려간것이다.그새무슨일이라도생긴건가!

나는불안감을가득안고꼬박보름만에다시황궁에발을디뎠다.물론디에리고와함께였다. “갑자기 황궁으로 부르시다니, 무슨 생각이신 거지......?”

“그러게 말입니다.”

디에리고가 의아한 듯 말을 흐렸다. 그 역시 전해 들은 바가 없는 모양이었다. 나는 사흘에 한 번씩 꼬박꼬박 신전에 들르던 에우레디안을 떠올리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본인이 신전으로 오면 왔지 다시는 황궁으로 부르지 않을 줄 알았는데. 역시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솔레이아랑 관련된 일인 가......! 나는 뭉게뭉게 증식하는 불안감을 안고 황제궁에 들어섰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 걱정은 굉장히 쓸데없는 것이었다. “예레니카아아아!”

“어억.”

나는 알현실로 들어서자마자 나를 덮친 커다란 무언가에 뒤로 휘청거렸다.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 리가 묘하게 귀에 익었다. 설마, 이 목소리는....... 나는 나를 깔아뭉개듯 껴안은 이를 향해 얼떨떨하 게 내뱉었다.


 “세, 세르게이?”

“어헝, 예레니카. 멀쩡하게 살아 있었구나!”

“진짜 세르게이야?”

나는멍청하게눈을깜빡이다그의어깨를꽉잡고떼어냈다.금방이라도엉엉울음을터뜨릴것같 은얼굴이눈앞에드러났다.나는그얼굴을확인하고나서야입을딱벌렸다.

“헐. 진짜네......?” 검은머리에레바논공작가의녹색눈을가진소년.웬만한여자보다더예쁘게생긴이미소년은르


보브니에 두고 온 내 소꿉친구, 세르게이 레바논이 틀림없었다. 나는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너...... 네가 왜 여기 있어?”

“그게석달만에본친구한테할소리냐!”

세르게이가 우렁차게 되받아치더니 다시 나를 덮쳤다. 끌어안은 것도 아니고, 정말 목에 지익 매달 렸다.나보다머리하나는더큰사내놈이대롱대롱매달리니나로서는별수없이다시휘청거려야했 다. 뒤에서 디에리고가 붙잡아 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꽝 주저앉을 뻔했다.

어쩐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더 키가 큰 것 같기도 하고, 덩치가 커진 것 같기도 하고....... 아, 하 긴이나이대의사내애들은좀빨리크던가?나는이리휘청저리휘청대며간신히세르게이를지탱하 고 섰다.

“야, 야. 좀 진정.......”

“어헝.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틀림없이 사지가 어디 하나는 똑 부러져 있을 줄 알았는데!”

“그건 알겠는데. 일단 이것 좀 놓고.......”

세르게이는 딱히 내 말을 듣는 기색도 아니었다. 결국 나는 한숨을 내쉬며 나를 꼭 끌어안고 눈물을 줄줄 쏟아 내는 세르게이를 토닥여 주었다.

“나 멀쩡해. 르보브니에 있을 때만큼이나 호화롭게 지냈거든. 애초에 편지도 썼잖아.” “팔다리는 다 붙어 있어?”

“당연하지.......”


 아니이렇게두다리로멀쩡히서있는데.사지걱정이웬말이야?

“어디 봐!”

“괜찮대도.”

세르게이는 나를 잠시 떼 놓고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뜯어보며 울상을 지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말랐어!”

“그......럴 일이 좀 있었어.” 쓸데없이눈치빠른녀석.나는허허롭게웃으며세르게이의팔을토닥여주다가,불과몇발자국앞


에서 꼭 세르게이처럼 울먹이는 표정을 한 두 남자를 발견했다. 한 명은 내 호위 기사인 페르난디스. 그리고그옆은테제비아언니의남편,즉내형부,레바논공작.


“어.......”

나는 그제야 상황을 제대로 파악했다. 이 멤버, 그러니까....... “르, 르보브니 사절단이 벌써 왔.......”

“예레니카 공주님!”

“공주니이이임!”

내 말은 채 끝맺어지지 못했다. 세르게이보다 배는 더 쩌렁쩌렁한 목소리들이 거대한 알현실에 메 아리쳤다. 덩치가 산만 한 두 남자가 푸드덕 소리가 나도록 빠르게 내 앞으로 다가와 내 온몸을 살피 기 시작했다.

“괜찮으십니까?! 어디 상하신 곳은 없으시고요?”

“페르디, 저는 괜찮아요.”

“어디 한 군데라도 상하신 곳이 있으시면 저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아내가 엄포를 놓았습니다. 정말 로 무사하신 겁니까!”

“혀, 형부.......”

무뚝뚝한 형부까지 이렇게 격하게 반응하다니, 르보브니에 있을 어머니며 아버지, 테제비아 언니가 그간 어떻게 지냈을지 눈에 선했다. 아, 어쩐지 너무 미안해지는데....... 나는 그동안 르보브니 쪽에 너무 무감했던 나 자신을 반성하며 밝게 웃어 보였다.


 “오랜만이에요, 페르디. 형부도요!”

“저는 공주님의 호위 자격이 없습니다. 르보브니로 돌아가고 나면 당장 호위 기사직을 내놓겠습니

다.”

“아니, 그건 페르디 탓이라기보다는.......”

나는 애매하게 말을 흐리며 내게 거의 달라붙다시피 한 세르게이를 힐끔거렸다. 사실 내가 벨고트 로 납치된 건 이놈이 제때 나타나질 않아서인데....... 그러나 그렇게 말했다간 당장 형부와 페르난디 스가세르게이를창문밖으로내던져버릴것같았다.나는세남자를동시에달래기위해애를썼다.

“저는 정말 멀쩡해요. 폐하께서도 인질이 아니라 귀빈으로 대접해 주셨고, 불편한 점도 하나도 없었 

고....... 벨고트 구경도 많이 했고요, 음, 맛있는 것도 많이 먹었고. 신전에서도 지내 봤고....... 좋은 사 람들도 많이 만났고.......”


“말랐어. 확실히 말랐다고. 새끼 돼지처럼 통통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걱정할 만한 부분이라곤 전혀 없었...... 닥쳐, 세르게이.”

나는 말을 잇다 말고 세르게이에게 상냥하게 욕을 해 주었다.

“새끼 돼지라니, 이 새끼가?”

“그렇잖아. 석 달 전까지만 해도 얼마나 포동포동했는데.......”

이건 욕인가 칭찬인가. 어느 쪽이든 기분이 팍 상하는 건 매한가지였다. 포동포동하다고 말하는 표

정이그렇게진지할수가없다는게더마음에안들어.나는세르게이를팽밀쳐냈다. “저리떨어져.멀리떨어져.오랜만에봐도여전히도움안되는것.”

“말본새 험한 건 그대로인 것 같은데.......”

세르게이가 순순히 떨어져 나가며 중얼거렸다. 욕이다. 욕이야. 나는 세르게이를 찌릿 노려보다가, 더 뾰족하게 이쪽을 응시하는 시선을 느꼈다. 의아하게 고개를 돌리자마자 멀찍이서 비딱하게 이쪽 을 보는 잘생긴 얼굴과 마주쳤다.

“아, 맞다.”

나도 모르게 숨을 헙 들이쉬었다. 참, 여기 알현실이었지. 벨고트 황궁의 알현실에서 누구를 알현하

겠는가?

“이제 만족하나? 공작.”


 에우레디안이 비뚜름하게 내뱉었다. 그는 황좌에 몹시 방만하고 얼핏 오만해 보이기까지 하는 자세 로 기대앉아 있었다. 손끝에 머리를 기댄 채로. 얼핏 보면 더없이 제국의 주인다운 위용이었다. 그러 나 나는 그 표정이 굉장히 불편하게 틀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에우레디안이 여전히 비딱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감히 황제의 알현실에 와서 공주를 내놓으라 협박을 하다니.”

“헐.”

거기서 입을 딱 벌린 건 나밖에 없었다. 어쩐지, 웬일로 에우레디안이 나를 황궁으로 부르나 했더니. 이 극성맞은 르보브니 사람들이 무려 황제를 면전에 두고 억지를 부렸을 줄은......!


“저번에도 공주의 친필 서신을 보내지 않으면 글루카만을 폭파해 버리겠다 위협을 하더니.......” 문제는 이게 처음이 아니라는 것이지. 나는 머리를 짚었다. 맞다, 그랬지. 저번에도 아버지께서 내


편지를 내놓으라고 성화를 부린 적이 있으시지.......

나는 일단 입을 열었다.

“저, 죄송해요. 제 생각보다 르보브니에서 걱정을 너무 많이 한 것 같.......”

평소에는 전혀 그러지 않는 사람이 빈정거리니 느낌이 이상했다. 표정이며 어조며 뭔가, 뭔가 엄청 나게 맘에 안 드는 것 같은데....... 게다가 에우레디안은 내 쪽은 보지도 않았다. 붉은 자안이 형부와 페르난디스, 그리고 세르게이를 슥 훑었다. 어쩐지 세르게이에게 좀 더 오래 머무는 것 같기도 했다.

에우레디안이 한쪽 입꼬리를 슥 올렸다.

“무례가 하늘을 찌르는데. 벨고트의 주인이 만만해 보이던가?”

나를 둘러싸듯이 선 르보브니 남자들의 얼굴이 파삭 굳는 게 보였다. 나는 당황스럽게 눈을 굴렸다. 왜, 왜 심술이야......!

“......아하.”

그러나 나는 금세 그 이유를 깨달았다. 세르게이가 나를 제 뒤로 쏙 밀어 넣자마자 에우레디안의 표 정이 방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차갑게 내려앉는 걸 본 것이다. 결국 입술을 비집고 웃음이 튀어 나왔다. 세르게이가 갑자기 실실 웃는 나를 미친년 보듯이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역시,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해.......” “은근히 기분 좋은 거구나, 이거.”


 “형님, 환영식이고 뭐고 당장 돌아가죠. 애 상태가 영 정상이 아닌 것 같은데.” 내가 몰랑몰랑한 기분에 젖어 있을 새도 없이 세르게이가 진지하게 깐죽거렸다. “조용히 해, 친구야.”

나는오랜만에재회한소꿉친구에대한반가움을곱게접고내앞을막은세르게이를옆으로치웠 다. 세르게이가 두어 걸음 옆으로 밀려나니 구겨진 얼굴을 한 에우레디안이 온전히 시야를 차지했다. 나는일단만면에그가가장좋아하는밝은웃음을띠었다.

“오늘은 왜 안 오시고 부르시나 했더니.”


에우레디안이 살짝 눈썹을 찡그리는 게 보였다. 나는 방실방실 웃으며 다시 달라붙으려는 세르게이 를옆으로퍽밀었다.


“소꿉친구예요, 소꿉친구. 이쪽은 제 호위 기사고, 이쪽은 형부.”

“.......”

“저를 좀 과하게 걱정했나 봐요. 이래 봬도 르보브니에서는 많이 사랑받는 공주라서.”

“걱정이라.”

“네. 죄송해요, 정말로.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무려 제국의 주인을 알현하는 자리에서 저지른 무례였다. 사과할 것은 응당 사과하는 게 맞았다. 나 는 멋쩍게 웃으며 ‘내가 다 미안해요!’라는 눈빛을 마구 쏴 주었다.

“......그대가 내게 사과할 필요는 없어.”

에우레디안은 마지못해 대답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은 많지만 속으로 꾹꾹 누르는 기색이 잘

생긴 얼굴에 가득했다. 여전히 시선은 나를 와락 껴안은 세르게이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의 기분이 점점 저조해지는 것과는 정반대로 내 기분은 점점 둥실둥실 날아올랐다. 그러니까 이 거, 그거 맞지? 질투! 이번에는 발뺌 못 하겠지. 내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그를 보니 에우레디안이 짧게 헛웃음을지었다.나는그가다른말을하기전에얼른말을이었다.

“저,그럼이왕황궁까지온김에......좀더이야기나누고가도될까요?” “이야기?”

“회포를 풀어야죠. 장장 석 달 만에 보는 얼굴들인데.”


 그 말은 어느 정도 진심이었다. 형부를 붙잡고는 테제비아 언니와 브리즈니에 대해 물어봐야 했고, 페르난디스를 붙잡고는 그의 부인과 태중의 알렉시오에 대해 물어봐야 했다. 뭐, 세르게이랑 오랜만 에이렇게투닥이는것도나쁘지않을거고.

그리고 에우레디안은 아마, 마음고생 좀 하겠지? 나는 씩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어디, 당신도 나한 테한번목을매봐라!

에우레디안은 잠시 나를 빤히 내려다보는가 싶더니 이내 슥 웃었다. 순식간에 원래의 나른하고 여 유로운 낯으로 돌아온 얼굴이었다.

‘음......?’


그 급격한 변화에 의아해하는 사이, 에우레디안이 천천히 대답했다.

“그래. 우선 그대들은 시종의 안내를 받아 가도록 해. 먼 길 오느라 피곤했을 테니, 여독을 푸는 게


먼저겠지.”

“저희는 괜찮-.”

“아니, 그대들은 안 괜찮아.”

칼같이 단호한 답이 뚝 떨어졌다. 여전히 손에 머리를 비딱하게 괸 채로 에우레디안이 나른하게 웃 었다. 저, 저. 사람을 홀리는 얼굴. 어쩔 때 보면 솔레이아보다 저 남자가 더했다. 에우레디안이 손을 까딱하자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다가와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예, 그럼.”

레바논 공작이 영 시원찮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곧바로 그들을 따라가려 몸을 돌렸다. 돌 리려고 했다.

“그대는 여기 있어, 공주.”

뒤편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바짝 굳어 버렸다. 가슴이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사실 이렇게 보는

것도 꼬박 나흘 만이었다. 마음이 홀라당 기울었다.

“.......”

아니야, 아니지. 여기서 홀랑 넘어가면 안 된다. 나는 고개를 흔들고 다시 에우레디안을 보았다. “아하하. 저어, 오랜만에 보는 가족들이랑 이야기하고 싶은데.......”


 잘생긴 얼굴에 살짝 금이 가는 게 보였다. 굉장히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 그리고 얼핏 내가 보고 싶 었던 표정이 보인 것도 같았다. 어딘지 살짝 조급해 보이는 얼굴. 나는 새침하게 웃으며 그가 입을 열 기전에먼저선수를쳤다.

“하지만 잠깐이라면 뭐, 폐하와도 독대할 시간이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예레니카!”

세르게이가 당장 얼굴을 구기며 나를 붙잡았다. 그리고 그 순간에 나는 다시 보았다. 불그스름한 자 안이내손을콱붙잡은세르게이의손으로휙내려가는걸.

나는 일부러 세르게이를 퍽 밀쳐 내지 않고 에우레디안의 표정을 슬쩍 살펴보았다. 어쩐지 안 믿어 

진다. 저 사람이 질투라니. 질투라니!

에우레디안은 인상을 살짝 찌푸리는가 싶더니,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어진 말은 내


예상을 조금 비켜난 말이었다. “이리 와 줘.”

“어.......” “와주면안될까?”

“.......”

“응?”

어떻게봐도부탁하는어조였다.나는입을딱벌렸다.아니,저렇게말하면안갈수가없잖아......!

나도모르는사이말이먼저튀어나갔다.

“머, 먼저 가요, 형부. 페르디.”

“공주님.”

“세르게이, 너도. 이......것 좀 놓고.”

나는 에우레디안의 눈치를 살짝 보며 세르게이를 쭉 밀어냈다. 세르게이는 무척 불만스러운 눈이었 다. 눈을 세모꼴로 뜨고서, 세르게이가 입을 열었다.

“야, 너. 벨고트 황제랑 무슨 사이.......” “형부.얘좀끌고가요,얼른.”


 답지 않게 왜 나한테 이렇게 달라붙는담, 얘는! 나는 제 발 저린 심정으로 레바논 공작에게 눈짓했 다. 공작은 약간 당황한 눈으로 나와 에우레디안이 있는 쪽을 번갈아 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공주님. 오셔서 그간 있었던 일들, 소상히 말씀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십시 오.”

“그럼요. 물어볼 게 많은 건 이쪽이에요.”

나는그셋을얼른알현실밖으로쭉쭉밀어내며웃어보였다.

“오느라 고생했어요. 그럼 이따가 봅시다!”


그리고 곧장 알현실 문을 닫았다. 까마득히 높고 커다란 문은 한 번에 닫히지는 않았다. 나는 잠시 낑낑대고나서야사람한명이드나들만큼의틈을남겨두고문을얼추닫는데성공했다.


이내 침묵이 찾아들었다. 알현실 안에는 딱 두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나와, 에우레디안. 나는 얼른 생글생글 미소를 걸고 뒤를 돌았다. 나와 그의 거리는 알현실의 끝과 끝만큼의 거리였다. 에우레디안 은여전히비딱한얼굴이었다.나는살짝열린알현실의문짝에기댄채로그를향해눈을찡끗했다.

“거기로 갈까요, 폐하?”

에우레디안은 잠시 나를 바라보는가 싶더니 이내 부드럽게 웃었다. 잘생긴 얼굴이 달콤할 만큼 느

슨하게 풀어졌다. 그러나 나는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껴야 했다. 너무 갑작스러운 표정 변화였다.

“아니, 내가 가지.”

그 말이 떨어진 것과 그가 황좌에서 몸을 일으킨 것은 거의 동시였다. 나는 문에 기댄 채 꼼짝 못 하 고 에우레디안이 성큼성큼 내게 가까워져 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 어, 어어.......’

훅.익숙한체향이확끼쳐들었다.멀리서봤을때부드럽고따스했던웃음은가까이서보니스산하 기 그지없었다. 큰 보폭으로 금세 내 앞까지 다가온 그가 손을 뻗었다. 나는 흠칫 놀라 몸을 굳혔다가, 그의손이내얼굴옆을스쳐지나가는것을보고눈을크게떴다.

에우레디안이 조금 열린 문에 손을 대고, 가볍게 밀었다. 탁. 내가 힘들게 밀었던 게 무색하게도 문 은 매끄럽게 닫혔다. 완전히. 문밖에서 간간이 들려오던 소음이 일시에 탁 멎었다. 이제 나와 그 사이 의거리는딱한뼘밖에는남아있지않았다.나는그가까운거리를인식하자마자숨을멈추었다.

“친구라.......”

에우레디안이 나른하게 중얼거리며 내게로 고개를 숙였다. 나는 시선을 빙빙 돌리다가 슬그머니 그


 의 눈을 바라보았다.

“레바논 공자가 그때 말했던 소꿉친구인가 보지?”

“음, 네.”

나는일단뭐라도대답하는게좋을것같아입을열었다.

“소꿉친구고....... 우리 언니의 남편, 그러니까 레바논 공작의 동생이에요. 그러니까 사돈인 거죠. 가족!”

음,저망나니같은세르게이를가족이라고칭하는게좀어색하긴했다.


“그렇다기엔 지나치게 친밀해 보이던데?” “그런가아.”


나는 말끝을 길게 늘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꼭 웃는 조각상같이, 웃고는 있지만 딱딱하게 굳은 얼 굴이었다.이상황에아까처럼또다시몽실몽실기분좋은만족감이차오른다면역시내가좀나쁜걸 까?나는그의눈치를보던걸그만두고방긋웃음을걸었다.

“역시 이건 질투 맞죠?”

“그렇다면?”

대답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에우레디안은 바로 응수해 왔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더 활짝 웃었다.

“와아, 이젠 인정까지 하시고......!”

그간 쌓아 왔던 철벽은 전부 철거 중인 모양이었다. 나른하고 충만한 쾌감이 금세 턱 끝까지 찰랑찰

랑 차올랐다. 나는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뺨에 가져갔다.

“당신 같은 철옹성을 여기까지 끌어내리다니. 저도 참 대단해요. 그쵸?”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결국 차갑게 굳어 있던 입매가 완전히 풀어졌다. 에우레디안이 허탈한 웃음을 뱉어 냈다. “차마 부정도 못 하겠군.”

“어머.”

“내가 이런 말까지 하게 하고.”


 완전한 긍정이었다. 그러나 에우레디안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아마도 종전까지의 화제를 그냥 넘길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가 집요하게 물었다.

“그래서, 가족보다는 친구에 가깝다고 그대 입으로 말했던 그 공자와는 계속 그렇게 지낼 건가, 공 주?”

“왜 또 호칭이 공주로 돌아왔죠?”

“......예레니카.”

내 뾰족한 지적에 금세 반응이 돌아왔다. 에우레디안은 아직도 나를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영 어색 한지 은근슬쩍 호칭을 혼용하고는 했다. 이름을 부르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저를 많이 걱정했나 봐요, 그 애가. 원래는 원수지간에 더 가까운데, 아무래도 소식이 뚝 끊긴 지가 오래니까. 그리고 여기는 르보브니 입장에서는 대립국이잖아요.”


“.......”

“그렇게 흉흉한 기세로 왕궁을 기습해서 공주를 납치해 갔는데. 남은 사람들은 걱정할 수밖에 없죠,

뭐.”

르보브니 쪽 사정은 전부 까먹고 있었던 주제에 나는 뻔뻔하게도 그렇게 말했다. 에우레디안이 금

세 다시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지나치게 가까워.” “에이, 뭐. 친구끼리.”

이제완전히주도권을쥔건내쪽인것같았다.늘튕기던건이남자였는데,내가당기는입장이되 니 기분이 색달랐다. 고소하기도 하고, 건드리는 대로 반응하는 걸 보니 쾌감이 느껴지기도 하고. 날 그렇게 아프게 밀어 댔던 벌 좀 받아 보라는 심보인 걸까? 못된 심보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그를 콕 콕쑤시는말을하는걸멈출수가없었다.

“오랜만에만난친구끼리가벼운포옹정도는할수있잖아요. 그렇게속좁게반응하시는거아 니-.”

그러나 나는 말을 끝까지 맺지는 못했다. 부드럽고 말랑한 무언가가 이마에 가볍게 닿았다 떨어진 탓이었다. 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아니, 아닌데.......” “이런 것도?”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묻는 목소리에 귓가가 간지러웠다.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내 가 굳어버린 걸 눈치챘는지, 에우레디안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가 고개를 살짝 더 내렸다. 이번 에는 코끝에 입술이 가볍게 맞닿았다.

“이런 건, 당연히 못 하겠지?”

“마,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나는 속으로 비명을 삼켜 냈다. 에우레디안이 직접 입을 맞춰 오는 건 처음이었다. 늘 선 을 넘지는 않으려는 것처럼 머리카락 끝이나 손가락 끝에만 이따금 입을 맞추곤 했으니까. 심장이 점 점 더 빠르게 뛰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그대로 툭 튀어나올 수도 있을 것같이, 빠르고 조급하게.


“당연히 못 하겠지.”

이 혼자서만 여유로운 남자는 혼자서 답을 내린 모양이었다. 입매가 만족스러운 호선을 그리는 게


바로 지척에서 보였다. 조금이라도 더 움직이거나 고개를 들었다간 당장 입술이라도 맞닿을 만한 거 리였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결국 고개를 푹 숙여 버렸다.

와, 진짜, 너무 부끄럽.......

“......!”

그러나 숙인 고개를 집요하게 따라오는 입술이 있었다. 기어코 입을 맞추고 나서야 가볍게 떨어져 나가는 감촉. 짧지만 선명하게 느껴지는 과한 부드러움이었다. 꼭 닿자마자 녹아 버릴 것처럼 달콤하 고, 그리고 비현실적이다.

이제까지의모든접촉에서느꼈던것과는전혀다른감각이몸속을가득채웠다.눈한번깜짝할사 이에 맑고 청량한 신성이 몸 안을 휘돌았다. 뱅뱅 돌며 실낱같은 혈관 하나하나에 기력을 불어넣었다. 버거울 만큼 순수하고 강렬한 신성이 정수리까지 찰랑거리며 차올랐다.

“......흣.”

나는 그 버겁기까지 한 감각에 순간적으로 숨을 들이켰다. 숨이 틀어 막혔다가 둑이 터지듯 흘러나 왔다. 에우레디안이 짧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혼자서 불만스러움을 전부 종식해 버리기라도 한 것같 이 나른한 웃음이었다.

“......진짜.”

아, 뭔가 억울하다. 나는 이제는 쿵쿵쿵 온몸을 울려 대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입술 안쪽을 꾹 물었 다.


 “맨날 나만 지고....... 이거 좀 억울해.”

“지다니, 누가?”

에우레디안이웃으며내양뺨을쥐고고개를들어올렸다.붉은자안이시야를가득채웠다.

“나를 언제나 쥐고 뒤흔드는 게 누군데.”

에우레디안이 여상하게 말했다. 그 어조가 내용과는 정반대라 어쩐지 또다시 심술이 솟았다. 그러 나 내가 채 심술을 밖으로 내뱉기도 전에, 조곤조곤 이어지는 목소리가 내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내가그어놓은선을내발로밟고넘어가게만드는게누군데?그대가그런말을하면안되지.” 

언제나나를정신못차리게하는달콤한말이었다.과연우리사이에서정말로우위에있는건누굴 까?사실그런걸따지는건무의미할지도몰랐다.


르보브니 사절단이 벨고트에 도착까지 했으니 정말로 돌아갈 날이 머지않았다는 것도 지금의 두근 거림을 멎게 하기엔 모자랐다. 헤어짐을 생각하며 우울하게 늘어져 있는 것보다는, 그래. 남은 시간이 나마이다디단감정에푹젖어있어야지.

역시 미리부터 뒷날을 걱정하고 밀어내는 건 내 성미에 안 맞았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지금은 이 남자가 줄 수 있는 버겁고 빠듯하면서도 강렬한 감각을 더, 더 많이 느끼고 싶었다. 부끄러움은 어느 새날아가고갈증에가까운느낌이목끝까지차올랐다.나는눈을휘며작게속삭였다.

“그럼 공평하게 한 번씩 해요.”

“뭐?”

그가대답할틈을줄생각은없었다.팔로그의목을휘감고내게로끌어당겼다.부드러운입술이다 시 맞닿을 때까지. 에우레디안이 살짝 흠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와, 정말로. 나는 기다렸다는 듯 온몸 으로 흘러드는 아찔할 만큼 청량한 감각에 입술을 맞댄 채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정말로, 내게 이만 한감각을줄수있는남자는하늘아래오직이남자뿐일것만같았다.

** *

내가다시르보브니사람들을만난것은그날늦은오후가다되어서였다. “그래서, 무슨 사이냐고, 대체!”


 나는 피곤한 얼굴로 세르게이를 옆으로 밀어냈다.

“말했잖아. 납치범과 인질. 주인과 객. 그냥 그런 사이라니까.”

물론 그것보다는 훨씬 친밀하고 은밀한 사이이기는 하지만....... 헉. 은밀하다니. 나는 내가 떠올린 단어에 혼자 부끄러워져 입을 꾹 다물었다. 실실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세르게이는 그런 내 모습에 더더욱 의심스러운 눈을 했다.

“너,거짓말하면다티나는거모르지?” “알아. 안다고.”


눈치 빠른 것. 나는 혀를 차며 앉은 채로 의자를 들고 슬금슬금 레바논 공작 쪽으로 움직였다. 우리 는 본궁 후원 앞의 티 테이블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형부, 레바논 공작이 곤란한 듯 말을 흐렸다.

“함께 궁으로 가시면 좋을 것을 왜 이 밖에서.......” “날씨가 좋잖아요.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고.”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둘러댔다. 차마 내가 황궁 안에서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는 몸이라는 걸 말할 수는 없었다. 내 체질에 대해 입을 뻥긋하기라도 했다간 그날로 르보브니가 뒤집힐 테니까. 나는 빈찻잔에얼른차를채우며화제를돌렸다.

“그래서, 아버지랑 어머니는 잘 지내고 계신 거 맞죠?”

“예. 전하께서 체중이 많이 줄어드시고 왕비님께서 스트레스성 소화 불량 증세를 보이시는 것 외에

는, 무탈하십니다.”

“.......”

이건나죄책감들라고하는말인가......?진짜그뜻으로한말은아니었겠지만어쩐지양심이콕콕 쑤셨다.

아버지는 당장이라도 굴러가실 것처럼 통통한 몸매가 트레이드마크이신데....... 대체 살이 얼마나 빠지신거야?안그래도마르셨던어머니가소화불량을달고사신다니이건또웬말이고?

나는 우울하게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예레니카로 살게 된 이상 그들의 사랑에 보답해야 한다고 생 각하고 있었으면서도 지금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었다.

“테제비아 언니는 어때요?”


 “지금은 건강합니다. 거의 다 회복해서 거동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딸아이도 건강하고요.” 그래도 이쪽은 좀 희소식이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로 다행이에요. 소식을 듣고 너무 놀라서.......”

“이제는 한시름 덜었습니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래. 어쨌든 테제비아 언니와 브리즈니가 건강하다면 된 거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곁을 지키고 선 페르난디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페르디.”


“......예, 공주님.” 저도찔리는게있는지흠칫하며시선을피한다.나는어이가없어피식웃었다.


“그래서, 예정일이 언제인데요?”

“겨, 겨울입니다. 올해 말쯤에.......”

겨울이라. 그렇지. 원작에서 알렉시오가 한겨울에 생일을 맞았다고 지나가듯이 언급했던 게 떠올랐 다. 우리 남주, 알렉시오. 우리 렉시. 렉시가 태어난단 말이지. 마음이 두근거려 왔다. 알렉시오까지 태 어나고나면정말로원작커플의꼬꼬마시절을눈앞에서볼수있는거다.

얼마나 귀여울까, 내 주인공들!

“그래서, 너를 언제 돌려보내 주겠대, 황제가?”

세르게이가 불쑥 끼어들지 않았다면 그 생각에 계속 즐거울 수 있었을 텐데. 들떴던 마음이 금세 푸 시식 가라앉았다. 그래, 브리즈니고 알렉시오고, 일단 그 애들을 보려면 르보브니로 돌아가야 했다. 에우레디안과 함께 있을 때는 의식적으로 차단했던 우울한 생각들이 다시 스멀스멀 고개를 들었다. 나는 마지못해 웅얼거렸다.

“이번 사절단이 돌아갈 때 함께 돌아갈 거야.”

“오, 정말?”

세르게이가 활짝 웃었다.

“그래도 벨고트의 주인이 완전히 무뢰한은 아니었구나.” “말을 조심해라, 세르게이. 여기는 벨고트의 황궁이야.”


 레바논 공작이 동생을 엄하게 꾸짖었다. 나는 허허롭게 웃으며 애꿎은 차만 꿀떡꿀떡 들이켰다. 어 쨌든 정말로 돌아가야 할 때라는 건 맞았다. 내 몸의 문제도 있고, 솔레이아의 위협도 있고, 그리고 무 엇보다 나를 오매불망 기다리는 사람들을 이 이상으로 힘들게 할 수는 없으니까.

그래도, 르보브니에서 어찌어찌 4년 정도 버티면, 라울루스가 지상에 강림해서 나를 구제해 줄 때까 지만 버티면 다시 벨고트로 돌아오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지 않을까......?

“소문대로 잘생기기는 했더라. 생각보다도 훨씬 젊고.”

“응. 그렇지. 내가 지금까지 본 남자 중에 제일 잘생겼는걸.”

그런데 무슨 명분으로 다시 벨고트로 돌아오지? 진짜로 에우레디안이 내게 청혼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적당한 명분을 만들기란 요원해 보였다. “그리고좀오만한구석이있는것같기는하지만,네게그리강압적으로굴지도않는것같고.”


“그럼. 처음 공략할 때 조금 애를 먹어서 그렇지 사실 속은 다정한 사람......인데. 그런데 뭐라고?” 나는 생각에 잠겨 아무렇게나 대꾸해 주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묘하게 나를 빤히 응시하는

세 쌍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세르게이가 눈을 가늘게 떴다.

“공략이라니. 게다가 애를 먹어? 이거, 수상해.......”

“뭐, 뭐가?” 세르게이가불쑥내코앞으로제얼굴을들이미는바람에나는차를마시다말고흠칫놀라야했다. “이오라버니눈을똑바로봐봐,예레니카.네속전부꿰뚫어보려니까.”

“오라버니는 무슨. 얼굴 치워, 세르게이.”

나는 코웃음을 치며 찻잔으로 세르게이의 얼굴을 멀리 밀어냈다. 행여라도 이 사람들에게 내 벨고 트에서의 행적을 들켰다간 르보브니 가족들은 이번에야말로 신을 부르짖을지도 모른다. 겁도 없이 황제에게 당당히 청혼했던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쳤다.

오.......절대안돼.

나는 세르게이를 붙들고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이상한 소리 자꾸 하지 마. 어쨌든 나한테 손 하나 안 댄 사람이고. 그 덕에 지금까지 잘 먹고 잘 입 고 잘 지냈으니까.”

“흐음.”


 “돌아가서 아버지랑 어머니께 이상한 소리 말란 말이야. 알겠어?”

“흐으음.”

어쩐지 불안한데....... 나는 몹시 미심쩍은 눈으로 세르게이를 보다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꽁 때려 주었다.

“입만 뻥끗해 봐, 진짜.”

“와, 이 폭력쟁이.”

세르게이가실실웃었다.그래도그얼굴이확연히안도에찬모습인지라,나는결국에는어쩔수없 

이피식웃어버렸다. 

** *

역시 신경 쓰인다. 에우레디안은 보고 있던 글루카만 삼국 재협약 건 서류를 건성으로 넘기던 것을 멈추었다. 인상은 한참 전부터 구겨져 있었다.

열어 놓은 집무실 창문 밖으로 희미한 목소리들이 계속해서 타고 올라왔다. 귀는 희한하게도 밝고 명랑한 목소리만 귀신같이 잡아냈다. 그늘 없이 웃는 소리, 심드렁하게 대꾸하는 소리, 조잘조잘 대화 하는 소리.

“.......”

안 그래도 며칠 뒤면 돌려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한참을 심란하던 차였는데. 에우레디안은 창문 밖 을 한 번 내려다보았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필 눈에 딱 잡힌 게 레바논 공자가 예레니카에게 얼 굴을 들이미는 모습이었던 탓이었다.

그간 가끔씩, 아니, 실은 조금 자주. 무방비한 모습을 아무렇지도 않게 드러내던 모습에 속으로 혀를 찼던 기억이 속속 떠올랐다. 디에리고 슈마르트의 이름을 턱턱 불러 대는 것도. 그의 방에서 로브 따 위를 벗어 두고 잠을 잤다,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던 것도. 그 입에서 줄줄 나오는 이름들이 전부 남자 이름인 것도. 거슬리는 걸 따지자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에우레디안은 짧게 헛웃음을 지었다. 정말로 어디까지 쥐고 흔들 셈이지. “일단돌아가면몸에좋다는것들좀많이먹자.팔이이게뭐야?”


 “공자님 말씀이 맞습니다, 공주님. 어쩐지 르보브니에 계실 때보다 더 마르신 듯한 느낌이.......” “그래요? 살이 좀 빠지긴 했나.”

“그것 봐. 분명히 볼이 이만큼은 토실토실했다고......!”

“좀, 닥쳐!”

창문 아래서 드문드문 들려오는 대화 소리가 집중력을 전부 앗아 갔다. 그렇다고 창문을 아예 닫아 버릴수도없었다.닫으면직접내려가보지않고서는못참을것같아서.

“......후.”


결국 에우레디안은 신경질적으로 서류를 탁 내려놓았다.

더 욕심내지 말고 돌려보내야지, 돌려보내야지. 그렇게 다짐했던 것들은 정말로 하나도 소용이 없


었다. 일단 제 발로 꼬박꼬박 신전을 찾았던 것부터가 그 방증이었다. 게다가 바로 오늘 오전, 결국에 는그순간의질투심을못이기고입을맞춰버린것도.

희미하게풍기던비누향과놀랐는지짧게들이쉬던숨결.살짝흠칫하던몸.입을대는순간사르르 녹지않는게이상할만큼달았다.

멋대로굴고싶지도않고그이상으로몰아붙일생각도없었던터라자제하고자제해서짧게떨어 져 나간 것인데, 예레니카는 겁도 없이 다시 입술을 맞대 왔다. 선명하게 전해져 오는 애정에 만족감 이 차오르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감이 잔재처럼 남았다.

무방비하고 부주의한 면이 사랑스럽기는 하지만 그건 상대가 자신에 한정되어 있을 때의 이야기다. 다른 남자 앞에서도 저렇게 사랑스럽게 구는 걸 방관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없는데.......

예레니카가 르보브니로 돌아가고 나면 그가 뭘 어떻게 알고 그녀에게 치근대는 것들을 치우겠는 가? 결국 생각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돌려, 보내야, 하는데....... 정말로 보내 버리고 나면 어떡하지?

에우레디안은 이제 그 고민에 빠졌다. 일단 다른 이는 몰라도 저 레바논 공자는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예레니카에게 함부로 와락 안겨 들질 않나, 손을 잡으려 들지를 않나. 지나치게 친근하게 대 화를 나누질 않나. 소꿉친구라고. 가족이라고. 다 집어치우고 일단 남자가 아닌가? 아마도 르보브니로 돌아가면 예레니카와 가장 가까이에서 지낼 남자.

예레니카는 물론이고 세르게이가 들었대도 기함할 만한 생각이었다. 물론 그랬대도 뻗어 나가는 불 안감을 잠재워 주지는 못했겠지만.


 “르보브니로 가면 금세 도로 찔 거예요. 걱정 마요, 다들.”

“역시 벨고트에서 고생을 하신 것이.......”

“아니라니깐!”

예레니카가 밝게 웃는 소리가 지나치게 크게 들렸다. 분명히 먼저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 건 자신인 데, 왜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저 말에 이렇게 속이 쓰린지 모를 일이었다. 정말로, 돌려보내야 하는데.

“.......”

꼭 돌려보내야만 하는 건가?


“.......”

꼭? 정말로? 방법이 그것밖에 없나?


“.......”

아, 정말로. 대체 무슨 생각을. 에우레디안은 피곤한 낯을 쓸며 창밖에서 간신히 시선을 떼었다.

돌아가야지. 적어도 그가 솔레이아의 뒷덜미를 잡아 지하 감옥에 처넣기 전에는. 그런데 애초에 솔 레이아가 있건 없건 상관없이 예레니카는 벨고트와는 체질적으로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에우레디안은 미간을 짚었다. 자유분방하게 통통 튀는 공주에게 다가가기엔 방해물이 너무 많았다. 이 땅이 그랬고, 그가 어깨에 진 황제라는 직위가 그랬다. 그러니까 자꾸 이렇게 욕심을 내면 안 되는 게 맞는데.

“벨고트 좋아요. 정말로, 몸만 따라 주면 여기서 자리 펴고 뿌리내려서 살고 싶을 정도로.”

저렇게 말하는 게 사랑스럽다고 느끼지 않을 수는 없어서. 결국에는 욕심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자꾸

만돌아보고,손을뻗고.희고부드러운뺨과닿으면그대로없어져버릴것같은머리카락을만지고. 그 숨의 달콤함까지 알아 버렸으니 앞으로도 계속 입을 맞추고 싶어지겠지. 그러다 보면 종국에는

곁에잡아두고싶어질테고.

솔레이아와 마탑의 문제만 어떻게든 해결하고 나면, 그러면 다시 예레니카를 곁에 둘 수 있지 않을

까? 어떤 명분으로든 다시 벨고트로 불러올 수 있지 않을까?

체질에 맞지 않는 땅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저만 한 신성이 곁에 있기만 한다면. 어차피 벨고트로 완 전히 데려온다면 곁에서 떼어 놓을 것도 아닌데. 필요하다면 글루카만의 수수료 정도는 열 배든 스무 배든올려줄테니까.사실일국의공주를황후로데려오는데그만한대가는당연.......


 “.......”

......한데. 에우레디안은 헛숨을 집어삼키며 머리칼을 흐트러트렸다. “별생각을 다 한다, 이제는.......”

평생 황궁 안에 가둬 놓을 것도 아니면서. 자신이 없으면 어디도 마음 놓고 돌아다니지 못할 테고, 누구도함부로만날수없을텐데.그녀의자유분방한면이가장사랑스럽다인정한주제에퍽모순적 인 생각이 아닌가.

하지만생각이마구뻗어나가는걸그자신조차막을수없었다.에우레디안은간신히쭉쭉뻗어나 가는 생각의 가지들을 쳐냈다. 사고가 겨우 제 궤도로 돌아왔다.


일단은 당장 눈앞으로 닥쳐온 글루카만 협약부터 해결하자. 그다음에는 솔레이아를 잡아 족치고, 그다음에는 마탑을 싹 정리한 후에.


“그래. 그게 순서지.”

에우레디안은 집무실 책상을 건성으로 헤집어 바로 엊저녁 올라온 보고서를 집어 들었다. 아제키엔 에서 들여오는 마광석의 총량과 마탑에서 마광석을 정제한 후 황궁에 보고하는 양의 비율을 상세히 따져 놓은 보고서였다.

지금까지대체얼마만큼의마광석을교묘하게빼돌려왔는지단한점의오차도없이정확히계산 한 수식들이 몇 장에 걸쳐 나열되어 있었다. 그 수치를 다시 보니 머리가 아팠다. 흑마법사들의 본거 지나다름없는마탑에서빼돌린마광석이대체어떤용도로,얼마나제국전역에걸쳐드넓게퍼져있 는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쓰렸다.

제위에 오른 이래 로셀을 지나치게 믿은 것이 화근이었다. 솔레이아 엘라드의 스승인 체르나타 로 셀 역시 어둠에 뿌리내린 마법사거나, 아니면 적어도 제자의 만행을 지금껏 묵인한 공범임이 분명했 다. 빼돌린 마광석들이 어떤 루트로 어디를 향해 운반되는지 추적하고 있다는 내용이 보고서의 말미 에 적혀 있었다.

에우레디안은 천천히 밑에 깔린 다른 보고서를 넘겼다. 마탑의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적어놓은 일지 와 솔레이아 엘라드와 그 제자들의 신상을 전부 정리해 놓은 명부였다.

“.......”

일단 예레니카부터 안전하게 르보브니로 돌려보내고, 그리고 제국 전역에 걸쳐 정화 작업을 실시할 작정이었다. 디에리고 슈마르트가 신음하는 소리가 바로 귓전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그러나 그가 엄 살을 부리든 말든 에우레디안은 그다지 개의치 않았다.


 전부 정리하는 데 얼마나 걸릴까. 벨고트 전역의 사제와 성기사들을 전부 동원해서 흑마법의 뿌리 를 뽑는 데에. 그렇게 전부 정화해 버리고 나면, 그의 나라가 예레니카에게 조금이라도 더 안전한 땅 이 될까?

알수없는일이었다.

“......후.”

어쨌든한가지는명확했다.이대로완전히그녀를놓아버릴생각은없다는것.결국어떤식으로든 그는 제 욕심을 채우게 될 거였다. 선 밖에 있는 이들에게는 알맹이 없는 관대함을, 껍데기뿐인 다정 함을. 그러나 선 안에 들어온 이에게는, 그 스스로조차 놀랄 만큼의 애정을. 그리고 그를 넘어서는 집


요함을.

애초에 에우레디안 벨고트의 높고 견고한 벽은 뚫는 것만큼이나 빠져나가는 것도 어려웠다. 스스로


그런 제 성정을 너무 잘 알아, 그는 차마 예레니카를 놓아야 한다는 현실의 속삭임에 완벽히 손을 들 어 주지도 못했다. 그러니 나오는 건 한숨뿐이었다. 에우레디안은 서류를 대강 정리해 한쪽으로 밀어 버리며 중얼거렸다.

“이해해 주면 좋을 텐데.......”

결국은 모든 것이 전부 예레니카에게 달렸다. 그녀가 저를 얼마나 생각하는지, 얼마나 제 욕심을 기 껍게 받아들여 줄 것인지. 그것이 그에게는 가장 중요했다. 그리고 에우레디안이 마침내 확신을 얻고 마음을 굳히는 날은 생각보다 훨씬 더 빠르게 찾아왔다.

** *

르보브니 일행과의 이야기는 몇 시간이나 이어졌다.

알고 보니 르보브니 사절단은 예정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거였다. 아버지께서 사절단이 떠날 채비 를 마치기도 전부터 당장 떠나라고 성화를 부리셨다나. 그래서 예정대로라면 환영식 전날에나 도착 했어야 할 것을 사흘이나 앞당겨 도착한 것이다.

어쩐지, 빠르더라.......

무슨 이야기를 하건 결국 끝은 ‘그래서, 정말 괜찮으십니까, 공주님?’으로 끝나는 게 조금 질릴 때쯤 되어서야 대화는 소강상태를 맞았다. 물론 세르게이는 나를 놔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디로 가게? 우리랑 같이 있어야지.”

신전으로 돌아가려는 것을 세르게이가 잡아 세웠다. 그리고 내가 뭐라 대꾸할 새도 없이 나를 질질

잡아끌었다.

“야, 아니, 그게.......”

얘 좀 말려 봐요! 라는 표정으로 양옆을 돌아보았으나, 레바논 공작과 페르난디스조차 이상함을 느 끼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하긴, 기껏 공주를 되찾으러 왔는데 다시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건 그것대로 어불성설이긴 했다. 신전으로 돌아간다고 했다간 이 얼굴들이 전부 또다시 울상을 지을 것 같아서, 나 는 일단 얌전히 세르게이의 손에 끌려갔다.


르보브니 사절단은 벨리룩 궁으로 안내되었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정원이 완전히 뒤집혀 있던 것 이 기억나 기함한 것도 잠시, 나는 말끔하게 메워져 있는 벨리룩 궁의 정원을 보고 안도했다. 하루 이


틀 걸릴 공사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렇게 빠르게 원상 복귀하다니. 이건 이것대로 또 대단하다....... 그러나 은근슬쩍 벨리룩 궁에 다시 둥지를 틀려던 내 계획은 에우레디안이 눈치 빠르게 알아채며

무산되었다.무려직접벨리룩궁에와나를홀랑잡아챈그는단호한어조로딱잘라말했다. “안 돼.”

“으으음. 그치만 딱 이틀뿐인데.”

“그래도 안 돼. 돌아가면 질리도록 볼 얼굴들인데 뭐 하러 굳이.”

“으으으음. 그렇긴 하지만. 환영식은.......”

“환영식은 안 가도 돼.”

에우레디안이 딱 잘라 말했다.

“어차피 사절들 얼굴도 봤겠다, 굳이 환영식에 참석할 필요 없지 않나?” “음.......”

듣고 보니 그도 그랬다. 르보브니 일행이 미리 도착하여 나를 내놓으라 성화를 부린 덕에 일찍 얼굴 을 봤으니 굳이 환영식에 참가할 필요는 없었다. 에우레디안이 내 볼에 짧게 입을 맞춰 주며 나를 살 살 달랬다.

“그대에게는 위험한 자리야. 솔레이아 엘라드도 참석할 테고, 아제키엔의 마법사들도 자리할 예정 이라.”


 “으음.......”

“혹시라도 그대가 잘못되었다간 르보브니의 왕이 정말로 글루카만을 폭파해 버릴지도 모르니, 안

돼.”

그는 장난처럼 말했지만 내게는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어쩐지 묘하게 신빙성 있는 이야기

야.......

어쨌든 결론적으로 나의 환영식 참석은 무산되는 듯싶었다.


르보브니 사람들에게 뭐라 변명할 새도 없이 나는 신전으로 도로 돌아가야 했다. 어김없이 신전을 찾은 클라리스에게 그 이야기를 해 주니 그녀는 몹시 아쉬워했다.


“어머나, 제가 공주님께 잘 맞을 만한 드레스까지 이미 골라 놓았는데요.”

“아하하. 그게, 저도 제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보니....... 마음만으로도 감사해요, 부

인.”

“아쉬워라....... 다들 기대하는 바가 이만저만이 아닌데.”

대체 뭘 기대한다는 거야?

별로 내게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았다. 무수히 많은 시선 가운데에 서는 건 내게 딱히 달가운 일은 아 니었으므로, 나는 그 즈음해서 완벽하게 마음을 굳혔다.

응,안가.

[가면 재미있을 것 같은데.]

라울루스가 은근히 나를 꼬시는 듯한 어조로 말을 던졌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안가요,안가.”

[인간들의 파티라는 건 그런 거 아닌가? 쌍쌍이 짝을 지어서 우스꽝스런 춤을 추고.......]

뭘 본 거야......? 나는 클라리스가 완전히 돌아가는 것을 확인한 뒤 의심스러운 눈으로 하늘을 흘끗 쳐다보았다. 라울루스가 낄낄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를 꽉 물고 라울루스에게 대체 몇 번째인지 모를 당부를 했다.

“잘 보셔야 돼요. 호옥시라도 솔레이아 그 여자가 페하께 접근을 하나 안 하나.”


 [으응.그래,그래.내눈부릅뜨고잘보고있으마.그렇잖아도요새좀몸이가려운게,기분이영좋 지만은 않단 말이지.]

“기분이 왜요......?”

[그러게나 말이야.]

라울루스는 지나가는 투로 말했지만 나는 졸지에 엄청난 불안감에 휩싸였다. 라울루스가 아무리 좀 하찮아 보인다곤 하지만 유데타 너머의 절대자가 아닌가? 기분이 좋지 않다니, 그 말을 그냥 넘겨 버 리기는 어려웠다.

“왜요. 뭐 때문에요?”


[요즘 좀 거슬리는 소리가 들려서. 재수 없게.] 

그 말과 함께 꼭 귀를 후비적거리는 것같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함께 들렸다. 라울루스는 심드렁 하게 말했다.

[신경쓰지말렴,아가야.어차피나는마력을인지할수도없으니.기분이좀안좋아도딱히방도가 없단다.차라리네예민한감각에좀더신경쓰는편이더효과적일걸.]

오, 정말로 도움이 안 돼.......

그러나 이미 라울루스가 내게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건 여러 번 절감한 터라, 나는 한숨을 쉬며고개만끄덕였다.그래도요며칠만신전에서버티고나면최소몇년간은벨고트와안녕일거니 까. 조금만 버티자, 조금만!

그렇게일많던그날하루는어찌어찌지나가는가싶었다.그다음날도잘지나갈줄만알았다.르보 브니 사절단 일행이 내 거취와 환영식 불참에 대해 태클을 걸어오지만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삼국 재협약이열리는내내신전에조용히박혀있을수있었을텐데.애석하게도일은내생각대로굴러가 지 않았다.

** *

“......넌 진짜 나를 죽이려고 작정을 했구나.” “내가 뭘.”


 태연자약하게 대꾸하는 낯이 저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나는 이를 갈며 세르게이를 찌릿 노려보 았다.

나는 신전으로 돌아간 지 꼴랑 하루 반 만에 도로 황궁에 와 있었다. 환영식이 시작되기 바로 전날 에. 원흉은 바로 세르게이 레바논, 이 자식을 필두로 한 르보브니 일행이었다.

“너는 르보브니의 공주야, 예레니카. 우리는 너를 석 달 만에 간신히 다시 찾았고. 전하와 왕비 전하 가, 그리고 테제비아 공주님이 너를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면 우리가 이러는 걸 과하다고 말하면 안 돼, 너.”

답지 않게 진지하고 엄한 어조였다. 내 어깨를 꽉 붙잡고 말하는 낯에 정말 진심으로 나를 염려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그렇긴 하지만. 그건 알지만! 나는 이를 악물었다. 르보브니일행에게내상태에대해전부말해줄수가없으니자연히그들을설득하는데에도제약


이 걸렸다. 황궁에서 지내는 게 내 몸에 얼마나 무리가 가는지, 혹시라도 솔레이아를 마주칠까 얼마나 긴장해야 하는지 전부 설명할 수는 없었다.

페르난디스가 옆에서 조심스럽게 말을 더했다.

“굳이 신전에 가 계시는 것도 이상합니다. 언제든지 공주님을 지킬 의무가 있는 저희가 있는데도요.

굳이 공주님을 저희에게서 떼어 놓으려는 황제의 의도도 수상하고.......”

에우레디안이 들었다면 헛웃음을 댓 번은 지었을 법한 말이었다. 나는 목구멍을 꽉 막는 답답함에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아니, 그 수상한 황제 폐하께서 나를 몇 번이나 살렸는지 알면 당신들이 그렇 게 말을 못 한다니까.......

“그리고 어차피 내일 환영식도 참석하셔야 할 텐데, 굳이 멀리까지 가 계실 이유가 없습니다.” “아,그환영식은제가굳이꼭참석할필요는없을것같아서요.”

“세상에, 공주님. 황제가 그리 말을 합디까?”

이번에 대경한 것은 형부, 레바논 공작이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벨고트의 황제가 르보브니를 기습해서 공주를 납치해 갔다는 소문이 온 대륙에 파다합니다. 저희 조차 공주님이 어디 한 군데라도 상하신 것은 아닌가 수없이 걱정했었는데, 각국 요인들이 전부 모인 자리에서조차 공주님의 참석을 허락지 않겠다고 하는 건.......”

“아니, 저기. 잠시만요. 형부?”

“역시 벨고트의 황제, 공주님을 돌려보내 줄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닙-.”


 “아니요, 아니요. 폐하께서 불허하신 게 아니라 제가.”

“어디 약점이라도 잡히신 겁니까? 공주님!”

머리가 지끈거렸다. 나는 이마를 짚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고요. 이 사람들아.......

요컨대 이런 이야기였다. 벨고트의 황제가 르보브니의 공주를 납치했다는 소식이 온 대륙에 다 퍼 진 판국에, 내가 환영회와 송별회의 어디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 소문에 불만 지피는 격이라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평화적인 협약을 하는 와중에 벨고트가 르보브니의 공주를 아직도 내주지 않고 있다는

말이 돌아 좋을 게 없는 건 단연 벨고트 측이었다. 어쨌든 나는 납치되어 온 인질이고, 벨고트가 르보

브니에 무력을 행사했다는 산 증거나 다름없으니까. 

사실 어떻게 봐도 이건 내가 잠깐 얼굴만 비추면 끝날 문제이긴 했다. 게다가 대체 에우레디안의 이 미지가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 이미 르보브니 측에서는 무뢰배라고 낙인을 찍어 놓은 것 같은데, 아니라고 해도 도통 믿지를 않으니......!

“그래. 그들이 그리 생각하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야.”

놀랍게도 에우레디안은 헛웃음을 짓는 대신 그렇게 말했다. 나는 입을 딱 벌리고 그를 보았다. 해가 진뒤그의집무실에와막주절주절이야기를쏟아놓던참이었다.에우레디안이팔락서류를넘기며 여상하게 말을 이었다.

“어쨌든그대를벨고트로납치해온건나니까.도화선은내가당긴셈이지.내죄를누굴탓해.”

“허어.”

이제 정말로 헛웃음을 짓는 건 내 쪽이 되었다. 애초에 에우레디안이 날 납치한 이유가 르보브니의 건방진 작태 때문이 아니었나. 게다가 본의 아니게 황궁에 꽁꽁 숨겨 놔야 했던 것도 내 체질 때문이 고.나는결국한숨을푹내쉬었다.

“죄송해요. 르보브니가 좀, 과하게 극성맞죠.......”

“귀한 공주를 빼앗겼다고 생각했을 테니. 과민 반응 하는 게 당연하지.”

이 남자가 왜 관대하다고 대륙에 명성이 자자한지 알겠다. 나는 새삼 감탄했다. 그러나 그의 관대함 은 황궁에서의 내 거취에까지 발휘되진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벨리룩 궁은 안 돼.”

“네에?”

에우레디안이 스스로에게 다짐이라도 하듯이 말했다. 거의 중얼거리는 것에 가까운 말이었다.

“같은궁을쓰는건,안돼.”

“그래 봤자 어차피 사흘도 안 되는데.......”

“사흘씩이나 되는 거지.”

에우레디안이 서류를 탁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곧장 집무실 책상 옆에 기대어 있던 내게 손을 뻗었 

다. 단단한 손으로 내 허리를 휘감고 끌어당겼다. 은빛 머리카락이 바로 아래에서 반짝였다. 내 목에 얼굴을 묻고 긴 숨을 들이켠 그가 몹시 못마땅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바로 곁에 둬도 불안한데. 그대는 가뜩이나 부주의해서.......”

[오,이제좀목을매나보구나.]

그 와중에 라울루스가 놀리듯 말하는 음성이 들렸다.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나는 모기만 한 소리 로 중얼거렸다.

“보지 마요, 진짜.”

“뭐?”

“아무것도 아니에요.”

에우레디안이 의아하게 눈을 치떴다. 나는 얼른 손을 내려 그의 뺨에 가져다 대며 화제를 돌렸다. “어쨌든, 그래서 여기로 왔잖아요. 정말, 그렇게 밀어내실 때는 언제고.......”

요즘 들어, 그러니까 르보브니에서 사절단이 막 도착했을 때부터 이 남자가 내게 손을 대는 범위가 점점 더 과감해지고 있었다.

“사람이 이렇게 바뀌면 죽을 때가 다 된 거라는데.”

나는반짝이는은발을살살쓸어주며생각에잠겼다.아무래도정말이남자가이상하다.손만대도 아프게 튕겨 버리던 그 튼튼한 철옹성은 대체 다 어디로 가고, 눈앞에는 커다란 대형견같이 들러붙는 남자가 있다.

뭐, 이것도 나름대로 나쁘지는 않지만....... 아니, 나야 사실 땡큐기는 하지만.......


 “하필이면 돌아가기 직전에 이렇게....... 나쁘다.”

좀 일찍 이렇게 넘어와 주면 좀 좋았어? 나는 우울하게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불그스름한 자

안이 눈꺼풀에 길게 가려졌다 다시 드러났다. 에우레디안이 나른하게 눈을 휘었다.

“글쎄. 그대가 돌아가기 직전이라 많이 자제하고 있다고는 생각 안 하고?”

“......치.”

결국엔 볼까지 발갛게 달아올랐다. 아, 정말. 이런 사람을 두고 어떻게 돌아가지? 아무래도 무리다. 영영안볼수있기는개뿔.안돼.난못해.


나는 입안을 꾹 깨물었다. 그렇지만 여기 계속 있겠다고 고집을 부릴 수도 없었다. 그건 욕심이니까.

그래. 욕심이지. 내가 벨고트에 있으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는가? 지금까지처럼 신전에 박혀 있거

나,아니면정말로하루종일이남자곁에만붙어있을수밖에없는데.그건욕심임이분명했다. 

나는 한숨을 쉬며 화제를 바꾸었다.

“환영식은, 참석할게요. 한두 시간이라도.”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저는 폐하를 무뢰한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아요. 어차피 얼굴 한번 비추면 끝나는 일이고. 그리고 아이벤 백작 부인이 잘 챙겨 주신다고 말씀하셨거든요. 정말 얼굴만 비출게요. 한 시간만.”

이건 나도 양보 못 해. 끝까지 민폐만 끼치고 가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단호한 어조로 내뱉자 에우 레디안이 한숨을 쉬었다. 대답은 한참 후에나 돌아왔다.

“슈마르트에게 언질을 해 두지. 함께 있어. 절대 떨어지지 말고.”

“헤헤. 역시 다정하셔라.”

에우레디안은 일단 허락은 했지만 몹시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표정 자체는 평소보다 약간 더 가라 앉아있다뿐이지만나는그안에일렁이는걱정과불안감을쉽게잡아냈다.언젠가부터이남자의표 정을 읽어 내는 건 꽤 쉬웠다. 생각이 다시 돌아갔다. 역시 난 못 해. 이대로 관계를 끝장내 버리고 르 보브니로미련없이돌아갈수있을리가없다.

망설임은 금세 활활 타올라 사라져 버리고 확고한 결심만이 남았다. 나는 마침내 마음을 먹고 입을 열었다. 손을 뻗어 에우레디안의 뺨을 만지작거리면서.

“4년....... 4년이 지나면요, 폐하.”


 “......?”

뜬금없는 말에 에우레디안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4년?”

“네. 4년이요. 음, 그러니까 제가, 제 몸이 버틴다는 가정하에.”

반듯한 눈썹이 대번에 꺾였다. 에우레디안이 몹시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말했다.

“르보브니에도 신전은 있잖아. 왜 그런 말을 해?”

“사람일은모르는거니까요.아니,이말을하려고하는게아니고!”


나라고 당장 4년 뒤에 죽을 수도 있단 생각을 하는 게 아니었다. 그 기간만 신전에서 버티면 라울루 스가 사제로 삼아 준다는 약속을 믿을 뿐이지. 나는 라울루스에 관련한 이야기는 쏙 빼고 말을 이었


다.

“그 4년이면, 솔레이아 엘라드를 잡아넣는 데 충분할까요?”

“그게 무슨?”

“만약에 그러면요, 폐하.”

나는 최대한 예쁘게 웃어 보였다. 지금까지 열 번은 더 한 말인데 왜 지금은 목구멍 끝에 걸려서 안 나오는건지모르겠다.나는몇번이고심호흡을한뒤에입을열었다.

“그러면, 그때는 저랑 결혼해 주세요!”

몇 번을 했던 말인데도 여전히 도전장이라도 내미는 것 같은 어조였다. 에우레디안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그자줏빛눈을보고는있었지만,그안에담긴게어떤기색인지는읽어낼수없었다.사실 이 남자가 어떤 답을 해 줄지 걱정부터 앞서지도 않았다. 왜냐면 그의 기색을 살필 정도의 여유가 내 게없어서.당장내심장박동소리가그에게들리면어쩌지라는생각으로머릿속이가득차있어서.

그래서 나는 눈을 부릅뜨고 에우레디안을 내려다보면서도 그의 눈매가 나른하게 휘는 것도, 천천히 대답하는 목소리도, 반쯤은 전부 놓쳤다.

“그렇게 오래 기다리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네, 그렇....... 네?”

나는 자동 반사적으로 아무렇게나 답하다 뚝 말을 멈추었다. 방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그제야 신 경이 온전히 에우레디안에게로 쏠렸다. 내 눈동자가 급격히 떨리는 걸 나조차도 생생히 느낄 수 있었


 다.

“어, 저, 뭐라고 하셨.......”

“방금 그 청혼은.”

에우레디안은 말을 반복하지는 않았다. 대신, 더없이 달콤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번에는 분명히 진심이겠지?”

아. 나는 짧게 신음했다. 세상에, 양치기 소년이 된 기분이다. 그간 한 청혼들이 사실은 팥 없는 찐빵 이었다는 걸 들켜 버린 셈이었다. 안 돼. 이번은 진짜 진심이란 말이야......! 나는 다급히 고개를 끄덕


였다.

“진심이에요. 정말로.”


“그러면 이건 이해를 해 주겠다, 이 말이겠지?”

에우레디안은 영 이해하지 못할 말만 자꾸 했다. 나는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되물었다.

“뭐를요?”

“내가 부리는 욕심. 억지. 뭐 그런 것들.”

단단한 손이 목덜미를 잡고 끌어당겼다. 불그스름한 자줏빛 눈동자가 순식간에 훅 가까워졌다. 그 눈이 조용히 답을 재촉했다.

“아.” 그리고나는방금의그한마디로이남자가무슨말을하는지전부알아들었다.맞지않는땅에나를

잡아놓고싶은것을이해해달라는뜻이다.

사실 처음부터 에우레디안이 하는 고민은 똑같았다. 나를 처음 납치해 왔을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

까지 그는 계속해서 내 체질에 대해 걱정했고, 그래서 벽을 쌓았고, 나를 밀어냈기 때문에.

결국 어쩔 수 없이 웃음이 나왔다. 나는 지척에서 보이는 눈매와 날카로운 콧대를 하나하나 눈에 담

으며 천천히 입을 열어 물었다.

“반대로 생각하시는 건 아니고요? 욕심이라면 저도 만만치 않아서.” 나는그가몇번이나내게해주었듯이코끝에입을맞추며속삭이듯이말했다. “폐하께서도 이해해 주셔야 할 것, 한두 개가 아닐 텐데.”


 솔레이아 건을 해결하고 나면. 마탑의 문제까지 전부 해결하고 나면. 그러고 나면. 나는 입꼬리를 끌 어 올렸다.

“저한테 당신을 온전히 주실 수 있어요?”

내가 이 땅에서 고통 받지 않게. 내가 필요할 때 항상 손잡고 끌어안을 수 있게. 당신 머리부터 발끝

까지,그몸을감도는신성한자락까지,전부내가갖는걸이해해줄수있어?

에우레디안은 말로 대답하지는 않았다. 그의 눈매가 만족스럽게 휘는 것을 언뜻 본 것도 같았다. 그 리고 다음 순간, 손가락 하나 겨우 들어갈 만큼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지고, 없어졌다. 입술이 맞닿 았다.


예의 그 버거우면서도 달콤한 감각이 입술서부터 시작해 온몸으로 퍼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내 물음에 대한 답으로는 넘치도록 충분했다. 


 Ch 7. 눈에는 이, 이에는 눈 (1)

그날밤이후로내게는목표가한가지추가되었다. 4년만버티자. 4년.그보다더적게걸릴거라에 우레디안이 말했으니까, 어쩌면 정말로 더 짧을 수도 있고. 그만큼만 딱 버텨서, 4년 후에 라울루스의 사제가되면되는거다.그러면다시벨고트로돌아올수있어! 4년이면절대짧은시간은아니지만, 기약 없는 기다림이나 영영 헤어지는 것보다는 나았다.

이제 벨고트에서 남은 일이라고는 아제키엔과 르보브니의 사절단 환영식밖에 없었다. 환영식이 예 

정된 날 아침, 클라리스가 황제궁을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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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

저만

믿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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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공주

내 참석이 결정이 난 것이 바로 어젯밤인데 대체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클라리스는 아침이 밝기 가 무섭게 내 방에 들이닥쳤다. 두 소매를 싹싹 걷어붙이고 자신만만하게 외치는 목소리가 어쩐지 심 상찮았다.

“들어오세요, 마담 필라!”

“마, 마담 필라......?”

내가 얼떨떨하게 그 이름을 중얼거리는 사이 문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열린 문으로 줄줄이 들어오 는수많은옷걸이들의향연을보고입을딱벌렸다.수십벌,아니,거의수백벌은되어보이는드레스 들이 줄줄이 소시지처럼 방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정말 끝도 없이.

“아이벤 부인, 이게 뭐...... 무슨......?”

“목표는!” 내멍청한물음은아이벤부인이콧김을내뿜는기세로외친말에묻혔다. “공주님을, 이 벨고트에서 가장 아름다운 분으로 만들어 드리는 것이에요!” “네에?”

“엘라드 영애보다 훨씬! 훠어얼씬 아름답게......!”

나는황당해서이미벌어진입을더크게딱벌렸다.마치큰수술을집도하는의사처럼엄숙하고진 지한 얼굴이었다. 클라리스 옆에 서서 맹렬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마담 필라라는 여인도 마찬가지였


 다.

“아니, 굳이 그러실 필요는.......”

그러나내작은반항은이미눈에뵈는게없어진클라리스에게는전혀통하지않았다.나는두집도 의의손에양팔이잡혀질질끌려들어갔다.드레스룸안으로.

라울루스가 덩달아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오, 나도 좀 궁금한데?]

이상한 거 궁금해하지 마!



정확히다섯시간후,나는거울앞에딱붙어정신없이거울에비친내모습을감상하고있었다.

“와.......”

꼭처음예레니카의몸에빙의한날의데자뷔를보는것같다.나는침을뚝뚝떨어뜨릴기세로거울 속의 나를 감상했다.

손을움직이면따라움직이고고개를돌리며따라고개를돌리는게,분명히거울속저여자가내가 맞는데, 굉장히 비현실적이었다. 늘 몽실몽실하게 휘날리던 연분홍빛 머리카락은 어찌 된 일인지 손 만 대면 당장 미끄러질 것처럼 매끄럽게 반짝거렸다.

머리카락을 복잡하게 땋아 얼기설기 엮어 귀엽게 틀어 올리고, 나머지 머리카락은 그대로 허리께까 지 흘러내리도록 두었다. 움직일 때마다 실크처럼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몸의 곡선을 타고 결결이 찰 랑였다.

“와, 진짜 신의 손.......”

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내 머리카락 손질을 담당한 시녀를 바라보았다. 시녀가 뿌듯한 얼굴로 외쳤

다.

“이렇게 달콤한 빛깔의 머리칼은 조금만 손질해도 배는 더 사랑스러워진답니다. 어떠세요, 마음에

드세요?”

마음에 드냐고? 대답할 필요조차 없었다.

** *


 나는 존경의 눈빛을 마구 쏘아 준 뒤 다시 거울로 시선을 돌렸다. 화장 자체는 짙지 않았다. 애초에 짙은 화장이나 강렬한 색채가 어울리는 얼굴도 아니라, 순한 눈매와 입술을 살짝 강조하는 선에서 그 쳤다. 그러나 그 작은 터치만으로도 이목구비가 더 섬세하게 살아나는 게, 이것은 마법이 분명했다.

확실히 이렇게 조금만 신경을 써도 확 살아나는구나. 하기야 원체 오밀조밀 예쁘게 생긴 얼굴이기 는 했다. 사실 나보다 예쁜 사람은 테제비아 언니랑 솔레이아 말고는 보지 못했다.

내 자랑 같은데 내 자랑 맞다. 그래도 1년이나 이 얼굴로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며 사실 좀 무감각해 져있었는데,이렇게제대로꾸미고나니내가내얼굴에재차반할지경이었다.

나르시스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귀걸이는 제가 골라 드려도 될까요?” 잔뜩들뜬레리아가기대에찬눈으로나를보았다.나는얼른고개를끄덕였다.


“응. 부탁해.”

레리아, 벨리룩 궁에서 지낼 때 나와 유일하게 같은 연배였던 막내 시녀이자 오늘부로 근신이 풀려

황제궁으로 배정된 시녀는 신이 나서 마담 필라가 가져온 보석함을 뒤적이며 보석을 골라냈다. 나는그커다란함에서줄줄이쏟아지는번쩍번쩍한보석의향연을차마똑바로보지못하고고개

를 돌렸다. 세상에, 저게 다 합치면 대체 얼마야......?

“드레스가 푸른빛이니까, 이 사파이어 귀걸이는 어떠세요? 아니면 가볍고 얇게 세공된 이 십자가 모

양 귀걸이도 잘 어울리실 것 같아요.”

레리아가 이것저것 내 귀에 대 보며 재잘거렸다.

[오,나는그거.지금저아이가손에든거.은색십자가.]

그리고 라울루스도 함께 재잘거렸다. 나는 무심코 레리아의 손에 들린 귀걸이로 시선을 옮겼다가 내심 놀랐다. 중앙에 자줏빛 보석이 박힌 은색 십자가가 달린 귀걸이가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저게 마음에 들어. 저걸로 하렴, 부스러기야.]

라울루스가 만족스럽게 말했다. 나는 그 십자가 귀걸이를 잠시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로 할게.”

은빛과 자줏빛, 그리고 십자가. 더없는 벨고트의 상징이며 에우레디안의 색이었다. 그래서인지 어 쩐지저십자가가오늘나를지켜줄부적같기도했다.나는손을뻗어귀걸이를양쪽귓불에찼다.


 “음, 예쁘다.” 귀걸이는짙은푸른빛드레스와도잘어울렸다.나는내모습을마지막으로한번더거울에비춰보

고 활짝 웃었다.

긴 우여곡절 끝에 벨고트에서의 마지막 사흘이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


“그럼 다녀오세요, 공주님!”

레리아는 경쾌하게 손을 흔들었다. 연분홍빛 머리카락의 사랑스러운 공주님은 뒤돌아 마주 손을 흔


들고는 다시 아이벤 백작 부인과 함께 복도 너머로 사라졌다.

평소에도 폭 빠져들 만큼 사랑스럽고 다정하신 분께서 저렇게 파티용 드레스까지 차려입으시니 정

말 예쁘다. 심지어 귀에는 자신이 골라 드린 귀고리까지 하시고.

레리아는 뿌듯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다 황제궁의 시녀 록산느에게 곧장 불려 갔다.

“레리아, 공주님의 침실은 내가 정리할 테니 너는 빨래방 하녀들에게 좀 다녀오렴. 이불 빨래를 맡 겨 두었는데, 지금쯤이면 세탁이 다 끝났을 거야.”

“앗, 네에!”

이번에 막 황제궁에 배정된 레리아는 빠릿빠릿하게 대답하고는 홱 뒤돌아 도도도 계단을 내려갔다.

‘이불 빨래. 이불 빨래.’

어린 시녀의 머릿속에는 단지 그 생각뿐이었다. 마리안느 언니가 황제궁에서는 실수하면 안 된다고 했어. 공주님을 잘 부탁한다고도 했었지. 일단은, 얼른 가서 이불 빨래를 가져오자.

풀밭을 종종걸음 치듯 지나는 발걸음 소리가 경쾌했다. 레리아는 한눈팔지 않고 빨래방 하녀들에게 서곧장잘갠흰이불을받았다.그리고얼른황제궁쪽으로다시방향을튼다.탁탁탁.발걸음소리는 여전히 가볍고 경쾌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전혀 짐작하지 못한 채로.

“어......?”

문득,제머리위로지는그림자에레리아는고개를들었다.제앞을가로막은이가누구인지알아본 레리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가 황궁에서 일하면서 좀처럼 본 일이 없는 인사였다.


 “이름이 뭐지?”

“레, 레리아입니다.”

물론 얼굴을 모르지는 않았다. 모를 수는 없는 사람이었다. 레리아는 얼른 허리를 숙였다. “-!”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레리아는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 *

환영식은 보통 황실 주최의 행사나 파티가 있을 때 주로 사용한다는 룩시아 궁에서 열렸다. 오늘 내 옆에는 신전에서 불려 온 디에리고가 함께 있었다. 나는 흘끔 그의 눈치를 보며 민망하게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제가 디에리고를 너무 부려먹는 느낌이 들어요.......”

“부려먹다니요. 아닙니다.”

디에리고는 선량하게 웃었다.

“어떤 식으로든 공주님께 도움이 될 수 있다면야 저로서는 큰 기쁨이지요.”

뭐 해요, 라울루스? 이런 신실한 사제님께 축복이라도 한 번 더 내려 주지 않고. 내가 슬쩍 중얼거리 니 라울루스가 어이없다는 듯 답했다.

[저 아이에겐 이미 충분히 축복을 내려 줬단다. 태어날 때부터 넘치도록 받았는걸.]

“역시, 제가 너무 대단한 사제님을.......”

“저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정말입니다. 그보다, 혹시라도 조금이라도 불편하신 곳이 있으시다면 지 체 말고 제게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아시겠지요?”

“넵.”

오늘은 에우레디안이 내 곁에 있을 수가 없으므로 디에리고의 도움이 절실했다. 언제 어디서 솔레

이아나 아제키엔의 마법사들이 나를 치고 갈지 모른다.

내가 이 연회장에 모습을 드러내는 건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고, 어차피 나는 오래 머물 계획 도아니었다.일단르보브니의공주가멀쩡하게살아있다는것만보여주고틈을봐서퇴장할계획이


 었으니까.그러니이두세시간정도만버티면된다이말이지.

나는 한창 르보브니와 아제키엔의 사절들이 인사를 올리고 각국의 주인이 보낸 친서를 읊는 것을

보는둥마는둥하며홀안을둘러보았다.여기가벨고트의사교활동이이뤄지는주무대구나.

“아름다운 홀이지요, 공주님?”

클라리스가 웃으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까마득히 높은 천장에 휘황하게 빛나는 샹들리 에들, 정교한 무늬가 새겨진 거대한 황금 기둥들에, 열댓 개는 되어 보이는 테라스 쪽으로 통하는 입 구를 가린 자줏빛 커튼들. 나는 드문드문 세워진 늑대 모양 동상들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라울루스의 흔적은정말이황궁어딜가나있었다.


[이것들, 눈을 박박 닦아 놓다니. 불경하게.]

정작 라울루스의 마음에 썩 들진 않는 모양이었지만. 나는 풉 웃다가 클라리스와 눈이 마주치자 얼


른 표정을 가다듬었다. 클라리스가 다소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오늘은 제가 계속 함께 있어 드릴게요. 일전에 약속드린 대로.” “감사합니다, 아이벤 부인.”

정말로 감사한 일이었다. 나는 벌써부터 내 쪽을 흘끗거리는 시선들에 어색하게 웃으며 살짝 뒤로 물러났다. 으, 역시 나는 나를 보는 저런 시선들에 익숙하질 못했다. 습관처럼 몸에 밴 거부감이었다. 내가 불편해하는 걸 알았는지 디에리고가 살짝 내 앞을 가려 주었다.

“사절단의 인사가 끝나고 나면 이쪽으로 오실 겁니다.”

“음, 그렇겠죠?”

이미 내가 있는 쪽을 맹렬하게 건너다보는 세르게이를 애써 무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클 라리스는그말을뭐라고생각한건지입을가리며작게웃었다.

“어머나. 다정하셔라.”

세르게이가......?

저 망나니가 다정하다니 끔찍한 생각이었다. 나는 몸을 부르르 떨며 황좌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르 보브니 쪽의 인사는 다 끝났는지, 아제키엔의 사절들이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황좌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에우레디안은 멀리서 봐도 퍽 무료한 얼굴이었다. 눈을 반쯤 내리깔고서 는 사절단들과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않는 게, 귀찮아 보이기도 했고 꽤 피곤해 보이기도 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답답해 보이시네.”

“네?”

클라리스가 의아하게 되물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어, 그냥, 역시 폐하도 사람은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에....... 지루해하시는 게 눈에 보여서요.”

내 말에 클라리스는 물론이고 곁에 있던 디에리고, 그리고 아이벤 백작까지 전부 나를 바라보았다.

“아....... 저게 무료하다는 표정이셨군요. 어쩐지, 그간 회의 때 저렇게 웃으실 때면 늘 기각이.......”

아이벤 백작은 어쩐지 상처받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클라리스가 웃으며 남편의 어깨를 도닥였다. 

“다음에는 좀 흥미로운 안건을 들고 가시면 되죠, 여보. 상심 말아요.” 

어쩐지 내가 본의 아니게 백작의 마음에 스크래치를 낸 것 같은데....... 아니지, 애초에 귀찮으면 귀 찮다고하면될걸저렇게입매만끌어올려서웃어주는저남자가잘못한거지!하여튼오만데에다 치는 철벽이다.

내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는데, 아이벤 백작이 헛기침하며 입을 열었다. “한데, 공주님. 혹시 식은 언제쯤 예정하고 계시는지......?”

“네?”

식? 나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아이벤 백작을 보았다. 무슨 식? ......설마, 결혼식?

“폐하께서 다른 말씀은 없으셨습니까? 그게 사실, 저희로서는 대략적인 시기라도 알아야 그에 맞춰 미리 준비하기가 수월한지라. 선대 황제 폐하께서는 늦봄에서 초여름 사이에 식을 올리셨던 기억이 납− 억. 클라리스?”

“이이도 참. 입이 방정이셔라.”

클라리스가 호호 웃으며 남편의 말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난 봤다. 클라리스가 매서운 손길로 남편

의 엉덩이를 꼬집는 걸.

“......아하하.”

나는 하릴없이 웃어 보였다. 그러니까 아이벤 백작이 하려던 말은 결혼식을 언제쯤 올릴 계획이냐, 그말인것같았다.나는세르게이를비롯한르보브니일행이저만치떨어져있는것을확인하고나서 우물쭈물 중얼거렸다.


 “음, 오래 기다리게는 안 하시겠다고, 말씀은 하셨......는데.”

4년을 꽉 채운다고는 안 했으니까 한 2년, 아니, 넉넉잡아 3년쯤 뒤에......? 그런데 어쩐지 주위의 이

목이몽땅이쪽으로쏠린것같은건기분탓인가.

기분탓이아닌것같다!나는황급히디에리고의뒤로쏙숨어들었다.험담을하든,좋은말을하든, 어쨌든 나를 보면서 수군거리는 건 싫어. 하지만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진 주위 사람들은 그런 나를 배려하는 걸 까맣게 잊은 듯했다.

“세상에, 정말 그리 말씀을 하셨나요, 공주님?”

남편의 엉덩이를 사정없이 꼬집던 클라리스는 이제 남편보다 더 흥분한 것 같았다.


“그런 다정한 말씀까지 하실 수 있는 분인지는 몰랐, 아니, 그런데 공주님. 분명 지난번에는 이번 사 절단과 함께 돌아가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아, 그게. 어떻게 이야기가 되어서요.”

몇 년 후를 기약할 수가 있게 됐어요. 내가 그 말을 채 밖으로 내뱉기도 전에, 클라리스와 아이벤 백

작이 몹시 심오한 얼굴로 이마를 맞대고 숙덕거리기 시작했다.

“그렇지, 그렇지. 벌써 황제궁에 머물고 계시는데. 폐하께서 전혀 생각이 없으셨을 리가.”

“그것뿐인가요. 사실 조짐은 한참 전부터 있었는걸요, 뭘. 제가 그랬잖아요. 그때, 몇 달 전에, 신전 에서.......”

“벨리룩궁을그렇게쥐잡듯이잡으시고.......당신이그궁앞의정원꼬라지를봤어야하는건데.” 이 사람들이. 댁들까지 내 앞에서 그렇게 수군거리면 어떡해요? 내가 디에리고의 등 뒤에 숨어 그들

을 찌릿 노려보자, 디에리고가 선하게 웃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괜찮으십니까, 공주님?”

아니요! 불편하다, 불편해! 나는 억지로 웃었다. “저는사교계나뭐그런거랑은안맞는것같아요.” “그러십니까?”

“네. 저는, 이런 상황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아서.......” “그래도 조금은 익숙해지셔야 할 텐데요.”


 디에리고가 애매하게 말을 흐렸다.

“아무래도 황후님의 자리는 벨고트뿐 아니라 대륙 이목이 전부 집중되는 자리라.”

그런가요,디에리고.잘난남자랑결혼하려면이정도시선쯤은씩씩하게견뎌낼줄알아야하는건 가요....... 내가 할 말을 잃은 사이 클라리스는 계속해서 남편에게 속닥거리고 있었다. 물론 내게도 아 주잘들렸다.

“내심 통쾌하네요. 아마 오늘 오신 영애들 모두 다들 같은 심정일걸요. 엘라드 영애께 덴 분들이 한 두 분이어야지.”

그 말은, 달리 말하면 솔레이아가 에우레디안에게 접근하기 전에는 대체 얼마나 많은 귀족 아가씨 

들이 그에게 달라붙었단 말인가요, 클라리스? 나는이와중에도깨달아버린달갑지않은사실에더더욱인상을구겼다.떠나기전에날잡고에우


레디안을 한번 털어 봐야 하나. 내 남자의 과거 이야기에 표정이 심상찮아진 것을 눈치챘는지, 클라리 스가 부랴부랴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오늘 엘라드 영애께서는 참석하지 않으신다는 말이 있었나요, 여보? 어쩐지 안 보이 시는 것 같네요.”

“글쎄, 명단에는 이름이 올라 있었는데.”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맞다. 솔레이아! 나는 행여나 디에리고를 놓칠까 그의 옷자락을 꼭 쥐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클라리스의 말이 맞았다. 홀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솔레이아의 적 갈색 머리카락은 그 어느 곳에도 없었다. 이대로 내가 돌아갈 때까지 나타나지 않으면 좋을 텐데.

“잠시만요, 공주님. 제가 영애들에게 가서 물어보고 올게요. 혹시 오늘 엘라드 영애께서 불참 예정 이신지요.”

클라리스는 그 말을 남기고 바람처럼 움직여 저쪽의 아가씨들 무리 속으로 끼어들어 갔다. 나는 불 안한 눈으로 그녀가 귀족 영애들과 친밀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지켜보았다.

“공주님.”

갑자기 오른쪽에서 불쑥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디에리고가 즉 각 나를 뒤로 끌어당기며 경계의 기색을 내비쳤다. 내 옆으로 고개를 불쑥 들이민 이는 다행히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나는 당황스럽게 중얼거렸다.

“레, 레리아?”


 내 막내 시녀, 레리아가 순진한 낯으로 활짝 웃었다. “마실 것 좀 가져다드릴까요? 목이 타신 듯 보이는데.” “어....... 그러면 고마울 것 같아.”

나는 얼떨결에 대답했다. 레리아는 신나서 고개를 끄덕이더니 홀 양쪽에 마련한 테이블에서 와인 잔과주스잔을잔뜩올린쟁반을들고왔다.흔들,흔들.쟁반위의유리잔들이위태롭게흔들렸다.나 는 기겁해서 손을 휘저어 그녀를 만류했다.

“세상에, 레리아. 이렇게까지 많이는 필요 없어! 한 잔이면 돼.”


“어떤 걸 드시고 싶어 할지 모르겠어서요!”

티 한 점 없이 해맑게 웃는 얼굴이라, 나는 그녀를 더 꾸짖지 못하고 주스 한 잔을 조심히 골라냈다.


디에리고가 손을 뻗어 레리아의 손에서 쟁반을 가져갔다.

“이리 가득 들고 오시면 위험합니다. 쏟기라도 하면 어찌하려고.”

레리아는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죄, 죄송해요.......”

“아니, 죄송할 건 없고!”

나는급히잔을쥐지않은다른손으로손사래를쳤다.

“공주님, 괜찮으십니까?”

디에리고는 손에 든 쟁반을 지나가는 시종에게 건네주고는 즉시 돌아섰다. 레리아를 흘끗 돌아보기 는했지만이내그의관심은내게로쏠렸다.레리아에게더신경을쓰는눈은아니었다.

“부딪히진 않으셨고요?”

“어, 네. 멀쩡해요.”

나야 뭐 털끝 하나까지 전부 멀쩡했다. 팔다리가 조금씩 저릿저릿해 오는 것을 뺀다면. 하지만 그건 마법사들이 우글거리는 이 회장에 들어선 순간부터 계속해서 느껴지던 것이라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나는 안절부절못하고 울상을 짓는 레리아를 향해 활짝 웃어 주었다.

“괜찮아, 괜찮아. 주스 고마워. 잘 마실게, 레리아.” “헤헤.......”


 그제야 레리아는 웃었다. 어쩐지 지나치게 과하고 인위적인 웃음이었다. 뭐지......? 조금 불안한데. 나는 눈을 굴리며 주위를 살폈다.

디에리고도,몇발짝앞에서다른귀족인사와이야기를나누고있는아이벤백작도,저만치서막무 리를 빠져나오는 클라리스도. 모두가 딱히 이상할 건 없었다.

“......기우인가.”

나는주스를마시지않고내려놓으며팔로몸을감쌌다.왜자꾸이렇게불안한느낌이드는거지?

불행하게도, 내가 느낀 불길한 예감은 기우가 아니었다. 사고는 바로 몇 분 뒤에 터졌다. 영 침착하 지 못하고 과하게 들떠 보이던 레리아가 기어코 실수를 저지르고 만 것이다.


“죄, 죄송해요......!” 

레리아가 실수를 저지른 상대는 나는 아니었다. 그러나 차라리 나였으면 좋았을걸. 나는 클라리스 의상앗빛드레스를온통적신새빨간와인자국에결국깊은한숨을내쉬었다.

“......괜찮으세요, 아이벤 부인?”

“아.......”

쉽사리 답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 클라리스 역시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모양이었다. 나는 급한 마 음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녀, 다른 시녀를.......”

“제 시녀가 연회장 밖에서 대기하고 있어요. 드레스는 갈아입으면 그만이지요. 튀지는 않으셨고요,

공주님?”

클라리스는 금세 원래의 평정심을 되찾았는지 괜찮다는 듯 웃어 보였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큰 사고 없이 돌아가나 싶었더니 역시나 일이 터지긴 터지는구나. “......저도 함께 갈게요. 어차피 더 있을 생각도 아니었고.”

“네? 하지만 공주님. 아직 폐하를 뵙지도 못하셨잖아요.”

“괜찮아요. 얼굴이야 내일도 볼 수 있고. 돌아가기 전까지 시간도 많으니까.”

게다가 온몸을 자꾸 쿡쿡 찔러 오는 마력 때문에 계속해서 신경이 곤두서고 있던 차였다. 이대로 더 있다가는 정말 통증으로 번질 것 같았다. 어디서 들어오는지 모를 한기 때문에 자꾸만 몸이 흠칫거리 기도 했고.


 클라리스가 드레스를 갈아입고 다시 연회장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보고 나서, 나는 황제궁으로 돌아 가야겠다. 연회가 어땠는지는 이따가 에우레디안이 돌아오면 물어보면 될 일이다.

“가요, 디에리고.”

나는 거기까지 판단을 내리고 지체 없이 돌아섰다. 지나가던 시종을 불러 에우레디안에게 먼저 황 제궁으로 돌아가 있겠다는 말을 전하도록 한 뒤 디에리고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레리아에게 손짓하 는것도잊지않았다.

“일단은 너도 따라와, 레리아.” “네, 공주님.”


레리아의 순박한 연갈색 눈에 평소보다 빛이 없었다. 나는 어렴풋이 이상하다, 라고 생각하면서도 우선 연회장을 나섰다.


연회장 밖에는 귀부인들과 영애들이 차림새를 다듬는 파우더 룸이 있었다. 나는 클라리스를 따라 파우더 룸 안까지 들어갔다. 그녀가 걸쳤던 숄을 풀어 내리며 민망하게 웃었다.

“저는 정말 괜찮아요, 공주님. 이런 큰 행사에 참석할 때는 보통 드레스 두 벌은 기본으로 챙겨 온답 니다. 어떤 일이 어떻게 일어날지 알 수 없으니까요.”

“그래도.......”

나는 착잡한 기분으로 엉망이 된 그녀의 상앗빛 드레스를 바라보았다. 클라리스랑 잘 어울리는 드 레스였는데, 내가 사고를 친 것처럼 괜스레 미안해졌다. 하긴, 시녀의 잘못은 곧 주인의 잘못이기도 하니 내 잘못도 조금은 있는 건가. 클라리스가 살포시 웃었다.

“상냥하기도 하셔라. 그럼 우선 옷을 갈아입고 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셔요.”

“네. 천천히 하세요.”

클라리스가휘장너머드레스룸으로시녀와함께사라지고나자룸안에는나와레리아만이남았 다. 디에리고가 여성들의 대기실 안쪽까지 동행할 수는 없었으므로, 디에리고는 문밖에서 우리를 기 다리는 중이었다.

대체 몇 사람을 번거롭게 하는 거야? 나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입을 열었다.

“조심했어야지, 레리아. 나한테 실수하는 건 그렇다고 쳐도, 아이벤 부인은 벨고트의 귀족이시잖아. 부인께서 상냥하셔서 다행이지, 이거 엄청난 무례야. 귀족 모독으로 몰릴 수도 있다고.”


 레리아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설마 울고 있는 건 아니겠지? 눈물을 보면 또 마음이 약해질 것 같 았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아직 어린 소녀가 아닌가. 그래도 잘못한 점은 지적해 줘야 했기에, 나는 일 부러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일단은 백작 부인이 나오시면 제대로 용서를 빌었으면 좋겠어.”

“.......”

“정말로 조용히 몇 시간만 서 있다가 돌아갈 계획이었는데....... 이목이란 이목은 다 끌어 버렸네. 무리하지 않아도 됐는데, 레리아.”

다들와인을한잔씩들고있기에넌지시클라리스에게도한잔권한것이화근이었다.옆에서그말 

을듣고있던레리아가신이나서와인잔을쟁반에받쳐오다기어코쏟아버렸으니.

되짚어 봐도 아찔하다. 깨진 유리 조각에 어딜 다치기라도 하면 어쩔 뻔했어. 아찔한 느낌이 온몸에


물리적으로 느껴지는 것 같았다. 꼭 마력이 나를 찌르는 것 같은 느낌이 자꾸만 들었다. 쿡쿡. 자꾸만. 이 방 안에선 마력이 흐를 리가 없는데도. 나는 피곤하게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애초에 네가 너무 갑작스럽게 나타났을 때부터 너무 놀랐.......” 문득머릿속을스치는의문이있었다.나는눈을두어번깜빡이다가,천천히방금떠올린의문을입

밖에 냈다.

“그런데 레리아....... 너, 홀 안에는 어떻게 들어왔어?”

백작 부인인 클라리스의 시녀도 홀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홀 안에는 에우레디안의 보좌관이 직접 선별한 사용인들만이 출입할 수 있다고 분명히, 그랬는데....... 순식간에 팔다리에 소름이 돋았 다. 파우더 룸 안의 공기가 한겨울처럼 차갑게 식어 있는 것을, 나는 그제야 온몸으로 체감했다.

“어떻게.......”

어떻게 귀빈들이 전부 모여 있는 그 거대한 홀에, 황제가 드나드는 황좌 옆의 통로를 제외하면 출입 구라고는 거대한 자줏빛 문밖에 없는 그 홀에. 시녀복을 입은 시녀가 어떻게 입구를 지키는 문지기의 눈을피해홀안으로들어와서,누구의의심도사지않고내쪽으로.......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홱 뒤를 돌아보았다. 밤색 머리에 소녀다운 천진함을 가진 내 막내 시녀, 레리아는더이상울먹이지않았다.대신입꼬리가찢어질듯환한웃음을짓고있었다.

괴이한 웃음. “레리아. 너.......”


 나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휘장 너머 드레스 룸에서는 클라리스와 그녀의 시녀가 바스락거리며 드레스를 갈아입는 소리가 그대로 전해지고 있었다. 도란도란 나누는 말소리까지도.

나는 이를 악물었다. 뒤는 클라리스. 그리고 문밖에는 디에리고. 클라리스면 몰라도 디에리고의 눈 까지 속일 수 있을 만한 강자를, 대륙에서 손꼽는 신성을 가진 사제의 눈을 현혹해 의심조차 못 하게 만들수있는강자를,나는단한명밖에는알지못했다.그이름이신음처럼흘러나왔다.

“솔레이아.......”

“공주님.”

레리아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까드득. 어딘가에서 무언가 딱딱한 것들이 부딪히는 소름 끼치는 

멀리, 아득하게 긴 문밖의 저 복도로부터 뾰족한 굽이 대리석 바닥에 닿으며 나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그러고는 바로 이 문 앞을 지나친다. 지나쳐서, 홀 쪽으로....... 몸이 흠칫흠칫 튀었다. 이제는 살갗에 물리적인 통증이 느껴졌다. 공기 속에 녹아 있는 마력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 결결 이 피부로 느껴졌다.

머리가 눈물 날 정도로 느리게 굴러갔다. 뒤는 클라리스. 밖에는 이미 솔레이아에게 어떤 식으로든 현혹되었을 디에리고. 휘장 뒤에서 상냥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거의 다 되었어요, 공주님. 잠시만 더 기다려 주셔요.” 안돼.나오면!나는입술을짓씹었다.비명을질러도안돼.그러면어떻게해야.......나는덜덜떨리

는 입술을 움직여 간신히 속삭였다. “라울루스.”

유데타 너머의 절대자에게서는 답이 없었다. “라울루스. 라울루-.”

나는 채 말을 다 잇지도 못했다. 단 한 걸음으로 내 코앞까지 다가온 레리아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 다.악취가훅풍겨왔다.왜이제까지맡지못했나싶을만큼구역질나는썩은내였다.그제서야어렴 풋이깨달았다.죽었구나.이아이.레리아의초점없는갈색눈에공포에질린내가비쳤다.

“저랑 가요, 공주님.” “......!”

소리가 들려왔다. 또각, 또각.



 그 속삭임을 마지막으로 레리아가 작은 두 손으로 내 목을 졸랐다. 잡힌 목으로 순식간에 마력이 넘 어왔다. 소리 없는 비명이 터졌다.

** *

솔레이아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걸이로 복도를 걸었다. 몇 개의 대기실과 파우더 룸 앞을

지나쳤다. 그녀가 지나친 그 방 중 어느 한곳에서는 르보브니의 공주가 죽어 가고 있을 것이다. 솔레

이아는 잠시 생각하다가, 그녀의 새로운 인형이 된 죽은 시녀에게 명령했다. 

“그래도 역시 너무 훼손하지는 말렴, 레리아. 최대한 사지는 멀쩡하게. 어디 한 군데라도 뽑혀 나가 지는 않게. 숨만 붙어 있도록.”


그 공주의 몸은 분명히 쓸모가 있을 테니까. 솔레이아는 마른 입술을 축이며 연회장으로 통하는 거 대한 자줏빛 문 앞으로 다가갔다.

[서둘러.]

해골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주인의 음성이 들렸다. [재수 없는 기운,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으니까.] “......네.”

결국에는 이렇게 일을 벌이게 되는구나. 솔레이아는 속으로 작게 탄식했다. 주인의 조급함이 그녀 에게까지 전염된 것인지, 아니면 그녀가 주인에게 현혹되어 버린 것인지. 심장이 불안하게 고동치고 있었다.

더는 지체할 수 없다. 주인이 명령한다면 그녀는 따라야 했다. 오늘, 바로 에우레디안 벨고트에게서 답을 들어야 했다. 지하의 왕이 가장 두려워하고 피하고 싶어 하는 무언가가 내려오기 전에.

[서둘러. 서둘러. 서둘러. 어서. 빨리. 그놈이 알아채기 전에.]

하이데스가 대체 무엇에 공포를 느낀 것인지 솔레이아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일단 어떻게든 오늘

결판을내어주인을만족스럽게해야했다.그렇지못하면먹히는건그녀가될테니까. “솔레이아...... 님.”

죽은 시녀가 홀 안으로 침입하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던 문지기가 멍한 눈으로 솔레이아를 보았


 다. 솔레이아는 키가 멀대같이 큰 사내의 어깨를 가볍게 잡고 밀어냈다. 문지기가 힘없이 옆으로 밀려 났다.

솔레이아는 거대한 문 앞에 서서 표정을 가다듬었다. 초조하고 불안했던 기색은 금세 사라지고, 여 유로운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조급한 속내는 한 톨 내비치지 않은 낯으로, 솔레이아는 작게 속삭였 다.

“......열어.”

연회장으로 통하는 불그스름한 자줏빛 문이 활짝 열렸다.


** *

“하, 흑. 아.” 꼬박석달만에느껴보는고통이었다.숨통이틀어막히고,온몸의혈관한줄한줄이한계까지팽

창하는듯한감각.부풀어오른핏줄에살갗이갈가리찢겨나가는고통.

발목을 차가운 손들이 휘감았다. 시체의 손이었다. 살점이라곤 다 썩어 얼마 남지도 않은 손뼈가 드 레스 밑으로 내 발목과 종아리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밑으로, 지하로. 망령들의 세계로 나를 끌어당겼 다. 몸이 크게 휘청거리며 시야가 아찔하게 돌았다.

“아−.”

그러나 다음 순간 그 모든 것이 지나치게 갑작스럽게 멎었다. 몸을 얽매던 끔찍하고 극악한 고통이

탁 하고 끊겨 나갔다. 고통뿐만이 아니라, 몸의 모든 감각도 마찬가지였다.

[아.......]

나는 이 감각을 알았다.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감각이다. 시선을 내리니 희끄무레하고 반투명하 게변한손이보였다.

나는 아직 내 몸이 있던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몸과 겹쳐진 채로, 그러나 명백히 몸에서 떨어져 나온 채로. 알맹이를 잃은 껍데기가 줄 끊어진 마리오네트처럼 휘청거렸지만, 목을 조른 레리아의 손 아귀 때문에 내 몸은 아래로 무너지지도 못했다.


[하, 아, 이게, 뭐.......]


 영혼인상태에서도눈물을흘릴수있는걸까.아니면눈앞이점점뿌옇게변하는게눈물때문이아 니라, 내 몸이 죽어 가고 있어서? 시야 가장자리가 하얗게 물들고, 이윽고 눈앞이 완전히 명멸하기 직 전이었다. 거칠고 단단한 음성이 내 머릿속을 강타했다.

[정신 차려.]

내 뒤로 누군가 바닥을 디뎠다. 사라락. 은빛 머리카락이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스치는가 싶더니, 왼 쪽 시야에 긴 소맷자락이 휘날렸다. 누군가의 팔이 불쑥 튀어나왔다. 길고 구부러진 손톱이 돋아난 손 이레리아의목을콱움켜쥐었다.나는그손과팔뚝에힘줄이세게돋아난것을보았다.

벼락같은 깨달음이 내리꽂혔다. 라울루스.


[어디서 자꾸 거슬리는 소리가 들린다 했더니.] “허억!”


[설마 레모르디의 금기가 옛적에 깨졌을 줄은 몰랐지.]

목이졸린레리아가쇠를긁는듯한소름끼치는신음을내며버둥거렸다.긴손톱이돋아난손에닿 은 그녀의 살갗이 치익 타들어 가는 것이 보였다. 삿된 힘에 물든 레리아의 몸이 강대한 신성에 서서 히 타들어 가고 있었다.

라울루스가 레리아의 목을 비틀며 빈정거렸다.

[누구는소환자가없어서안넘어온줄아나.이거완전나만새된거네?]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이 뚝, 밑으로 추락함과 동시에 라울루스의 음성이 머릿속을 왕왕 울렸다.

[달려, 부스러기야.]

평소의 경박스러운 목소리가 아니라 낮게 가라앉은 싸늘한 목소리였다. 바로 곁에서 내는 것이라기 엔믿을수없을만큼아득한음성이뇌를휘저었다.

[그날 새벽처럼, 당장 죽을 것처럼 달려.]

[무, 무슨.......]

[나는 여기 오래 있을 수가 없으니까.]

그말을듣고나는더생각하는것을포기했다.레리아의손아귀에잡혀축늘어진몸을뒤로하고나 는 달렸다. 라울루스의 말대로, 망령들에게 뒤를 쫓기던 그 악몽 속에서 그랬던 것처럼.

[헉, 으흑.......]


 장담하건대, 핏자국이 은빛으로 빛나는 하얀 티셔츠와 청바지 차림을 한 영혼은 이 세계에 아마 나 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 영혼인 상태로 죽어라 달렸다. 문을 열어젖힐 필요도 없었다. 손은 문고리를 잡기도 전에 문을 쑥 통과해 버렸다. 기겁했지만 달려오던 반동 때문에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그대로 문을 통과해 밖으로 튀어나왔다. 여전히 느껴지는 감각은 아무것도 없 었다.

“......!”

그리고 나는 문밖의 디에리고와 정통으로 눈이 마주쳤다. 순한 금안은 반쯤 몽롱하게 풀려 있었다.

나는그금안에흐릿하게비치는내모습을보았다.내가보이는,건가?


하지만 디에리고를 붙잡고 ‘제가 지금 아무래도 큰일이 나게 생긴 것 같은데 좀 도와주실래요?’라고

절절하게 매달릴 새도 없었다. 죽어라 도망치기에도 부족한 시간에 매달리긴 무슨! 게다가 디에리고

는현혹에서아직풀려나지못한건지영제정신이아닌것같았다. 

까드드득. 아까와 비슷한 괴음이 다시금 고막을 찢었다. 무언가가 바닥을 거세게 긁는 소리 같았다. 나는 이를 악물고 디에리고를 지나쳤다.

“공주님......?”

[......!]

그가 나를 부르지만 않았다면 틀림없이 그랬을 거였다. 디에리고는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손으로 머 리를 짚었다.

“그 상태는 무슨....... 그런데 왜 이렇게 갑자기 몸이, 윽.” 그의몸이크게휘청거렸다.나는반사적으로손을뻗었지만내손은그의팔을그대로쑥통과해들

어갈 뿐 그를 붙잡지는 못했다. 디에리고는 벽에 기댄 채 간신히 숨을 몰아쉬었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금안에서서히총기가도는게보였다.그러나나는그가완전히몸을회복할때까지기다릴수가없 었다.

“공주님, 뭐라 말씀을.......”

[제가!]

나는결국참지못하고그의말을가로막았다.마음이점점더급해졌다.당장이라도죽은시녀가문 을박차고튀어나올것같았다.나는연신굳게닫힌대기실문을돌아보며횡설수설내뱉었다.


 [제가 급하게 도망을 좀 가야 해서요. 디에리고도 얼른 정신 차리고, 클라리스를 부탁해요.]

“예? 어딜, 윽, 어딜 가시려고요?!”

디에리고는 나를 붙잡으려는 듯 손을 뻗었지만 헛수고였다. 그의 몸이 결국 아래로 푹 무너졌다. [디, 디에리고.]

에우레디안 다음으로 가장 강한 사제라며! 이대로 두고 가도 괜찮은 거야?! 그러나 내겐 선택의 여 지가 없었다. 디에리고가 자기 몸을 건사할 수 있을 정도로는 능력이 있으리라고 믿는 수밖에는. 게다 가지금당장급한건나였다.


[망할.......]

결국 나는 욕설을 짓씹으며 끔찍할 만큼 긴 복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내가 도망칠 데라곤 하나였다.


황궁밖,신전.라울루스는신전으로가라는말은하지않았다.그러나본능적으로알수있었다.이땅 에서 나에게 가장 안전한 곳......!

[흑, 헉, 허억.......] 그러나나는그대로룩시아궁을빠져나가지는못했다.막코너를돈순간,환영식이열리고있던거

대한홀의자줏빛문이활짝열려있는것을목격한탓이었다. [헉.]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저 안에는 내 소중한 이들이 전부 들어가 있었다. 에우레디안, 세르게이, 페르 난디스. 형부......! 지체하지 말고 얼른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다리가 돌처럼 뻣뻣 하게 굳었다. 선뜻 몸이 움직여지질 않았다.

[으.......]

까드득. 사람을 조급하고 미치게 만드는 거슬리는 소리가 다시 귓전을 때렸다. 나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질질 끌며 활짝 열린 자줏빛 문 앞으로 다가갔다. 아니야, 아닐 거야. 타국의 귀빈들까지 전부자리한곳에서설마솔레이아그여자가이자리를뒤집어놓을리는.......

그러나내바람은홀안의광경을눈에담음과동시에산산이조각났다.

** *


 벨고트 황성의 가장 큰 중앙 연회장에는 매캐한 수증기 냄새가 가득했다. 영문을 모르는 귀족들이 어리둥절하게 주위를 둘러보며 수상한 냄새의 근원지를 찾았다. 그러다 모두의 시선이 활짝 열린 문 아래의 여인에게로 꽂혔다.

솔레이아 엘라드, 새카만 드레스를 휘감은 적갈색 머리카락의 마법사가 거대한 홀 입구에 서 있었 다. 그녀가 안쪽으로 발을 디딤과 동시에 두 개의 기운이 허공에서 첨예하게 맞부딪치며 스파크가 튀 어 올랐다. 수증기 냄새가 점점 더 진해졌다.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낀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솔레이아는 그 모든 목소리를 가볍게 무시했다. 높 은 구두가 대리석 바닥과 닿아 또각거리는 소리에 홀 전체가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황제와의 거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솔레이아는 황좌를 향해 다가가며 목소리를 냈다. “제가 일전에 드린 제안, 생각해 보셨나요, 폐하?”


“.......”

에우레디안 벨고트. 벨고트의 주인만이 앉을 수 있는 황금의 왕좌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은 황제는

비뚜름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그대가 모르리라 생각지는 않았는데.”

“저는 오늘 그날의 답을 들으러 왔답니다. 시간은 충분히 드렸다고 생각해요.” “공석에서 사담을 하자?”

명백히 비아냥거리는 어조였다. 불그스름한 자안이 차게 솔레이아를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지하의 가호를 받는 솔레이아라도 만만히 보기 어려운 눈이었다. 하지만 이미 지난 5년 동안 수도 없이 받았 던 시선이기도 했다.

“이것은 무척 공적인 일이랍니다, 폐하. 무려 황후의 자리와 벨고트 마탑의 존속이 걸린 문제인 것 을요.”

솔레이아의 평온한 목소리에 주위에서 소리 없는 파란이 일었다. 황후. 그리고 벨고트의 마탑. 흥미 로운 주제가 아닐 수 없었다. 아제키엔의 마법사들이 눈을 빛내며 이쪽을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황제 역시 그 기색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그가 천천히, 그러나 짓씹듯 내뱉었다.

“솔레이아 엘라드. 그대는 방금의 내 말이 경고로는 들리지 않았던 모양이지.”

꽉 억눌린 음성과는 정반대로 창처럼 날카로운 신성이 사방으로 짓쳐 들었다. 솔레이아는 사방에서


 제 목을 겨눠 오는 무형의 기운에 짧게 웃었다. 당신은 알까? 당신이 그렇게 귀히 여겨 손대지도 못하 고 안달복달하는 공주가 지금 죽어 가고 있다는 걸. 친절하게 그 사실을 알려 주고 싶지는 않았다. 저 남자가 한발 늦어 이미 싸늘하게 죽은 시체를 마주하게 하는 것도 꽤나 기꺼우리라.

까드득. 해골이 지상을 긁었다. 지상에 허락되지 않은 앙상한 손모가지가 레모르디의 경계를 넘고 지상으로 손을 뻗었다. 참을성 없는 그녀의 주인이 그새를 못 참고 들썩였다.

툭, 솔레이아의 발치로 또다시 뼛조각이 하나 떨어졌다. 이제는 정말로 망설일 여유가 없었다. 솔레 이아는 제 목을 정확히 겨눈 날카로운 신성을 살짝 밀어냈다. 손가락이 겨누어진 신성에 닿자마자 살 갗이 타들어 가며 화끈한 통증이 번졌다. 솔레이아는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


“......당신께서 망설이시는 게 이 회장에 있는 인간들 때문이라면.”

흑요석같이 반짝이는 눈에 순간적으로 초점이 사라졌다. 그녀는 빛조차 삼켜버리는 까만 구슬 같은


눈으로 연회장을 한 바퀴 훑었다.

멀찍이서 관전하고 있던 아제키엔의 마법사들이 그녀의 시선을 받고 흠칫했다. 사절의 대표로 보이 는 마법사가 경악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지금 솔레이아가 뿜어내는 마력과 연회장을 스멀스멀 잠식하는 어둠의 정체를 짐작한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들이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공기가 떨었다. 빛과 온기가 감돌던 회장 안을 싸늘한 지하의 공기가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갔다.

황실 악단이 연주하던 부드러운 선율이 일시에 뚝 멎었다. 음습하고 축축하며 쾨쾨한 공기가 휩쓰 는 곳마다 생기를 앗았다. 들이쉬고 내뱉는 호흡이 멈추고, 자유로이 움직이던 몸들이 전부 동작을 멈 추고, 산 자의 부드럽던 살갗들이 뼈처럼 굳었다.

생기를 빼앗긴 공간에 이윽고 완전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웅성거리던 소리. 드레스와 정장 재킷이 사각이며 스치던 소리. 잔을 맞대는 소리. 그 모든 생동감 넘치는 소리가 뚝 끊겨 나간 자리에는 괴이 한 침묵만이 남았다.

명백히지하의주인이내린힘이었다.인간이행할수있는마법의범위를아득하게뛰어넘은힘.솔 레이아는 그제야 다시 꽃같이 웃어 보였다.

“이제는 제대로 저와 대화를 해 주실까요?”

에우레디안은 기가 찬 숨을 뱉어 냈다. “내궁에서멋대로마법을쓰는게대체몇번째인지,이제는짐작할수도없군.뭘한거지?” “걱정 마세요. 일시적으로 산 자의 흐름을 멈추어 놓았을 뿐이니.”


 불그스름한 자안이 주위를 휘 훑었다. 딱딱한 돌조각처럼 굳은 귀족들, 그리고 타국 사절들의 모습 에 머리가 지끈 아파 왔다. 이 망할 삼국 재협약 건을 한 방에 처리해 버릴 심산으로 벨고트로 오게끔 했는데 이렇게 되면 전부 물 건너갔다.

솔레이아엘라드는경이로울만큼무식하게그를지금껏괴롭혔던두가지건수를전부쥐고흔들 었다. 글루카만 삼국 협약. 그리고 솔레이아 엘라드 그 자체. 여러 갈래로 꼬아진 새끼줄 같던 인내심 이뚝뚝끊겨나갔다.

“답을 달라. 그대를 황후로 삼아 목줄을 채우라는 제안에 답을 달라?”

에우레디안은 사납게 빈정거리며 황좌 아래의 계단을 밟았다. 채 다섯 개도 안 되는 계단을 느리게


내려간다. 걸음걸음마다 지금껏 억눌려 왔던 분노가 점점이 묻어났다. 그의 몸을 휘도는 칼날 같은 신

성이 계단에 덮인 카펫을 찢었다. 반질반질한 대리석 바닥을 스치며 섬뜩한 소리와 함께 흠집을 만들

어 냈다. 

솔레이아는 매끄럽게 웃었다. 그녀는 어떤 상황에서든 웃음을 만들어 내는 것을 잘했다. “벨고트 마탑, 필요하지 않으신가요?”

“어둠에 뿌리내린 마탑은 필요하지 않아.”

“마탑은 언제나 제 뜻에 따르지요. 당신께서 저를 취하신다면 벨고트를 위해 충성을 다할 것이고, 저를 버리신다면 그때야말로 진정 어둠에 뿌리내린 집단이라 명명하심에 무리가 없겠지요. 버려진 마탑이 어떻게 나올지는 너무나 당연하고요.”

에우레디안은 비뚤게 입매를 뒤틀었다. 솔레이아 엘라드는 정말로 그라는 인간이 한계의 한계까지 가면어떻게변할수있나시험해보려는것처럼굴었다.

벨고트 마탑. 선대 황제들이 그 막대한 세금을 쏟아부어 가며 양성했던 벨고트 마법의 총 집합체. 아,그래.늘귀찮은눈엣가시같았던그마탑.없으면어떤가?이성과현실감따위는전부집어치워버 린붉은자안에확불길이일었다.

“일을 이렇게까지 만들어 놓고 아직도 내게 거래를 제안하다니. 그건 그것대로 참 놀랍군.”

에우레디안은 다섯 걸음을 남겨 두고 멈춰 섰다.

“언제 뒤통수를 칠지 모를 삿된 탑을 존속시키느니 차라리 빠르게 적으로 돌리는 게 낫겠지. 설마 내가마탑하나못휘어잡을것같나?잊고있는것같은데,여긴마왕국이아니라신성제국이야.”

아무래도 지난 100여 년간 지나치게 마법사들의 비위를 맞춰 왔던 게 분명했다. 에우레디안의 머릿 속에서 마법과 마법사 양성에 대한 미련이 깨끗이 지워졌다.


 “그러면 또 뭐가 남았더라. 아, 감히 르보브니의 공주를 입에 올렸던가, 그대가?”

예레니카가 마침 자리를 비운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녀가 돌아오기 전에 일을 처리하려면 서둘러야

겠다.

“여기서 그대를 잡아넣고 공주를 본국으로 돌려보내면, 그 역시 그대가 가진 패는 못 되겠군.”

챙강. 어딘가에서 유리가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날카로운 창처럼 뻗은 은빛 신성이 유연하 게 구부러지며 휘몰아쳤다. 밀랍 인형처럼 뻣뻣하게 굳어 버린 사람들 위를 장막처럼 넓게 덮고, 하나 의 목표물을 향해 쇄도했다.

어디선가작은비명소리가들린것같기도했다.



싸늘한 정적이 홀 안에 내려앉아 있었다. 나는 하얗게 질린 채 주위를 돌아보았다.

[이게 뭐야......?]

거대한홀은꼭생기라고는하나없이정지해버린정교한그림같았다.나는다급히내가아는얼굴 들을 찾았다.

[세르, 세르게이.]

다행히 곧바로 오른쪽 테라스 앞에서 세르게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그에 게 달려갔다가 경악했다. 밀랍 인형처럼 뻣뻣하게 굳은 세르게이는 내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녹색 눈동자 속에는 내가 비치지 않았다. 기겁하며 나를 제 뒤로 숨기기는커녕 놀란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 기만 했다.

세르게이뿐만이 아니었다. 옆의 페르난디스도, 레바논 공작도, 전부 살짝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굳 어 있었다. 단단한 돌조각처럼 차갑게 굳은 뺨에 손을 뻗었지만 손을 쑥 통과해 들어갈 뿐, 어떤 감각 도 느껴지지 않았다. 생명력을 빼앗긴 사람들이 되살아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당장 기절하고픈 정신을 간신히 추스르며 연회장 안을 다시 돌아보았다.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딱딱하게 굳어 버린 사람들. 일렁이지 않는 촛대. 바람에 휘날린 채로 허공에 딱 멈춰 버린 자줏빛 커 튼. 흐르지 않는 공기.

[......망할.]

** *


 나는 욕설을 내뱉으며 초조하게 고개를 돌렸다. 누구의 소행인지는 바보라도 알 것이다. 아제키엔 의 마법사들까지 자리한 이곳에서 이만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건 솔레이아 엘라드밖에는 없었다. 그여자,정말로얼마만큼의능력을가지고있는거야?이쯤되면인간이라고볼수도없을것같은데.

공기가 한 차례 떨었다. 그리고 이어, 몸속의 피를 전부 얼려 버리고도 남을 만큼 서늘한 목소리가 무겁게 귀를 파고들었다.

“그러면 또 뭐가 남았더라.”

맹세코 내가 아는 남자가 낼 수 있으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목소리였다. 나는 자석

에 끌려가기라도 하듯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가 들려온 쪽은 홀 저편, 황좌 앞이었다. 

“감히 르보브니의 공주를 입에 올렸던가, 그대가?”

나는 세르게이를 방패 삼아 몸을 숨기고 팔 사이로 상황을 훔쳐보았다. 에우레디안과 솔레이아가


대치하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말다툼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와, 저 사람 정말 화가 났다. 어떡하지? 그래도 일단 에우레디안 옆에 있는 게 좋은 건가? 나 이런 영 혼 상태로 계속 있다간 누가 옆에서 마법으로 불만 켜도 끽 소멸해 버릴 것 같은데....... 나는 불안하 게 그들의 대치 상태를 훔쳐보다가, 몰랐던 사실을 깨닫고 숨을 집어삼켰다.

‘단순히 말다툼하는 게 아니었-.’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바로 머리 위에서 창문이 부서져 내렸다.

[......!]

산산이 부서진 유리 조각이 머리 위에서 흩날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작게 비명을 질렀다가, 이내 그 날카로운 유리 조각들이 머리 위의 장막에 가로막혀 밑으로 떨어져 내리지 못하는 광경을 목도했다.

홀 전체를 넓게 뒤덮은 투명한 은빛 장막이 반짝였다. 여전히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나 는 본능적으로 그것이 에우레디안의 신성임을 알았다.

나는 신음처럼 내뱉었다.

[황제의 신성.......]

가장 농도 짙고, 정제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신성이었다. 불안하게 허공으로 흩어질 것처럼 일렁 이던 내 영혼의 표면이 다시 제 형태를 이루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순간이었다. 나는 감각을 제대로 느낄 수 없는 상태에서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조여 오는 마력을 느꼈다.

[윽.......]


 솔레이아의 마력이었다. 지상에 존재하는 두 개의 초인적인 힘이 맞부딪히며 기긱거리는 소름 끼치 는 마찰음을 만들어 냈다. 공기가 떨었다. 푸르스름한 은빛으로 번쩍이는 신성이 명확한 창끝의 형태 로 쇄도했다. 그리고 허공에 휘몰아치는 그 신성 아래에서, 스멀스멀 증식하듯 발밑에 질척하게 고이 는 것은,

까드득.

[망할.]

나는 다시 한번 욕설을 짓씹으며 연회장 바닥에 서서히 질척하게 고여 가는 시커먼 기운을 보았다. 그 기운은 점점 영역을 넓혔다. 그냥 검은 기운이 아니라, 소용돌이처럼 뱅뱅 돌고 있었다. 그 새카만


구멍같은기운사이로새하얗게빛나는뼈가보인것도같았다.꼭,꼭손의모양을한것같은뼈다귀 였다.


불현듯 어떤 깨달음이 머리를 스쳤다.

[......인간이 아니야.]

솔레이아의 힘이 아니다. 한낱 인간이 가질 힘이 아니었다. 지옥에서 올라온 해골. 망령인가? 하지 만 고작 죽은 망령에 불과하다면, 이렇게. 발이 저절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희뿌옇 던 몸이 점점 더 투명하게 변해 가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지상에서 사라져 버릴 듯이 일렁이고, 무언 가에 할퀴어지기라도 하듯 스크래치가 났다.

[설마 레모르디의 금기가 옛적에 깨졌을 줄은 몰랐지.]

라울루스가 짓씹듯 내뱉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 달았다. 레모르디에는 유데타를. 마력에는 신성을. 지하의 미지의 존재에게는...... 유데타 너머의 절 대자를.

라울루스를 지상으로 소환해야겠다.

하지만 그게 가능하냐고! 나는 신성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라울루스를 소환하려 면 황제 정도의 신성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데. 내가 시도해 봤자 개죽음밖에 더하겠냐는 소리까지 들었는데. 내가 라울루스를 소환할 수 있을 리가.......

[.......]

그러나 곧바로 다른 생각이 치밀었다. 에우레디안은 홀 안의 사람들이 머리털 하나 다치지 않도록 할 것이다. 그의 나라, 그것도 그의 황궁에서 그런 꼴이 벌어지도록 좌시할 남자가 아니니까. 하지만 저 기이한 뼈다귀가 정말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힘이 아니라면, 레모르디 너머의 힘이라면. 그러면


 정말로 앞일은 모르는 거잖아!

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였다.

“아.”

에우레디안이 짧게 신음했다. 나는 멀리서도 그의 오른쪽 뺨에 휙 피가 튀는 것을 보고 기함했다.

[저, 저, 저 여자가.......]

지금 누구한테 손을 대! 그것으로 내 이성은 완전히 끊겼다. 내 남자 얼굴에 상처가 났어! 나는 무의 미한 가정을 세우고 확률을 계산하는 짓거리를 당장에 집어치웠다. 망설이지 않고 뒤돌아섰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시도라도 해 보고 죽어야겠다...! 

** *

영혼 상태가 되어서 좋은 게 뭐가 있느냐, 하면 딱 하나였다. 앞길에 장애물이 없다는 것. 벽, 사람, 마차, 심지어는 성문까지. 나는 내 키만 한 폭의 바위를 뚫고 지나가는 기이한 경험을 하며 성문을 벗 어났다.

[......어억!]

반면단점은뭐가있느냐하면정말오만가지것에다휩쓸린다는것이다.때맞춰슝불어온바람에 몸이사정없이이리휘청저리휘청거렸다.뭐라도붙잡으려손을뻗었지만손은맥없이모든것을통 과해 버리기 일쑤였다.

이런 게 무중력 상태라는 건가! 정말 잎새에 부는 바람에도 괴로워하게 됐어!

그래도 어쨌든 속도는 빨랐다. 몸을 지탱하려는 시도를 때려치우고 바람을 타고 슝 날아가기만 하 면 죽어라 뛰는 것보다 배는 더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으니까. 허공을 데굴데굴 구르는 경험은 정말 다시 태어나도 못 할 거야.......

어쨌든 신전에 도착하는 것은 말을 타고 달리는 것만큼이나 빨랐다. 신전 안쪽에 발을 들이니 그나 마 나를 억죄던 마력의 기운이 옅어졌다. 나는 앞뒤 재지 않고 곧바로 제단으로 향하는 계단에 발을 디뎠다.

“라울루스께서 직접 걸음 하시는 곳이라 출입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계단에잘못올라갔을때분명히디에리고가저위의신전은라울루스가직접강림하는제단이 라고 그랬었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계단을 나는 듯이 올랐다. 마침 바람도 등 뒤에서 불어와 계단을 오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와, 씨. 왜 이렇게 높아!]

그렇다고는 해도 높긴 정말 지랄 맞게 높았다. 위가 까마득했다.

[더럽게 높네!]

한참을 올라도 끝이 보이질 않았다. 이렇게 높게 짓는다고 유데타에 가까워질 리도 없는데 뭐 한다 고 쓸데없이 이렇게 높게......!


딱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뒤에서 강풍이 몰아쳤다. 종잇장보다도 더 연약한 영혼 상태의 몸이 데굴 데굴구르며계단위를슝날았다.


어, 어지러워. 토할 것 같아.

[......허억.]

태풍 같은 강풍이 한 번 더 불었다. 몸이 허공으로 슉 솟구쳤다가, 사정없이 아래로 패대기쳐졌다.

[악.]

나는 그대로 바닥을 굴렀다.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 상태니 망정이지, 정말 육체를 입고 있었다면 그 대로 뼈가 다 바스러졌을 거였다.

[어지러워.......]

멀미를하는것처럼울렁거렸다.바람에멀미를하다니,이또한정말기이한경험이아닐수가없었 다. 별걸 다 겪는구나, 진짜. 나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바람이 불어 서 다행이랄까. 나는 순식간에 제단 위에 올라 있었다.

바리샤드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저 멀리 솟은 마탑이 새끼손가락만큼 작아져 있었다. 마탑 의 새카만 첨탑의 창문마다 전부 불이 들어와 있었다. 황궁에서 비상사태가 일어났다는 것을 인지한 것 같았다. 솔레이아의 수하들이 우글거리는 마탑이니 딱히 반길 일은 아니었다.

시선을 옮기자 손톱만 한 황궁이 보였다. 지금 저기서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물며 바리샤드 시내로부터 뒤돌았다.

거대한 기둥들 사이, 한가운데에 제단이 놓여 있었다. 거대하고 평평하게 놓인 대리석 제단은 내 키 를훌쩍넘을만큼높았다.나는고개를들어그위를바라보았다.올라가야하나?


 그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바람이 한 번 더 들이닥쳤다. 종이 인형 같은 몸이 공중으로 솟았다가, 제 단 위에 가볍게 내려앉았다. 바람이 나를 돕나 보다. 나는 더 생각을 거치지 않고 힘주어 내 하찮은 절 대자를 불렀다.

[라울루스.]

여기서부터가 문제다. 라울루스를 어떻게 소환할 것인가? 나는 간절함을 담아 한 번 더 그를 불렀

다.

[라울루스, 듣고 있어요?]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아까 현신한 라울루스가 레리아의 목을 움켜쥐고 서늘하게 일갈하던 걸 똑 

똑히 기억한다. 지상에 직접 개입할 수 없다는 유데타의 금기를 깨고 라울루스가 지상으로 내려왔었 다. 하지만 분명히 오래는 머물지 못한다고 했어.


신전에서 라울루스의 모습을 그린 벽화를 처음 보던 날, 그와 했던 대화가 머릿속을 스쳤다.

[10년에 한 번, 내가 지상으로 내려갈 때, 내 아이들은 내가 내린 이름으로 나를 소환한단다.]

라울루스가 내린 이름. 세례명. 내 세례명은 몰랐지만....... 하지만 알고 있는 이름들은 많았다. 신전 에서 라울루스의 벽화 밑에 깨알같이 쓰여 있던 역대 벨고트 황제들의 풀 네임들을 똑똑히 봤었다.

가장 처음에 눈에 담았던 이름. 가장 첫 줄 첫 번째에 쓰여 있던 이름. 초대 황제의 이름. 라울루스가 자신의 첫 아이의 세례명이었다며 자랑스레 알려준 이름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하지만 그걸로 될 까......?나는일단뭐라도해보기위해입을열었다.

[아드레아.]

휙. 귓전에 바람이 스쳤다. 아니, 바람이 아니라 허공을 가르는 파공음이었다. 나는 반신반의하면서

도 힘주어 내뱉었다.

[라카이스 루 엘리자드....... 아드레아, 벨고트.]

내가 뱉은 이름에 담긴 신성이 반짝이는 빛무리와 함께 제단 위에 나타났다. [아.]

반짝이는 빛무리가 소용돌이치며 제단 위를 타고 올라가나 싶더니, 천장에 뚫린 동그란 구멍 위로 사라졌다. 나는 멍하니 위를 올려다보았다. 꼭 하늘을 관찰하는 천문대처럼 둥글게 뚫린 구멍 위로 새 카만 밤하늘이 보였다. 별들이 반짝였다.

바람이 불었다. 제단이 미세하게 떨었다. 몸이 그대로 허공으로 튕겨 나갈 것같이 속절없이 흔들렸


 다. 하지만 뭔가 방금과는 묘하게 느낌이 달랐다. 뭔가...... 깃털처럼 가벼워서 산들바람에도 휙 날아 갈 것 같던 몸이 아주 조금 무거워진 것 같은 건....... 다음 순간, 머리를 울리는 익숙한 목소리가 있었 다.

[내놔.]

[네, 네?]

영혼 상태라 그런지 평소보다 더 뇌를 곤죽으로 휘젓는 듯한 음성이었다. 계속 묵묵부답이던 라울 루스가 드디어 소리를 낸 것이다.

[아무거나 내놔. 나를 지상에 붙잡아 놓을 매개체.]


[매개체......?] 

[십자가면 더 좋고, 나를 상징하는 아무 조형물이라도 좋으니까 아무거나.]

아무거나? 나는 재빨리 내 몸을 훑었고, 인상을 팍 구겼다.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지금 육 체를 입고 있는 게 아닌걸! 핏자국이 낭자한 청바지에 흰 티셔츠. 십자가나 늑대 비슷한 건 있을 리도 없을뿐더러, 있었대도 만질 수가 없을 거였다. 내 몸을 여기저기 더듬어 봤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망할, 진짜 한 번에 되는 일이 없어......!

내가막욕한바가지를또내뱉으려던찰나였다.

달랑.

[어?]

무언가가 귓불에 무겁게 늘어졌다. 육체에서 분리된 이후 처음으로 명확하게 느껴지는 감각이었다. 곧이어 귀뿐만이 아니라, 온몸에 ‘무게’가 생겼다.

“어.......”

나는 얼떨떨하게 신음을 흘렸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고 있었다. 나는 당장 내 몸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프릴 잡힌 짙푸른 드레스가 보였다. 여전히 반투명하기는 했지만 분명한 예레니카의 몸이었다. 내 몸은 아직 황궁에 있을 텐데?

그러나 그런 쓸데없는 걸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환영식을 위해 치장했던 기억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쳤다.

“라울루스, 정말로 아무거나 된다고 했죠?”


 [그래, 아무거나.]

나는 당장 귀에 걸린 귀걸이를 풀어냈다. 귀에 손을 가져다 대며 과연 잡힐까,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귀걸이는 제대로 잡혔다. 은빛 십자가 모양에 가운데 자줏빛 보석이 박힌 귀걸이. 내가 귀걸이를 풀어 내 제단 위에 내려놓자 라울루스의 음성이 대번에 뚱해졌다.

[야, 그건 너무 하찮잖아.]

“시끄러워요. 아무거나 괜찮다고 했으면서.”

[아무리 그래도 내 체면이.......]


이 신이 정말? 나는 눈을 부릅뜨고 위를 노려보았다. 일분일초가 아까운 상황에! “그런 건.......”


결국나는가장예쁘게활짝웃으며이를갈았다.

“일단 내려오고 나서 생각하면 안 될까요?”

내남자가지금무서운언니랑뭘하고있을지모르는데!라울루스는여전히영마음에차지않는다 는 기색이었다. 투덜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때렸다.

[이런하찮은거로나를지상에묶어놓는건네가최초일거다,아이야.그것도감히내첫아이의이 름으로.]

바람이 나를 한 바퀴 휘감았다. 예레니카의 몸에 미약하게 돌던 신성이 쭉 빨려 나가는 것이 느껴졌 다. 동시에 몸의 감각이 순식간에 다시 전부 사라졌다.

[아.]

다시 영혼 상태로 돌아온 몸이 작은 바람에 휘날리듯 비틀거렸다. 무언가를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시야가 거세게 뒤흔들렸다. 대리석 제단이 금방이라도 쩍 갈라질 것같이 떨었다. 언뜻 시야에 불그스 름한자줏빛이스친것같기도했다.

점점이빛나던빛의무리가번개치듯번쩍빛났다.내가제단위에서보고들은것이라고는그게다 였다. 다음 순간 거세게 불어닥치는 소용돌이를 버티지 못하고 제단 아래로 휙 쓸려 떨어졌으니까.

[으어억.]

나는괴상한비명과함께제단아래를데굴데굴굴렀다.나는비명을참고간신히고개를들었다.그 리고고개를듦과동시에머릿속을쾅쾅뒤흔드는전음이아닌,정말인간의목구멍을타고나오는육


 성을 들었다.

“안녕, 부스러기야.”

[어.......]

산뜻하게 피크닉이라도 나온 듯 가벼운 어조였지만 단단한 울림이 있는 목소리였다.

[라울루스......?]

“이야,내가내발로지상을밟는일은다시는없을줄알았는데.”

경박스러운 말투는 그대로였다. 성별을 분간할 수 없는 목소리 자체는 내게 익숙했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전혀 익숙하지 못했다.

발목 아래까지 끌리는 길고 반짝이는 은발이 제단 아래에 물결쳤다. 백지장처럼 흰 피부에 섬세하


게 조각된 이목구비, 예스러운 하얀 튜닉 사이로 보이는 평평한 가슴팍, 길고 뾰족하게 자라난 열 손 톱.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주위를 맴도는 위압적인 신성.

제단위에방만한자세로턱을괴고앉아나를내려다보는존재는말그대로신이었다.홀린듯중얼 거림이 새어 나왔다.

[서, 성공했.......]

나는 그 사실에 스스로 감탄하기도 전에 몸을 사정없이 죄는 압박감에 신음을 터뜨렸다.

[......헉.]

꼭 처음 신전에 발을 디뎠을 때의 느낌과 같았다. 황궁에서 에우레디안이 처음으로 폭발하듯 터뜨 렸던 신성과도 닮아 있었다. 정제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신성.

감각이 없으니 고통도 없었지만, 절대자의 발아래 짓눌리는 듯한 위압감이 나를 거세게 몰아붙였 다.내가정신을못차리고숨을몰아쉬자라울루스가쯧쯧혀를찼다.

“내무게도모르고냅다소환부터했으니네가버틸수있을리가없지.옜다,일단받고.”

휙. 내 앞으로 무언가가 날아왔다. 나는 몸을 숙이고 헉헉대며 숨을 고르는 와중에도 라울루스가 던

진것을기가막히게받아냈다.

[이게 뭐.......]

달랑.손가락한마디만도안되는작은은빛십자가가휘황하게빛났다.가운데에박힌자줏빛보석 이 진짜 사람의 눈처럼 번뜩였다.


 귀걸이를 받자마자 나를 짓누르던 무게가 일시에 사라졌다. 쪼글쪼글 쪼그라들기 일보 직전이었던 몸에훅바람이들어차며도로빵빵하게펴지는것같은느낌이들었다.

[와아, 이거 정말, 장난이 아니잖아.......]

시야가 핑글핑글 돌았다. 어쨌든 성공한 거지. 그렇지? 나는 아직도 미약하게 남은 위압감에 적응하

자마자 홱 고개를 들었다. 라울루스가 고개를 쭉 빼고 나를 이리저리 뜯어보고 있었다. “너 그렇게 생겼었구나, 부스러기야.”

[아니, 뭐. 지금까지 다 보고 있었던 것처럼 말씀하시더니.......]


“꽤 예쁘장하게는 생겼네.”

내가지금그런말을들을주제가아닌것같은데......? 나는멍하니입을벌렸다. 다시보니정말


로.......

[미인.......]

와, 대박. 대박 미인. 너무 정교해서 무서울 정도의 미인이다.

나는 도무지 다물어지지 않으려는 입을 손으로 턱 막았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미 모였다. 아니, 성별이 어느 쪽이든 무슨 상관이랴. 저렇게 예쁜데......! 테제비아 언니와 솔레이아보다 도 예쁜 사람이 있었어....... 나는 신음했다. 역시 세상은 넓고 미인은 많다......!

“내가 예쁘게 생긴 건 알겠는데.”

휙. 흰 소맷자락이 허공에 펄럭이는가 싶더니 라울루스가 그대로 제단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내 앞에 턱 착지한 것은 더 이상 예쁜 미인이 아니었다. 내 몸집의 다섯 배는 족히 넘어 보이는 거대한 은 빛 늑대가 눈앞에서 그르렁거렸다.

[으악!]

나는 기겁해서 푸드덕 뒤로 물러났다. 바로 코앞에 짐승의 머리가 있었다! 늑대의 눈은 꼭 내 눈 색 과 같은 하늘색이었다. 나를 기겁하게 한 주제에 늑대는 나른하게 머리를 한 번 털었다. 자르르 윤기 도는 은빛 털이 반짝이는 빛을 점점이 두르고 흔들렸다.

[아무래도 본체보다는 분신으로 있는 게 낫겠다. 워낙 얼렁뚱땅 소환당해서 말이지.]

[좀 예고라도 하고, 좀......!]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나는 늑대의 코, 혹은 주둥이로 추정되는 것을 죽 밀어냈다. 희한하게도 손


 은 주둥이를 통과하지 않고 제대로 닿았다. 접촉과 동시에 정수리까지 채워지나 싶었던 신성이 다시 죽 빨려 나갔다. 라울루스를 소환하는 데에는 내가 가진 신성이 소모되는 게 분명했다. 은빛 늑대가 나른하게 그르렁거렸다.

[지금네가이렇게여유부릴때가아닐텐데,아가야.]

[네?]

[더늦었다간그아이가제집을전부때려부술것같은데.......]

누가 뭘 한다고? 그제야 잠깐 잊고 있었던 상황이 떠올랐다. 나는 꽥 비명이 터지려는 걸 혀를 깨물 어 가며 참았다. 아, 아! 솔레이아! 에우레디안!


내 앞에 자세를 낮추었던 늑대가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그아이가네몸을발견하기전에돌아가는편이좋지않을까?네몸이그꼴로쓰러져있는걸보면 아마 정말로 눈이 돌아갈 모양인데.]

거기다 내 몸까지......! 나는 기겁해서 따라 벌떡 몸을 일으켰다. 라울루스의 현신에 정신이 팔려 잊 고 있었던 것들이 전부 주르륵 다시 떠올랐다. 분명히 그 거대한 유리창을 하나 깼지, 에우레디안.

솔레이아가 가만있을 리가 없으니 황궁이 정말로 다 부서지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 같았다. 게다가 레리아의 흑마법에 당한 내 몸은 아마, 조금 더 있으면 그대로 꽥 죽어 버릴지도. 그러면 정말로 귀천 을 떠도는 망령 신세가 되잖아!

라울루스는 나와는 조금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머리로 전해져 왔다.

[그망할놈이순순히레모르디아래로돌아갈것같지도않으니,이몸이친히나서줘야지.]

그 말을 맺자마자 라울루스가 주둥이로 나를 가볍게 튕겼다. 시야가 순식간에 뒤집히며 몸이 허공 을 붕 날았다. 날았다가, 부드러운 은빛 털 위에 안착했다. 나는 어질어질한 시야를 붙들고 간신히 물 었다.

[레모르디 아래라면.......]

[먼저 금기를 깬 건 그놈이야. 내가 그걸 알고도 가만있으리라 생각했다면 오산이지. 네가 떡하니 나

를 소환까지 한 와중에.]

라울루스가 뭐라 중얼거리는 소리를 나는 반도 채 알아듣지 못했다. 그놈이라니. 역시 솔레이아 말 고도 뭔가 더 있었던.......


 내 생각은 거기서 끊겼다. 나를 등 위에 태운 라울루스가 앞발을 쳐들고 까마득한 바리샤드의 밤 허 공으로 뛰어올랐다.

** *

쨍그랑!

날카로운 파열음이 연속적으로 홀 안을 찢었다. 거대한 회장의 천장과 맞닿은 창문이 하나하나 부


서져 내리고 있었다. 샹들리에 빛을 반사해 날카롭게 빛나는 유리 조각이 눈처럼 허공에 비산했다. 그

러나 그 위협적인 조각들은 은빛으로 반짝이는 장막에 닿자마자 반짝이는 빛무리만 남긴 채 전부 녹

았다. 

솔레이아가 늘 손에 쥐기를 갈구했던 그 강대한 신성이 틈 없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아주 어렸 을 적부터 손에 넣고 싶었던 힘인데도 솔레이아는 그것을 마냥 기꺼워할 수는 없었다. 위압감에 몸이 홀의 입구까지 떠밀렸다.

그녀를 향해 포위망을 좁히며 여유롭게 다가오는 남자의 눈은 이미 이지를 날려버린 자의 눈이었 다. 솔레이아는 다소 초조한 기분으로 입술을 물었다. 이럴 줄 알았다. 이렇게 무리해서 일을 서두르 면 저 남자가 분명 이성적으로는 반응하지 않으리라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그러게, 왜 그렇게 서둘러서......! 솔레이아는 날 선 눈으로 연회장 한가운데서 끓어오르듯 뱅글뱅 글 도는 검은 마력 덩어리를 노려보았다. 이렇게 되면 정말 정면으로 저 신성을 받아쳐 내야 하는데. 그녀가계약자의힘을더빌리지않고오롯이그녀혼자만의능력으로저남자를제압할수있을까?

하자면불가능한일도아니었다. 저남자는그입으로그녀가가진패가남지않았다했지만. 글 쎄.......

“레리아.”

저가 내뱉은 이름에 에우레디안 벨고트의 낯이 살짝 굳는 게 보였다. 아는 이름이겠지. 솔레이아는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제 선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세상 모든 걸 다 갖다 바치는 사람이니까. 시중드 는 시녀들의 명부와 신상 정보는 전부 꿰뚫고 있을 것이다. 그만큼 철저한 남자였다.

솔레이아는 밤색 머리 시녀에게 연결해 놓았던 제 눈을 열었다. 시야 저편에 너울거리는 방 안의 풍 경이 들어찼다.

“레리아.”


 죽이지는말고숨만붙여놓으라명령했는데.상황이이렇게된거,이남자가어디까지이성을놓을 수있나시험해보는것도나쁘지않을것같다.

“레리아. 내 예쁜 인형.”

솔레이아는 노래를 부르듯 흥얼거렸다. 허공에서 마력이 촘촘하게 얽혀 들어갔다. 사납게 인상을 구기는 저 남자는 죽어도 느낄 수 없는, 신성과는 정반대 극에 있는 삿된 기운이 거미줄처럼 얽히며 영역을 넓혔다. 솔레이아는 불길이 휙 타오르는 불그스름한 자줏빛 눈을 마주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 렸다.

“이리 데려오렴, 그 사랑스러운 공주님을.”


완성된 흑마법에 방점이 찍혔다. 

** *

[으어어억.]

라울루스는 빨랐다. 그리고 영혼 쪼가리에 불과한 나를 전혀 배려해 주지 않았다.

[이야, 이거 진짜.......]

사실 나를 배려해 줄 만한 상태도 아닌 것 같았다. 나를 덜렁 입에 문 라울루스가 꾹 억눌린 신음을 내뱉었다.

[지상에 발 딛는 게 아무리 오랜만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힘에 부치지는 않았는데.]

저도 힘에 부쳐요, 라울루스. 나는 라울루스의 입속을 들여다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고개를 돌렸다. 내가 자꾸만 바람에 휙 쓸려 날아가니 라울루스는 결국 나를 홱 입에 물어 버렸다. 짐승에 가 까운거대한늑대가웬영혼쪼가리를하나입에덜렁덜렁물고가는꼴이어떨지나는굳이상상하지 않으려 애썼다.

아무리 내뿜는 숨결 한 자락까지 전부 신성한 기운이 감돌고 있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늑대잖 아......!

[네가 지금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 그런가....... 아니면 야매 소환이라 그런가.]

착. 늑대의 크고 부드러운 앞발이 어딘가에 부드럽게 착지하는 느낌이 났다. 나는 간신히 정신을 차


 리고 아래를 내려다봤다가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 라울루스가 가볍게 내려앉은 곳은 황궁 중에서 도가장높은곳,남문의첨탑맨꼭대기였다.

연무장이 손바닥만 하게 보일 정도로 까마득한 높이였다. 여기서 떨어지면 뼈 한 조각도 못 추리겠 다. 라울루스가 나를 문 주둥이를 가볍게 털었다. 종잇조각 같은 몸이 팔랑팔랑 흔들렸다.

[으악, 뭐 하는 짓이에요!]

미, 미친. 나는 간이 콩알만 해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리 영혼 상태라도 여기서 추

락하고 싶진 않은데! 라울루스는 내 비명을 싹 무시하고 말했다. [느껴 봐, 부스러기야.]


[뭐, 뭘요?] 

[삿된 기운.]

나는그말을금방알아들었다.삿된기운.마력.

[하지만 몸에 감각이.......]

그렇게 중얼거리자마자, 나는 팔을 꿰뚫리는 것 같은 얼얼한 통증에 꽥 비명을 질렀다.

“끄아악! 아파요!”

[어엉?]

차라락. 짙푸른 드레스 자락이 아래로 흘러내렸다. 또다. 다시 ‘몸’이 돌아와 있었다. 나를 두 동강 내 버릴 것처럼 물고 있던 라울루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왔다 갔다 하는구나, 너?]

“흐억, 아니, 놓지는 말고......! 기울이지도 말고요!”

나는 허겁지겁 라울루스의 이빨 하나를 꽉 끌어안았다. 몸까지 입은 마당에 떨어지면 정말로 즉사 다! 순식간에 감각이 전부 돌아왔다. 숨이 잠깐 막혔다가 다시 터졌다. 차갑게 온몸을 가득 채우는 이 기운을 나는 알고 있었다. 황궁 전체에 밀도 높게 들어차 있는 것은 바로 이 궁의 주인, 에우레디안 벨 고트의 신성이었다.

“와, 정말. 뭘 하고 있는 거야......?”

[내가 그랬지. 늦었다간 전부 때려 부술 거라고.]


 라울루스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 말이 맞았다. 평소에도 그의 곁을 휘돌고 있던 신성이 몇백 배, 몇천 배로 몸을 불려 황궁 전체에

휘몰아치듯 불고 있었다. 욱신욱신 쑤시는 몸에 그 강대한 신성의 일부가 끊임없이 흘러들었다.

이렇게 신성이 폭풍처럼 불어닥치고 있으니 몸이 잠시나마 돌아온 모양이었다. 아까 라울루스가 강 림했을 때 그랬듯이.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나는 허공에서 사락사락 휘날리는 드레스 자 락이 반투명하게 변해 가는 것을 보았다. 이러다 또 아까처럼 다시 서은서의 영혼 상태로 돌아갈 테 지.

[느껴봐,얼른.나는마력을못느껴.]


나는 입술을 꾹 깨물고 정신을 집중했다. 뭐 하나라도 느껴져라. 제발. 오래 집중할 것도 없었다. 손 끝 발끝부터 심장 부근까지 찌르르하게 번져 오는 감각이 있었다. 이걸 왜 먼저 느끼지 못했나 싶을


정도로 강렬한 기운이었다. 그러다가 덜컥, 어느 순간 모든 감각이 완전히 끊겼다.

[어......?]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내 몸을 내려다보았다. 핏자국이 낭자한 청바지. 흰 티. 다시 돌아왔다. 그 러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희끄무레하던 손끝이 점점 더 투명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헉.]

나는 짧게 숨을 들이켰다. 단지 투명해지기만 하는 게 아니라 점점 더 허공과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

었다. 손뿐만 아니라 팔도, 다리도, 온몸이.

[네 몸, 어디 있니?]

라울루스도 그것을 본 모양이었다. 은빛 털까지 따라 투명하게 변해 가는 것을 본 나는 당장 상황을 파악했다. 내 몸이 죽어 가고 있다. 레리아, 내 몸을 가지고 뭘 하는 거야! 이미 끊긴 감각에 마력의 흐 름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방금 전까지 느껴지던 마력이 들끓던 지점은 한곳이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황제궁의 남서쪽에 위치한 궁. 환영식이 열리던, 벨고트의 귀족과 르보브니와 아제키엔의 사절들이 전부모여있는궁.

[룩시아 궁.......] 그러나나는내뱉은지1초만에생각을정정했다. 파장창!


 룩시아 궁의 모든 창문이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내부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감도는 은빛 기운이 폭 발하듯 터져 나왔다.

“헉.......”

내가 그 광경에 기겁하기도 전에, 라울루스가 허공으로 풀쩍 뛰어내렸다. 무시무시한 낙하감이 나 를 덮쳤다. 그러나 떨어지는 것은 정말로 한순간이었다. 부드럽게 바닥에 착지한 라울루스가 나를 바 닥에 굴리듯이 내려놓았다.

[가, 부스러기야.]

나는 발딱 몸을 일으켰다. 라울루스의 은빛 털이 정말로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일렁이고 있었


다.

“헐, 안 돼. 어떻게 소환했는데!”


[가서, 네 몸부터 찾아.]

라울루스가 주둥이로 내 등을 밀었다. 거의 느껴지지도 않는 감각이었다.

[소환자의 몸이 비실하니 힘을 쓸 수가 없다. 몸 찾고, 나를 다시 불러. 그 재수 없는 기운이 가장 크 게 느껴지는 곳에서.]

“재수 없는 기운이라니. 그게 무슨.......” [네감각에닿는기운중에가장재수없고불결한것.죽음의향.시체의냄새.말라비틀어진뼈다귀

의 소리. 그런 것들.]

말라비틀어진 뼈다귀. 나는 당장에 룩시아 궁의 연회장 한가운데서 꿈틀거리던 손 모양의 뼈다귀를

기억해 냈다.

그래. 그때 느꼈던 것은 어떻게 봐도 인간이 내는 힘은 아니었다. 그럼 역시, 솔레이아의 뒤에 뭔가

가 더.......

라울루스의 형체가 희미한 빛무리와 함께 허공으로 녹아들어 가는 것을 눈에 담자마자, 나는 벌떡 일어나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 *


 으득. 으드득.

뼈가 우둑우둑 부러지는 소리가 복도를 가득 채웠다. 절대자가 직접적으로 쏘아 보낸 신성에 목 부 분이새카맣게타들어간밤색머리시녀는다부서진몸을삐걱거리며대기실을나섰다.새파란힘줄 이 울룩불룩 돋아난 양손에는 몸이 하나 들려 있었다.

“공주님? 어디 계세요, 공주님?”

복도 저 끝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회장으로 돌아가셨나......? 슈마르트 님은 또 어디로, 어머나!”


레리아는 비틀비틀 걸음을 옮겼다. 축 늘어진 채 이따금 경련하는 몸은 물에 젖은 솜뭉치처럼 무거 웠다.


“내게로 데려오렴.”

그녀의 주인이 전한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수십 수백 번 되풀이되고 있었다. 레리아는 착실하게 명

을따랐다.공주의몸을질질끌고활짝열린자줏빛문앞을지나쳤다.코너를돌았다.

“슈마르트 님, 괜찮으세요?!”

뒤쪽에서 누군가 비명처럼 외쳤다. 그러나 레리아는 그 소리도 듣지 못했다. 공주의 가늘고 여린 몸 은 금세 생채기가 나고 멍이 들었다. 레리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끌고 계단을 내려갔다. 작은 몸 이쿵,쿵계단에부딪혔다.

데려가야지. 데려가야지. 이미 죽어 영혼이 떠난 텅 빈 몸에 그 명령 하나만이 텅텅 울렸다. 데려가 야지.

제 손에 질질 끌려가는 공주의 몸이 이따금 사라졌다가 도로 나타나는 것을, 이미 죽어 껍데기만 남 은 시녀는 인지조차 하지 못했다.

“뭘 했어?”

에우레디안은 간신히 이성의 마지막 남은 한 가닥을 붙들고 짓씹듯 내뱉었다. 창처럼 휜 신성에 두

팔이 포박당한 여자가 미친 것처럼 웃었다. 그들 사이의 거리는 가까웠다.

공주를 데려와라, 라는 솔레이아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일정 거리를 유지하던 남자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멱살을 틀어쥔 것이다. 사슬처럼 얽힌 신성이 팔다리를 포박하고 산산이 부서져 내린 유 리창 밖으로 내던졌다. 몸이 허공으로 붕 날았다가 이내 바닥으로 추락했다.


 수증기 냄새가 자욱하게 풍겼다. 안개처럼 주위를 뒤덮었다. 여름의 열기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는 뜨거운 공기가 너른 정원을 휩쓸었다.

“예레니카에게 뭘 했지?”

순식간에 집요하게 따라온 남자가 입매를 비틀었다. 목을 사정없이 틀어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 다. 신성과 마력이 정면으로 맞부딪치며 기긱 하는 기괴한 소음을 만들어 냈다. 단단히 붙잡힌 상황에 서도 솔레이아의 얼굴에는 균열 한 점 없었다.

“제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답니다, 폐하.” “뭘 했냐고 물었어.”


“저도 이렇게 갑작스럽게 앞뒤 없이 굴고 싶지는 않았는데. 제 주인께서 분부하신 바라면 저는 따라 야지요.”


묻는 말에 제대로 답할 기색이 아니었다. 에우레디안은 사악한 마녀에게서 답을 듣는 것을 집어치 우고 당장 몸을 일으켰다.

“라딘.”

낮게 가라앉은 울림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마지막이었는데. 환영식이 열리는 이 사흘이 예레니카가

벨고트에 머무는 마지막 시간이었는데. 그 사흘을 못 막아서.

“뤼기에.”

그가 이름을 하나씩 내뱉을 때마다 그의 수족들이 하나씩 정원에 모습을 드러냈다. 주군을 닮아 창 처럼 날카로운 신성이 솔레이아의 머리 위를 촘촘하게 얽었다.

“셀비-.”

“아, 저기 오네요.”

솔레이아를 붙잡아 놓은 뒤에 당장 예레니카를 찾으러 가려던 에우레디안의 사고가 딱딱하게 굳었 다. 곧게 뻗은 솔레이아의 손가락이 그의 뒤편을 가리키고 있었다.

서걱. 서걱. 풀밭을 짓이기듯 밟는 무거운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가 질질 끌리는 소리도 함께 들렸다.

“그러게 제가 말씀드렸죠.”

신성에 속박된 마녀가 속살거렸다.


 “차라리 제 목에 목줄을 채우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제 뒤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시면서, 가지고 계신 패도 없으시면서.”

에우레디안은 차마 뒤돌아보지도 못하고 벼락처럼 내리꽂히는 그 속삭임을 들었다.

“결국 저 공주님을 죽이는 건 폐하가 되시는 것이지요.”

종국에는 그 목소리에 서서히 분노와 설움이 깃들었다. 대체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감정이. 솔레이 아의 미소가 기괴하게 뒤틀렸다.

“일전에 다짐한 바가 있었죠.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공주님이시니, 많이 망가뜨리지 않고 곱게 박제 해 버리면 어떨까 하고.”


땅에 질질 끌려오는 것이 무엇인지 에우레디안은 어렴풋이 깨달았다. 사고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 럼 일시에 정지했다. 아니, 분명히 디에리고 슈마르트가 함께.......


집중력이 아주 잠시 흐려진 사이에 솔레이아의 오른팔을 얽매고 있던 신성이 탁 끊겨 나갔다. 솔레 이아가 일그러진 얼굴로 미소 지었다. 시체처럼 차가운 손이 에우레디안의 뺨을 슥 훑었다.

탁, 탁. 발목과 허리를 콱 조이고 있던 신성의 사슬마저 끊어 버린 솔레이아가 입이라도 맞출 듯이 가까이 다가왔다. 유혹적인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그러게, 제 말을 들으셨어야지.”

털썩. 무언가가 사정없이 풀밭에 내던져지는 소리가 들렸다. 에우레디안은 더 생각할 것 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풀잎 사이사이에 녹아들 듯 얽혀 있는 연분홍빛이 시야에 잡히는 순간 그대로 숨이 막혔 다. 솔레이아의 목소리가 아득한 정신 속을 왕왕 울렸다.

“어떤가요? 아무리 사랑하는 공주님이라도 시체는 싫으신가요, 폐하?”

더 무슨 생각을 해야 하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 그 순간 그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분노도, 절망도,

충격도 아닌 그저 불안이었다. 설마.

그의 어깨에 촉수처럼 달라붙듯 얹혀 있던 솔레이아의 가는 팔이 다시 허공으로 휙 잡혀 올라갔다. 에우레디안은 그대로 몸을 돌려 다가갔다. 풀밭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작은 몸을 향해서. 그 걸음에 망설임은 사치였다. 다 다가서기도 전에 입이 먼저 열렸다.

“예레니카.”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름을 부르면 좋아하는 사람이라 당장 고개를 들었어야 하는데. 불안감


 이배로몸집을불려엄습했다.그는곧바로미동도없는작은몸을들어올려안았다.안고,얼굴을확 인했다.

생기라고는 전부 빨려 나간 것처럼 창백한 얼굴. 대체 무엇에 붙잡혔던 건지 시뻘겋게 쓸려 핏자국 이맺힌가는목.드레스자락사이로보이는상처투성이인다리,팔.다른누구도아닌그의손이닿았 음에도 여전히 싸늘한 몸.

“아.”

아연한 신음이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애초에 혼자 두면 안 되었던-. 그러나 에우레디안이 채 그 사 실을 머리로 받아들이기도 전에, 훅, 가볍고 부드러운 바람이 스쳤다. 온기가 도는 바람이었다. 어느


쪽에서 불어오는지 알 수 없는 바람을 타고, 무언가가 변했다. “......!”


그리고 단단히 내리감고 있던 눈이 반짝 뜨인 것은 바로 그다음 순간이었다.

** *

“......푸핫!”

나는수면위로억지로끌어올려지듯이눈을떴다.눈을뜨자마자보인것은평소보다더붉게물들 어 있는 것 같은 자줏빛 눈동자였다. 나는 그 안에 든 경악과 충격을 다 읽어 내기도 전에 일단 안도의 한숨부터 내쉬었다.

“다, 다행이다.......”

와, 이거 정말로 아슬아슬했어......! 내가 당장 룩시아 궁 앞의 정원으로 달려왔을 때 본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니라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내 몸과, 그리고 그 앞으로 다가서는 에우레디안의 모습이 었다. 필사의 슬라이딩 끝에 나는 내 몸에 닿았고 다시 육체를 입는 데 성공했다. 몸이 죽기 전에 성공 한 게 기적이었다.

“진짜 다행이...... 어?”

그러나 나는 말을 다 잇기도 전에 에우레디안에게 한가득 끌어안겼다. 거의 부딪히다시피 한 어깨 가 얼얼하게 아파 왔다. 완전히 돌아온 감각에 나를 꽉 끌어안은 단단한 몸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얼떨떨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폐, 폐하?”

꼭 내 것이 아닌 양 걸걸하게 쉬어 버린 목소리였다. 목소리가 왜 이러지? 나를 그대로 품에 밀어 넣

은 남자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느리게, 억눌린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가, 이쪽을 똑바로 쏘아보는 시선과 눈을 정통으로 마주쳤다. 몇 갈래인 지 셀 수도 없을 만큼 무수히 많은 신성의 사슬 한가운데 얽매인 여자. 은빛으로 번쩍이는 창끝같이 날카로운 신성이 사방에서 전부 그녀를 겨누고 있었다.

솔레이아. 늘 반듯하거나, 서늘하거나 아니면 유혹적이거나. 그런 얼굴을 고수해 왔던 아름다운 낯 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헉.”

에우레디안은 내가 급하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약한 부유감과 함께 몸이 휙 들려


올라갔다. 에우레디안은 그대로 내 머리를 그의 품으로 꾹 눌렀다.

“자, 잠깐.......”

별로 거칠지도 않은 움직임이었는데 어쩐지 허리며 어깨가 쑤셔 왔다. 그러나 목의 통증에 비하면 그런 건 약과였다.

“으.”

와, 미친. 너무 아파! 나는 그 통증에 반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로 그의 품에 안겨 이마에, 머리

위에쉴새없이내려앉는입맞춤을받아야했다.

“아, 정말. 그대는 나를 말려 죽이려고.......”

에우레디안이 뭐라고 중얼거린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꽉 다물린 잇새로 새어 나오는 낮은 목소리 라 정확히 뭐라고 했는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어.......”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굳이 표정을 보지 않아도 알 것 같다. 공기가 떨고 있었다. 나는 겨우

눈만그의어깨너머로빼는데성공했다.그리고보인광경에기함했다.

휘우우우.

진짜 칼날처럼 시퍼렇게 벼려져 언뜻 푸르스름하게까지 보이는 신성이 솔레이아의 드레스 자락을, 드러난 팔과 다리를 할퀴었다. 내가 본 것은 거기까지였다. 나를 안은 채로 에우레디안이 뒤를 돌았 다. 자연히 시야가 돌아갔다. 따라 돌아가는 고개를 단단한 손이 고정했다.


 “잠깐, 잠깐만요. 폐하, 지금.......”

“당장 죽여 버려도 되겠지.”

네? 사고가 쩡하니 굳었다. 나는 눈을 번쩍 떴다. 뭐라 채 반문하기도 전에 서늘한 목소리가 이어졌 다.

“그뿌리를캐내려면살려둬야할텐데,그냥당장죽여버리는편이낫겠지.”

내 뒤통수를 가볍게 쓸어내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언제나처럼 다정하고 따듯한 손이었다. 그러나

내뱉는 말은 전혀 다정하지 못했다.


“그렇지, 예레니카?”

내가 알던 남자가 맞나......? 생각이 불쑥 튀었다. 솔레이아,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에우레디안 벨


고트가 이렇게 분노하게 만든 것인가? 평소에는 마음에 안 든다는 티도 잘 내지 않는 사람을! 나는 일 단 다급하게 목소리를 냈다.

“잠시만요, 폐하. 저 확인할 게, 있는-.” 고작그짧은말을하는데도목이찢어질것처럼아파왔다.목에서비릿한쇠맛이느껴졌다. “확인할 게, 있는데.......”

“나는 없어.”

내 어깨와 등을 도닥이는 손은 여상하기 그지없었다.

“그대도 없을 거야.”

“그게 무슨!”

이제는 혀뿌리 쪽에서 비릿한 피 맛이 올라왔다. 레리아의 흑마법에 당한 몸은 에우레디안의 신성 으로도 금방 회복되지 않았다. 망할. 육체를 입어도 여전히 개복치라니. 나는 일단 에우레디안의 옷깃 을 잡고 고개를 들었다.

“폐하, 저 안 죽었어요. 정말 멀쩡하니까 잠시만 다시 생각을.”

“멀쩡한 사람이 목소리가 그런가?”

확인할게있는데.솔레이아뒤에무엇이버티고있는건지.레모르디의금기를어겼다는게대체뭔 지.왜라울루스가그렇게이를가는건지,알아야할필요가-.


 “......!”

내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몸이 내 의지와는 반대로 사시나무 떨리듯 덜덜 떨려 오기 시작했 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거다. 이게 라울루스가 나더러 읽어 내라던 삿된 기운이다. 레모르디 의금기를넘어지상에발디딘,사악한인외의존재.나는덜덜떨리는입술을열었다.

“라, 라, 라.......”

라울루스!

내가속으로피토하듯그이름을외침과동시에,땅이그대로갈라졌다.그광경에서뒤돌아있는데 도 똑똑히 알 수 있었다. 굉음과 함께 대지가 요란하게 뒤흔들렸다.


“......!”


에우레디안의 팔에 순간적으로 힘이 살짝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고개를 들었고,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솔레이아의 발밑이 완전히 갈라져 있는 것을 보았다.

“......미친.”

땅이 괴물의 아가리처럼 쩍 벌어져 지하의 심연을 고스란히 내보이고 있었다. 신성의 사슬에 두 팔

과허리가묶인솔레이아는바로그깊은심연위에떠있었다. 까드득.

“소리.......”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저 소리. 신경을 예민하게 긁는, 마르고 딱딱한 무언가가 마구 부딪히는 소 리. 갈라진 땅속에서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불쑥 솟아 나왔다. 마르고 앙상한 손뼈였다. 해골에 불과한 그 손이 무언가를 찾기라도 하는 것처럼 지상을 더듬었다.

라울루스. 나는 다시 한번 입속으로 라울루스를 불렀다. 귓불에서 달랑거리는 십자가 모양 귀걸이 가점점무겁게늘어지는것같았다.

“라울루스.”

“뭐?”

작게 웅얼거린 소리를 기가 막히게 잡아낸 에우레디안이 내게로 시선을 내렸다. 나는 얼른 그의 목 을 감았던 팔을 풀고 몸을 버둥거렸다. 그와 동시에 에우레디안의 주위를 휘돌던 신성의 흐름이 순간 적으로 멈칫했다. 공기의 흐름이 일순 멎었다.


 그틈을타나는그의품에서떨어져나오는데성공했다.발이땅에닿으며순간적으로몸이휘청거 렸지만 다행히도 바로 픽 쓰러지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시큰거리는 발목의 통증을 애써 무시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라울루스.”

에우레디안이 듣든 말든, 나는 급하게 다시 그 이름을 불렀다.

“부르라면서요. 왜 안 와!”

결국 벌컥 성질이 났다.


“느려!” 머릿속을울리는목소리가들려온건바로그때였다.내가욕을한바가지쏟아내려던바로그때.


[이게 다 네가 비실비실한 탓이잖아. 누굴 탓해?]

귀고리가 무겁게 늘어졌다. 언뜻 푸르스름하게까지 보이는 은빛 섬광이 터져 나왔다. 에우레디안에 게서 흘러들어 와 몸을 채웠던 신성이 그대로 쭉 빨려 나감과 동시에, 몸을 저릿하게 찌르던 마력의 농도가 순식간에 치솟았다. 바늘보다 훨씬 두껍고 날카로운 수백 개의 가시가 전신을 관통하는 것 같 은 통증이 나를 덮쳤다.

“헉.”

[버텨, 부스러기야. 내가 제대로 다시 형체를 구성할 때까지.]

이 지경인데 어떻게 버텨......! 아무래도 나는 정말 내 능력 밖의 일을 저질러 버린 게 분명했다. 쉬 지 않고 격돌하는 신성과 마력의 부딪침에 죽어나는 것은 에우레디안이나 솔레이아가 아니라 나였 다.마력과신성,그두힘을오감에가깝게느껴내는나.

“미친. 내 팔자.......”

게다가 이렇게 정수리부터 내리꽂히는 듯한 위압감은 솔레이아의 마력과는 분명 그 느낌이 달랐다.

차라리 라울루스의 현신과 마주했을 때의 느낌과 비슷했다.

폐에서 공기를 전부 앗아 가는 위압감, 아래로 파묻힐 것 같은 중력의 무게. 그러니까 이건 정말로 인간의힘이아니었다.그럼망령의힘인가?하지만,이미죽어살과내장까지다썩어버린망령따위 가이런위압감을낼수가있다고?

아니야. 한낱 귀천을 떠도는 귀신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니었다. 나는 간신히 숨을 고르며 욕설을 염 불처럼 외었다.


 “망할. 대체 뭘 불러낸 거야, 저 언니는......?”

에우레디안이 다급히 나를 부축했다.

“예레니카.”

들어본적없던어조였다.그의목소리에불안감이역력했다.나는한껏구겼던인상을대번에활짝 폈다.

“걱정 마세요! 하나만 확인하면 되니까.” “그러니까, 대체 뭘.......”


“하나만물어보고나면,당신이저여자를죽이든지지든볶든아무소리안할테니까.한번만봐주 세요.”


나는 에우레디안의 목덜미에 팔을 감고 내게로 끌어당겼다. 차가워진 뺨에 입을 맞췄다. 걱정할 만 도 하겠지. 하지만 정말로 지금이 아니면 솔레이아와 이렇게 마주 볼 수 있는 때가 오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것은 예감이라기보단 강렬한 확신에 가까웠다.

솔레이아의 붉은 입술이 벌어졌다.

“나를 죽여 버리겠다고.......”

이내 그녀의 입매가 양쪽으로 추켜 올라갔다.

“당신은 그러지 못할걸, 에우레디안.”

솔레이아의 얼굴이 차츰 일그러졌다. 나는 늘상 도도하고 여유롭던 솔레이아가 저만큼이나 엉망이 되어있는것을보지못했다.

“뭐든내선에서끝낼수있었던것을후회하는때가올거야.”

본능이 적신호를 켜고 경고했다. 지금이 아니면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솔레이아.”

생각보다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나는 곧바로 뒤에서 내 어깨를 끌어안는 팔을 토닥이며 다시 입 을열었다.한자한자분명하게.

“저게, 뭐예요?”

검지로 여전히 지상에 불쑥 튀어나와 있는 손뼈를 가리켰다. 흑요석같이 반질한 눈동자가 내가 가


 리키는 쪽으로 흘끗 움직였다. 그리고 희미한 미소. “글쎄.”

아름답고 사악하며 교활한 마녀가 속삭였다.

“나의 주인?”

툭. 신성의 사슬 한 가닥이 잘려 나갔다. 솔레이아의 목을 조르고 있던 사슬이었다.

“지하의 왕.”

흥얼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망령의 세계를 다스리는 자.” 

레모르디 아래의 왕. 신. 죽은 자들의 신. 그제야 모든 것이 명쾌하게 떨어졌다. 내가 라울루스를 소 환해냈듯,솔레이아는이미한참전에사악한것들의신을소환해낸것이다.나는약하게신음했다.

“대체 언제부터......?”

“사랑스러운 공주님, 이 손이 보이나요?”

깜빡. 솔레이아가 눈을 깜빡였다. 속눈썹이 나풀거리며 내려앉았다가, 다시 흑요석 같은 검은 눈을 드러냈다.

“마력 부적응자. 마력에 예민하다더니.”

그제야 나는 무언가 어긋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급하게 에우레디안을 돌아보았다. “폐하, 저게....... 저게, 안 보이.......”

그러나나는말을끝까지이을필요도없었다.불그스름한자줏빛눈동자안에비친것은나,그리고 갈라진 땅. 그 위에 포박된 솔레이아 그뿐이었다. 자안이 내가 가리키는 쪽을 슥 훑었다. 나는 멍하니 그 눈동자에 비친 광경을 바라보았다.

없다. 그간 라울루스가 했던 말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신성을 다루는 자는 마력을 인지할 수 없지.]

[느껴 봐, 부스러기야. 재수 없는 기운.]

안 보이는구나. 찾을 수가 없는 거구나. 그렇다면 왜 지금 이 남자가 이렇게 침착한지 알 것도 같았 다.멀찍이서솔레이아를둥글게에워싸포박하고있는성기사들도왜저소름돋는뼈다귀를보고기


 함하지않는건지.보이지않는것을알수는없는일이아닌가.

“양립할 수 없는 힘을 동시에 느낀다라.......”

위험할 만큼 낮은 목소리가 속삭였다. 줄곤 에우레디안에게만 박혀 있던 검은 시선은 이젠 오로지 내게만 박혀 있었다. 등줄기에 오싹하게 소름이 돋았다. 검은 구슬처럼 반질한 눈동자에는 빛이라고 는 하나도 없었다.

솔레이아의 머리 위에 복잡한 그물처럼 촘촘히 얽혀 몸을 구속하던 신성에 파삭, 금이 갔다. 사슬이 그대로 끊겨 나갈 듯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아.......”


끊어질 거야. 나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솔레이아의 목과 사지를 결박하던 신성의 사슬이 파르르 떨 리는것이보였다.그리고거의동시에갈라진땅위를끼긱거리며긁던손뼈가순식간에위로솟구쳤


다. 앙상한 뼈다귀가 뱀처럼 허공으로 솟아올라서, 드레스 사이로 드러난 솔레이아의 발목을 움켜잡 았다.

“......!”

그러나 그것 역시 내게만 보이는 광경일 테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마자 나는 앞뒤 생각할 것도 없

이 내뱉었다.

“라울루스.”

끌고 들어가려는 속셈이다. 지하로......! 그렇게 두어서도 안 될뿐더러, 이대로 솔레이아를 놓칠 수 는 없었다. 이미 새카맣게 빛을 잃은 눈이 자꾸만 마음에 걸려서.......

툭. 투툭. 수십 겹으로 얽혀 있던 사슬이 하나씩 풀려 나갔다. 다음 순간 벌어진 일은 정말로 순식간 이었다. 내 뒤에서 나를 단단히 붙들고 있던 남자가 미처 반응하지 못할 정도의 가공할 만한 속도로, 나는 속절없이 솔레이아에게로 ‘끌려들어 갔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현혹의 마법.

“예레니-.”

에우레디안이 다급하게 나를 부르는 소리는 지척에서 들리는 바람을 가르는 소리에 전부 묻혔다.

푹 푹, 머리부터 발끝까지 커다란 무형의 가시들이 몸을 꿰뚫었다.

“헉.......”

나는 정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쩍 갈라진 땅 위에 떠 있었다. 떠 있었다기보다는, 솔레이아에게 붙 잡혔다는편이더옳겠다.내무게따위는느껴지지도않는것처럼솔레이아가손끝으로내턱을치켜


 들었다.그작은접촉으로도몸이붕들렸다.숨이꽉틀어막혔다. 솔레이아가내턱끝을제쪽으로가까이당겼다.내게입이라도맞출듯이가까운거리였다. “라울루스라고 했나요, 사랑스러운 공주님?”

“윽, 하윽.......”

“유데타 너머의 그 절대자 말이지요. 그렇지요?”

까드득. 솔레이아의 발목을 움켜쥔 앙상한 손이 스멀스멀 그녀의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솔레이아 가 낮게 속삭였다.


“어때요,하이데스님?저남자말고이공주님을대신데려가는건?”

나는 헛숨을 집어삼켰다. 거, 거짓말이지......? 솔레이아의 발치에서 소름 끼치는 까드득 소리와 함


께 고막을 긁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래. 이제 거슬리는 것이 어느 쪽인지 똑똑히 알겠군.]

나는 동시에 벼락처럼 깨달았다. 솔레이아의 목표가 바뀌었다. 에우레디안 벨고트에서 나, 예레니 카로. 이제야 원작이 제대로 비틀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을 반기고 있을 새가 없었다. 얼굴에서 핏기가 죄 빠져나가는 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등 골에 흐르던 식은땀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나는 그녀의 손등을 긁으며 쉰 목소리로 외쳤다.

“미, 미쳤어요? 정신 차려요, 언니!”

“유감스럽게도 정상이랍니다, 공주님. 한 번 더 불러 봐요.”

솔레이아가치켜든내턱끝에가볍게입을맞추었다.입술이닿은곳이불에덴것처럼뜨거웠다.

“지상이 아니라, 이 세계에서 가장 강대한 신성을.”

미쳤나 봐, 진짜! 결국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내뱉었다.

“라울루스.”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나는 솔레이아의 조종에 반항하는 대신 입이 움직이는 그대로 줄줄 내뱉었 다.

“내 몸에 남은 신성, 전부 가져가도 상관없으니까.”

잠깐 아프고 말지, 지옥으로 끌어내려지긴 싫단 말이야......!


 나는 버럭 외쳤다.

“그러니까 당장 내려와요!”

이번에는 내 심각함이 라울루스에게도 전해졌는지, 그는 더 망설이지 않았다. 몸에서 신성이 쭉 빨 려 나갔다. 간신히 몸이 무너지지 않게 붙들고 있던 에우레디안의 신성이 빠져나가자 당장에 허리가 푹 꺾였다.

종전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고통이 엄습했다. 그리고 거의 동시인 것 같았다. 에우레디안의 분 노가마침내폭발해버린건.



<다음 권에서 이어집니다>


 악당의 아빠를 꼬셔라 3

지은이:달슬 발행처및제작:연담 유통 : 삼양씨앤씨

copyright 2018. 달슬 all rights reserved. ISBN : 979-11-6509-344-0 [05810]

이 책은 저작권법에 따라 보호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 및 무단복제를 금지합니다. 


  


  


 악당의 아빠를 꼬셔라 4권

 


 목차

악당의 아빠를 꼬셔라 4권

Ch 7.눈에는이,이에는눈(2)



Ch 8. 겨울과 봄, 그리고 여름

Ch 9. 그대는 갑작스럽게 (1)


 Ch 7. 눈에는 이, 이에는 눈 (2)

그야말로 파괴적인 혼돈 그 자체였다. 거센 돌풍이 불었다. 이제까지 황궁 전체를 휘감았던 신성의 흐름은 어린애들 장난에 불과했다는 듯이 날카로운 가시를 두른 신성이 돌풍처럼 몰아닥쳐 솔레이아 를 휩쌌다. 솔레이아가 반사적으로 마력을 펼쳐 내자 두 개의 힘이 강렬하게 충돌했다. 내 코앞에서.

“억.......”


두개의강대한힘이부딪치며만들어내는짙은수증기냄새와천지가뒤흔들리는진동에정신을 차릴수가없었다.다음순간,시야가휙90도로기울었다.은빛털이시야저편에서휘날렸다.내턱을


붙들

있던

고있 끊어져 나갔다.

레이

아의

떨어

감과

시에

,그

한쪽 팔과 허리가 자유로워진 솔레이아가 훌쩍 뒤로 물러났다. 솔레이아의 손이 떨어져 나가자마자

신성의 사슬이 크게 투둑

나를 죄던 고통이 반절로 뚝 줄어들었다.

“흑, 윽. 허윽.......”

나는 숨을 몰아쉬며 겨우겨우 고개를 들었다. 무언가가 내 몸을 단단하게 ‘물고’ 있었다. 나는 바로 지척에서 보이는 크고 날카로운 송곳니를 보자마자 라울루스가 제대로 현신했음을 알아챘다. 솔레이 아에게서나를가로채듯이빼앗아문라울루스가나를입에문채로혀를찼다.

[너, 평소에 이러고 살았니, 부스러기야? 이거 썩 좋은 감각은 아니로구나.]

라울루스가 말을 이을 때마다 신성으로 가득 찬 숨결이 온 얼굴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 신성이 라울 루스본인의것이아니라내게서흡수한신성이라는걸생각하면퍽억울한일이었다.안그래도쥐꼬 리만큼 있는 신성인데.......

쩍벌어진땅사이에불쑥솟아솔레이아의발목을움켜쥔앙상한손모가지가소름끼치는소리를 내며 서로 부딪혔다. 라울루스의 눈이 아래를 향했다.

[이렇게 뻔히 지상을 긁고 있는데 못 알아챈 내가 등신이다.]

솔레이아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간신히 눈을 깜빡여 눈물을 털어 냈

다.

[언제 레모르디를 넘었나, 하이데스?]


 훨씬 명확해진 시야에 잡힌 솔레이아는 웃고 있었다.

“역시.......”

부릅뜬 채 내게 와 박힌 눈동자가 가히 정상적인 인간의 눈이 아니었다. 솔레이아가 입이 찢어지도 록 웃으며 다시 순식간에 가까워져 왔다. 돌풍처럼 휘몰아치는 신성의 칼날이 하얀 뺨에 상처를 하나 둘씩늘려가는것이보였다.

“유데타....... 유데타!”

괴이한 음성으로, 피를 토하듯이 외치는 속삭임이었다. 그 손아귀가 시야를 새카맣게 뒤덮나 싶던

순간. 라울루스는 예고도 없이 나를 뒤로 던졌다.


휙. 

“......!” 나는비명을채지를새도없이허공을붕날았다.입대신온몸의뼈들이비명을빽질러댔다.나는

허공을 날아가며 우울하게 생각했다.

아,이거정말좋지않아.내가생각한건언제고이렇게스케일큰대격돌이아니었는데......!

“으앗, 억!”

허공으로 치솟는 듯한 부유감이 끝나자 곧바로 중력에 끌어당겨지는 느낌이 났다. 그대로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듯한 추락감. 나는 더 생각하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저건 또 뭐야?”

그러나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건 단단한 맨땅이 아니었다. 허리가 낚아채이듯 붙잡혔다. 누구의 팔이

고 손이며 품인지는 명확했다.

“헉...... 흡.”

나는 헐떡이며 내게 가장 익숙하고 잘 맞는 신성을 들이켰다. 마력이 뭉친 날카로운 가시에 푹푹 관 통당했던 몸이 서서히 도로 채워지는 감각이 선연히 느껴졌다.

그러나 느렸다. 들이쉬는 신성이 죄 가시가 돋치기라도 한 것처럼 까끌했다. 나는 기력을 얼마 채우 지도 못하고 고개를 들었다. 차갑게 굳어 있는 얼굴을 마주함과 동시에, 귓가에 낮게 으르렁거리는 듯 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젠 별 시답잖은 게 다.......”


 라울루스를 가리켜 말하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 중얼거림에 나는 때에 맞지도 않게 몹시 민망해 졌다.

음, 그거, 제 신성을 받아서 그래요, 폐하....... 원래는 진짜 센 제 백인데.......

졸지에몹시시답잖은게되어버린나는얌전히입을다물고그의날카로운신성이나마내몸에차 곡차곡 쌓아 나가는 데 집중했다. 그러나 에우레디안은 나만큼 마음을 금세 가라앉히지는 못한 것 같 았다.나를제뒤에바로내려앉힌뒤에,그가걸음을옮겼다.발이내딛는곳마다풀이서걱서걱베여 나갔다.

“뭔지는 모르겠으나.”


지하의 죽은 공기보다도 더 서늘하고 음습한 목소리로, 에우레디안 벨고트가 내뱉었다. “비켜.”


굉음과 함께 강풍이 불었다. 나는 물론이고 거대한 늑대 형상을 한 라울루스와 솔레이아까지도 죄 쓸어버릴 듯 거칠게 쇄도하는 신성이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랬다.

[야. 너, 불경하게 이게 무슨 짓.......]

“입도 좀 닥치는 게 좋겠군.”

평소에는 쓰지도 않는 상스러운 말까지 내뱉는 목소리가 들렸다. 죽여 버릴 셈이다. 진심으로.

휙-.

망설임 없이 쇄도한 신성이 솔레이아의 몸을 꿰뚫었다. 그리고 그대로 푸르스름한 은빛 불로 화했 다. 일전에 본 적이 있는 불꽃. 정화의 불이었다. 넘실거리는 불길이 솔레이아의 몸을 삼켰다. 그녀의 드레스 자락과 살갗이 까맣게 타들어 가는 게 보였다.

저대로 두면 죽을 테지. 나를 몇 번이나 죽이려 했던 여자다. 게다가 저 여자는 레리아를 죽였고, 지 금까지얼마나많은인간을죽이고현혹해왔을지모른다.그러니지금죽여서없애는게후환이없을 지도 몰라. 애초에 인간의 시체를 가로채고 혼을 꼭두각시처럼 부리는 흑마법사는 즉결 처분 하는 게 당연했다.

이성은 끊임없이 그렇게 말했다. 그래, 네 생존과 직결된 문제잖아? 죽게 놔둬. 이성이 뚝뚝 끊겨 가 고 있었다. 눈앞이 까맣게 물들었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버거운 신성을 버티지 못한 몸이 덜 덜 떨려 오기 시작했다. 나는 과하게 숨을 헐떡이며 간신히 솔레이아 쪽을 돌아보았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의 형태로 변한 신성이 솔레이아가 있던 자리를, 갈라진 땅 위와 그 위의 허공까지 온통 뒤덮고 있었다.

“으.......”

그러나 나는 똑똑히 보았다. 강렬하게 너울거리는 푸르스름한 은빛 불꽃 사이로 허옇게 빛나는 낡

은 뼈를.

으득, 으드득.

내게만 들리는지 모두에게 들리는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소리가 다시 뇌 속을 휘저었다. 타오르 는 푸른 은빛 불길 사이로, 해골이 점차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앙상한 손뼈, 팔뼈, 그리고 갈비뼈.


기어오르듯 솔레이아의 몸을 타고 나타난 낡은 해골이 그녀를 껴안듯이 얽어맸다. 언뜻 솔레이아가 짧게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이대로 저 여자를 죽여 버리면, 그러면 다 끝나는 건가? 저 여자는 죽은 자의 시체와 망령을 부리는 흑마법사인데. 지하의 왕과 계약한 인간인데. 뻔히 보이는 저 해골이 진짜 사람처럼 생각하고 말을 하 는데.

솔레이아의 죽음이, 의미가, 있.......

나는 덜덜 떨리는 입을 열었다.

“라울루스.”

에우레디안의 위협적인 신성에 옆으로 휙 밀려났던 라울루스가 즉각 대답했다. [왜?]

“쫓아....... 쫓아갈 수, 있어요?”

[뭐?]

무언가는 결정을 내려야 할 때였다. 솔레이아가 저대로 죽게 놔두느냐, 아니면 여기서....... 보내 주 느냐. 어떤 것이 더 나에게 이득인가? 감정적으로나, 이성적으로나.

“망할. 쫓아갈 수 있어요?”

[......네 감각과 연결되어 있다면야.]

“그게 가능해요?”

[너는 내 소환자이고, 계약자니까. 불가능하지는 않지. 단, 네 몸만 따라 준다면.]


 귓불에 걸린 귀걸이가 무겁게 늘어졌다. 나는 그 순간에 바로 결정을 내렸다.

“그럼 보고 와요.”

어차피 라울루스의 저 모습은 내가 소환해 낸 분신에 불과하다. 본모습은 아마 유데타 너머에 있겠 지. 분신이 지상에서 좀 구른대도 기운이 빠지면 다시 유데타 너머로 돌아가면 되니까. 그러니까 내 몸만 좀, 받쳐 준다면.......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다시 땅을 딛고 섰다.

“저,저망할,당신말대로재수없는놈이뭘하는지.”

잇새로 꽉 눌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말을 한마디씩 내뱉을 때마다 목구멍이 찢어질 것처럼 아파

왔다.


“지하의 주인이라는 자가 솔레이아에게 뭘 하는지. 솔레이아가 어떻게 되는지. 대체 저 아래에서 무 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빠짐없이 보고 와요.”


그 말을 끝으로 나는 걸음을 옮겼다. 여기저기 찢어지고 긁힌 다리가 후들거렸다. 몇 걸음인가를 옮 겨서, 에우레디안에게로 가 그 어깨를 끌어당겼다. 힘을 얼마 주지도 못하고 단지 얹은 것에 가까웠는 데도 에우레디안은 즉각 나를 돌아보았다.

“예레니카.”

곧장 서늘한 음성에 조급함이 깃들었다. 나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그의 양 뺨을 잡고 내게로 끌어

당겼다. 그리고 그대로 입을 맞추었다.

“......!”

에우레디안의 몸이 흠칫 굳는 것이 멀어지는 감각 속에서 느껴졌다. 한계를 모르고 몰아치던 황궁 안의 온 공기의 흐름이 일순간 뚝 멎었다. 그가 당황했음을 나타내는 지표였다. 몸이 기억하는 빠듯하 면서도 버거운 감각이 입술을 타고 끊임없이 흘러들었다. 만신창이가 되어 텅텅 빈 몸에 순식간에 날 것 그대로인 신성이 흘러들었다. 목구멍에서 감돌던 비릿한 혈향이 전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니야. 더. 고개가 비틀렸다. 더. 더 필요했다. 숨이 깊고 아득하게 얽혔다. 덥고 습한 숨결이었다. 내어깨를잡고밀어내려던남자의손에힘이풀렸다.발치에서사정없이잔디를베어나가던칼날같 은 바람이 멎었다. 그리고 그다음으로는 일렁이던 열기가 훅 물러갔다.

솔레이아가, 그리고 지하의 왕이 그 짧은 틈새를 놓칠 리가 없다는 걸 알았다. 알고서 한 짓이기도 했다. 이 남자를 제어하는 동시에 라울루스가 제대로 그들을 쫓아갈 수 있도록 내 몸에 신성을 가득 붓는 방법을, 나는 한 가지밖에는 몰랐다.

접촉.그의정신을흔들어놓고,내몸에순식간에강대한신성을채우는가장간단한방법.


 땅이 우지끈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갈라지고, 무언가가 그 속으로 둔탁하게 굴러떨어졌다. 희미 하게 뜬 시야에, 에우레디안 너머로 완전히 해골에 뒤덮인 솔레이아가 갈라진 땅속으로 끌려가듯 추 락하는 것이 보였다. 적갈색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은빛 털이 반짝이는 빛무리와 함께 뒤를 쫓는 것까 지보고나서야나는눈을감았다.

에우레디안이 정신을 뒤쪽에 팔지 못하도록 그를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목에 팔을 휘감고 매달렸 다.억지로나를붙잡고틈을벌린그가당황한어조로나를불렀다.

“예레, 니카. 잠시.......”

그러나 그 뒷말까지 전부 삼켜 버렸다. 잠시 떨어졌던 거리가 틈 없이 다시 맞붙었다. 맑고, 청량하


고, 그리고 묘하게 달콤한 기운이 쉴 새 없이 입안에 가득 들어찼다가 목으로 넘어가기를 반복했다. 종국에는 온몸을 부서뜨릴 것처럼 가득 채우고 휘돌았다. 감은 시야에 버거운 감각이 마치 하얀 폭


죽처럼 터졌다. 맞닿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짧은 신음은 누구의 것이었나. 그리고 그 뒤에는 정신 을다른데팔수가없게된게과연누구였는지,나는더생각할수가없었다.

시야가 휘리릭 뒤바뀌었다.

** *

[처음부터 네게 맡기는 게 아니었어.]

여자의 몸을 밧줄처럼 칭칭 옭아맨 해골이 위험하게 속삭였다. 머리 위에서 갈라진 땅이 굉음을 내

며 도로 이어 붙고 있었다. 갈퀴처럼 휘몰아치는 신성이 지하의 공기를 할퀴었다.

“제가 말씀, 드렸잖, 아요.”

해골 안쪽에서 짧게 끊어지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검은 눈이 손가락뼈 사이로 번뜩였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돌진해서 잡을 수 있는 남자가 아니라고.......”

하이데스가 차갑게 비웃었다.

[라울루스를 소환한 여자조차 놓친 것도 그리 설명할 테냐?]

“.......” [황제가아니라그여자였지.유데타너머로단숨에닿을수있는건.어쩐지,내내재수없는기분이


 들더라니.]

그들은 여전히 아래로, 지하에 있는 망령들의 세계로 추락하듯 향해 가고 있었다. 레모르디가 서서 히 가까워졌다. 신성을 가진 자는 인지할 수조차 없는 절대 금기 아래 그들의 세계가 이제 바로 코앞 이었다.

검은 마력이 원을 그리며 세차게 휘돌았다. 레모르디의 입구였다. 하이데스와 솔레이아의 몸이 검 은 원을 통과하는 순간, 몸을 사납게 할퀴던 신성이 자취를 감추었다.

“......!”

몸이 순식간에 가벼워졌다. 레모르디 아래, 죽은 시체와 망령들의 세계로 돌아온 것이다.


쿵. 솔레이아의 몸이 세게 지하의 땅에 부딪혔다. 솔레이아는 인상을 쓰며 지상 위에 둔 그녀의 ‘인 형’들과의 연결을 전부 끊어 버렸다. 정신을 분산할 틈이 없었다.


“솔레이아 님!”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마탑의 제자 중 한 명이었다. 뭐라 대답을 해 주려 입을 열었으나 앙상한 뼈

다귀가 그녀의 입을 막았다.

[그래. 인정하지. 그 조그만 공주가 설마 라울루스를 소환할 능력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으니.]

조그만 마력의 흐름에도 곧 죽을 것처럼 고통스러워하는 마력 부적응자. 늘 순진하고 해맑은 얼굴 로 방실방실 웃기만 하던 르보브니의 공주. 에우레디안 벨고트를 차지하는 데 방해가 되는 여자라고 만 생각했는데 대체 무슨 수로 유데타 너머의 절대자를 소환한 것인가. 아니, ‘어떻게’는 중요하지 않 았다. 무슨 수로 라울루스를 소환했든 소환했다는 그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그 뻔뻔한 낯짝을 설마 눈앞에서 다시 보게 될 줄이야.......]

하이데스의 앙상한 손가락뼈가 솔레이아의 볼을 톡톡 건드렸다.

[내가 이래서 들키면 곤란하다 그리 이야기했지. 유데타와 레모르디의 금기가 깨졌다는 것을 들키 면 곤란하다고.]

표정을 지을 수 없는 짐승의 머리뼈가 덜그럭거리며 괴이하게 뒤틀렸다. [이제 더는 네게 맡기고 있을 수만은 없겠어.]

“뭐, 무슨. 뭘 하시려고......?”

[네 몸, 내가 가져가야겠다.]


 솔레이아는 헛숨을 들이켜며 급히 주인을 만류했다.

“말도 안 되는 말씀 마세요. 산 자의 몸에 어떻게 적응을 하시려고.......”

[너 정도의 몸이라면 충분히 버틸 수 있지 않으냐, 솔레이아?]

날카로운 손가락뼈가 하얀 뺨을 긁어내렸다. 이미 한 번 신성의 회오리에 죄 긁혀 있던 뺨에서 다시 가는 피가 새어 나왔다.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삿된 힘을 가진 자.] “헛소리......!”


[내가 적응하는 데 시간은 조금 걸리더라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거야.]

솔레이아는 더는 하이데스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로


먹힌다. 저를 속박하고 있던 뼈다귀들을 휙 밀쳐 내자 해골이 우르르 아래로 부서져 내렸다. 그러나 곧바로 다시 달그락거리며 이어 붙었다.

솔레이아는 하이데스의 음침한 웃음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불안한 눈으로 저를 보고 있는 제자들을 훑었다. 하이데스와 계약한 뒤, 지상의 탄압이 있을 때마다 레모르디 아래로 몸을 숨기도록 했던 마탑 의 흑마법사들이었다.

“너희는 마탑을 두고 왜 여기로 내려와 있어?”

그러나 솔레이아는 물음을 다 잇기도 전에 이유를 알았다. “에우레디안 벨고트.......”

귀신같이철저하고계산적인황제가일이터지면그즉시마탑부터봉쇄하도록미리손을써뒀던 게 분명하다. 이번 황궁 급습은 그녀의 예정에조차 없던 말 그대로 기습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벌써 마 탑을 포위했다니. 게다가 지하로 무사히 대피한 제자들의 수는 마탑 총 인원의 반절도 채 되지 않아 보였다. 솔레이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로셀 님은?”

“남부로, 가신다고.......”

제자 중 하나가 울먹이며 대답했다.

“이번 일로 솔레이아 님과의 연은 끝이라고 하셨습니다.”

체르나타 로셀, 마탑의 주인 역시 도망쳤다고 한다. 황제 쪽에 붙어먹으려는 속셈은 아닌 모양이었


 다. 하긴 그도 떳떳한 입장은 못 될 것이다. 그녀의 부모를 흑마법사로 고발해 사형대로 밀어 넣은 주 제에 그들의 딸인 그녀를 제자로 들이고, 후작가의 적녀로 둔갑시켜 죄책감에서 벗어나려던 늙은 마 법사는 솔레이아가 흑마법사라는 걸 알고도 몇 년을 묵인했다.

솔레이아는 잠시 끊었던 지상의 인형들과의 연결을 다시 이었다. 지상에 두고 온 시체들이 일시에 눈을 번쩍 떴다. 솔레이아는 황궁 안에 두었던 인형, ‘레리아’에게로 감각을 집중했다.

“레리아.”

그러나 그 인형에게서는 반응이 없었다. 솔레이아는 한 번 더 레리아를 부르기 위해 입을 열었다가,


“......!”

저를통째로휩쓸듯뒤덮는화끈한열기에즉각레리아와의연결을끊었다.그곱게미친황제가황 궁을 전부 태워 정화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녀가 발밑에 무릎 꿇릴 가치가 있다 생각했던 아름다운


남자는 제 가치를 온몸으로 증명하는 중이었다. 아무리 관대하고 느슨해 보여도 황제는 황제. 지상에 유일한 라울루스의 혈족. 그걸 일찍부터 알아 공들여 왔던 5년이 전부 무너졌다. 그녀가 키워 온 마탑 도.

[네 목표, 이루고 싶지 않아?]

하이데스가 달콤하게 속살거렸다.

[지상에서너와네제자들이마음껏활개칠수있는세상을만들고싶다,그리말했었잖아.]

“.......”

[지상에서 신성을 몰아내고, 억눌려 있던 흑마법사들의 세상을 만들고 싶다고. 그게 죽은 네 부모의 복수를 하는 법이라고 네 입으로 말했지.]

솔레이아는 붉은 입술을 세게 짓씹었다. 자신의 힘만으로 될까? 무려 라울루스의 신성을 받은 그 공 주를손에넣는게.

그 순간 어디선가 이쪽을 향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흑요석 같은 눈동자에 경계의 빛이 확 튀었다.

“누구......!”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그녀를 보고 있는 이들은 지하에 우글거리는 망령들, 그리고 그녀와 같은 흑 마법사들뿐이었다. 그러나 어디선가, 계속.......

눈물을 한가득 쏟으면서도 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던 하늘빛 눈동자가 뇌리를 스쳤다. 설마. 여기 는 레모르디 아래인데. 말도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불안감이 엄습했다.


 [네 힘으로 될 것 같아, 솔레이아?]

자신의 힘으로 안 된다면. 그렇다면 차라리, 미친 것임을 알아도 계약자에게 몸을 줘 버리는 게....... 몸이 천천히 돌아섰다. 어서 오라는 듯 손을 까딱이는 해골을 향해, 솔레이아는 저도 모르는 새 한 발 을 내디뎠다.

[그래, 그래. 착하지.]

그것조차 하이데스의 현혹임을 솔레이아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하이데스는 태곳적 유데타에서 쫓

겨나 레모르디 아래의 지옥에 처박힌 이후부터 죽 시체와 망령을 다스린 지하의 왕이었고, 흑마법의

기원이 되는 힘을 가진 존재였다. 애초부터 반항은 불가능했다.


“......!”

결국 솔레이아는 제 등을 꿰뚫어 오는 날카로운 뼈를 피하지 못했다.

** *

“허억......!”

내가 본 것은 바로 그 장면까지였다. 짐승의 머리뼈에 인간의 해골 형상을 한 그것이 솔레이아의 몸 을 꿰뚫는 바로 그 장면까지. 그리고 거기까지가 내 한계이기도 했다. 몸으로 흘러들어 오는 에우레디 안의 신성보다 라울루스의 형체를 구성하기 위해 신성이 빠져나가는 속도가 빨랐다. 결국에는 흐름 이반전되었다.몸안에남아있던신성이바닥을침과동시에라울루스와공유하고있던감각이끊겼 다.

“......!”

탁. 눈앞이 새카맣게 물들었다. 레모르디 아래, 지옥의 끔찍한 풍경이 전부 암흑으로 뒤덮였다. 누군

가 나를 부르는 것 같은데 명확하게 들리지 않았다. 소리는 커졌다가 작아지기를 반복했다.

‘진짜 미친 거 아니야?’

라울루스가 레모르디 아래서 마력에 산산이 부서져 내리는 것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그 순간 머릿 속을맴도는생각은딱하나였다.진짜,미친거아니야......?그생각을끝으로내게취약한힘이다시 나를 덮치기 직전에, 나는 정신을 놓아 버리는 데 성공했다.


내가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그로부터 열흘이나 지난 후였다.


 “-그래서. 일부는 남부로 향했다. 이건가?”

“예. 그간 마광석을 빼돌린 루트와 동일합니다.”

** *

대화 소리가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것처럼 희미했다. 내용을 이해하기도 전에 목소리가 웅웅거리며 멀어졌다. 시야는 암흑 속에 잠겨 있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어서, 나는 그냥 눈을 감은 채로


가만히 있었다. 언젠가는 감각이 다시 돌아오겠지. “황궁 복원 상황은?”


“예에, 그게.......”

“그게 뭐?”

“워낙....... 예....... 골고루 정화해 놓으신 터라.......”

“.......”

“게다가 마탑의 인력이 반의반으로 훅 줄어서....... 그 남은 인력도 전부 취조 중이니.......”

누군가 쩔쩔매며 대답하고 있다는 건 명확히 알 것 같았다. 나는 잠이 든 것도 아니고 깬 것도 아닌 멍한 상태로 계속해서 이어지는 대화를 들었다.

“슈마르트 님께서 직접 취조를 담당하고는 계십니다만, 아무래도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일이 다 보니....... 게다가 아시다시피, 사제님께서는 마력을 인지하실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자백을 하게 하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어서.......”

“골치 아프군. 쓸모도 없고.”

대답하는 목소리는 분명히 귀에 익었다. 날카롭게 날 서 있기는 하지만 평소라면 약간은 느슨하고,

그리고 달콤할 만큼 다정했을 목소리였다.

왜저렇게화가나있지?

“아제키엔 쪽에서는 별말 없나?”

“예. 황궁 상태를 보고는 알아서 사태를 파악한 모양인지 수수료를 조정하겠다 통보해 왔습니다.”


 “아.역시애초에곱게말해서는안듣는건어디서든똑같은건가.”

“폐하, 그렇게 생각하시면 아니 됩.......”

“수수료 올려 줄 일도 없겠다, 당장 마탑에 들어갈 세금도 없겠다. 예산은 황궁 복원에 모두 몰아넣 으면 되겠군.”

되는 대로 내뱉는 것 같은 어조였다. 어쩐지 못마땅했다. 으음. 역시 다정한 쪽이 더 좋은데....... 눈 을떠보려이마와미간에힘을줘봤지만눈꺼풀은여전히꼼짝도하지않았다.

그제야나는약간의이상함을느꼈다.정신은깬것같은데몸이돌이되어버린것처럼움직이질않 았다. 몸이 뇌의 명령을 거부한다.


오, 아직은 움직일 때가 아니라 이거야? 그렇다면 가만히 있어 주지. 

나는 일어나서 생각해 보면 이불을 찰 만한 말을 속으로 지껄이며 깨어나려는 노력을 곱게 접었다. 응. 나는 환자다. 환자는 좀 더 쉬어도 돼. 그 생각을 끝으로 다시 짙은 수마가 몰려왔다. 생각은 거기 서뚝끊겼다.

내가 다시 깨어난 건 그렇게 도로 잠이 든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였다. 뭔가가 머리맡에서 귀신처 럼 울고 있었다.

“흐흡. 흐어어엉.......”

흐어어엉- 흐엉어엉-.

나는 눈을 감은 상태에서도 미간을 콱 찌푸렸다. 아, 시끄러워.......

“예니이이이.......”

귀신 곡소리 뺨치는 울음소리였다. 자꾸만 묘하게 신경을 긁는 소리에 결국 몸이 먼저 반응했다.

퍽!

“흐어어......어억.”

내가 휘두른 팔에 정통으로 맞았는지 곡소리가 뚝 끊겼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우렁찬 외침 소리가 고막을 찢었다.

“예레니카!”


 “.......”

이 목소리는 세르게이다. 세르게이야. 이 망할 놈. 누님이 아파서 좀 쉬겠다는데. 응? “깨어난 거야, 예니?”

그러나 세르게이가 내 속마음을 읽고 알아서 입을 다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결국엔 움직 이지 않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흐린 시야에 온통 내 망할 친구의 얼굴이 들어차 있었다. 검 은 머리에 녹색 눈. 세르게이가 틀림없었다. 눈물을 줄줄 흘려 대는 퉁퉁 부은 눈이 조금 웃기기도 하 고, 안쓰럽기도 하고.......

“내가헛것을보고있는건가!예레니카,뭐라고말좀해봐!”


일단은 너무 시끄러웠다. 골이 왱왱 울릴 정도로.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텁텁한 입을 열었다. 

“좀.......”

“헉. 진짜 깨어났어. 이대로 죽는 줄 알았더니!”

“좀, 조용히 좀 해.......”

이 새끼야. 뒷말을 잇지 못한 건 순전히 목구멍이 찢어질 것처럼 아파 왔기 때문이었다. 울컥. 목 깊 은 곳에서 비릿한 뭔가가 혀뿌리를 타고 올라왔다.

“윽.......”

구토기가 치밀었다. 뭔가 커다란 덩어리 같은 게 억지로 목구멍을 넓히며 올라왔다. 켁. 나는 고개를

돌리고 그 덩어리를 밖으로 퉤 뱉고 나서야 그것이 시뻘건 핏덩어리라는 것을 알았다.

“......헐.”

“헐.”

나와 세르게이의 입에서 똑같은 신음이 튀어나왔다. 나는 멍하니 이불 위를 물들인 시뻘건 선혈을 보았다.

“가.......”

“.......”

“각혈......?” 나는부릅뜬눈을들어세르게이를보았다.그리고내가뭐라더말을잇기도전에,세르게이가쩌렁


 쩌렁하게 소리를 질렀다. “의사아아아아아아!”


** *

“에, 모, 목에 무리가 많이 가신 듯합니다. 공주님.” 즉각불려온이는저번에한번진찰을받은적이있었던황궁주치의였다.주치의는식은땀을뻘뻘

흘리며 나를 한참을 샅샅이 뜯어보고는 진단을 내렸다. “열흘이나지났는데도아직각혈을하시는것을보면아무래도파열된장기쪽이아직회복이덜된


듯싶, 딸꾹.” 가엾은의사선생님은말을끝까지다잇지도못하고딸꾹질을했다.원인은몹시명확했다.침대곁

에 버티고 서서 나까지 절로 숙연해질 만큼 형형한 분위기를 뿜는 남자 때문이었다.

나는 헤헤 웃으며 입을 열었다.

“조금만 더 쉬면 나아지겠죠?”

“지금으로서는 더 두고 봐야 하겠지만....... 우선 절대 안정이 최우선입니다, 공주님. 일단은 정신을 차리셨으니 복용하실 약을 지어 올리도록...... 하, 하겠습니다.”

더 대답했다가는 또다시 피를 토할 것 같아서 나는 얌전히 고개만 끄덕였다.

“우선 목을 쓰는 것에 주의하시고....... 식사는 부드러운 리소토나 수프 위주로, 너무 뜨겁거나 차가

운 것도 지양해 주시고요.” 끄덕끄덕.

“그리고...... 그리고.......”

주치의가 땀을 닦으며 에우레디안 쪽을 흘끔거렸다. 걱정 마요. 제가 말 잘해 줄게요. 나는 그 뜻을 담아 그를 두어 번 토닥거려 주었다. 그렇게 주치의가 한결 안심한 표정으로 돌아가고 나서야, 방 안 에는 나와 에우레디안 둘만이 남았다.

세르게이의 외침을 듣자마자 득달같이 달려와 세르게이를 휙 치워 버린 남자는 내가 진찰을 받는 동안단한마디도하지않았다.나는배실배실웃으며일단입을열었다.


 “어쩐지 오랜만...... 큽.”

입을 열자마자 당장 도로 닫았다. 상태가 심각하긴 한 모양인지 말을 이을 때마다 목구멍이 따가웠 다. 나는 일단 주치의가 건넨 사탕 같은 약을 얼른 입에 물었다. 쓰고 화한 맛이 입안에 확 퍼졌다. 아 주 쓰고 차가운 박하사탕을 먹는 기분이었다.

나는 억지로 그 약을 혀끝에서 녹이며 슬슬 에우레디안의 눈치를 보았다. 입을 열었다가 또 빨간 것 비슷한 것이라도 토했다간 정말로 그 눈이 돌아갈 것 같아서, 나는 우선 약을 전부 녹여 삼킨 뒤에 그 를 향해 씩씩하게 팔을 벌렸다.

안아줘라!나를안아라!안아줘라.안아주세요!강렬한염원을담은눈빛을슝슝쏘아보내니딱딱 

하게굳어있던낯에가늘게균열이이는게보였다. “.......”


그러나 여전히 그는 선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에우레디안의 눈가가 예민하게 곤두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흰자와 눈 밑이 눈동자 색처럼 살짝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 남자는 과로로 며칠 밤을제대로자지못했을때보통이런눈을했다.

잠을못잤나?나는태평하게그렇게생각했다가이내내가열흘이나끙끙앓고있었다는사실을상 기해 냈다. 아. 걱정했겠구나.

그제야 그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열흘. 긴 시간이지. 기절해 있던 시간이라 그런지 어쩐지 현실감 이 없었다. 정신을 잃고 있었던 시간이 바로 하루밖에 안 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데, 열흘 이라니.

결국나는다시입을열었다.

“안,큼.안안아주실거예요?”

여전히 형편없는 목소리였다. 나는 슬쩍 불그스름한 자안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면 저 이렇게 계속 떠들어야지.”

“.......” “이러다목이완전히가버려서평생말도못하게되면,그러면그거다폐하탓.......”

말을 끝까지 맺을 필요는 없었다. 커다란 손이 그대로 내 입을 가볍게 막은 것과 동시에 그가 내 곁 에 가까이 앉았다. 시트가 작게 출렁거렸다. 나는 웃으며 입을 막은 손을 잡아 내렸다. 다른 손으로는 에우레디안의 불그스름한 눈가를 만지고 뺨을 쓸고, 그리고 내게로 가까이 끌어당겼다.


 “아까는 왜 그렇게 찬바람 쌩쌩 불게 화를, 큼, 내고 그러셨어요.”

“말 그만.”

드디어 목소리를 들었다. 나만큼이나 가라앉아 있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어쩐지 식어 있는 것 같은 검지가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목을 쓰는 것에 주의하라고 주치의가 그러지 않았나.” 그랬지.그런데그러면대화할수가없잖아.목소리를제대로들은게대체얼마만인지까마득할지

경이었다. 나는 그제야 열흘의 시간을 체감했다.


몸이 가볍게 붕 뜨는가 싶더니, 다시 침대로 눕혀졌다. 아니, 싫은데. 얼굴을 마주 보고 싶은데....... 내가 버둥거리자 에우레디안이 단호하게 내 어깨를 붙들었다.


“안 돼. 그대는 쉬어야 해.”

“그래도.......”

“말은 하지 말고.”

이러다간 눈도 뜨고 있지 말라고 하겠어. 심통 난 얼굴로 그를 보니 에우레디안이 낮게 한숨을 쉬었 다.

“매일숨을쉬는걸확인하긴했지만,눈을뜬걸보니정말로다시돌아버릴것같군.”

꽉눌린목소리였다.나는멍하니눈을깜빡였다.돌아버려?이게무슨말이지?내가어리둥절한사 이 에우레디안은 몇 번이고 나를 만졌다. 머리카락을 쓸고, 뺨을 쓰다듬고, 입이라도 맞출 듯 가까이 고개를내렸다.닿을듯말듯한거리에서숨결이서로얽혔다.

“......?”

뭘 하는 거지? 그는 꼭 내가 살아 있는 게 맞는지 확인하려는 것처럼 굴었다. 이렇게 뻔히 눈을 뜨고 있는데도. 말을 할 수가 없으니 답답하기만 했다. 나는 손을 뻗어 에우레디안의 손을 잡고 손가락으로 글자를 끼적였다.

[걱정하셨어요?]

“그걸 말이라고.......”

용케 내가 적은 글자를 이해한 그가 허탈하게 웃었다.

“내가 지난 열흘간 어떤 심정이었는지 그대가 알면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웃지는 못할 텐데.”


 에우레디안이 내게로 허리를 숙였다. 가까이서 보니 늘 느슨하고 여유롭게 풀려 있던 낯이 수척하 고 예민해진 게 더 잘 보였다. 내가 뭐라 대답할 새도 없이, 가벼운 입맞춤이 이마에 내려앉았다. 이마 에서 코로, 뺨으로, 마지막에는 입술로. 나는 온 얼굴에 가볍게 쏟아지는 입맞춤을 받으며 생각을 정 리해 보려 애썼다.

“그러니까, 제가 그날 밤에 쓰러져서 많이 앓았던 모양.......”

“한마디만더하면바로키스해버릴테니까알아서해.”

키스라는 달콤한 단어를 말하는 것치고는 다분히 위협적인 어조였다. 그 괴리에 결국 웃음이 터졌 다.


“몸이 그 지경인데 웃음이 나오나?” 입술에한번더입을맞춘에우레디안이체념한듯물었다.


“목이며 팔다리며, 하다못해 몸속까지 한 군데도 성한 데가 없던데.”

성한 데가 없었던 건 사실 벨고트로 오면서부터 죽 그랬는걸. 딱히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사실

테제비아 언니 몫의 고생길을 내가 걷는다고 생각하면 퍽 수지가 맞기도 했고.......

하지만 이런 말을 줄줄 내뱉었다간 정말로 이 남자가 어떻게 반응할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나는 방

긋방긋 웃으며 그의 손에 다시 글자를 끼적였다. [웃으면 복이 온댔어요]

[!]

조금 고민하다 깜찍하게 보이도록 느낌표 하나까지 마저 찍어 줬다. 그래. 웃으면 복이 온댔어. 사실 아프면서러워서엉엉울기라도했을텐데,가만히누워있기만해서그런지지금은딱히통증이느껴 지는 구석은 없었다. 게다가 정말로 열흘 내내 잠도 못 자고 안절부절못한 게 눈에 뻔히 보이는 남자 를앞에두고어떻게징징운담.

“......후.”

에우레디안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뭘불러낸건지알수도없고.”

네? 나는 어리둥절해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다시 입을 맞춰 오려는 얼굴을 간신히 막고 입을 열었 다.


 “뭘 불러내다니, 그게 뭐......?”

굳이 물을 것도 없는 질문이었다. 꿈틀, 가슴 위까지 덮인 이불 속에서 뭔가가 움직였다.

“......?”

작고,뭔가굉장히따듯하고부드러운것이내몸위를꼼질꼼질타고올라오고있었다.왼쪽다리부 터시작한그간지러운느낌은점점몸을타고올라와서,

[프하.] 굉장히귀여운소리가퐁터짐과동시에뭔가가내가슴언저리에서이불밖으로고개를쏙내밀었


다. 나는 멍하니 푸르르 머리를 터는 은빛 털 뭉치를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나와 에우레디안 사이를 당당히 비집고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하여튼, 눈을 뜨는 것도 이렇게 굼떠서야.]

“머.......”

[네 몸이 하잘것없어서 내가 지금 이 꼴이다, 부스러기야.]

경박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둥둥 울렸다. 나는 입을 딱 벌리고 내 턱에 제 고개를 턱 얹은 도도한 새 끼 늑대를 바라보았다.

라...... 라울루스......? 내가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에우레디안이 손으로 라울루스를 휙 치워 버렸 다. 나는 경악했고, 라울루스는 억울하게 외쳤다.

[이것 봐라, 부스러기야! 저놈이 나를 몰라보고 이렇게 무엄하다!] 물론 에우레디안에게는 들리지 않을 목소리였다.

“그날 밤도 그렇고 자꾸 어디서 이상한 게 튀어나오는데.......”

에우레디안이 내게 바짝 붙어 오며 중얼거렸다. 시선은 침대 가장자리로 밀려난 새끼 늑대에게 고 정한 채였다. 내 팔뚝만큼도 안 되는 작은 늑대가 고개를 팩 치켜들었다. 나는 그 눈이 내 것과 똑같은 하늘색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새끼 늑대가 위엄 있게 외쳤다.

[이상한 것이라니!] “그대가 불렀나, 저것?” [저것이라니!]


 이, 이상한 거....... 저것.......

나는그만할말을잃었다.

[자식새끼 키워 봐야 다 소용없어.......]

라울루스가 우울하게 내 품을 꿈질꿈질 파고들었다. 나는 얼른 보드라운 새끼 늑대를 안아 도닥여 주었다. 음, 당신이 에우레디안을 키운 건 아니지만, 서운할 만은 하겠.......

[내가키운거나다름없지!저힘이다어디서나온건데!]

그리고 라울루스는 이제는 내 속마음까지 읽을 수 있게 된 모양이었다. 날카롭게 고개를 쳐들고 반


응해 오는 모습에 나는 얼른 생각하던 것을 멈추었다. 거참, 예민하기는. [예민하다니!]


“제...... 제 애완동물이에요.”

라울루스가 뭐라 딴죽을 걸려는 것을 무시하고 우선 방긋 웃음을 걸었다. 에우레디안은 여전히 미

심쩍은 표정이었다.

“갑자기 애완동물이라.”

“네에. 그, 황궁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기에 제가 주웠어요.” “황궁에 감히 짐승을 풀어놓은 자가 있다니. 경비가 엉망이군.” “아니요. 그게, 큼큼, 제가 황궁 밖에서.......”

“그날 황궁 밖으로 나갔었다고?”

대번에 시선이 뾰족해졌다. 나는 허허롭게 웃으며 라울루스를 도로 이불 아래로 쑥 밀어 넣었다. 이 걸 뭐라고 말하지? 실은요, 폐하. 제가 그날 밤에 영혼인 채로 공중을 날아서 신전엘 다녀왔거든요. 거 기서 라울루스 신을 소환해 왔.......

“.......”

그렇게는죽어도말못하지.그럼어떻게설명을해야돼?

별수 없이 나는 다시 활짝 웃는 것을 택했다. 검지로 내 목을 가리켰다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목소리, 안 나와요. 에우레디안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피식 웃었다.

“불리할 때만 그렇게 웃지, 그대는.”


 나는목소리가안나온다.나는대답을못한다.......나는애써자기최면을걸며도로에우레디안의 목을 휘감았다. 힘을 주지 않았음에도 그는 순순히 내게 이끌려 왔다.

쪽. 입술이 가볍게 맞닿았다. 이걸로 그냥 넘어가 주세요. 에우레디안은 눈치 빠른 남자답게 내 눈빛 의 의미를 금세 읽어 낸 모양이었다. 그가 단호하게 내뱉었다.

“안 돼. 뭔지도 모를 생명체를 어떻게 믿고 그대 곁에.......”

쪽.

“......그날 밤도 그렇고. 자꾸 이런 식으로 회피하려나 본데. 두 번은 없.......” 

쪽. 이번에는 금방 떨어지지 않고 그의 입술을 앙 물었다. 그냥 넘어가 주세요오. 초롱초롱. 반짝반

짝. 나는 심혈을 기울여 눈을 반짝였다. 여기서 한번 꼬리를 밟히면 이실직고해야 할 게 한둘이 아녔

다. 말해도 생각을 정리한 다음에 말을 해야지, 아직은 아니야......!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자줏빛 

눈동자에 체념의 빛이 스쳤다.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못 당하겠군.”

결국 승자는 나였다. 나는 배시시 웃었다.

“헤헤, 역시.......”

“말은 그만.” 그러나정말승자인걸까?나는정말로말을더이을수없었다.입술이다시겹쳐온순간부터. “......!”

가볍게 닿나 싶더니, 거칠고 조급하게 파고들었다. 그러나 금세 다시 조심스러워지는 움직임. 약의 쓰고시원한맛과비릿한혈향이아직희미하게남아있는입안에부드러운것이가득들어찼다.살살 달래는 것처럼 입안 곳곳에 난 상처들과 쓴맛을 부드럽게 훑어 냈다. 찰랑이며 밀려드는 신성에 목의 통증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흐.......”

그러나그것과는별개로호흡이가빠왔다.입술새로가느다랗게숨이샜다.언제받아도버거운감 각이고, 숨 쉴 틈 없이 밀려들어 오는 신성이었다. 맞닿은 입술 끝이 살짝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어 느새 도로 느슨하고 나른한 평소의 낯으로 돌아온 남자가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저것, 계속 곁에 두지는 않을 거지?”


 “흐, 뭐, 무슨......?”

“계속 곁에 붙어 있으려는 게 한둘이 아니라, 거슬려서.”

한둘이 아니라니. 뭐가 또 더 있....... 그러나내반문은그날밤내가그에게그랬듯금세입술사이로먹혀들어갔다.

** *


내가 ‘내 곁에 계속 붙어 있으려는 것’들의 존재를 명확히 확인한 것은 그날 늦은 오후의 일이었다. 

“왜말안했어?”

“뭘?”

“뭐긴. 네 체질 말이야.”

“아.”

나는 무감하게 감탄했다.

“됐고, 더 길게 말할 것도 없어. 당장 돌아가자.”

세르게이가 짐짓 화난 얼굴로 나를 몰아붙였다. 물론 당하는 내가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으니 세르 게이의 엄격함은 딱히 효과는 없었다.

나는 세르게이의 잔소리를 흘려들으며 생각을 천천히 되짚었다. 일어나서 정신을 차리고 나니 열흘 전밤에있었던일들이마치어제일처럼생생하게기억났다.라울루스가지하에서보고듣고온것들 까지전부다.

[네 몸, 내가 가져가야겠다.]

솔레이아의 몸을 옥죄고 있던 해골이 속삭이는 소리가 바로 지척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몸을 가 져간다고. 나는 마지막에 솔레이아가 홀린 듯이 뒤돌아 그 해골을 향해 걸어가던 것을 떠올렸다. 하이 데스, 레모르디 아래를 지배하는 신이 솔레이아의 몸을 가져갔다.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예레니카?” “으응.”


 나는 무신경하게 대답했다. 다른 손으로는 라울루스의 부들부들한 등을 긁어 주면서. 라울루스는 거기까지 보고 산산이 부서졌다고 했다. 내 기억도 에우레디안에게 키스한 뒤 비틀거리며 주저앉은 것에서 끊겨 있는 것을 보면, 아마 거기까지가 내 한계였던 모양이었다.

[그 조그만 공주가 설마 라울루스를 소환할 능력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으니.]

하지만 ‘조그만 공주’인 내가 순식간에 하이데스의 표적이 되어 버린 셈이란 건 알겠다. 과연 얼마나

걸릴 것인가. 하이데스가 솔레이아의 몸을 완전히 차지한 이후에 나를 찾아오는 데.

“......어후!”

나를 찾아오다니. 나를 찾아오다니! 나는 속으로 꽥꽥 비명을 지르며 이불까지 휙 뒤집어써 버렸다. 

왕국을구하고제국을구하는숨은영웅포지션을넘어서이젠최종흑막과맞서싸우는주인공포지

션이냐! 작가님, 예레니카가 이렇게 거창하고 다채로운 역할을 맡을 리가 없어요....... 

“.......”

그러나 이쯤 되면 이제 《브리즈니는 행복하고 싶어》의 작가님을 부르짖는 게 의미가 없었다. 솔 레이아의 타깃이 나로 바뀌고 하이데스라는 거대한 흑막의 존재가 명확히 드러난 이상 원작은 이미 비틀린 거나 다름없었다.

그 이야기는, 이제 원작을 가장 잘 안다는 내 몇 안 되는 강점 중 하나가 깡그리 사라졌다는 뜻도 되 고.이제는앞일이어떻게흘러갈지단하나도예상할수가없게되어버렸다는뜻도되지!

“야, 야?”

세르게이가 당황해서 나를 부르는 소리는 깨끗하게 무시했다.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설 마....... 원작을비튼대가로그모든끔살루트들을전부내가뒤집어쓰게되는건아니겠지, 설 마......?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와아. 테제비아 언니 대신 벨고트로 납치를 당하더니 이제는 에우레디안 대신 흑마법에 죽어 좀비

가 되게 생겼네! 나는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왜 대신이야, 왜......?”

그냥깔끔하게언니도구하고,내남자도구하고끝!하면얼마나좋아?왜고통은다내몫이냔말이 다.

[정해진 것이 있으니, 그걸 바꾸려면 그만한 무언가로 채워 넣어야 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니, 아가


 야.]

귀여운 털 뭉치처럼 내 무릎에 웅크려 있던 라울루스가 밉살스럽게 말했다. 이거 그건가? 미운 일곱

살.나는라울루스를이불밑으로푹밀어넣어버렸다.

“조용히 해요, 진짜.......”

“조용히하긴뭘조용히해?네몸이회복되는대로바로짐꾸려떠날거니까,그렇게알아.”

나는 세르게이의 으름장을 한 귀로 듣고 흘렸다. 라울루스는 굴하지 않고 내 몸을 타고 올라와 투덜 거렸다.


[뭣보다,이렇게졸리고나른한기분은존재한이래처음이다.너그몸좀어떻게안되겠냐?]

내 하찮음은 아무래도 상대를 내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최강 파괴력을 자랑하는 모양이었다. 하긴,


애초에소환식자체도올바른절차를거치지않았으니라울루스가본힘을다발휘할수없는게당연 하기는 했다.

[그래도 희망적인 사실은 있어, 부스러기야.]

“뭔데요?”

[일단은 내가 있으니 네가 마력에 급사할 일은 없을 거야. 시한부는 아니게 됐다, 이 말이지.]

웬일로라울루스가정말위안이되는말을다한다.

[두 번째로, 하이데스 그놈이 인간의 몸에 적응하는 데는 시간이 꽤 걸려. 아마 본격적으로 행동을 개시하려면 최소 몇 년 정도는 걸릴걸?]

그러고 보니 솔레이아가 인간의 몸에 어떻게 적응하려고 하냐며 하이데스에게 쏘아붙였었다. 하이 데스는그녀의몸정도면충분히자신을받아들일수있을거라고했고.

하지만 하이데스가 그녀의 몸에 적응하는 데 적어도 몇 년은 걸린다면 그만큼의 시간을 번 셈이다. 몇년이걸릴까. 1년?길게잡으면3년?하지만대륙전역을다뒤지려면고작일이년가지고는안될 것 같은데.......

내가 초조하게 햇수를 짐작해 보는데, 라울루스가 집중하라는 듯 양발로 내 다리를 꾹꾹 눌렀다. [내말아직안끝났어.세번째희망적인사실이있다고.]

“세 번째가 또 있어요? 뭔데요?”

[내가 그놈 꼬리에 신성의 씨앗을 심어두고 왔거든!]


 “네?!”

내가 놀라 눈을 크게 뜨자, 라울루스가 의기양양하게 꼬리를 흔들었다.

[뭐, 끽해야 씨앗에 불과하긴 하지만 추적하는 데는 문제가 없을 거야. 하이데스 걘 지 몸에 신성이 달라붙어 있다는 것도 모를걸. 못 느끼니까.]

“언제 그런 기특한 짓을 했어요?”

[그날, 레모르디 아래에서 부서지기 직전에.]

“와, 라울루스. 똑똑해......!”


내 눈에 라울루스를 향한 존경심이 뭉게뭉게 자라는 건 금방이었다.

[그 애한테 가서 말해. 벨고트 전역을 정화하면서 신성의 씨앗을 뒤쫓으라고. 그리고 그동안 너


는.......]

라울루스가내몸을아래위로슥훑고는딱잘라말했다.

[요양을 좀 하자, 아가.]

“요양이요?”

[너 하마터면 죽을 뻔했어. 내가 옆에 붙어 있지 않았다면 아무리 그 애가 네게 신성을 쏟아 줬더라 도못버텼을거야.이땅도네게는최악이고.]

라울루스까지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면 내가 정말 위태로운 상태이기는 한 모양이었다. 나는 내가 그 나마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곳이 어디인지 생각해 보았다. 구석에서 훌쩍이고 있는 세르게이를 보 니답은금방나왔다.

“르보브니에 있을 때는 경주마 같더니, 다 죽어 가는 노장이 됐어, 우리 예니.......”

르보브니. 산 좋고 물 좋은, 마법의 ‘마’ 자도 모르는 깡시골 왕국.

‘이대로 돌아가도 괜찮은 건가.......’

원작은 틀림없이 바뀌기는 했다. 나는 가만히 생각을 이어 가다 퍼뜩 깨달았다. 나는 일단은 에우레 디안 벨고트에게 안배된 원작의 운명까지 비트는 데 성공한 셈이었다.

그 대가로 내가 희생될 수도 있다는 게 가슴 아프긴 하지만, 나비의 날갯짓에 불과했던 내 버둥거림 은 헛짓거리는 아니었다. 그 날갯짓이 대체 어떤 태풍이 되어 내게 몰아닥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이 세계로 들어오면서 마음먹었던 것들을 전부 해냈다.


 그러면 이제 남은 건 나다.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겼던 나. 어떤 후폭풍에 두들겨 맞을지 모르는 나......!

“자력 생존.”

나는 힘주어 중얼거렸다. 세르게이는 이제 나를 미친 것 보듯 보고 있었다.

“자력 생존. 자력 생존.......”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고개를 홱홱 내저었다. 아팠던 탓에 유난히 퍼석한 연분홍빛 머리카락이 사 방으로 휘날렸다. 나는 주먹을 다부지게 쥐었다.


“목표는, 자력 생존......!”

하이데스가 솔레이아의 몸을 완전히 꿰차는 시간 동안, 그리고 에우레디안이 하이데스의 뒤를 쫓는


동안 내 몸을 완전히 회복하는 게 급선무였다. 하이데스의 유일한 대항마인 라울루스를 더 완벽하게 소환할수있을정도가되면더좋고!

“야,열좀재보게이리와봐.약먹을시간됐어.”

“저리 가, 세르게이.”

돌아가자마자 극한 요양이다, 예레니카! 나는 세르게이를 침대 밑으로 퍽 밀어낸 뒤 재차 결심했다. 이렇게된거,무조건끝까지살아남기만하는게목표다!

“공문은 전부 전달했습니다, 폐하.”

“빠짐없이?”

“예.”

** *

디에리고 슈마르트는 아직도 의심을 거두지 않은 눈으로 서류를 훑는 황제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 다.황궁전체가정화의불길로활활불타고있는것을바로제두눈으로본게열흘전이었다.

그 열흘간 황궁은 당연하게도 아직 복구되지 않았고, 황제는 벨고트 전역에 정화 작업을 실시하라 는명을내렸다.디에리고는황제가자신의몸을대체몇개로알고있는지이제확신할수가없었다.


 “전부 확인했으니 마음 놓으셔도 됩니다. 정화 작업은 이달 말부터 실시할 예정입니다.”

“시일은?”

“3년, 정도.......”

“2년으로 줄여.”

칼같은명이떨어졌다.그리고디에리고는확신했다.제몸을두세개쯤되는것으로생각하는것이 틀림없었다.

“......예.”


그러나그가달리할말이있을리가없었다.황제가맡긴르보브니공주의호위임무를완전히실패 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선량한 사제는 상당한 죄책감을 느껴야 했다. 사실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라도 공주가 앓았던 이 열 흘간곁을지켰다면없던죄책감이라도솟아날것이다.특히나그몸과영혼이뚝분리된것을눈앞에 서 목격한 사람이라면. 그리고 그 꼴을 눈앞에서 보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사람이라면 더더욱.

‘말씀을 드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디에리고는 근 열흘간 그것에 대해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다. 그날, 이상한 차림을 하고 있던 공주의

‘영혼’을 보았다고 황제에게 고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러나 결정을 내리고 자시고와 관계없이 그는 에우레디안에게 말을 꺼낼 틈조차 얻질 못했다. 건 드리기만하면물불안가리고사나운말만지껄여대니그를비롯한황궁의모두가몸을사리게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공주는 심하게 앓았다. 신성을 몸 안에 가득 채워 넣었는데도 별다른 효과가 없어 그저 눈을 뜨기만 을 기다린 게 무려 열흘이었다. 그 모습을 바로 곁에서 지켜봤으니. 황제가 극도로 예민해질 만도 했 다.

그나마 황궁의 궁들이 비교적 멀쩡한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열댓 개가 넘는 궁들이 전부 폭삭 무너져 버리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물론 연무장이며 잘 다듬어 놓은 후원, 그 외에 궁이 세워지지 않은 빈 땅이란 땅은 전부 새카맣게 타거나 거대하게 움푹 패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기서 끝난 것이 다행이라고, 디에리고를 비롯한 황궁 의 모든 사용인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정작 그들의 주인은 엉망이 된 황궁에 일말의 관심조차 없었다.


 “마탑의 주인, 로셀이 남부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남부 켈키타로 향하는 모든 길목에 정화 작업을 서두르라 지시했으니 늦어도 올해 안으로는 잡힐 겁니다.”

에우레디안은 입꼬리를 슥 밀어 올렸다. 마탑의 주인이 제자들을 이끌고 도망치고, 다음 대 마탑의 주인으로 내정되었던 여자가 땅속으로 꺼진 이후 벨고트의 마탑은 뿌리까지 샅샅이 파헤쳐졌다. 그 러나 이미 증거 대부분이 불살라지고, 도망친 흑마법사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텅 비다시피 한 그탑에남은것이라고는시체수십구와극소수의마법사뿐이었다.그마저도믿지못해전부지하감 옥에가둬두었기때문에황실에서당장운용할수있는마법사는정말로몇되지않았다.

“빌어먹을.”


에우레디안은 욕설을 짓씹었다. 그간마탑에들인시간이,돈이얼마인데.수많은선조들이대를거쳐일궈오다시피한마탑이실은


가장 악한 어둠에 뿌리내린 집단이었다니. 가장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던 가정이 정확히 들어맞았을 때의 기분은 상상 이상으로 더러웠다.

그날 들이닥친 마탑에는 흑마법에 조종당했던 시체들이 잔뜩 굴러다니고 있었다.

“어떤가요? 시체는 싫으신가요?”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마녀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예레니카 역시 그 꼴을 만들어 놓을 작정이 었음이 분명하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도중부터는 예레니카를 노리는 것이 여실히 보였다. 그리고 예레니카는, 대체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여자가 도망가도록 놔두었다.

그때 떼어 냈어야 했는데. 비릿한 혈향이 감돌던 그 키스를 되새기며 에우레디안은 관자놀이를 꾹 꾹 눌렀다.

“그걸 어떻게 밀어내라고.......”

예레니카는 저에게 잠시나마 제동을 걸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방법을 꿰뚫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자

신은 그 수에 아주 훌륭하게 말려들어 갔고, 그리고 솔레이아를 놓쳤다.

의문은또있었다.갑자기하늘에서뚝떨어진저은빛늑대는대체무엇인가.그녀의하늘색눈동자 를 빼닮은 저 새끼 늑대는. 에우레디안은 그날 밤 예레니카가 멍하니 중얼거리던 것을 똑똑히 기억했 다.

“라울루스.......”

그것은 위기의 상황에서 신을 찾는 목소리라기엔 더없이 목적이 명확한 부름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그의 모든 의문은 한밤중, 예레니카가 그를 찾아오며 풀렸다.

“라울루스의 분신?”

에우레디안은 의심스럽게 그녀의 품에 안긴 새끼 늑대를 내려다보았다. 어딜 봐도 절대자의 위압감 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작은 짐승은 색색 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그게, 으음. 제가 하도 여기서 구르고 있으니까 라울루스께서 보시기에도 좀 딱해 보였나 봐요. 이 름은...... 음, 음, 라리! 그래. 라리예요.”


어떻게 봐도 방금 지은 이름이었다. 그가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고 은빛 늑대를 샅샅이 뜯어보자, 예레니카가 애매하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라리가 있어서 좀 더 일찍 회복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폐하의 신성으로도 부족했었다면서요. 그 래도얘가와줘서걱정은조금덜었어요.”

에우레디안의 기준에서 열흘은 절대 일찍이라고 말할 수 없었지만, 예레니카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 정이었다.

“이 짐승이 마물이 아니라 라울루스의 분신이라는 증거는?”

“벨고트의 수호신에게 그렇게 불경하게 굴어도 되는 거예요?”

맑은 웃음소리가 발코니에 울려 퍼졌다. 예레니카가 늑대의 털을 손으로 살살 빗겨 주며 그를 안심 시켰다.

“제가 산증인이잖아요. 라리가 없었으면 꽥 죽었을 거라니까.”

“그렇게 말하지 마.”

“말이 그렇다는 거죠, 뭐. 그리고 제가 솔레이아를 보냈을 때, 라리가 신성의 씨앗을 그녀에게 심어 두었대요. 솔레이아의 위치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

“추적이 가능해?”

“솔레이아가 지상에 있고, 그리고 씨앗이 소멸하지만 않는다면요. 그리고 저한테 라리가 온 것처럼 솔레이아에게도 뭐가 붙은 것 같은데. 음, 그게 완전히 개화하기 전에 찾아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라 리가 그러네요. 몇 년쯤 걸릴 거래요.”

“적어도 1년 이상 걸린다는 얘기군. 그 정도면 충분해.”


 분명 땅이 갈라졌었고, 솔레이아는 그 밑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즉시 정화의 불을 불러내 온 황궁을 샅샅이 태웠지만 솔레이아를 찾아내는 데는 실패했었다.

그래서 꼼짝없이 놓친 줄로만 알았는데, 예레니카의 말이 정말이라면 이번에야말로 그녀를 제 앞에 무릎꿇릴수있다.벨고트뿐아니라대륙전체를이잡듯뒤져서라도반드시잡아들이고말테니까.

그의 눈치를 보던 예레니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저 말이에요.”

“응.”


“아직 완전히 나은 건 아니니까.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으니까요. 체질적인 문제요.” “......돌아간다는 말이지?”


“아무래도.......”

금세 시무룩해진 예레니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에우레디안은 외려 안도감을 느꼈다. 마침 하루라도 빨리 돌려보내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시체처럼 싸늘하게 굳어 있던 몸의 감촉이 아 직도 손가락 사이사이에 진득하게 붙어 그를 괴롭혔다. 그때마다 사악한 마녀의 목소리도 함께 떠오 르곤 했다.

“결국 저 공주님을 죽이는 건 폐하가 되시는 것이지요.”

그래서그는어쩔수없이예레니카가눈을뜬이후하루에도몇번씩그녀가살아숨쉬고있다는 것을 직접 확인해야만 직성이 풀렸다. 사실 그것만큼 중요한 게 없었다. 맑은 하늘빛 눈동자가 저를 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모든 의문이 부질없어졌다.

아무리 그가 곁에 붙어 있어도 벨고트의 땅 자체는 예레니카에게 위험했다. 안전한 르보브니로 돌 아가 가족들 품에서 요양하는 게 맞다. 어디에 있든, 그녀에게 가장 안전한 곳에서 멀쩡하게 살아 숨 쉬고만있으면.일단그것만확신할수있다면잠시곁에서떠나보내는것정도야감당할수있다.

그의 나라를 전부 정리하고 난 뒤에, 그녀에게 위험한 것이 단 한 개도 남지 않을 때까지 확인하고 또 확인한 뒤에, 욕심은 그때 채우면 된다. 에우레디안은 그녀가 르보브니로 돌아가는 것에 아쉬움을 갖지 않으려 몇 번이고 마음을 다잡았다.

아쉬움조차 지금은 욕심일 뿐이라서.

에우레디안은 한숨을 참고 그녀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 테라스 위에 앉히자 눈높이가 엇비슷하게 맞았다. 예레니카는 놀란 듯 짧게 비명을 지르더니, 곧장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할 말 더 있는데. 황궁 말이에요, 폐하.”

“그래서, 언제 돌아갈 생각인데?”

“아, 이틀 뒤쯤이요. 그것보다요, 폐하. 황궁이.......”

“이틀 뒤라.”

에우레디안은 대충 대답하고 도로 돌아가려는 고개를 도로 제 쪽으로 돌렸다.

“어딜 자꾸 봐.”

“......굳이 저렇게 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말끝을 길게 늘이며 고개를 기울이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무슨 말을 하는지 단번에 알아들었지만 에우레디안은 깨끗이 무시했다.


“먼길가야할텐데.”

“저 방금 뭐라고 했게요?”

“목은 이제 괜찮고?”

하늘빛 눈동자에 금세 뾰로통한 기색이 돌았다.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다는 듯이, 예레니카가 테라 스밖을척가리켰다.

“황궁 꼴이 저게 뭐예요!”

“아, 저거.”

“아, 저거어?” 작고오뚝한코에서흥콧김이뿜어져나올것같았다.예레니카가다다다말을이었다.

“벨리룩 궁 앞을 그렇게 헤집어 놨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어. 황궁에 마력으로 돌아가는 장치만 몇 개인데 저렇게 통째로 불태워 버리면, 큼, 사람이 다닐 수도 없게 저렇게 다 파헤쳐 놓으면....... 어떡 해요!”

말을잇다목이아픈지중간중간콜록거린다.그모습이귀엽기는했지만더두고보면낫던목도다 시 악화될 것 같아, 에우레디안은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았다.

“그만. 알았으니까.” “반성하는 기색이 아닌데요?”


 “반성하고 있어.”

고작이만큼의정화로이렇게황궁이죄부서질줄알았다면제위에오르자마자황궁보수공사부 터 했을 것이다. 에우레디안은 안일하게 생각했던 스스로를 반성하며 다시 예레니카를 샅샅이 뜯어 보는 데 집중했다.

“목은?” “......괜찮아요.” “멍 자국은?”


“거의 다 사라졌어요. 보실래요?”

당장 팔을 걷어붙이려는 것을 붙잡으며 에우레디안은 한숨처럼 웃었다. 그의 눈에는 아직도 금이


잔뜩 간 얇은 유리처럼 보였다. 당장이라도 부서져 버릴 것처럼 위태로운 유리. 가는 목에 난 시커먼 손자국은 거의 2주가 지났는데도 사라지지 않았다. 얼마나 목을 세게 졸렸으면 목 안쪽까지 전부 상 했을까.

죽은 시녀에게 질질 끌려온 몸은 팔이고 다리고 전부 잔 생채기들과 멍 자국들로 가득했다. 어디 한 군데 부러지거나 금이 가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황궁 주치의가 말했다. 게다가 깨어나자마자 각혈까지 할 정도로 내상도 심했다. 어떻게 봐도 괜찮다고는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런 주제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그렇게 밝게 웃어 버리니. 그 얼굴만 다시 생각하면 속이 쓰렸다. 쓰리다 못해 갈퀴 로 긁어내는 것처럼 아렸다.

“폐하?”

목의 흉한 손자국을 가리기 위해 맨 얇은 붕대 끝자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예레니카가 밝게 웃으며

그의 어깨를 톡톡 쳤다.

“신기한 거 알려 드릴까요?”

“......어떤 거?” “저이제당신표정만봐도어떤생각하고있는지대충은알것같아요.”

나는 도저히 모르겠다. 에우레디안은 그렇게 답해 주고 싶은 것을 간신히 눌러 참았다. 처음 보았을 때는 이 여자만큼 속이 얼굴로 훤히 드러나 보이는 사람이 또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오판이었다. 완 벽한 오판.

예레니카는 제 속을 저 웃는 얼굴로 감쪽같이 가릴 줄 알았다. 그것이 그녀의 의도든 아니든 간에.


 보는 사람의 속을 태운다는 점에서는 가히 파괴적인 웃음이 아닐 수 없었다.

예레니카가 바로 그 웃음을 지으며 다리를 난간 아래로 까딱였다.

“으음, 이번에도 뭔가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인데. 뭐가 그렇게 또 마음에 안 드실까?” “그런 것 없어.”

차마그웃는얼굴이달갑지않다고는말못하겠다.물론해사하게웃는얼굴은사랑스러웠지만,그 리고 그 얼굴에 속절없이 휘둘리는 자신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차라리 우는 얼굴이 낫지. 지금 서럽구 나, 아프구나, 단박에 알 수가 있으니까.


거기까지 생각하고는 에우레디안은 설핏 웃었다. 위험한 생각이었다. 이 생각까지도 읽을 수 있을 까?


“에이, 아닌데. 절 속일 생각 하지 마세요. 딴생각 하고 계시면서, 지금.” “그래?”

글쎄. 의식하지 못한 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럼내가지금무슨생각을하고있는지맞혀봐.”

“음.......”

예레니카가 고개를 기울였다. 무언가를 잠시 곰곰이 고민해 보는 기색이었다. 그러고는 해맑게 웃

는다.

“저한테 키스하고 싶다는 생각?”

할 말을 전부 앗아 가는 한마디였다. 차분하게 빗은 연분홍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한 차례 휘날렸다. 머리 위에 뜬 휘황한 보름달 위로 나부꼈다. 새벽녘의 보름달이 바로 그녀 뒤에 떠 있었다. 어느 쪽이 더 눈이 부시게 빛나고 있는지, 에우레디안은 분간하지 못했다.

“......틀리지는 않아.”

“역시 그렇죠?”

다만 조용히 대답하며 테라스 난간에 걸쳐진 담요를 집어 들었다.

펄럭.

도톰한 담요가 가는 어깨 위에 덮였다. 작은 몸이 담요 안에 쏙 들어갔다. 딱히 생각의 흐름을 거치


 지도 않은, 요 며칠 새 몸에 배어 버린 습관적인 동작이었다. 담요를 단단히 여미자 예레니카가 살풋 인상을 찌푸렸다.

“아, 정말. 이거 과보호-.”

그녀가 뭐라고 더 말을 잇기 전에, 에우레디안은 가볍게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예레니카의

몸이 흠칫 떨렸다.

“......!”

그러나 입술은 짧게 닿았다가 이내 가볍게 떨어져 나갔다. 끈적한 아쉬움이 도로 떨어진 거리만큼 이나 길게 늘어졌다.


예레니카가 눈을 깜빡였다. 

“음. 이게 끝?”

에우레디안은 헛웃음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가끔 예레니카는 지나친 솔직함으로 상대를 당황하게 하는 적이 많았다. 하. 이걸 정말. 요망하다고 해야 하나. 에우레디안은 그 말을 간신 히 삼키고 대신 내뱉었다.

“아쉬움이 남아야지.”

“아쉬움이요?”

다시 꼭꼭, 담요 자락을 여몄다. 그의 나라에서 석 달 하고도 반이 넘게 고생만 하다 돌아가는 여자 가 감기라도 더 걸려 가지 않게. 이어진 말은 느리게, 그리고 담담하게 내려앉았다.

“그래야다음에만날때나를더반겨주겠지.”

사실 에우레디안은 그것부터 확신할 수가 없었다. 벨고트 전역을 아무리 정화해 놓는다 한들. 도망 친 솔레이아를 아무리 다시 잡아다 반 죽여 놓는다 한들. 그때가 되어서도 예레니카가 제 손을 잡아 줄까?

“으음.......”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무언가를 고민하는 얼굴이 그 생각에 불안감을 더했다. 예레니카는 한참을

뭔가 고민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음, 그러면 이렇게 할까요?”

동그란 눈매가 사르르 접혔다. 그의 불안감 따위는 자근자근 밟고 훅 들어오는 얼굴이었다. 예레니


 카가 장난스럽게 코끝을 찡끗하며 말했다.

“떠나기 전에 폐하께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하고 싶은 말?”

“그런데, 저도 아무래도 좀 참아야겠어요.”

예레니카가 가늘고 서늘한 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마저 속삭였다.

“그러면 궁금해서라도 저를 더 빨리 찾아오시겠죠?”

아찔하도록 달콤한 속삭임이었다. 살짝 굳었던 낯이 탁 풀리는 것은 금방이었다. 가는 팔이 그의 목 

을 껴안고 끌어당겼다. 작은 몸이 품에 폭 안겼다.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꿈결처럼 귓가로 흘러들었다. “아쉬움은 제가 가져갈게요. 폐하는 궁금증만 가지고 계세요.”


그것은실로,더없이달콤한확신이었다.품에안긴이의녹아버릴듯한색채의머리칼이시야를가 득 메웠다. 그리고 그 순간 에우레디안은 방금의 그 말을, 황궁이 불타오르던 그 밤의 아릿한 키스만 큼이나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본능처럼 깨달았다.

** *

떠나는 날은 이른 아침부터 복작거렸다.

“먼 길 가시는데 조심하시고요, 공주님. 이건 식후에 바로 드셔야 하는 약이고, 이건 체력 보강제, 그

리고 이건 하루에 하나, 저녁마다 드셔야 하는 약입니다.” “네에.”

“무리한운동은당분간절대하시면안됩니다. 말을타거나하는일은절대, 절대! 없으셔야하고 요.”

“승마는 못 해서 괜찮아요.”

“마법사나 마법 도구 가까이에는 절대, 절대, 절대, 절대 가시면 안 됩니다. 자칫하다간 내상이 다시

터질 수가 있어요.” “힉, 네엡.”


 내상이다시터진다니생각만해도끔찍하다.나는시퍼렇게질린채황궁주치의의두손을꼭부여 잡고 끝없이 이어지는 주의사항을 들었다.

“많이 나아지셨다고는 하나 아직 환자임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아시겠지요? 건강이 최우선입니 다!”

“네. 알겠어요.”

나는 최대한 밝게 웃으며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그러지 않으면 오늘 해가 중천에 뜨도록 출발하지

못할것같은예감이들어서였다.주치의를꼭안아준뒤에도발길을붙잡는이들은또있었다. 벨리룩 궁에서 지내던 때에 나를 돌봐 주었던 시녀들이 주르륵 배웅을 나온 것이다.


“공주님.......” 

오랜만에 보는 마리안느가 눈시울을 붉혔다. 나는 웃는 얼굴 그대로 마리안느에게 다가가 폭 안겼 다.

“아팠다면서요? 괜찮았어요?”

“제가 공주님께 들을 말은 아닌 것 같아요.......”

마리안느가 울먹이며 말했다.

“그날 레리아를 대신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레리아. 그 이름에 몸이 흠칫 굳었다. 솔레이아에게 살해당한 불쌍한 어린 시녀. 그 애는 그날 마리 안느의 대타로 황제궁에 배치되었다고, 뒤늦게 전해 들었다.

“......마리 잘못이 아니에요.”

나는 한숨과 함께 마리안느를 토닥였다. 레리아의 시신은 그날, 에우레디안이 황궁을 통째로 정화

하던 날 정화의 불길에 휩싸였다고 했다. 흑마법에 물들었던 몸이라 흔적도 없이 불타올랐다고 했다.

“좋은 곳으로 갔을 거니까.”

그렇게 믿어야지. 솔레이아의 손에 지하로 끌려들어 가서 그녀의 인형으로 남는 것보다는 깨끗하게 정화되는 편이 나으니까. 좋은 곳으로 갔을 거야. 분명.

입안이 썼다. 나는 의식적으로 레리아에 대한 생각을 차단했다. 그 애가 내 목을 쥐고 마력을 흘려 넣던 감각은 생각만으로도 금세 몸의 온기를 앗아 가곤 했다. 솔레이아에게 조종당한 것일 뿐이긴 하 지만, 어쨌든 그 얼굴은 레리아의 얼굴이라서. 아마 평생 가는 악몽으로 남겠지.


 “다시볼수있을거예요.음,그래도몇년은지나야겠지만.”

“공주님.......”

나는 마리안느를 마지막으로 토닥여 준 뒤에 그녀의 품에서 떨어져 나왔다. 나를 배웅 나온 긴 행렬의 마지막은 디에리고였다.

“몸 조심히, 돌아가시고.......”

디에리고가 말을 흐렸다. 선한 금안에 걱정이 넘실대고 있었다. 무언가를 말하려는지 입술이 몇 번 이고 달싹였다 다시 다물리기를 반복했다. 그가 망설이는 말을 알았다. 나는 주위의 눈치를 보며 디에


리고에게 눈을 찡끗했다. “쉿.”


“......공주님.”

“쉿, 이에요. 그날 본 건. 알겠죠?”

그날,육체에서뚝떨어져나온영혼상태인나를제대로본것은디에리고가유일했다.나는그것만 큼은 에우레디안에게 말하지 않았다. 이제 와 생각하지만, 아마 디에리고가 그날 나를 볼 수 있었던 건 그가 이 세계에서 손꼽는 신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날 에우레디안에게 들키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지. 그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몇 번을 내쉬었던가.

“......괜찮으신 거라 믿겠습니다.”

“그럼요.”

디에리고는 몹시 착잡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만의 하나의 하나도 없애 버리기 위해 그 에게 몸을 바짝 기울이고 소리 낮춰 속닥였다.

“그날 본 것에 대해서 한마디라도 발설했다간.......” “발설했다간......?”

“라울루스께 밤마다 빌 거예요. 바리샤드 신전에 천벌을 내리라고.”

이게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디에리고는 모르겠지. 예상대로 그는 설핏 웃었을 뿐 전혀 겁먹은 눈치 가 아니었다. 이 선량한 사제님은 꿈의 꿈에도 모를 것이다. 지금 내가 그가 성심껏 모시는 신을 품에 안고있다는걸.내게얌전히안겨있던새끼늑대가팽코웃음을쳤다.

[천벌안내릴건데.안내릴건데.]


 “아하하, 라리. 자꾸 바동거리면 버려 버린다!” 나는짐짓상냥하게늑대의은빛털을퍽퍽쓰다듬어주었다.라울루스는너무기가막혀할말을잃

어버린 것 같았다.

[너....... 아가 너....... 방금 날 뭐라고 불렀, 아니. 불경하게 이게 무슨.......]

나는 라울루스가 충격 받도록 그냥 내버려 두었다.

“어쨌든 디에리고, 그동안 제 어리광 받아 주느라 고생했어요.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공주님. 저야말로 감사하지요.”


“디에리고가 제게요?” “예.”


디에리고가 다정하게 말했다.

“언젠가는 돌아오셔서 폐하의 마수에서 저를 꺼내 주실 분이시니까요.”

“풉.”

농담하는 사람치고는 여전히 따듯하고 선한 얼굴이었다. 이 잘생긴 사제님을 또 언제 다시 볼꼬? 나 는 아쉬움을 느끼며 팔을 벌렸다.

“자, 디에리고도 허그......으?”

나는 주치의와 마리안느에게 그랬듯 디에리고에게도 작별의 포옹을 해 주려다 홱, 뒤로 끌려갔다.

“어딜.”

누구인지는 뻔했다. 나는 내 허리를 감아 제게로 달랑 끌고 온 남자를 샐쭉하게 돌아보았다.

“왜 또 심술이에요?”

“심술이라니. 정당한 간섭이야.”

에우레디안이 딱 잘라 말하며 내 어깨를 붙들고 돌렸다. 시야가 빙글 돌아갔다. 오늘도 반짝이는 은 발과 불그스름한 자안, 잘생긴 얼굴이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예레니카, 아무에게나 그렇게 부주의하게 안겨 들면 안-.” “아이, 정말.”


 에우레디안은 마지막까지 요 며칠간 내게 귀에 못이 박이도록 했던 잔소리를 또 할 모양이었다. 나 는 짐짓 미간을 찌푸리며 살래살래 손을 내저었다.

“안그래요.안그런다니까.몇번을말해도못믿어요,왜?”

“전적이 워낙에 화려하셔야 말이지.”

그리고 그는 이 문제에 관한 한 물러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이 남자의 질투는 그가 치던 철벽만 큼이나 참 이상한 데서 집요했다.

나는 결국 이번에도 하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의할게요. 아무 데서나 안 드러눕고, 안 자고, 안 안기고.......” “개인 공간에 들이지도 말고.”


“......방에도 안 들이고.”

얌전히 따라 했지만 에우레디안은 영 성에 차지 않는 얼굴이었다. 나는 흘끗 르보브니 사절단 일행

이 마차를 점검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음, 지금이 기회다. 쪽.

나는 살짝 까치발을 들어 가볍게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짧은 순간에도 기분 좋은 신성이 흘러들었 다. 물론 르보브니 일행만 신경 쓰느라 뒤에 줄줄이 서 있던 벨고트 사람들이 죄 지켜보고 있었다는 걸간과하긴했지만뭐어때.마지막인데뽀뽀도못하고가는건너무억울한걸.

에우레디안이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이러면 보내기가 싫은데.”

“생각해 보니까, 좀 아쉬움이 남아도 될 것 같아서요.”

나는눈을휘며제일예쁜웃음을지어주었다.

“나만 아쉬우면 억울하니까. 한 스푼 정도는 폐하도 가지고 계세요.”

아쉬워 죽겠단 말이야. 가기 싫어. 아, 가기 싫다. 시간이 딱 멈춰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어제 새벽이 다시 왔으면 좋겠어.

나는아쉬움이뚝뚝떨어지는얼굴로그를보다다시입을열었다. “편지 산더미처럼 쓸 거예요.”


 “그래.”

“답장안하면삐칠거고.”

“그래. 여부가 있을 리가.”

“그리고, 이거.”

아침부터 내내 손에 쥐고 있었던 것을 그에게 내밀었다. 은빛 십자가 모양에 가운데 자줏빛 보석이 박힌 귀걸이가 아침 햇살에 반짝 빛났다.

“아쉬움 한 스푼이에요.”


에우레디안은 의아한 기색으로 내 손가락 한 마디만 한 귀걸이를 받아 들었다. 내가 그에게 건넨 것 은 라울루스를 소환했던 귀걸이의 나머지 한 짝이었다. 아마도 내가 죽을 때까지 내 몸에 붙어 있을


물건의다른한짝.게다가더할나위없는에우레디안벨고트의색채.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부적이고 증표였다. 떨어져 있는 동안의 내 무사 안녕을 기원하는 부적. 언젠

가는다시한쌍으로돌아올거라는약속의증표.

“잃어버리시면 안 돼요. 매일매일 보면서 아쉬워하세요. 왜 더 일찍 안 넘어갔을까 후회도 좀 하고.”

“......어젯밤이랑은 말이 너무 다른데.”

“원래 새벽에 하는 말이랑 아침에 하는 말은 다른 거예요.”

에우레디안은 결국 못 당하겠다는 얼굴로 피식 웃었다.

“그래. 뭐든 넘치도록 하게 되겠군.”

온기 도는 손끝이 내 귀밑머리를 살짝 어루만지나 싶더니 이내 볼을 가볍게 톡 건드렸다. 벨고트로 온지얼마되지않았을때내게했던것처럼.짧고담백한접촉이었다.

“복잡한 생각은 하지 말고, 잘 먹고, 잘 자고.......”

“알겠다니까. 건강해져서 올게요. 힘도 세지고. 폐하도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응.”

그 대답을 마지막으로, 그가 한숨과 함께 나를 놓아주었다.

“예레니카!”

사절단 행렬을 모두 정비했는지, 저 멀리서 세르게이가 나를 부르며 손짓했다. 이제는 정말로 가야


 할 때였다. 쉽사리 떨어지지 않던 발걸음이 마침내 떨어졌다. 돌아서서, 몇 걸음 걷다가.

“.......”

결국에는참을수없어졌다.르보브니일행이저멀리서전부지켜보고있든말든,뒤에벨고트사람 들이 있든 말든. 나는 줄곧 안고 있던 라울루스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뭐야, 부스러기야. 왜 내려놔?]

라울루스의 찡얼거림은 무시했다. 다만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뒤돌아서. 그리고 딱 세 걸음을 뛰

듯이 걸어서,


“......!”

이 세계에 떨어진 이래 최초로 발견한 내 구명줄 같은 남자에게, 내가 마침내 비극적인 운명을 비트


는데성공한남자에게그대로안겨들었다.내가지금껏몇번이고그랬듯이.

즉시 찰랑이는 신성이 몸 안을 아득하게 채웠다. 부드럽고 다정하면서도 단단한 손길이 더 센 힘으 로 나를 마주 안았다. 내가 가장 좋아하게 된 맑고 정갈한 체향을 들이쉬면서, 나는 다시 만나는 날까 지이감각을절대로잊지않겠다고다짐했다.하나하나전부꼭꼭오감에새겨넣었다.

그래. 그래도 나는 무언가는 해냈어. 나에게 적대적인 이 땅에서. 무언가는 분명히 바뀌었고, 이제는 불분명하고 불안하며 그래서 두렵지만 그만큼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미래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나 도, 에우레디안 벨고트도. 이 세계도.

두근두근.

살아 있는 사람의 심장 박동 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모르게 섞였다.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뿌듯해 오 는벅찬감동이라서,나는그헤어짐의날에끝까지울지않았다.


 Ch 8. 겨울과 봄, 그리고 여름

라이거 대륙의 북동쪽에 치우쳐진 벨고트의 겨울은 추운 편이었다. 북부는 물론이고 수도 바리샤드 가 위치한 중부까지 전부 새하얀 눈으로 뒤덮였다. 이번 겨울은 지난겨울보다 유난히 추웠다. 남부는 그나마 따듯한 편이었다. 눈이 조금 오기는 했지만 북부에 비해 공기는 한결 포근했다.

“역시남부로오니좀살만하군.”


“그렇구먼. 역시 겨울에는 남쪽이 따듯해. 여름 더위는 살인적이지만.”

희고 무늬 없는 수도복을 입은 수습 사제 두엇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막 제국 

의 남부 지방으로 통하는 길목인 소도시, 헤자드에 도착한 참이었다.

“그러니 내년 여름이 오기 전까지는 끝내야지. 그러고 보면 이런 것까지 계산하신 게 아닌가 싶기도

하군.”

“......가끔은 조금 무서울 정도로 철저하시단 말이지, 폐하께서는. ......아, 이런. 또 눈이라니.”

때마침다시내리기시작한눈에키큰사제쪽이눈살을찌푸렸다.후드를푹눌러덮으며조그맣게 투덜거린다.

“어쨌거나 촉박한 일정이라는 생각엔 변함없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걸.”

키 작은 사제가 따라 후드를 덮어쓰고 끈을 조이며 대꾸했다.

“이 큰 땅덩어리를 전부 정화하라니....... 물론 이참에 흑마법의 뿌리를 뽑아 버리겠다는 의중은 알 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2년은 너무한 것 아닌가?”

“이번 정화 작업이 끝나면 벨고트 사제의 반은 앓아누울걸. 나를 포함해서.”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 두 사제의 낯빛은 그리 파리하지만은 않았다. 교대가 칼같이 이루어

지는덕에사흘간푹쉬고다시나서는길이니당연한일이긴했다.

“어쨌든,불가능은없다고....... 1년반만에남부까지내려온걸보니반년안에나머지지역을정화 하는 게 영 불가능하진 않을 모양인데.”


 “그게 바로 놀라운 점이지.”

두런두런. 대화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눈발이 하늘하늘 떨어져 발치에서 사각거리며 밟혔다.

“듣기로는 슈마르트 님께서 이번에 남부로 내려온다고 하시던데.”

“슈마르트 님께서 직접? 왜?”

“남부에 특별히 신경을 쓰라는 지시가 떨어진 모양이야.”

“그래? 하기야....... 남부에 신전이 적기는 하지.”

키 큰 사제가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중부에서 살짝 북쪽에 위치한 바리샤드에서 멀리 떨 

어지면 떨어질수록 라울루스 신을 모시는 신전의 수가 적었다.

지방 신전의 사제들이 정기적으로 시찰을 나가기는 하지만 절대적인 머릿수가 부족해서, 본격적인


정화 작업을 실시하기 위해서는 북동부와 북서부의 사제들 일부가 남쪽으로 내려가야 했다. 그러나 상대가말한부분은그지점은아닌모양이었다.키작은사제가소리낮춰속삭였다.

“그것도 그렇고. 켈키타가 정화 작업의 최종 목적지라는 이야기가 있네.” “켈키타? 제국 최남단?”

“그래.”

키 큰 사제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켈키타는 이 헤자드보다도 작은 도시가 아닌가? 아마 수도의 흐름이 가장 늦게 전해지는 지역일 텐 데.”

“그래서 더더욱 신경을 쓰시려는 게 아닐까? 그 말은 달리 말하면 수도 권력에서 가장 자유로운 곳 이라는 이야기이기도 하니.”

“흐음.”

“여름이 오기 전까지 켈키타까지 전부 정화하는 게 목표라고 하더군.”

“하지만....... 내가 알기로는 켈키타, 가장 먼저 정화를 실시한 지역이 아니었던가?”

키 큰 사제가 고개를 기우뚱 기울였다.

“분명 제국 전역을 정화하라는 명이 처음 떨어졌을 때 켈키타부터 정리했던 기억이 있는데.......” “그랬었지. 그런데.......”


 키 작은 사제가 말끝을 흐렸다.

“이건 정말로 기밀인데.......”

키 작은 사제는 섣불리 말을 꺼내지 않고 한참이나 머뭇거렸다.

“전부, 갈아엎으라는 명이 있었다고.......”

“전부?”

“그러니까, 지하까지 전부, 말일세.”

“지하까지라면?”


“그래. 아마도 그곳을 흑마법사들의 본거지로 간주하시는 모양.......” 

키작은사제는더말을잇지않고입을다물었다. 사박. 누군가 그들 앞을 가로막았다.

“아.......”

“아.”

동시에 앞을 본 사제들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튀어나왔다. 흰 망토 끝자락에 고위 사제임을 뜻하는 은빛십자가무늬가그려져있었다.그리고가슴께에매달린붉은자줏빛보석이촘촘히박힌은빛십 자가.

키가 훌쩍 크고 호리호리한 체형의 남자가 천천히 후드를 살짝 올렸다. 선량한 미소를 띤 얼굴이 드 러났다. 그 얼굴을 알아본 두 사제의 얼굴에 대번에 놀란 기색이 떠올랐다.

바리샤드의 부주교, 디에리고 슈마르트가 놀란 사제들을 향해 다정한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형제들.”

** *

“남부로 가신다더니요, 부주교님? 어떻게 이쪽으로 먼저 오십니까?” “헤자드에 볼일이 있어서요. 조금 급한 사안이라 부득이하게 서둘렀습니다.”


 디에리고는 선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나 묘하게 어정쩡한 얼굴이었다. 그들은 벨고트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목 한가운데 위치한 헤자드의 신전에 도착해 있었다.

두 수습 사제들은 갑작스레 나타난 바리샤드 부주교의 모습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디에리고는 차분하게 미소 지었다.

“두 분께서는 시엘라스에서 오시는 길이십니까?”

“예. 보고를 마치고 막 헤자드로 들어서던 길이었습니다.”

“그러셨군요. 어려운 일은 없으셨고요? 아, 시엘라스는 신실하기로 이름 높은 도시였지요.” 

“예, 예에....... 별다른 일은 없었습니다.”

무려 부주교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사제들의 시선은 흘끔흘끔 그의 뒤편을 향했다. 디에리고의 뒤


에 그림같이 늘어선 네댓 명의 기사들에게로. 전부 후드를 덮어쓰고 있기는 했지만 일반 사제들의 것 보다 조금 더 날카로운 기백이 영락없는 성기사의 기운이었다.

키 작은 사제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부주교님께서야말로....... 무슨 일이시기에 이리 성기사들까지 대동하시고......?”

“아, 뭐, 큰일은 아닙니다. 일이 끝나면 바로 남부로 내려갈 예정이라서요. 형제님들께서는 이쪽은 신경 쓰지 마시고 지시받은 바를 그대로 이행해 주시면 됩니다.”

“예에.......”

그러나 신경 쓰지 않기에는 그가 대동한 성기사들의 수가 적지 않았다. 게다가 바로 디에리고의 뒤 에 있는 남자는 후드와 목깃으로 얼굴을 전부 가렸는데도 불구하고, 벨고트에서 둘째가는 사제인 디 에리고보다 더한 위압감을 풍기는 중이었다. 뒤에 선 성기사들과 같은 복장인데도 묘하게 그 주위에 흐르는 공기만 이질적이었다. 혼자서만 복면을 쓴 것처럼 하관을 전부 가린 것도 그렇고, 분명 후드로 눈가를 가렸는데도 묘하게 쏘아보는 듯한 시선이 느껴지는 것도 그렇고. 도저히 범인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평범한 일반 사제들이 버티기에는 과한 존재감이었다.

“그리고 형제님들.”

디에리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어 사제들의 주의를 환기했다. 두 사제는 퍼뜩 정신을 차리

고 빼앗겼던 시선을 다시 부주교에게로 돌렸다. 디에리고는 다정하지만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밀은 기밀입니다. 아시지요?”

“아.”


 “우리 형제들끼리야 괜찮지만 민간에는 퍼지지 않도록 주의해 주십시오. 이야기가 돌기 시작하면 기밀에 부친 의미가 없으니.”

키 큰 사제가 뜨끔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슈마르트 님. 명심하겠습니다.”

디에리고는 선하게 미소 지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라울루스께 기도를 올리러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모쪼록 형제들께서도 힘내 주 십시오.”


“예, 예. 부주교님. 라울루스의 뜻이 늘 함께하시기를.” “라울루스께서 늘 함께하시기를.”


쭈뼛거리면서도 고개 숙여 인사하고 물러가는 사제들을 끝까지 눈으로 배웅하고 난 뒤에야, 디에리 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그리 티를 내고 다니시면 수습 사제라도 다 알겠습니다. 좀 갈무리하고 다니십시오.”

“나는 아무것도 안 했어.”

내내 후드와 목 끝까지 올라오는 옷깃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남자가 여상하게 대꾸했다. 살짝 뒤 로 미끄러진 후드 사이로 매끄러운 은빛이 반짝였다. 디에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예. 아무것도 안 하긴 하셨지요.......”

아무것도안하고있으니평소에도그의주위를휘돌던신성이그대로공기중에넓게퍼져있었다. 황제의 위압감이었다. 에우레디안은 날카로운 턱 선과 입가를 복면처럼 가린 목깃을 밑으로 끌어 내 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대가너무당근만주는것같아서.그대는다좋은데,사람이너무유해.”

성격을 시정하라는 이야기신가....... 디에리고는 애매하게 웃었다.

“저는 지도자가 아니지 않습니까? 벨고트의 모든 사제들은 형제인 것을요. 형제에게 어찌 날을 세웁 니까?”

에우레디안은 짧게 혀를 찼다. 다음 대의 대주교로 그 스스로 내정해 놓은 자가 어떤 성정인지야 그 자신이 제일 잘 알았다. 디에리고가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신실한 형제들입니다. 정화 작업 상황은 전부 받아 보고 계시지 않습니까? 괜한 트집이십니다.”


 “내게 하는 것의 반만큼이라도 엄격했으면 좋겠군.”

에우레디안은 피식 웃으며 툭 툭, 잠겨 있던 망토의 단추를 두어 개 풀어 내렸다. 목이 긴 상의 밖으 로 긴 목걸이가 차르륵 떨어져 내렸다. 가운데 붉은 자줏빛 보석이 박힌 작은 은빛 십자가가 은빛 줄 에 걸려 반짝였다.

사제들이 으레 걸곤 하는 십자가 목걸이라기엔 살짝 부자연스러운 모양이었다. 손가락 한 마디만큼 작았고, 화려할 정도로 정교하게 세공되어 상징물이라기보다는 장신구에 가까워 보였다. 디에리고는 잠시 그 목걸이를 바라보았다가 다시 황제에게로 시선을 올렸다.

“뭐....... 어쨌든.”


망토 끝자락과 발치에 붙어 있던 눈이 허공으로 사르륵 녹아들었다. 에우레디안이 무감하게 중얼거 렸다.


“여기까지 온 만큼의 성과가 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정보는 정확할 겁니다. 꼬박 몇 달을 쫓은 기척이니까요.”

“기대되는데.”

디에리고는 뇌리를 스치는 불길한 예감에 살짝 표정을 굳혔다. 그는 주군에게 단호하게 선을 그었 다.

“제발, 이번에는 자중해 주십시오. 그때처럼 또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으셨다간.......”

“만들어 놨다간?”

“저부터 파업에 들어갈 겁니다.”

황제에게하기에는지나치게친근하고격의없는감이있는언사였지만둘다그다지신경쓰지않 았다. 디에리고는 힘주어 말을 이었다.

“작년 봄에 황성을 전부 태워 버리셨던 일이나, 올해 초에 레이드 지역을 전부 뒤엎으셨던 일이 나....... 그런 일은 다시는 없으셔야 한다고 이제는 몇 번을 말씀드리는지 모르겠습니다, 폐하.”

“알아. 반성하고 있어.”

그러나 전혀 반성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디에리고는 황제의 몇 안 되는 약

한 지점을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공주님께서 아시면 좋아하시지 않을 겁니다.”


 “......말하지 않으면 그만이지.”

그러나이번대답은한박자늦었다.디에리고는그틈을놓치지않고말했다.

“은근히 눈치가 빠르신 분이라 숨기기 어려우실 텐데요.”

에우레디안은이미그말을듣지않고있었다.황궁을전부태워버렸던날그에게눈을흘기던사랑 스러운 낯이 머릿속을 스쳤다.

반듯한 입매에 희미한 호선이 떠올랐다. 벌써 1년 하고도 반이나 지났는데도 그날 새벽은 바로 어제 일처럼선명한색채로기억에남아있었다.아니,사실그넉달도안되는짧은시간이전부그랬다.


디에리고가 다시 한번 꾹꾹 눌러 가며 말했다. “일거리를 더 늘리지 마십시오, 폐하. 부탁입니다.”


“그래.”

에우레디안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거리가 벌어지거나 상대가 도망칠 기

색을비친다싶으면앞뒤안가릴것을그도알고,디에리고도알았다.

추격은 날이 갈수록 과격해졌다. 에우레디안의 여유가 차츰 무너지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이유는 분명했다. 지난 1년 동안 손에 닿을 듯 말 듯 달아나던 ‘신성의 씨앗’이 최근 몇 달간 완전히 자취를 감 춘 탓이다. 소멸해 버린 건지 아니면 신성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영역으로 들어간 건지는 불분명했 다.

선량한 사제의 깊은 한숨 소리를 뒤로하고 에우레디안은 걸음을 옮겼다. 그를 수도에서 한참 떨어 진헤자드까지직접오게만든자를향해서.

** *

그로부터 약 하루 뒤. 디에리고가 각오했던 최악의 상황은 다행스럽게도 일어나지 않았다. “큭......!”

외알 안경이 콧대에서 미끄러져 아래로 추락했다.

툭. 데구루루.


 채찍처럼표적의두손목과두발목을후려치듯꽁꽁얽어맨신성의줄기가대상을동굴벽에단단 히 결박했다.

“윽, 이게 무슨......?”

허공에서 붉은 마력이 촘촘하게 짜이기 시작했다. 이동 마법진이었다. 그러나 사지를 포박한 신성 이 시전자의 마력을 억제하자 반쯤 옭아 들어가던 마법진은 버티지 못하고 산산이 부서졌다. 시뻘겋 게 빛나던 마력이 훅 사그라졌다.

“반항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겁니다. 지하 동굴이 무너지는 건 지상이 반파되는 것보다 뒤처리가 더 곤란해서요.”


디에리고는 착잡한 낯으로 무릎 꿇은 노인을 내려다보았다. 체르나타 로셀. 한때 마탑의 주인이었 던자. 1년반전마탑의배신과함께도망친늙은마법사.신성의사슬에사지가결박당한채벽에매


달린 노인이 신음처럼 내뱉었다.

“슈마르트.......”

“오랜만입니다, 로셀 님.”

디에리고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체르나타 로셀은 한때 벨고트의 모든 마법사들의 스승이었던 대 마법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한 꼴이었다.

“1년 반....... 아니, 조금 더 되었던가요?”

“계속해서 뒤를 쫓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는 했지만, 설마 자네가 직접 나섰을 줄이야.”

“사안이 사안이니까요.”

디에리고는 뒤쪽을 흘끗 돌아보며 대답했다. 직접 나서지 않고 뒤에서 조용히 로셀이 포박당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황제를.

사실 딱히 황제가 직접 나설 필요도 없는 일이기는 했다. 이미 황제 직속의 성기사만 셋에 바리샤드 부주교인 그까지 있으니, 늙은 마법사를 상대하는 데는 차고 넘쳤다. 디에리고가 막 그를 부르려던 찰 나, 체르나타 로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슈마르트....... 슈마르트.”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디에리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로셀을 내려다보았다. 늙은 마법사가 잔기침을 뱉어 내며 물었다.


 “폐하께서 보내셨나?”

“......당연한 말씀을.”

심지어 그 폐하께서 지금 바로 뒤에 계십니다만. 디에리고는 그 말을 속으로 삼켰다. 로셀이 불안하 게 눈을 굴렸다.

“즉결 처분 하라 하시던가?”

“.......”

즉결 처분. 흑마법에 관련된 자는 재판을 거치지 않고 발견 즉시 사살하거나 사제에게 이송해 ‘정 

화’하는것이벨고트의법이었다. 물론오늘은그법을손안에서가지고놀수있는이가몸소자리해 있으니 이야기가 다르기는 하지만. 로셀이 급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흑마법사가 아니네, 슈마르트. 그런 삿된 마법 따위는 일평생 손에 댄 적도 없어.” “그러십니까? 그렇다면 왜 지금껏 도망하셨는지?”

“......어쩔 수 없었네. 나도, 나도 두려웠어.”

“그만한 각오도 없이 폐하를 배신하셨습니까?”

“아니, 아닐세. 벨고트 황실이, 황제가 두려운 것이 아니야.” 늙은 마법사가 겁에 질려 속삭였다.

“그 아이가 무서워서.”

“.......”

“내가 기르다시피 한 그 아이. 아름답고 교활한 흑마법사.”

“로셀 님.”

“슈마르트, 자네는 몰라. 그 아이가 얼마나.......”

디에리고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단호한 어조로 로셀의 말허리를 잘랐다. “그 말씀은 저에게 하실 말은 아닌 듯하군요.”

“자네가 아니면 누구에게 하겠나? 나를 놓아줘, 슈마르트. 놓아주면 다시는 벨고트로 돌아오지 않겠 다고 약속할 테니.”


 “.......”

“자네만 입을 다물면 되는 게 아닌가?”

디에리고는 늙은 마법사를 딱한 눈으로 보다 다시 고개를 돌려 뒤편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비딱하 게벽에기대어팔짱을끼고서있는이는자신의기운을감쪽같이갈무리하고있었다.디에리고는천 천히 입을 열었다.

“어찌할까요?”

후드 아래로 비뚤게 치켜 올라간 입꼬리가 언뜻 보였다. 디에리고는 다시 한번 물었다.


“즉결 처분입니까, 폐하?” “그럴 리가.”


답은 빠르게 돌아왔다. 벽에 비딱하게 기대어 있던 이에게서 비틀린 조소가 튀어나왔다.

“물을 것이 얼마나 많은데. 지금 죽여 버리기엔 아깝지.”

저벅. 자세를 바로 한 그가 발을 내디뎠다. 뒤집어썼던 후드를 완전히 젖히자 가라앉은 어둠 속에서 도 반짝이는 은발이 드러났다. 그 아래 잘생긴 이마, 날카로운 콧대. 입술과 턱으로 이어지는 유려한 선.

“헉.......”

로셀이짧게숨을들이켰다. 1년반전보다살짝짧아진은발이이마위에흩어져있었다.길게뻗은 눈매가날카로웠다.늘어딘지느슨하게풀어진여유로운낯을하고있던그의옛주군이기억속과는 정반대의 낯을 하고 그를 똑바로 직시했다.

차고, 단단하고, 무기질적인 낯. 오수에서 방금 깨어난 것같이 나른하던 얼굴은 간데없고 시퍼렇게 벼려진칼날같은서슬을두른남자가서있었다.

로셀은 차마 그 얼굴을 마주 보지 못하고 시선을 떨어뜨렸다. 무감한 목소리가 정수리에 내리꽂혔 다.

“오랜만이군, 로셀.”

“......폐......하.”

“잘 지냈나?”

묻는 목소리에는 높낮이가 없었다. 툭, 툭. 로브의 단추를 뜯듯이 풀어내는 소리가 들렸다.


 “수도로 데려오라 명한 후에 심문할까 했는데. 생각해 보니 그러면 기다림이 두 배라.” 이어지는 목소리는 무감해서 도리어 여상하기까지 했다. “내가요즘옛날처럼여유가있는편이못돼서.”

“폐, 하.”

“여기까지 직접 오는 수고를 감수한 가치가 그대에게 있었으면 좋겠어.”

1년 반 동안 황제가 이를 갈며 제국 전역을 뒤지고 있다는 소문은 들었다. 정화 작업은 핑계고 사실

은 반역자 무리를 소탕하는 게 본 목적이라더라. 벨고트 마탑이 무너진 것과 관계가 있다더라. 마탑이 

황실을 배신했다더라.

물론 에우레디안에게는 제국 전역을 정화하는 것도 솔레이아의 잔당들을 추적하는 것만큼 중요했


지만,그것을로셀이알리도없었고알새도없었다.

휙. 갈고리처럼 휘어진 푸르스름한 신성이 로셀의 턱과 뒤통수를 휘감고 위로 홱 쳐들었다. 고개가 저절로 뒤로 꺾이며 황제의 모습이 시야에 담겼다. 황제가 허리를 굽혔다. 불그스름한 자안에 시선이 홀릴 듯이 얽혀들었다.

“솔레이아 리사드를 엘라드 후작가의 적녀로 둔갑시켰더군. 그대가.”

“.......”

“15년 전에 그대가 그 입으로 직접 선황께 고발한 그 삿된 가문. 리사드의 ‘정화식’에서 유일하게 살 아남은 핏줄이었다지.”

하나하나, 에우레디안 벨고트는 이미 조사를 끝마친 사실들을 내뱉었다. 그 입으로 자신이 여유가 없다 했던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느릿한 목소리였다.

“그 여자를 빼돌린 게 그대의 죄책감 때문이었든 다른 이유가 있었든 그건 별로 궁금하지 않아.”

“폐, 폐하, 그것은.......”

“그대가 지금껏 그 사악한 마법사를 묵인했던 이유도, 뭐,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었겠지. 그래. 그게 중요한 건 아니야, 로셀.”

길쭉한 엄지와 검지가 로셀의 왼쪽 팔을 결박한 신성의 사슬을 죽 쓸었다. 그와 동시에 사슬에서 갈 라져 나온 신성이 가시 돋은 올가미처럼 로셀의 목을 옭아맸다. 즉시 숨통이 틀어 막혔다.

“내가알고싶은건,그여자가지금어디있느냐.”


 “크, 큭, 크읍.......”

“그리고 그 여자의 꿍꿍이가 무엇이냐, 그것이지. 솔레이아 엘라드가 내 땅에서 대체 무엇을 하고

싶은 건지.”

“폐, 폐. 하. 윽.......”

“설마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지, 로셀?”

늙은 마법사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당장 사형에 처해도 모자란 중죄인을 15년 가까이 제자로 삼아 감쪽같이 지켜 내지 않았나? 내 코 

앞에서.”

황제가 입꼬리를 추켜올렸다. 더없이 아름답지만 비틀린 미소였다. 황제가 태어나던 순간부터 마탑


의주인이었던늙은마법사는이제더는무엇도숨길수없음을알았다.

** *

수도로 돌아가는 내내, 에우레디안은 로셀이 자백한 내용에 대해 생각했다.

“어찌......했는지는 모르지만, 망령들의 세계를 제멋대로 넘어 다니던 아이입니다. 시체와 망령을 부리는 능력이 제가 알았던 어떤 흑마법사보다 뛰어났습니다.”

무려 레모르디를 마음대로 넘어 다닌 여자라.

“그 아이는, 지상에서 가장 강대한 신성을 쥐기를 소망했습니다, 폐하. 마탑으로 오던 날부터 계

속.......”

그 여자가 자신을 탐냈다는 것이야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제 곁에 달라붙어 여자란 여자는 죄 쳐

낸 세월이 자그마치 5년이라.

그가 물은 것은 ‘왜?’였다. 왜 솔레이아 엘라드는 자신에게 그토록 집착했나?

“머리가 크며 제게도 많은 말을 하지는 않았습니다만....... 다만 스쳐 지나가듯이 한번 물은 적이 있 습니다. 유데타 너머에, 닿으면 어떨 것 같으냐고.”

“지하....... 지하로 갔을 겁니다, 솔레이아는.”


 유데타 너머라니. 그야말로 미친 소리였다. 지상에서 가장 유데타 너머에 흐르는 힘과 비슷한 힘을 물려받은그조차감히닿을생각도못하는곳을그와정반대되는힘을가진마법사가노리고있다고.

“그러기만 하면 전부 끝난다는 것처럼,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래도 숨은 붙여 두시다니....... 당장 죽이지는 않으실 모양입니다.”

디에리고가 그의 상념을 깨고 끼어들었다. 그들은 수도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몇 안 남은 황실 마법 사가 이동 마법진을 허공에 띄워 놓고 있었다. 에우레디안은 걸음을 옮기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없애기엔 아까운 패지. 벨고트에서 제일가는 마법사인데.”


그러나 그런 것치고 그가 로셀에게 내린 처분은 그리 가볍지는 않았다. 로셀의 자백을 전부 듣자마

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를 태워 버린 것이다. 그 특유의 푸르스름한 빛이 도는 은빛 신성의 불꽃

으로. 

물론 체르나타 로셀은 흑마법사는 아니었는지, 그 ‘화형’식에서 목숨을 잃지는 않았다. 정화의 불은 기본적으로 지상에 허락되지 않은 삿된 것들을 태우는 불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신성은 마력을 파괴하는 힘이었고, 다분히 살의가 가득했던 그 불꽃은 로셀의 마력 을전부에가깝게태워버렸다.아마도다시회복하는데는꽤나시일이걸릴것이다.

디에리고는 그 망설임 없는 처분에 혀를 내둘렀다. 시간이 갈수록 더 입안에 가시라도 난 것처럼 날 카로워지는 성정에 점차 익숙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역시 완전히 적응하기는 어려웠다. 마탑의 잔 당들을 하나씩 잡아들일 때 에우레디안이 내리는 처분들은 단호하고 냉정하기 그지없었다. 보는 사 람의 등골마저 서늘하게 할 정도로.

선량한 사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법사에게 마력을 빼앗으시다니. 근래 들어 굉장히 무서워지셨습니다, 폐하.” “관대하게대해줘봤자별소용이없다는걸알았거든.그래도살려둔게어디야?”

에우레디안은 빠른 걸음으로 이동진에 몸을 실었다. 즉각 사위가 뒤바뀌며 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내려앉았다. 그들은 순식간에 남부로 통하는 길목에서 제국 중부를 지나는 곳으로 이동해 있었다. 디 에리고가 그를 따라 마법진에서 걸어 나오며 중얼거렸다.

“저라면 차라리 죽기를 바랐을 겁니다.”

“그래서 살려 둔 거야. 그게 더 고통스러울 테니까.” 장거리를단번에이동할수있는마법을엮을마법사가없는수도로가려면몇번씩이동진을바꾸


 는수밖에는없었다.이래서마법사한명한명에그렇게매달렸던건데.

마탑과 마법사 양성에 들어간 시간과 돈을 생각하니 다시 속이 쓰렸다. 지금이라도 알아차린 게 다 행이라 자위해도 그간 낭비한 벨고트 제국민의 피 같은 세금을 상기하면 화가 가라앉았다가도 다시 울컥하는 것이다.

“그날 밤 땅이 갈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애는 늘 그런 식으로 지하를 드나들고는 해서, 곧바로 알았지요. 일을 저질렀다는 걸.......”

땅이 갈라지고, 그 아래를 손쉽게 드나들었다, 라. 그래. 황궁에서 사달이 일어나던 그날도 솔레이아 는 추락하듯 땅 밑으로 사라졌다. 땅 밑. 지하. 레모르디 아래로?


아무리 흑마법사라고 해도 인간이 레모르디를 넘어갈 수 있다는 이야기는 듣도 보도 못했다. 인간 이 그 절대 금기의 경계를 오갈 수가 있다니. 아무리 마법사라 한들 그 시체와 망령들의 세계에서 인


간이살아숨쉴수가있다니.......

글쎄. 그럴 리가. 그러나 그럴 리가, 라고 생각을 차단하는 것이 그다지 좋은 방법은 아니라는 걸 에 우레디안은알았다.그럴리가없다는그안일한생각이마탑을복구불가의상태에빠뜨린것이나다 름없었으니까. 게다가 예레니카가 떠나기 전 스치듯 남겼던 말이 있었다.

“저한테 라리가 온 것처럼 솔레이아에게도 뭐가 붙은 것 같은데. 음, 그게 완전히 개화하기 전에 찾 아내는게좋을것같다고라리가그러네요.몇년쯤걸릴거래요.”

그녀는 알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제는 솔레이아에게 붙은 망령의 정체보다 다른 것이 더 걸렸다. 라울루스가 예레니카에게 보냈다던 그 분신. 새끼 늑대.

로셀이 죽기 직전에 내뱉는 호흡처럼 가느다랗게 중얼거리던 목소리가 귓전을 스쳤다.

“사실 강대한 신성이기만 하면 누구든 상관없었을 겁니다, 그 아이는.”

누구든 상관없을 거라고....... 하지만 지상에서 가장 강대한 신성이라면 라울루스의 혈족인 그 자신 과 슈마르트를 비롯한 몇몇 사제들 외에는 없을 텐데. 그러니 솔레이아의 타깃은 여전히 그 자신이어 야 맞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그때 예레니카가 했던 말들이 맴도는지 모르겠다.

“라울루스의 분신이에요. 제가 하도 여기서 구르고 있으니까 라울루스께서 보시기에도 좀 딱해 보 였나 봐요.”

설마. 혹은 그럴 리가, 하는 작은 의혹들도, 그저 본능적인 직감이라도 허투루 넘기지 않기로 다짐했 다. 그러니 지금 솔레이아에게 붙어 있던 신성의 씨앗이 갑작스레 자취를 감춘 것도, 멀리 있는 연인 의안위에의구심이드는것도그냥넘겨버릴수는없었다.


 마음이 초조하게 죄어들었다. 26년 동안 초조하거나 불안한 감정과는 담을 쌓고 살았는데, 이 1년 하고도 반이 넘는 시간 동안 그는 그 생소한 감정들을 전부 안고 살아야 했다. 간간이 날아오는 짧은 편지에점점더목을매면서.

편지는늘밝았고그가걱정할만한일이라고는전혀적혀있지않았지만불안함은전혀수그러들 지 못했다. 살얼음판을 묵직한 쇳덩이를 신고 걷는 것처럼 불안하던 마음은 이제 점점 더 한계치까지 몰리고있었다.그불안함의이유를명확히알수가없으니답답함과조급함도함께차곡차곡쌓여갔 다.

에우레디안은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왜아직도1년반밖에안지난거지?” “......?”


“꼭 2년을 채워야 하는 걸까?”

“예......?”

디에리고가 흠칫하며 되물었다. 에우레디안은 인상을 구겼다. 그의 여유는 한참이나 전에 이미 박 살이 났다.

“느려.”

하루에도 몇 번씩 습관처럼 중얼거리는 말에 디에리고는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우레디안은 빠른 걸음으로 수도로 통하는 이동진에 몸을 실었다. 마력의 파장에 은빛 머리 카락이 휘날렸다.

불안과 조급함이 낳은 결론은 하나였다. 하루라도 빨리 다시 데려와야겠다. 에우레디안의 가슴 위 로늘어진은빛십자가가휘도는기운속에서반짝빛났다.마법진이발동한자리에는두남자의모습 대신그작은빛만이남았다.

** *

그다음 해의 봄. 헤자드.

추운 겨울이 지나고 가장 먼저 봄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한 지역은 남부였다. 남부로 통하는 길목인 헤자드 역시 눈이 녹고 따스한 공기가 막 내려앉기 시작하는 참이었다.


 “겨울에 폐하께서 오셨었다면서?”

“무슨 소리야, 그건 또?”

북적북적한 거리에는 언제나 그렇듯 수만 가지 이야깃거리가 떠돌았다. 반은 뜬소문이었고, 그 반 의반은 와전된 사실들이었으며, 나머지는 얼추 사실과 가까운 이야기들이었다.

“바리샤드 교회의 부주교님을 보았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부주교님뿐이 아니더라니까.”

“예끼.말이되는소리를해.황제폐하께서이먼헤자드까지뭣하러걸음하셨겠나?” 

그리고 황제에 관련한 소문은 이 작은 도시에서는 뜬소문으로 취급되는 중이었다. “이 사람이. 안 믿네.”


“직접 행차하실 이유가 없잖아. 그것도 몰래.” “이유가 있다니까.”

사박사박.

“들어는 보자. 뭔데?”

“그게.......”

긴망토자락이잘마른땅을스쳤다.

“이 헤자드에 반역자들의 무리가 숨어 있었다지 뭐야.”

“뭐?”

어이없다는 듯 짧게 터뜨리는 웃음소리.

“수배령도 내려진 적이 없는 이 시골 도시에?”

“그래. 수도 마탑의 주인이었다지.” “어이고,이사람.큰일날소리를하네.그화제는금기야,금기.” “진짜라니까.”

공기가 한결 따듯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겨울의 끝자락에 걸친 계절이었다. 사람들의 옷차림은 아 직 칙칙하고 두툼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린 검은 망토는 크게 눈에 띄지는 않았다. 게다가 애초에


 남부로 통하는 유일한 도시인 헤자드에는 이방인이 많았고, 수상한 복장을 한 자들도 수두룩했다. 짐 수레를 끄는 잡상인들의 이야기는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그 무너진 마탑의 수장이 도망쳤다는 이야기는 들었지. 그가 여기에 숨어들었다고?”

“그래, 그래. 해서 직접 이 헤자드까지 내려와 심문하셨다지, 폐하께서.”

“흐음.......”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짐수레 끄는 소리가 멈추었다. 새카만 로브 자락이 땅에 끌리던 소리도 따라 멈추었다.


“자네표정이마음에안들어.역시안믿는거지?”

“믿을 만해야 믿지. 자네는 너무 귀가 얇아. 뜬소문을 철석같이 믿는 경향이 있어.”


“허, 답답하군.”

“왜, 아예 그 마탑의 주인이 실은 흑마법사였다, 이렇게 말을 하지? 그러면 좀 납득이 가겠는데.”

“내가 그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말을 일삼진 않아. 나를 뭘로 보고.......”

드르륵. 쿵. 짐수레에서 물건들을 내리는 소리. 그리고 이제 반쯤은 투닥이는 소리.

“차라리 올 봄에 폐하께서 결혼하신단 소문이 더 신빙성 있겠군.”

“그런 소문이 있었어?”

“글쎄. 겨울에 남부로 휴양하러 가시는 귀족 나리들께서 하신 이야기를 주워들었을 뿐이라. 하지만 이쪽은 그래도 신빙성 있지 않나? 수도에서 파다한 소문이라 이거잖아.”

“오....... 하기야, 황후 자리가 오래 비어 있기는 했지.”

이야기는 이제 황제의 혼사 쪽으로 흘러가는 듯했다. 길가에 그림같이 멈추어 있는 이방인에게 관

심을 두는 사람은 여전히 거의 없었다.

“그래서, 예비 황후님은 누구시라는데?”

“그것까지 내가 어찌 아나? 그저 알음알음 주워들은걸.”

“오랜 약혼녀가 있으시다고 어디서 들은 것 같기도 하고.......” “그거야말로 헛소문이라던데.”


 “그래?이거원.뭐가뭔지알수가없군.하긴,수도라는곳이원래그렇지만.”

주의를 끌 만한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드르륵. 수레에서 내린 짐을 끄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

어지는 시시콜콜한 잡담들.

“파란 지붕의 레이나가 가을에 결혼한다는 말은 들었어?”

“아, 그거.......”


봄바람은 제국 전역에 도는 소문의 근원지인 수도 바리샤드에도 불어왔다. “봄이네요.”

“봄이로군.”

클라리스 아이벤은 남편과 함께 막 연회장에 들어선 참이었다. 조금 늦게 도착한 터라 이미 무도회 는 한창이었다. 휘황찬란한 샹들리에의 빛, 후끈하게 달아오른 열기. 궁정 악단의 연주. 꽉 찬 댄스 플 로어. 화려한 홀은 지지난해의 늦봄에 완전히 엉망으로 부서지고 불타 버렸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 로 멀쩡하게 복구되어 있었다.

다만 궁을 재건하며 현 황제의 취향이 조금 반영되었는지, 화려하기 그지없던 천장화나 금 기둥 등 눈이 돌아갈 정도로 사치스럽던 장식들은 확연히 줄어 있었다. 화려하지만 다소 예스러웠던 황궁이 우아하고 정갈한 분위기로 정리되는 데는 1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클라리스는 홀 안을 둘러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하기야, 너무 화려한 것을 좋아하시진 않으셨으니.” “그랬던가......? 딱히 별생각 없으셨던 것 같은데.” “아니요, 폐하 말고요.”

클라리스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와인 잔을 기울였다. 미리 골라 놓은 드레스들을 내밀었을 때 하 얗게 질리던 얼굴이 떠올랐다. 르보브니의 공주는 눈을 굴리며 슬금슬금 덜 무겁고 덜 화려한 드레스

멈추어 있던 걸음이 다시 떨어졌다. 사박. 검은 로브 자락이 다리 사이를, 겨우내 얼어붙었다 이제 막 녹기 시작한 땅을 다시 스쳤다. 바람을 타고 들려오던 상인들의 목소리가 서서히 멀어졌다.


** *


 를 찾아 골랐었다. 벌써 2년이나 지났는데 왜 이렇게 자세하게 기억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아무래도 벨고트에서는 보기 힘든 분이라 그렇겠지.’

클라리스는 아닌 척 슬쩍 황좌가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황제는 자리에 없었다. “어머나, 어디 가셨지?”

딱히춤이나사교활동을즐기지않는황제는황실주최의행사가있을때마다두어시간자리만지 키다 돌아가곤 했다. 재위에 오른 이래 늘 그랬지만, 작년부터는 단지 자리만 지킬 수는 없게 된 상황 이었다.부인곁에찰싹붙어있던아이벤백작이혀를찼다.


“쯧. 비르젠 후작, 아직도 폐하께 둘째 딸을 들이미는 모양인데.” “뭐라고요?”


클라리스의 목소리가 대번에 뾰족해졌다.

“어디예요, 어디?”

깜짝 놀라 잔을 떨어뜨릴 뻔한 아이벤 백작이 슬그머니 부인에게서 떨어졌다. 또다시 엉덩이를 꼬 집힐까 걱정스러웠는지, 그는 적당히 안전거리를 벌린 후에야 홀 오른편을 가리켰다.

“저......저기.”

클라리스의 고개가 전투적으로 돌아갔다. 황좌에서 가장 가까운 홀 오른편의 테라스 근처에서 눈에 확 튀는 은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황제는 막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궁으로 돌아가려던 것 같았다. 그러 다 비르젠 후작에게 딱 걸린 모양새였다.

후작의곁에수줍게선아리따운영애가보였다.비르젠후작의둘째딸.클라리스도익히얼굴을아 는, 한창 사교계의 새로운 꽃으로 떠오르고 있는 어린 아가씨였다. 더 생각할 것도 없다. 클라리스는 맹렬한 기세로 걸음을 옮겼다.

“부, 부인. 어디를......?”

아이벤 백작은 손을 뻗었지만 부인을 막을 힘 따위는 그에게 있지 않았다. 백작은 이마를 짚으며 서

둘러 부인의 뒤를 쫓았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황제와 후작이 나누는 대화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내 혼사는 내가 알아서 해, 비르젠 후작.”

“그 말씀만 벌써 2년을 들었습니다, 폐하. 이제는 슬슬 혼사와 후계에 대해서도 고민을 해 보셔 야.......”


 사실 바르젠 후작이 틀린 말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황제의 나이가 벌써 서른에 가까워 오는데 약혼 녀조차 없다는 건 한 번쯤은 생각해 볼 만한 문제기는 했다. 황족들은 대부분 이른 나이에 약혼하고 재위에 오르며 결혼과 황후 책봉을 동시에 진행하는 것이 관례였다.

황족의 결혼이란 보통 정치적 권력 간의 결합과 무관하지 않았으니, 모든 귀족들의 관심이 쏠리는 사안인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전통은 전통일 뿐. 그대로 답습하기엔 현실과의 괴리가 있어서. 지금은 황제파와 귀족파, 혹은 귀족 사이의 파벌이 나뉘어 대립하는 혼란기는 아니었다.

정치적 혼란에 신물이 난 전전대의 황제가 일부일처를 황족에게까지 확대해 버린 이후로 개같이 싸

워 대던 수도 귀족 간의 항쟁은 눈에 띄게 수그러들었다. 게다가 이번 대의 황제는 함께 자란 형제나

사촌도없어자연히황위를놓고겨뤄야할정적따위도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황태자로 내정된 유일한 황족이었고, 감히 그 정통성에 토를 달 여지가 단 하나도 없 었으니귀족세력의힘으로뒤를받쳐야할이유도필요도없었다.


정치적약점이없는단하나의군주.그게이번대벨고트의주인이가진위상이었다.그러니결론은 관례에 살짝 어긋나기는 해도 혼사가 지금껏 미뤄진 게 잘못되거나 급한 일은 아니라는 소리다.

게다가 황제는 황태자 시절부터 딱히 여자를 밝히는 성정은 아니었다. 수려한 외모 덕에 주위에 늘 얼굴을 붉힌 아가씨들이 들끓었던 것과는 별개로, 황제는 늘 상냥하고 친절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 로 벽이 높은 남자였다.

황제가 딱딱하게 대꾸했다.

“몸 건강하고, 마음도 건강하고. 그러니 당장 내일 죽을 일도 없어. 후계를 걱정하는 거라면 전혀 급

한일이아니라고말해주고싶군.”

“비단 후계 때문이 아닙니다, 폐하. 벨고트에는 어머니가 필요합니다. 폐하께서 미처 살피지 못하시

는 부분을 세심하게 어루만져 줄 황후님이요.”

“내가 어디가 부족했나? 길이 남을 성군은 못 돼도 폭군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 뜻이 아님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황후를 들이시면 폐하의 업무량도 반절로 줄어들 겁니다. 요몇달내내무리하신것,알고있습니다.”

“그대가 이렇게 나를 괴롭히지만 않으면 마음의 부담이라도 좀 덜 수 있을걸.”

그러나 그렇다고 황실의 외척이 되어 가문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픈 귀족들의 야망이 전부 사그라들

었느냐 하면, 그건 절대 아니었다.

황제의 약혼녀를 자처했던 엘라드 후작가의 마법사가 사라진 이후 근 2년간 황제의 주위에는 제 딸


 들을 어떻게든 붙여 보려는 귀족들이 득실득실했다. 황제가 짜증스럽게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내 뱉었다.

“한두 번도 아니고. 그대들이야말로 지겹지도 않나? 2년 내내 나만 보면 같은 말을 하는 게.”

“하지만 폐하.......”

“그대의딸은나보다더좋은남자를만나도돼,후작.”

그순간비르젠후작과클라리스,그리고아이벤백작은모두같은생각을했다.젊고잘생긴황제보 다더좋은신랑감이이나라에대체어디있나?


“내게 자그마치 2년이나 쏟기엔 그대 딸이 아깝지도 않나?”

부드럽게 돌려 말하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속뜻은 제발 그만 괴롭히고 꺼지라는 것이었다. 클라리스


는 그 차가운 목소리에 시원한 쾌감을 느꼈다. 이번에도 딱히 걱정할 필요는 없겠네. 그녀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앞으로 나섰다.

“어머나, 비르젠 영애. 어디를 가셨나 했더니, 여기에 계셨군요.”

클라리스를 발견한 황제의 눈에 짧게 안도의 빛이 스쳤다. 이 비슷한 상황을 벌써 열 손가락으로는

세지도 못할 만큼 겪고서 생긴 별스러운 유대 관계였다. 클라리스는 싱긋 웃었다.

“다들 영애를 찾고 있답니다. 손등에 키스라도 한번 해 보고자 애태우는 영식들이 줄을 섰던걸요.”

“아....... 아이벤 백작 부인.”

“후작님, 영애를 데려가도 되겠지요?”

클라리스는자연스럽게황제와아버지사이에끼어이도저도못하고있던가여운아가씨의팔짱 을 끼고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비르젠 후작의 눈이 즉각 세모꼴로 변했다.

“그래, 그래. 어서 가 보시오, 부인.”

후작이 뭐라 말을 내뱉기 전에 아이벤 백작이 은근슬쩍 끼어들었다. 그 역시 부인의 서슬에 이 연극 에 참여했던 적이 벌써 여러 번이라 처음에는 부자연스럽기 그지없던 대사도 퍽 자연스러워졌다. 비 르젠 후작은 클라리스가 제 딸을 데리고 재빠르게 멀어지는 것을 보며 이를 갈았다.

“......하면 저도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폐하.”

“오늘그대가내게했던말중가장반가운말이야.”

황제는 비딱하게 대답했다. 심사가 꼬인 게 분명했다. 이제 황제를 달래는 건 아이벤 백작의 몫이었


 다.이역시벌써몇번이나겪었던일이었다.백작은한숨을푹내쉬었다. “오늘은 비르젠 후작이었군요.”

“어제는 레이먼 공작이었고.”

“세상에, 공작에게 딸이 있었습니까?”

“사돈의 질녀라더군. 어처구니가 없어서.......”

황제가 사납게 이를 갈았다.

“누구는결혼을안하고싶어서안하는줄아나?”


그러면 얼른 안 모셔 오시고 뭐 하시는 겁니까? 그 말이 목구멍 아래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백작은 훌륭하게 삼켜 냈다. 주군이 왜 이리 날카롭게 반응하는지 잘 알고 있는 탓이었다.


“르보브니에서는 아직도 답신이 없습니까?”

“.......” 대답대신뿌득이를가는소리가들려왔다.백작은어렵지않게답을유추해냈다. 응,아직안왔군.

르보브니의 국왕은 간도 크지. 무려 벨고트의 주인이 보낸 구혼서를 몇 달째 나 몰라라 하다니.......

백작이 기억하기로 그가 처음 르보브니에 구혼서를 보낸 것은 지난겨울이었다. 황제가 막 체르나타 로셀을 잡아들여 지하 감옥에 처넣던 그때쯤. 귀족들에게 알리지 않고 조용히 보낸 구혼서라 아직 수 도에는 퍼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르보브니 측에서 벌써 넉 달 가까이 구혼에 대한 답을 주질 않 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간 수도에 민망한 소문이 돌기 딱 좋았다.

“이런 기분이었나.......”

황제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백작은 고개를 갸웃했다. “예? 무슨 기분을 말씀하시는지......?”

“차이는 기분.”

“예에?”

아이벤백작은저도모르게소리를높였다.맹세코황제의입에서나올만한말은아니었다.딱히지 위와 위상이 아니더라도 에우레디안 벨고트는 어디 가서 이성에게 차일 만한 남자는 아니었다. 아이


 벤 백작은 당황스럽게 중얼거렸다.

“차이다니.......”

게다가두분사이,시간이꽤지났어도썩나쁜것같지는않았는데.......

“서신 주고받고 계신 것 아니었습니까?”

“......저번 달까지는 그랬는데.”

“그 말씀은, 이번 달은 건너뛰었다는......?”

백작은 무심결에 내뱉다 그를 슥 돌아보는 붉은 자줏빛 시선에 입을 딱 다물었다. 황제가 피곤한 낯 

으로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 넘겼다.

“설마 이런 식으로 복수하려는 건 아니겠지, 예레니카.”


“.......”

“누구 피를 말려 죽이려고.......”

정말로 현실성 없는 말인데, 묘하게 그럴듯하다. 아이벤 백작은 황제를 이동 수단 비슷하게 취급하 며편하게안겨다니곤하던르보브니의공주를떠올리고는눈치없이웃어버렸다.즉각돌아온형형 한 눈초리에 한껏 올라간 입꼬리를 재빠르게 아래로 내리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무려 라이거의 동부 강자, 벨고트의 황제를 이렇게 애가 달게 만드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그 공주님이 유일했다. 누가 감히 황제의 청혼을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직접 써 보내는 친필 편지를 무 참히 무시해 버리겠는가?

물론 그 생각은 아이벤 백작이 2년 전 황제와 공주 간에 오가던 은근한 줄다리기에 대해 까맣게 모 르고있었기때문에할수있는생각이기도했다.

에우레디안은 홀을 벗어나며 짜증스럽게 목을 죄고 있던 크라바트를 헐겁게 풀어냈다.

‘벌 받는 건가......?’

2년 전에 몇 번이나 예레니카의 청혼을 매몰차게 거절한 데 대한 벌을 받는 건가? 하지만 아무리 그 래도 1년 반이 넘게 잘 이어져 오던 연락이 한 달이 넘게 뚝 끊어진 건, 아무리 벌이라도 강도가 좀 심 하지 않나.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그새 마음이 바뀌었나?

하지만 마지막 편지에서는 그런 낌새는 느껴지지 않았는데....... 서면과 본심은 다르다 이건가. 생 각이 점점 비뚠 방향으로 흘러갔다. 아쉬움은 저가 다 가져가겠다고 그렇게 말을 했으면서. 이제는 별


 로안아쉽다?그런거면안되는데.

“사실 강대한 신성이기만 하면 누구든 상관없었을 겁니다, 그 아이는.”

로셀의목소리가자꾸귓전을스쳤다.그말이남긴찜찜함은날이갈수록몸집을불렸다.이제는찜 찜함이 아니라 확연한 불안감이었다.

그래서 헤자드에서 황궁으로 돌아온 바로 그 날 르보브니의 왕에게 구혼서를 보냈건만. 석 달이 넘 어서까지 확답을 듣지 못할 줄이야.

그 와중에 예레니카로부터의 편지도 뚝 끊기니 그로서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하루하루 인내심이 바 싹 타들어 갔다. 솔레이아 엘라드의 행방도 묘연해진 지 넉 달째라 불안한데, 이제는 혹시 그녀의 마


음이 돌아서진 않았는지까지 걱정해야 한다니.

지금 밀고 당기기를 할 때가 아닌데. 얼굴도 못 보고. 목소리도 못 듣고. 그것만으로도 애가 달아 죽


겠는데. 2년전꿈결처럼곁에머물다간여자는야속하게도꿈속에서조차얼굴을잘비춰주지않았 다.

품에 안아 체취를 들이켜고 드러난 곳곳에 전부 입을 맞춰 주고 싶은데. 편지로는 해소되지 않는 갈 증이 이렇게 쌓여 있는데. 그런데 편지마저 안 주면 어떡하라고? 어떻게 버티라고. 아니면 혹시 벌써 그사악한마녀가마수를뻗친건가?르보브니에무슨일이있나?

“.......”

생각은 점점 더 최악의 방향으로 뻗어 가고 있었다. 에우레디안은 마구 가지를 뻗어 나가는 생각의

고리들을힘겹게쳐냈다.그러자사고는나름제궤도를찾았다. “직접 확인하면 될 일인가?”

그 언젠가 그랬듯이, 이성과 현실과는 살짝 비켜난 궤도였다. “예에?”

그의 중얼거림을 들은 아이벤 백작이 기겁하든 말든 에우레디안은 방금 떠올린 생각에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주위에는 온통 제 결혼만 바라며 질척하게 들러붙어 오는 귀족들 천지겠다, 게다가 마침 정화 작업도 켈키타를 제외하고는 거의 다 끝난 참이었다. 그녀를 벨고트로 데려올 때쯤이면 아 마도전부다끝나있을것이다.

뭐든 우선 그녀의 허락부터 받아야 하겠지만. 이미 마음이 떠났다고 하든, 아니면 여전히 그에게 사 랑스럽게 웃어 주든. 어느 쪽이든 일단 뭐라도 그 목소리로 들었으면 좋겠다.


 “......눈앞에두고도답을안해줄리는없겠지.” 2년전이라면섣불리하지도못했을생각을잘도하고있다는걸에우레디안본인은미처깨닫지못

했다. 그는 집무실에 도착하기도 전에 결정을 내렸다.

대충 급한 일만 마무리하고 직접 가야겠다고. 르보브니로.

** *


“아버지, 그렇게 자꾸 무시하셔도 되는 걸까요......?”

테제비아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오늘의 서신도 손수 파쇄하고 있는 그녀의 아버지, 르보브니의


왕을 바라보았다.

“무려 벨고트 황제가 직접 보낸 서신인데.......”

붉은자줏빛공단에덧대어진서신은왕의손에잘게조각이났다.다시이어붙인대도알아볼수없 을 만큼 꼼꼼히도 조각난 서신은 그대로 쓰레기통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엄청난 집중력으로 큰일을 해낸 그녀의 아버지가 손을 탁탁 털었다.

“그럼, 그럼. 황제로서 보낸 서신이라면 또 모르지만, 이 서신은 우리 막내를 노리는 도둑놈이 보낸 것일 뿐이니까.”

“도둑놈.......”

상대는 무려 벨고트의 황제인데요....... 테제비아는 그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

아 냈다. 입가에 애매한 미소가 걸렸다.

에우레디안 벨고트. 라이거 대륙의 동부를 휘어잡고 있는 제국의 주인. 그 젊은 황제는 아마도 대륙 에서 첫손가락에 꼽힐 최고의 신랑감일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굴러들어 오는 호박을 걷어차 버리 는 꼴인 것 같은데.......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는 단호했다.

“우리 예니는 아버지랑 같이 살아야지. 어딜 제국으로 보내? 그 위험한 땅에.”

“그건, 그렇지만.”

테제비아는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아버지가 이러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약


 2년하고도몇달전왕궁을기습한벨고트군에의해제국으로납치되었다돌아온동생은웬듣도보 도못한특이한병을얻어돌아왔다.

병명은 마력 부적응. 분명 벨고트에서 귀하게 대접받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던 발랄한 편지와는 정반대로, 르보브니로 돌아온 예레니카의 상태는 썩 좋지 못했다. 살이 쏙 빠져 온 것은 물론이고 르 보브니에는 거의 없다시피 한 마력이나 작은 마력 도구도 견디기 어려워했다.

게다가 달에 한 번은 꼭 생전 관심 없던 라울루스 신전에 둥지를 틀었다. 그 모습이 죽을 날을 받아 놓고 성수를 떠다가 기도하는 모습으로밖에 비치질 않으니, 왕과 왕비의 근심이 날이 갈수록 몸집을 불리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하지만 벨고트에서 온갖 고생을 다 하고 온 사람이라기엔, 황제와 지나치게 친밀해 보이던데.......


테제비아는 벨고트에서 편지가 날아올 때마다 눈에 띄게 반색하던 동생을 떠올렸다. 해가 바뀔 때마 다 몰라보게 활짝 피어나는 사랑스러운 동생을.

올해로스물한살이된르보브니의보물예레니카는이젠어딜봐도귀여운소녀같은구석은없었 다. 예레니카 특유의 색채는 여전히 귀엽고 달콤했지만, 그녀를 이루는 분위기가 조금 더 성숙하게 바 뀐 탓이었다.

톡건드리면부서질유리구슬같은동생은스무살이넘은뒤로는온르보브니남자들을전부홀리 고 다니고 있었다. 가끔 수심에 잠긴 듯 가라앉아 있는 모습이 그대로 공기 중으로 사라질 듯 위태로 워 보이기도 했지만, 그 모습조차 묘하게 시선을 잡아끌었다. 물론 본인은 꿈에도 모르겠지만.

“우리 예쁜 딸은 아무도 못 데려가. 그럼, 그럼.”

“딱히 예니가 르보브니에 있어도 안전할 것 같지는.......”

않은데....... 테제비아는 뒷말을 속으로 삼켰다. 예레니카가 지나갈 때마다 르보브니의 기사들이 홍 당무처럼얼굴을붉히며기둥뒤에서훔쳐보는광경을테제비아는벌써몇번이나보았다.그애가잘 다니는 길목에 다채로운 꽃들이 한 송이씩 놓여 있는 일은 일상다반사였다.

“대체 누가 자꾸 꽃을 꺾어서 길가에 버려두는 거야?”

물론 예레니카는 그 남정네들의 마음은 손톱만큼도 모른 채 늘 투덜거리기 일쑤였다. 눈치가 없는 아이가 아닌데 반응이 그렇다는 것은, 다른 남자는 눈에 차지도 않는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맏딸 의속은요만큼도모르는왕은통통한주먹을꼭쥐며다시한번다짐했다.

“글루카만 수수료를 10퍼센트로 올려 준다고 해도 안 돼.”


 “저번에는 12퍼센트까지 올려 주겠다고 했.......”

“그으,래도.안돼!내딸을사지로보낼수는없지.”

맑은하늘색눈동자가풍랑을만난연약한조각배처럼세차게흔들리는걸본것같은건착각이겠 지.그러나테제비아는흘끗돌아본집무실안에서왕이벨벳쿠션을끌어안고눈물을찍어내는것을 보고 말았다.

“12퍼센트....... 끄흑.......”

“.......”


테제비아는 국왕의 집무실을 나오며 얕은 한숨을 쉬었다. 사실 그녀도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 자신부터도 예레니카가 벨고트 땅으로 간다 하면 쌍수를 들고 말릴 생각이었다. 르보브니보다 배는 더 강한 마력이 흐르는 그 위험한 땅에, 마력 부적응자라는 불치병까지 안고 있는 아이를 어떻게 보낸단 말인가!

테제비아는 왕궁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서랍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상자 안에는 지난 한 달간 세르게이까지 동원해서 몰래몰래 빼돌린 편지 한 뭉치가 들어 있었다. 미처 빼돌리지 못한 편지 들은 발송되기 전에 반송 처리를 해 버리는 철저함까지 발휘하면서도 테제비아는 죄책감을 버리지 못했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

테제비아는 울적하게 상자를 닫았다. 설마 직접 르보브니를 다시 침략해 올 정도로 황제가 무뢰한

은 아니겠지, 하고 믿으면서.

“미안해, 예니.......”

그리고그날부터벨고트와르보브니간의비공식서신은한달하고도반이더지날때까지뚝단절 되었다. 물론 테제비아와 르보브니의 왕을 비롯한 그 누구도, 그 사건이 누구를 불러올지는 까맣게 몰 랐다.

** *

여름이 막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봄바람에 점점 더 열기가 실리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가만히 햇빛


 을 받고 섰노라면 등줄기에 땀이 주룩 흐르는 계절이 돌아왔다. 시간이 안 간다, 안 간다 노래를 불렀 는데.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또다시 여름이었다.

태양이 바로 머리 위에 걸려 있었다. 새파란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했다. 이따금 불어오는 산 들바람이 땋아 내린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파고들었다. 나른하고 평화로운 한낮. 포근하고 안전한 왕 궁.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여유.

“.......”

그래. 굉장히 기분이 좋을 만도 한 날인데....... 나는 굉장히, 굉장히 심기가 불편했다. 반송되어 돌

아온 편지가 손안에서 처참하게 구겨졌다.


“이 남자가 진짜.......”

나랑 한번 해 보자는 거야......? 한 달도 아니고. 두 달도 아니고. 무려 두 달 반 동안이나 내 편지를


씹어?

“이 나쁜 사람. 내가 가만두나 봐라.”

나는몇달간입에배어버린욕을입속으로중얼거리며반송된편지를홱쓰레기통으로던져넣어 버렸다.내가무려보름전에벨고트로보냈던편지였다.이런식으로연락이뚝끊긴지벌써두달반 이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조금 있으면 석 달을 채우겠어, 아주.” 올봄까지만해도편지의주기는길어야열흘을넘기지않았다.하지만그래봐야한달에고작두통

정도라 안 그래도 가뜩이나 부족하던 참인데. 나는 심호흡을 하며 인자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니야, 예레니카. 진정하자.”

그래, 처음 한 달은 바빴다 쳐. 벨고트에 무슨 일이 생겼다고 쳐. 내가 그 정도는 이해해 줄 수 있다 이거야. 하지만.......

“석 달은 너무하잖아!”

나는 결국 인자한 미소를 집어치우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침대에서 세상모르게 퍼질러 자고 있던

새끼 늑대가 펄떡 뛰어올랐다. [깜짝 놀랐잖아, 요놈아!] “설마 변심했다거나.”


 [뭐?] “이제나같은거전부다까먹어버렸다거나!” [......또 그 소리구나.]

라울루스는 몹시 한심하게 나를 보고는 도로 침대에 길게 드러누웠다. 뒷발로 복슬복슬한 배를 슬 슬 긁는 꼴이 얄밉기 그지없었다. 나는 눈을 세모꼴로 뜨고 라울루스를 찌릿 노려보다 고개를 돌렸다. 창틀에 오른쪽 볼을 지근지근 누르며 우울하게 생각을 이어 갔다.

‘갑자기 이렇게 연락이 끊기니까 불안하잖아.......’


내가 마지막으로 에우레디안에게 들은 소식은 벨고트의 정화 작업이 거의 마무리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솔레이아의 몸에 달라붙은 신성의 씨앗도 아직 희미하게나마 추적망에 잡히고 있다고 했

었다. 

그러나 그 편지를 받고 몇 주 지나지 않아, 라울루스가 신성의 씨앗이 지상에서 소멸했다는 것을 알 아챘다. 그 사실이 뜻하는 바는 하나다. 하이데스가 제 몸에 붙어 있던 씨앗을 발견해 없애 버렸거나, 아니면 그가 솔레이아의 몸에 완벽히 적응해 씨앗이 견디지 못하고 죽어 버렸거나.

전자라면 아직 시간적 여유가 남았다고 위로할 수 있지만, 후자라면 곤란했다. 이제 언제 하이데스 가들이닥칠지짐작할수없게되어버린거나마찬가지니까.게다가하이데스가목표로하는게라울 루스와 함께 있는 나일지, 아니면 에우레디안일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이건 전자든 후자든 둘 다 문제 다.

그 때문에 불안감이 날로 가중되던 와중에 멀쩡히 잘 오가던 편지까지 뚝 끊겼다. 내가 미치지 않은 게 용하다.

“오래 기다리게 안 하겠다며!”

결국 서운함이 입 밖으로 툭툭 튀어나왔다.

“얼굴보는건기대도안해.고작편지를이렇게오래기다릴일이냐고!”

[아휴, 시끄러워.......]

설마. 서어어얼마. 설마 이대로 끝? 그러면 곤란하지. 내가 당신을 어떻게 원작의 굴레에서 끄집어 냈는데,이렇게나몰라라하면안되지!

“......그런데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까.”

끓어오르던 화는 금세 식고 우울함이 그 자리를 채웠다. 그래. 시간이 2년이나 지났으니까....... 함


 께 보냈던 시간의 여섯 배나 넘게 지났으니까. 마음이 변했대도 이상하진 않은 시간이긴 하지....... 씩씩하게 르보브니로 돌아올 때는 언제고, 자신감은 바닥까지 처박혀 있었다. 사실 벨고트에서 돌

아온 첫 몇 달은 정말 아무것도 하기가 싫었더랬다. 밤마다 라울루스를 끌어안고 훌쩍거렸지.

“젠장, 죽이 되는 밥이 되든 벨고트에 붙어 있었어야 했어. 하이데스에게 죽임당하기 전에 상사병

으로 먼저 살아 있는 좀비가 되게 생겼네.......”

하지만 그렇게 염불을 외던 병도 시간이 좀 지나니 낫더라. 그리고 내게도 해야 하는 일들이 하나씩

생기며 어찌어찌 극한 상사병에서는 좀 벗어났나 했는데. 그런데 2년을 다 채우고 이렇게 뒤통수를

때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진짜만나면가만안둬.”


그런데 무슨 수로 만나지?

“다무너진줄알았더니,설마그새그벽을보수공사해버린건.......”

그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거야? 내 마음의 소리를 훤히 꿰고 있을 라울루스가 낄낄거리며 비웃었다.

[뭐, 인간의 마음은 갈대라고 안 하더냐, 아가야.]

라울루스는팔다리짧은새끼늑대의모습을하고있는주제에몹시도건방지게앞발을괴고비스 듬히 누워 나를 보고 있었다. 라울루스가 던진 그 습관적인 놀림은 내 불안감에 정확히 명중했다. 나 는 우울하게 고개를 푹 숙였다.

“그쵸....... 남자의 마음은 갈대랬어.......”

아니,그건여자의마음이었던가?젠장.갈대같은게남자든여자든뭔소용이야?당장그남자가어 느바람에흔들리고있을지모르는데.이러다가정말로어느날갑자기벨고트황제의결혼소식이날 아드는 거 아니-.

“이모오오오!” 그최악의가정은귓가에꽂혀드는혀짧은목소리에뚝끊겼다. “어, 어어?”

나는 얼떨떨한 소리를 내며 홱 고개를 들었다.


 “오늘은 온다는 말이 없었는데......?”

벌떡 일어나 창 아래를 내다보니 눈에 익은 빨간 머리카락이 보였다. 창문 밑으로 아장아장 걸어오

는 아이는 틀림없는 내 사랑스러운 조카, 브리즈니였다.

“예니 이모오!”

브리즈니를 보는 순간 내 불안감은 일시에 뇌리 저편으로 쭉 밀려났다. 나는 기겁해서 벌떡 일어났 다.

“브리즈니, 엄마는 어쩌고 혼자 있어, 위험하게!”


“브리랑 놀아요!”

“뭐 주워 먹지 말고 기다려!”


그러나 이미 글렀다. 어디서 흙장난을 하고 왔는지 두 손과 치맛자락이 온통 흙투성이였다. 브리즈 니가 손을 입에 가져다 대는 것을 보자마자, 나는 앞뒤 가리지 않고 2층 높이의 창문에서 훌쩍 뛰어내 렸다.

“그만, 그만!”

베이지색 드레스 자락이 허공으로 훅 펼쳐졌다. 기분 좋은 기운이 살랑거리며 다리와 몸을 한 바퀴 휘감았다.아,맞아.아이앞에서이렇게훌쩍창을넘나드는걸자꾸보이면안되는데.......그러나한 박자 늦은 생각이었다. 이미 둥실 떠오른 몸이 천천히 땅으로 내려앉은 후였으니까. 나는 발이 땅에 닿자마자 재빨리 아이에게 다가갔다.

“에헤, 손 지지야. 지지.”

“예니 이모다!”

이제세살이된내조카이자테제비아언니의딸,그리고원작《브리즈니는행복하고싶어》의여 주인공, 브리즈니가 활짝 웃으며 내게 흙투성이 손을 뻗었다. 작고 포동포동한 깜찍한 손을. 아유, 귀 여워. 나는 헤벌쭉 웃으며 브리즈니의 손을 살살 털어 주었다.

브리즈니는 이제 곧잘 뛰어다녔다. 말도 잘 알아듣고, 혼자 재잘거리는 것도 잘했다. 그리고 그 나이 대의 아기들에게는 으레 그래야 하듯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브리즈니는 소문난 사고뭉치였다.

“엄마는 어디 두고 혼자 왔어요, 우리 조카님?” “브리 혼자 아니야아.”


 오늘은 대체 어디서 구르다 온 건지 온몸이 흙투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 하며 일단 아이를 안아 들었다.

“그럼 누구랑 왔는데?”

“레에엑시.”

“레에엑시?”

나는 브리즈니의 앙증맞은 코끝에 살짝 묻은 흙을 털어 주다 뻣뻣하게 굳었다. 렉시?


“브리이이이!”

그리고 고막에 푹 꽂히는 자그마한 악동의 목소리를 들었다. 아, 이런.


“아이고, 이 녀석들.......”

나는 브리즈니만큼이나 온몸에 흙을 잔뜩 묻힌 알렉시오를 발견하고 한숨을 쉬었다. “이리 와, 이 녀석.”

분명히 원작에서는 알렉시오가 나이에 맞지 않게 어른스럽고 진중한 성격이었다. 오죽하면 브리즈 니가 알렉시오를 부르는 별명도 애어른이었겠는가. 그런데 그럼 지금 내게 안겨 한껏 바동바동하는 이 악동은 대체 누구란 말이지?

“내려조요!”

“안 돼. 얼굴 씻기 전에는. 입에 들어간단 말이야. ......브리즈니! 손 입에 넣지 마!”

아이 둘을 보는 건 버겁다. 그것도 이제 막 호기심과 고집이 최고치를 찍은 세 살배기 두 명이라면 말다했지.둘다한시라도눈을떼면어디서어떤사고를쳐올지모르는어린아기들이었다.

나는내한손에두손을전부잡히고도꾸물꾸물손을입으로가져가는브리즈니부터분수대가장 자리에 앉히고 손을 씻기기 시작했다.

“어디를 이렇게 파헤쳐 놨을까, 또?” 또아버지가아끼시는나무밑을전부엉망으로만들어놓은건아니겠지?나는불안함을느끼며조

막만한얼굴을깨끗하게닦아주었다.그러다가또한번감탄했다.

아유, 이뻐. 역시 이 세계의 여주인공이라 그런가, 아니면 테제비아 언니의 딸이라 그런가. 꼭 살아


 움직이는 인형 같다.

“아구, 예뻐. 우리 조카....... 알렉시오!”

그리고 그 짧은 새에 알렉시오는 아장아장 멀리까지 도망가 버렸다. “어딜 가, 요놈.”

나는 콧김을 팽 내뿜었다. 아장아장 열심히도 도망가던 알렉시오가 허공에 붕 떴다. 희미한 은빛 빛 무리가 아이를 휘감아 천천히 내게로 끌어왔다. 알렉시오는 공중에 둥둥 떠 있는데도 무서워하기는 커녕 재미있는지 꺄륵꺄륵 웃어 댔다. 참 겁도 없다. 나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이러려고 배운 것들이 아닌데.......”

기껏 2년간 라울루스에게 신성을 다루는 법을 배워 놓고는 고작 아이 돌보기에나 쓰다니. 아니, 뭐.


어디에라도 쓰이면 좋은 일이긴 한데.......

나는 한숨을 내쉬며 알렉시오까지 깨끗하게 씻겼다. 이미 더러워진 옷자락은 어쩔 수 없었지만 혹

시라도 입이나 코에 들어가지 않도록 소매까지는 깔끔하게 씻어 냈다. [킁킁.]

“뭘 또 냄새를 맡고 그래요?”

어느새 곁에 와 찰싹 붙은 라울루스가 브리즈니에게 코를 들이밀고 있었다. 브리즈니가 반색하며

라울루스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꺄아. 라리.”

그래도 그렇지. 아무리 새끼라도 엄연히 늑대의 형상인데....... 내 귀여운 조카는 알렉시오만큼이나 겁도 없었다. 라울루스가 즐겁게 조잘거렸다.

[나는 이 애가 좋아. 깨끗한 기운을 풍기는 아이거든.]

“악, 방금 씻겼는데!”

라울루스는 그대로 브리즈니를 아프지 않게 넘어뜨리고는 둥가둥가 놀아 주기 시작했다. 양 갈래로 깜찍하게 묶은 빨간 머리카락이 은빛 털과 하나가 되어 잔디밭을 데굴데굴 굴렀다. 아이가 꺄르륵 웃 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정원에 가득 울렸다.

“나도오. 나도!” 내품안에갇혀있던알렉시오가세게바동거렸다.혀짧은소리로귀엽게징징거린다.


 “나도 브리랑, 라리랑 놀 거야!”

“렉시는 안 돼. 방금 씻었잖아.”

“히잉.”

호박색 눈동자에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어흑. 네가 그렇게 똘망똘망하고 귀여운 얼굴로 울면 이 이모는 심장이 쿵쿵 떨어진단다, 아가야.......

내가 원작에서도 하염없이 찬양했던 우리 남주님은 어린 시절에도 브리즈니 못지않게 세상 제일 귀 여웠다. 나는 결국 한숨을 쉬며 알렉시오를 잔디밭에 내려 주었다.


“심한 장난은 치면 안 돼, 렉시. 그때처럼 장미 넝쿨을 잡고 휘두른다거나. 브리 머리카락을 잡아당 긴다거나.......”


“으응......!”

못 미덥다. 못 미더워. 나는 잔뜩 미심쩍어하면서도 결국 아이를 놓아주었다. 짧은 다리로 아장아장

뛰어가는 게 당장 꼭 끌어안아 주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알렉시오는그대로라울루스의등으로푹파고들었다.곧빨간머리여자아이한명과,은색새끼늑

대한마리,검은색머리남자아이한명이똘똘뭉친커다란덩어리가정원을데굴데굴굴러다녔다.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한낮의 햇살이 쏟아지는 정원. 활짝 피어난 곳곳의 여름 꽃들. 정원사가 점심 에 물을 주었는지 촉촉하게 젖은 수목들. 정원을 가늘게 가로지르는 작은 시냇물. 꺄륵거리는 아이들 의해맑은웃음소리.꼭동화속에나존재할것같은반짝이는은빛털의새끼늑대.

나는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며 불안한 마음으로 뒤를 쫓았다. 진짜 가슴 졸이며 지켜봐야 할 애 들부모님은다어딜가시고왜내가남아보모가되어있는것인가.인생참모를일이었다.

“......아하하.”

하지만 역시 아기들은 귀여우니까. 잔디밭을 뒹굴던 브리즈니와 알렉시오가 저들끼리 머리를 쾅 부 딪치고 울상을 짓는 게 보였다. 결국 웃음이 터졌다. 다 좋다. 이 평화가 죽 이어졌으면 더 바랄 게 없 을 것 같았다. 이대로 하이데스가 나 같은 건 영영 잊어버렸으면 좋겠는데.

......그리고 그 남자도 좀, 답장이라도 써 줬으면 좋겠고.

결국 생각은 다시 돌아왔다. 조금 나아졌던 기분이 다시 아래로 가라앉았다. 나는 자리에 쪼그려 앉

아애꿎은잔디를한가닥씩뜯었다.

‘당장 벨고트로 쳐들어갈 수도 없고.......’


 “예레니카!”

울적하게 정원을 엉망으로 만들어놓고 있는데, 저 멀리서 세르게이가 헉헉거리며 달려오는 게 보였 다.나는짧게한숨을내쉬며몸을일으켰다.그럼그렇지,왕궁에세살배기애기들만왔을리는없지. 내 앞으로 달려온 세르게이가 허리를 꺾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나는 그를 찌릿 흘겨봐 주었다.

“눈똑바로안뜨고다녀,세르게이?눈떼지말아달라고언니랑형부가부탁하지않던?”

“헉...... 미안. 허억.”

정말로 사색이 되어 찾아다녔는지 세르게이의 이마에도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세르게이 가 손등으로 이마를 닦으며 대답했다.


“애들이 파헤쳐 놓은 화단을 정리한다는 게 그만. 조그만 것들이 빠르기는 또 얼마나 빠른지 모르겠 다.”


“역시 쟤들, 또 아버지의 화단에 들어간 거지?”

아버지가 또 일주일 동안 죽은 나무들을 끌어안고 눈물을 글썽이실 모습이 눈에 선했다. 나는 쯧쯧

혀를 찼다.

“언니랑 형부는?”

“전하를 뵙고 계시는 것 같던데.”

“아하. 그럼 페르난디스는?”

“저기.”

나는 세르게이가 달려온 쪽에서 헐레벌떡 따라오는 페르난디스를 발견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정말 로,아이보기에는재능이없는남자들이아닐수없었다.

“또 간다고?”

“응.”

“이번에는 또 어디를 가려고?”

** *


 브리즈니와 알렉시오는 옷이며 양 볼에 풀물을 가득 들인 채로 각자의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돌아갔 다. 나는 아이 둘을 차례차례 페르난디스와 테제비아 언니에게 안겨 주며 대답했다.

“신전. 지난번 이후로 벌써 한 달이나 지났더라고. 다시 갈 때가 됐지.”

“이번에도 혼자 가려고?”

“혼자여도 상관없어.”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이번에 가려고 하는 곳은 르보브니에서 딱 하나 있는 라울루스의 신전 이었다. 수도 외곽의 할라이트산 중턱에 위치한 신전은 왕궁에서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테제비아 언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세르게이라도 데려가지. 아무래도 혼자서는 맘이 안 놓이는데.”


“세르게이?”

나는 알렉시오에게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놀아 주고 있는 세르게이를 흘끗 돌아보았다.

“에베베베. 렉시, 삼촌 봐. 에베베베-.”

“.......”

대체 누가 세 살짜리 아이고 누가 스물한 살짜리 청년이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쟤를데려가면뻔해.틀림없이보모가될걸.다큰남자애보모노릇은하기싫단말이야.브리랑렉 시만큼 귀여우면 또 몰라.......”

“야.이게날뭘로보고.”

세르게이가 찌릿 나를 째려보았다. “너,이오라버니를자꾸몇년전의그철딱서니없는꼬마로보면안돼.나도이제남자라고.” “오라버니는 무슨....... 그리고 날 꼬맹이로 보는 건 너잖아.”

나는팽코웃음을쳤다.확실히저망나니도남자라고, 2년전보다는키도덩치도훌쩍커진데다이 번에 기사 서임까지 치러 이젠 빈말로도 미‘소년’이라고 하기엔 어폐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속 알맹이가 세르게이 레바논인 것은 변하지 않는다. 호들갑스럽고 얄미운 잔소리꾼 세르게이.

그러나 언니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아니야. 그래도 세르게이와 함께 가도록 해, 예레니카.”


 테제비아 언니가 단호하게 말했다.

“혼자서는 아무래도 위험해. 아무리 르보브니 땅이라도 위험은 어딜 가나 있어.”

“어딜 가나 과보호일까, 왜......?”

묘하게 벨고트에서 지내던 시절이 떠올랐다. 하긴, 그때의 과보호에 비하면야. 나는 어깨를 으쓱했 다.

“내 몸 정도는 이제 내가 지킬 수 있어. 혹시라도 마력 도구를 사용하는 곳이 있더라도 잘 피해 다닐 수 있고.”


2년 동안 마력 예민도를 최대치까지 끌어올리고 신성을 다루는 수련을 한 보람은 차고 넘쳤다. 나는 이제 혼자 길을 걷더라도 뜬금없이 풀썩 주저앉아 헉헉거리지 않아도 될 정도로는 발전했다.


“그 이야기가 아니야.”

그러나 테제비아 언니는 정말로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네가 몰라서 그래, 예니.”

“뭘?”

“......그런 게 있어. 하여튼, 세르게이와 함께 가도록 해. 마침 할라이트산 밑에서 레바논 기사단이 훈련을 하고 있으니까. 함께 갔다가 함께 돌아와.”

“어어.......”

내가 좋다고 해도 쟤가 싫을걸! 나는 홱 세르게이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덩달아 테제비아 언니와 똑

같이 진지하고 엄한 얼굴을 한 세르게이를 발견했다. “나도 형수님 생각과 같아. 나랑 가, 예레니카.” “갑자기왜그래,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혼자서 잘 다녔는데......? 나는 몹시 의아한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 지만 별다른 답을 듣지는 못했다.

** *


 “형수님이 너 때문에 걱정이 많아, 예레니카.” “요즘들어더그런것같긴하더라.갑자기왜그러지?” “갑자기......는 아니고.”

“그럼?”

세르게이는 몹시 심란한 낯으로 소꿉친구를 바라보았다. 예레니카. 르보브니의 귀한 막내 공주는 정말로 모르겠다는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세르게이는 친구를 잠시 내려다보다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


“뭐야, 왜 눈을 피해?”

네가 너무 예뻐서. 라고 말하기 싫은 건 안 그래도 높은 저 콧대를 더 높여 주기 싫다는 그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하지만 사실 예레니카는 원래부터 예뻤다. 르보브니에서조차 드문 저 달콤한 분홍빛 머리카락도, 왕족 특유의 맑은 하늘색 눈동자도,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도. 옛날부터 예쁘긴 했지만 요즘 들어서는 더.......

“얘가 왜 갑자기 부끄럼을 탄담.”

세르게이는 지레 뜨끔해 얼굴을 아예 반대쪽으로 팩 돌려 버렸다. 나는 그냥 사실을 생각하는 거다, 사실을! 이라고 열심히 스스로를 합리화하면서.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스멀스멀 솟아올랐 다.

“앞으로도 절대 혼자는 다니지 마라, 예니.”

“그러니까 이유를 대, 이유를.”

예레니카는 이제 짜증스러운 얼굴이었다. 세르게이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누가 홀랑 납치해 간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네가 예뻐서라고. 아주 꼬꼬마 시절부터 그녀를 봐 왔던 세르게이 조차 요즘의 예레니카를 돌덩어리 보듯 하기는 힘들었다. 그는 시선을 휙 굴리며 아무렇게나 대꾸했 다.

“거울 봐. 거울.” “거울을뭐하러봐?늘똑같이예쁘기만할건데.” “......그래. 네가 성격이라도 그래서 다행이다.”


 입만 다물면 한 달은 고사하고 1년 내내 봐도 질리지 않을 인형 같은 얼굴인데....... 세르게이는 짜 게식은얼굴로혀를찼다.

“암만 봐도 자의식 과잉이야.” “자기 객관화라고 해 줄래?” “......그래.”

이래서 곧이곧대로 예쁘다고 해 주기가 싫은 거다. 슬금슬금 빠르게 뛰려던 심장이 도로 제 박자를

찾았다. 하지만 이것도 상대가 세르게이 자신이니 가능한 일이다. 예레니카가 브리즈니만 했던 시절

부터 그녀를 봐 왔던 세르게이에게는 ‘예쁘다’라는 감상보다 ‘어휴, 저 왈가닥’이라는 감상이 먼저였 

다.

하지만 그 자신의 감상이 그렇다고 해서 예레니카가 갑자기 못생긴 게 되는 건 아니라서. 남자고 여


자고 관계없이 시선을 끌어모으는 친구는 아무런 경계심도 없이 길거리를 버젓이 활보하는 중이었 다. 결국 세르게이는 손을 뻗어 예레니카의 후드를 푹 덮어씌웠다. 즉각 불평 어린 목소리가 튀어나왔 다.

“더운데.” “얼굴 타.” “......?”

이건 또 무슨 헛소리야? 라는 얼굴로 예레니카가 그를 보았다. 세르게이는 모르는 척 시선을 돌렸 다. 옛날이면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텐데, 확실히 요즘에는 그냥 왈가닥처럼 부주의하게 이곳저 곳 쑤시게 두기는 힘들었다. 얼굴로 보나, 풍기는 분위기로 보나.

사실 예레니카가 어딘지 조금 변했다고 처음 느꼈던 것은 거의 3년쯤 전이었다. 그 전까지는 딱 귀 하게 자란 공주님. 조금 제멋대로고, 종잡을 수 없는 기분파에 아프거나 불편한 것을 잘 못 참는 아이 같은 공주님. 기본적으로 감정 표현에 솔직하고 겉과 속이 같은 투명한 소녀.

......였는데.

“하여튼, 다들 너무 과보호야. 나도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는데.”

예레니카의 툴툴거림은 길게 이어졌다. 세르게이는 그 투덜대는 목소리를 한 귀로 흘려버리며 계속 해서 생각했다. 그러니까 꽤 옛날부터 어딘지 모르게 변했단 말이지.

물론 왈가닥인 것도, 무모한 면이 있는 것도, 공주답지 않게 언행이 경망스러운 것도 전부 비슷하긴


 했지만. 그래서 당시에는 자신조차 잘 느끼지 못하긴 했지만. 그래도 다시 생각해 보니 정말로 뭔가 다르긴 달랐다.

“으음.......”

그리고벨고트에서석달반가량을보내고돌아온뒤의예레니카는딱보기에도알수있을정도로 많이 바뀌었다. 딱히 외적인 면만을 말하는 건 아니었다. 그 전까지는 제 속에 든 걸 전부 하나하나 꺼 내 보여 주는 아이였는데, 지금의 예레니카는 속으로 꽁꽁 꿍쳐 두는 것에 더 능숙해 보였다. 은근슬 쩍 다가가 속을 들여다보려고 하면 눈을 흘기며 퍽 밀어낸다.

“산 밑까지만 함께 가는 거야. 신전까지는 따라오지 마. 알겠지?”


“......궁금하지도 않거든.” 지금처럼.


대체 벨고트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병은 어디서 어떻게 얻어 온 것이며 벨고트의 황제와 무슨 일 이 있었기에 열흘마다 날아오는 편지에 그렇게 목을 매는 건지, 그래서 정말로 무슨 사이인 건지, 예 레니카는 하나도 제대로 답한 적이 없었다. 세르게이는 쯧쯧 혀를 찼다.

“얘가, 어디서 이상한 것만 배워 와서.......” “뭐? 이 자식이 진짜.”

무형의 기운이 세르게이의 정수리를 꽁 때렸다. “아야. 이게 오라버니를 뭐로 보고.”

“물로 본다, 왜.”

티격태격. 의미 없는 말씨름은 길게 이어졌다. 세르게이는 툭툭 돌아오는 말대꾸에 발끈하면서도 속으로는피식웃었다.이런걸보면마냥철없기만해서대하기어려웠던어린시절보다는성격이훨 씬유해진것같기도했다.

그래서 세르게이는 친구의 이상 행동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겨 버렸다. 게다가 우선은 자꾸만 친 구에게향하는뭇남자들의시선을차단하는게더급했다.

“야, 같이 가!”

“떨어져. 멀리 떨어져!”

세르게이의 뇌리에서 벨고트 황제니 바뀐 성격이니 하는 생각들은 금세 잊혔다.


 “이번에는 며칠 있을 거야?”

“글쎄. 일주일 정도?”


“일주일. 알겠어. 일주일 뒤 이 시간에 여기서 기다린다?” “일 있으면 먼저 돌아가도 돼.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데.”


** *

나는이마에손을대고그늘을만들었다.산중턱의신전은기울고있는해의역광에온통가려져있 었다.

“형수님께 혼나.”

“......그래, 그럼.”

답지 않게 집요하게 구는 세르게이의 기백에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세르게이와는 산 밑의 갈 림길에서 헤어졌다. 세르게이는 레바논 공가 휘하의 기사단이 특별 수련을 하는 수련장으로 향하는 길로 들어섰고, 나는 산 위의 신전으로 가는 오르막길로 들어섰다. 등에 멘 꾸러미가 꾸물거리더니 라 울루스가 푸 고개를 내밀었다.

[나는 알지. 저 애가 왜 저러는지.]

“제발 저를 좋아해서 저런다는 끔찍한 이야기는 하지 마세요.” [그거야말로 제대로 된 자의식 과잉이구나, 아가.]

“음. 그건 인정.”

한달만에오르는산길은내게는조금버거웠다.마력을읽어내는능력이나신성에좀더친숙해지 는 훈련은 분명히 도움이 되기는 했지만 기본적인 체력을 상당히 잡아먹었다. 그래서 나는 2년이 지 난 지금도 신체적 능력은 거의 0에 수렴했다.

그래도 픽픽 쓰러지는 개복치 상태를 벗어난 것만 해도 어디냐! -라고하고는싶지만.......그래도역시이런산길하나제대로못오른다는건문제가있다. “후. 하.”


 [태워 주랴?]

“장난, 하지 마요.......”

나는내다리한짝이간신히올라갈만큼작은새끼늑대를보며헛웃음을지었다.

[내 크기를 키우면 되잖아.]

“그래요. 당신을 키웠다가 정신을 잃고 눈떠 보니 신전. 뭐 이런 전개로 흐르는 건가요?”

[그렇지.]

“말이야, 방귀야?”


라울루스는 내가 그를 처음 소환하던 날 보았던 집채만 한 크기의 늑대로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건 순전히 소환자인 내 한계에 기인한 거였다.


라울루스를지금의저팔뚝만한크기보다더키웠다가는안그래도부족한신성이일시에쭉빨려 나가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라울루스를 더 키울 생각은 감히 하지도 못했다. 애초에 더 크기가 커졌다 가는 내가 데리고 다니기에도 무리가 있고.

“후....... 다 왔다.”

체감상 한 시간이 훌쩍 넘게 산을 탄 후에야 널찍한 평지가 눈앞에 나타났다. 르보브니에 딱 한 곳

있는 라울루스의 신전 입구였다.

[오랜만에 좀 살 것 같구나. 아유, 좋아라.]

라울루스가 신나게 폴짝폴짝 뛰어 신전 입구로 달려갔다. 나는 흐르는 땀을 닦으며 숨을 크게 들이 쉬었다.포근한신성이밴공기가코와입을타고들어와폐부를가득채웠다.

벨고트 바리샤드의 신전만큼 청량한 기운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가 기운차게 지낼 수 있을 만큼 신성을 채우기에는 충분했다. 나는 이미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 라울루스를 좇아 걸음을 옮겼다.

“같이 가요, 라울루스......!”

한달에한번,일주일에서보름.내가르보브니의신전에방문해서하는일은늘비슷했다. “오셨습니까, 공주님.”

“네, 사제님. 오랜만이에요.”


 “오늘도 기도실로 안내해 드릴까요?”

주름이 자글자글한 인자한 느낌의 사제님이 나를 맞이했다. 르보브니의 신전을 맡은 대사제, 율리

우스였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율리우스가 인자하게 웃었다.

“공주님께서 이토록 정성이시니 라울루스께서도 언젠가는 꼭 공주님의 뜻을 알아주실 겁니다.” “예에.......” 나는신전바닥에직늘어져신성으로복식호흡을하는새끼늑대를돌아보지않으려고애썼다.


나를 안내해 준 율리우스가 나가자 널따란 기도실에는 나 혼자 남았다. 나는 짐을 내려놓고 로브 단 추를 풀어 내렸다. 촐랑거리던 라울루스가 내가 들어온 문으로 따라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그러면 어디, 성과를 한번 볼까?]

쿵. 문이 닫히자마자 짐승의 발이 바닥을 디뎠다. 내게로 곧장 다가온 라울루스가 내 정수리에 주둥

이를 턱 얹었다.

[그래. 이래야 좀 사는 것 같지. 조그만 몸으로는 영 답답해서.]

“후으아.당신이사는것같으면제가좀죽을것같은데요.”

푹신하고 부드러운 털이 등에 부드럽게 감겼다. 본래의 크기대로 쑥 커진 라울루스가 내뿜는 신성 가득한 숨결이 귓전을 스쳤다. 나는 손을 뻗어 라울루스의 턱밑을 간질여 주었다.

[저번에 어디까지 했더라? 공격법은 끝냈고. 방어법으로 들어갔던가?]

“네. 튕겨 내는 법이요.”

내가 근 2년 동안 배우고 있는 것은 신성을 다루는 법이었다. 내 몸 안의 쥐꼬리만 한 신성이나마 자 유자재로 다루는 법. 물론 내 몸은 훌륭한 신성 공급원은 못 되어서, 달에 한 번은 정기적으로 신전을 방문해 신성을 충전해 주어야 했다. 신전에 가득 찬 신성으로 라울루스는 일시적으로나마 본래의 크 기를되찾고나는빈몸에신성을채워수련하고.꿩먹고알도먹고.

[어디보자,그러면안한게또뭐가있지?]

“음.......”

나는 2년 동안 라울루스에게 꽤 많은 걸 배웠다. 신성으로 마력을 튕겨 내는 법. 몸에 방어막을 씌우 는 법. 기운에 불과한 신성에 물질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도록 무게감을 입히는 법, 신성을 날카롭게


 벼리는 법, 등등. 그 배움의 과정은 그다지 상기하고 싶지 않다. 라울루스는 절대로 좋은 스승은 아니 었으니까. 결국 나 혼자 몸으로 뒹굴며 독학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 개고생은 헛짓거리는 아니어서, 이제는 신전을 벗어나도 간단히 체내의 신성을 운용하는 것 정도에는 익숙해진 참이었다. 허공에 발판을 만든다거나, 물건을 끌어당겨 온다거나. 마력이 몸에 닿는것을방어한다거나하는것정도는이제혼자서도곧잘해내곤했다.

라울루스가 기도실의 작은 제단 위로 훌쩍 뛰어오르며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정화의 불꽃까지는 무리겠지?]

“글쎄요.......”


나는 제단 앞으로 다가가며 애매하게 웃었다. 신성을 무기로 다루는 여러 방법 중 가장 최고 난도는 단연 정화의 불을 불러내는 것이었다. 삿된 것만을 태워 낸다는 푸르스름한 은빛 불꽃. 흑마법을 파괴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

나는에우레디안이그거대한황궁전체를뒤덮을만한불을불러냈던것을떠올리고몸을부르르 떨었다. 역시 지상에서 가장 강대한 신성을 가진 자는 스케일부터가 달랐다. 생각해 보니 그걸 그냥 ‘미쳤어, 황궁을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어 놓다니!’ 하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던 거다.

얼마나 대단한 남자를 잡고 있었던 건가, 그때의 나는.......

[아가, 집중.]

“헛, 네에.”

라울루스의 목소리에 나는 퍼뜩 다시 정신을 차렸다. 내 것과 꼭 같은 하늘색 눈동자가 나를 위아래 로 훑었다.

[영마음이다른곳에가있는것같은데.]

“죄송합니다. 집중할게요.”

평소의새끼늑대는내게몹시하찮은취급을받곤했지만 ‘수업’을할때는달랐다. 일단몸집도열 배는 더 큰 데다 신전에서의 라울루스는 꽤 강한 신성력과 위압감을 내뿜기도 해서, 평소처럼 투닥투 닥하기 쉽지 않았다.

[그러면, 이제 자체 치유력을 끌어올려 볼까?] “자체 치유력이요?”


 [그래.몸안의빈부분에신성을채워넣어서세포의회복을증강하는거지.]

“오.......”

[그아이가네곁에있을때야그애가가진신성이무한하니저절로전신의세포가활성화되었겠지. 하지만 그건 상대가 그 아이일 경우에나 해당하는 이야기고.]

여기서 말하는 그 아이가 누구인지는 뻔했다. 나는 빛나는 은발과 붉은 자줏빛 눈동자를 울적하게 떠올렸다. 라울루스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마력을튕겨내는것도네몸을보호하는좋은방법이기는하지만,마력이몸속으로침투했을때그 것을 빨리 정화하고 손상된 부분을 메꾸는 방법도 알아야지.]


“넵. 그렇죠.” 

[네가 고분고분하니 속이 다 시원하구나. 귀여운 돌멩이 같으니라고.] 라울루스의 신성이 살랑살랑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나는 멋쩍게 웃었다. “그렇게 말하니까 제가 엄청난 반항아라도 된 것 같은데.......” [불경하기는 하잖아.]

“그거야 라리가 제 속을 맨날 긁어 대니까.”

[보통 바로 이런 걸 불경하다고 하지.]

나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기도실 양옆에 쌓여 있던 방석을 가져다 무릎을 꿇고 단정하게 앉자 라 울루스의 음성이 이어졌다.

[네 몸속의 신성을 움직여야 하니 집중해라. 지난번에 알려 줬던 ‘튕겨 내는’ 법을 쓰면 안 돼. 그랬다 간네장기어디하나가튕겨나갈테니까.물론신성에날을세워도안되고.무슨말인지알지,아가?]

무,무서워라.나는지레겁을먹고눈을꼭감았다.신성수련을할때가장기본이되는것은몸속에 들어찬 신성의 흐름을 느끼는 것이었다. 나는 타인의 신성을 예민하게 읽어 낼 수 있기는 했지만 나 자신의 몸속에 돌고 있는 신성을 읽어 내는 데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왜냐하면, 읽어 낼 것도 없이 미약하기 짝이 없어서.......

감각만 좋으면 뭘 해? 기본적인 스탯이 달리는데. 나는 한숨을 쉬며 심장 박동에 맞춰 전신으로 뻗 어 나가는 흐름을 읽어 내기 시작했다.

두근. 두근. 작은 고동과 함께 약한 신성의 흐름이 느껴졌다. 내 안의 신성이 훑고 지나가지 못하는


 부분은 너무 많았다. 듬성듬성 메꿔지지 않은 부분들이 몸 전체로 뻗어 나갈수록 점점 더 많아졌다. 이 빈 곳으로 마력이 침투하면 죽어나는 것이다.

감은 시야 저편에서 라울루스의 음성이 메아리치듯 들려왔다.

[신전의신성을받아들이지말고,네안의신성으로만빈부분한곳을메꿔봐.]

빈곳.나는급소인심장언저리를중심으로잡고드문드문퍼져있는신성을끌어모았다.아주느리 게, 몸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얕게 물결치며 몸의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두근. 두근-.


“......윽.”

가슴께가 뻐근했다. 점점 조여드는 것처럼 버거워졌다. 예전에 느껴 봤던 감각과도 비슷했다. 그러


니까, 2년전에.내게는적대적이었던그땅에서늘가장강한신성을들이켰던그날들의감각과.

시간이 적지 않게 지났음에도 또렷이 기억했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에 기력을 불어넣는 것 같던 감각을. 순식간에 텅 빈 몸에 가장 맑고 청량한 신성이 찰랑거리며 차오르던 느낌을. 그 버거운 아찔 함을.

[......예레니카!]

“헛.”

라울루스가날카롭게나를불렀다.그가내이름을제대로부르는일은많지않았다.나는퍼뜩상념 에서 깨어났다.

[내 집중하라고 했지. ‘튕겨 내면’ 안 된다고.]

라울루스가 혀를 차며 내 앞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내 얼굴 두 배만 한 앞발이 머리를 살짝 건드렸

다.내가가진것보다배는짙고강한신성이즉각흘러들어왔다.

[내가 순서를 잘못 가르쳤지. 이거야 원. 공격형으로 길들여 놨더니 제 몸에도 가시를 세울 줄이야.]

“어.......”

나는 얼떨떨하게 내 몸을 내려다보았다. 라울루스의 말대로였다. 심장 근처로 모여들었던 신성에 죄가시가돋아있는것이내게도느껴졌다.

[그건 자살하는 길이다, 부스러기야. 집중하라고 했지 그래서.] “세상에.”


 딴생각 좀 했다고 황천길로 직행할 뻔했다. 아무래도 신성을 마력에 대항하기 위한 무기로 생각하 고 수련한 여파가 이렇게 오는 모양이었다. 라울루스가 혀를 찼다.

[안 되겠다. 손톱이나 발톱, 뭐 그런 데로 연습해.]

“소, 손톱......?”

[조금부러지거나튕겨나가도목숨에지장없는곳말이다.내참,아직도그아이가그렇게좋던?]

“......?”

말의 앞과 뒤의 괴리가 상당했다. 나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라울루스를 보았다가 지레 찔끔 

놀랐다. 귀가 발갛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마음 같은 건 읽지 말라고요.......”


[난읽은적없다.네가너무크게생각해서내게들린거지.]

어이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생각을 크고 작게 할 수 있는 건데? 나는 입술을 꾹 앙다물고 다시 자세

를바로했다.

“다시 할게요. 다시. 이번에는 진짜 집중해서.”

아무리 손톱이라도 뽑히면 아플 거다. 그렇게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옛날이고 지금이고, 아 픈건싫어!

** *

녹초가 되어 기도실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아.......”

수련하는 내내 몸은 반경 1미터도 움직이지 않았는데 기운이란 기운은 쪽 빨려 나가 있었다. 이마는 물론이고 등허리까지도 땀으로 축축했다.

“죽겠다.......”

신전에와있는데도이꼴이라니.나는몇걸음걷지도못하고신전입구의계단에털썩주저앉았다. 내몸안에서신성을운용하는일은신성을밖으로끄집어내는것보다배는더어려웠다.


 늘 신성을 날카롭게 벼려 놓는 게 습관이 되어 그런지, 혹시라도 신성이 몸속 어딘가를 베지 않도록 뭉뚝하게 만드는 데에만 평소의 열 배가 넘는 집중력을 쏟아부어야 했다.

“살기 힘들다, 진짜.”

내가 투덜거리고 있자니 다시 작아진 라울루스가 슬쩍 내 다리 위로 파고들었다.

[그래도 잘했어. 처음 하는 것치고는. 늘 말하지만 재능이 없는 건 아니라니까.]

“몸이못받쳐줘서그렇지.라고말할거죠?”

[잘 아네.]


“병약한 천재란 이런 걸까?” [그건 너무 갔다, 아가.]


라울루스는 냉정하고 단호했다. 쳇. 나는 라울루스를 안아 들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 이쪽을 흘끔거 리는 시선들을 느낀 탓이었다.

요즘 들어 자꾸 어딘가에서 나를 보며 저들끼리 수군거리는 광경을 목격하는 횟수가 늘었다. 이번 에는 신전 앞 널찍한 터에서 수련하는 성기사들이었다. 나는 신전 뒤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어떻게 생각해요, 라울루스?”

[뭘?]

“이 이상한 상황 말이에요.”

나는 2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누가 날 보며 수군거리는 걸 싫어했다.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러 나 라울루스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네가 예뻐서 그렇지.]

“예전에는 아니었나?”

[그거,되게재수없는말인건알지?]

응.인정한다.좀재수없게들릴수있다는거.하지만사실이그런걸!

“제가 예쁘게 생긴 건 알아요. 근데 그거 하루 이틀 일은 아니잖아요. 제가 예레니카가 된 이래로 벌 써3년가까이똑같은얼굴인데왜요새유독반응이튀냐는거죠,제말은.”

[흐음.]


 신전을반바퀴돌아나가자탁트인산아래가보이는널따란뜰이나타났다.나는비스듬히경사진 뜰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가벼운 원피스 자락이 긴 풀잎 위에 푹 덮였다. 나는 옷자락을 정리 하며 말을 맺었다.

“하여튼, 이유가 그건 아닌 것 같다는 거예요.”

[흐음.......]

“라울루스, 보는 사람 없으니까 다시 크게 변해 주면 안 될까요?”

[왜, 또 베개로 쓰려고?]


빙고. 라울루스는 몹시 따듯하고 부들부들해서 베개나 인형 대용으로 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게다 가 신전에서는 조금 색다르게 활용할 수도 있다. 이렇게.


“히히. 침대다, 침대.”

[......내가 네 버릇을 너무 잘못 들여놨어.]

순식간에 다시 어마어마하게 커진 라울루스는 투덜대면서도 내가 등에 파묻히기 좋게 자세를 낮춰 주었다. 신전에 왔을 때만 누릴 수 있는 호사였다. 신전 밖에서는 라울루스가 이런 모습으로 다닐 수 없으니까. 나는 라울루스의 등에 등을 기대고 팔다리를 쭉 폈다.

“아아, 좋아라.”

산 저편으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구름이 한 점도 없는 날이라 태양이 점점 산등성이 너머로 사라져

가는 모습이 잘 보였다. 하늘이 온통 붉었다.

“있잖아요. 요새 어쩐지 조금 불안해요.”

[늘 하던 이야기잖아. 네 입버릇인 줄 알았는데.]

“달라요.”

라울루스의 꼬리가 내 몸을 폭 덮었다. 나는 크고 북슬북슬한 꼬리를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제 감각 믿는다고 했죠, 라리.”

[가장 정확한 감각이지.]

즉답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이거, 아무래도 정말로 시기가 가까워져 오는 것 같은데.”


 신성의 씨앗이 내뿜던 미약한 신호가 사라진 지 벌써 반년이 넘게 흘렀다. 하이데스가 어떤 식으로 든 솔레이아의 몸에 적응하기 부족하지 않은 시간이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이라면, 하이데스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인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르보브 니는 아직 마법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않은 나라였기 때문에 타국보다 신성에 보호받는 정도가 높았 다.

하지만 내가 르보브니의 공주라는 걸 알고 있으니 분명 왕궁부터 노리겠지.

“르보브니를 떠나야 할까요?”

[떠나서 어디로 가려고?]


라울루스가 반문했다. 나는 웃으며 방금 말을 정정했다. 

“르보브니는 못 떠나더라도, 적어도 왕궁이라도 떠나 있어야 하는 거 아닐까요? 우리 왕궁 아래 땅 이쩍갈라지는꼴은보기싫은데.”

[무리할필요는없어,아가.넌좀더어리광을부려도돼.]

“치. 제가 브리나 렉시도 아니고. 어린애 취급하지 마요.”

나는 그러면서도 부드러운 털에 몸을 더 푹 파묻었다. 라울루스가 흡수한 신전의 신성이 몸을 휘감 아 이마와 등에 흐르던 땀방울을 말려 주었다. 몸은 금세 뽀송뽀송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기운은 쪽 빠진 채라서,

“......옛날 생각나네.”

어쩐지 그날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벨고트에서 땅의 무게에 허덕이던 날들이. 하루도 제대로 버티

지못해서무기력증을달고살던그석달하고도반이.

벨고트에 비하면 르보브니의 땅은 눈물 날 정도로 가벼웠다. 조심만 한다면야 내가 못 갈 곳은 없었 다. 르보브니로 돌아와 내가 가장 먼저 맛본 것은 해방감과 안도감이었다. 일단 길 가다 그 고통을 다 시 겪을 리는 없었으니까.

물론 시간이 많이 흘렀고, 이제는 르보브니도 시대의 흐름에 동참해 서서히 마력 연구와 마법사 양 성에관심을두기시작하는참이긴했지만이젠내몸은알아서보호할수있으니문제될건아무것 도 없었다.

2년 전에 르보브니로 돌아오기로 한 건 앞으로의 내 인생을 고려했을 때 아주 잘한 결정이었다. 하 지만, 그래도....... 그래도 나는 그 땅이 그리웠다. 정확히는 그 땅에서 하루하루 버텨 냈던 날들이.


 “......읽지 마요.”

나는 라울루스의 부드러운 은빛 털에 얼굴을 파묻으며 중얼거렸다. 라울루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내 마음을 들여다보지 않고 있을 리 없다는 걸 알았다. 라울루스는 늘 너무하다 싶을 정 도로 나를 꿰뚫어 보고 있으니까.

“나빠, 진짜.” 그래서나는그냥생각을입밖으로내뱉어버렸다. “이렇게또영영차버리는건아니겠죠?”


[음.......]

“이럴 거면 편지에서 그렇게 다정하지나 말던가. 맨날 이런 식이지.”


[.......]

“진짜 가만 안 둘 거야.......”

석 달간 쌓였던 설움이 자꾸만 툭툭 뚜껑을 열고 넘쳐흐르려고 했다. 혼자 버텨야 했던 근 2년은 아 니라고 아무리 고개를 저어 봐도 역시 조금 버거웠다. 분명 평화로운 나날들이 이어지고 있는데도 망 망대해를 헤매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머니 아버지가 아무리 내게 각별하셔도, 테제비아 언 니가 아무리 다정해도, 세르게이가 아닌 척 나를 챙겨줘도, 그들의 사랑은 나를 향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처음 이 세계로 떨어졌을 때와 똑같이 가족들에게 즐겁고 행복한 모습만 보이도록 노력하는 중이었다. 그들의 사랑에 보답하는 방법은 내가 예레니카로 행복하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는 것, 그 거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이곳에는 내가 기대고 의지할 곳이 없다는 말이 된다. 라울루스가 없었다면 우울증에 걸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내게 안정감을 주는 남자의 편지가 끊긴 이후로는, 라울루스가 있어 도 해소되지 못한 우울감이 조금씩 쌓였다.

나는눈을부릅뜨고눈물을참아냈다.울면안돼.울면지는거야.안울거야.안울어.

[쯧. 정말로 좋은 남자는 아니구나. 애를 울리기나 하고.]

라울루스의 꼬리 끝이 살랑거리며 머리를 쓰다듬는 게 느껴졌다. 오른쪽 귓불에 늘어진 은빛 십자 가가 가볍게 달랑거렸다. 신성의 힘이 편안해서 그런지, 아니면 기운이 너무 빠진 상태라 그런지, 몸 이 점점 나른해져 왔다. 깜빡.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라울루스가 혀를 차며 뭐라 중얼거리는 목소리 가 저 멀리서 메아리쳤다.


 [내가 이렇게 대놓고 불러 주는데, 오려면 빨리 올 것이지.......] 그 마지막 말이 정확히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신전에서의 일주일은 느리게 지나갔다. “어려워.......”


[대체 뭐가 어려운 거야? 밖으로 끄집어내는 건 잘만 하면서.] 

** *

“어려워요. 느낌이 이상하단 말이야.”

나는 징징 우는 소리를 내며 기도실 바닥에 팽 드러누웠다. 몸 안의 신성을 컨트롤하는 것은 신성을

밖으로 꺼내어 운용하는 것보다 배는 까다로웠다.

비슷한 예를 들어 보자면, 혈관 속에서 움직이는 피의 흐름을 읽고 한곳으로 모으는 것과 비슷하달 까.이미한쪽으로흐르고있는흐름을내의지대로바꾸는것은상당한정신력과체력을동시에소모 했다.

나는 우울하게 몸을 굴렸다. 데구루루.

“이걸 어떻게 빠르게 하지?”

마력이 몸 안으로 침투하면 즉각적으로 손상된 부분을 치유해야 했다. 일단 마력에 당하고 나면 집 중할 겨를이고 뭐고 없으니까, 그 순간의 대처가 중요한데....... 라울루스가 나름대로 위로의 말을 건 넸다.

[숙달이안돼서그래.이제겨우일주일해놓고서는엄살부리기는.]

“......그렇긴 하지만.”

그래. 아직 포기하기는 이르다. 나는 비척비척 다시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나 수련이라는 게 정신력 만 받쳐 준다고 되는 건 아니라, 이미 한계까지 굴린 몸은 일으키기가 무섭게 도로 아래로 푹 꺾였다. 나는 맥없이 말했다.

“일단오늘은아니네요.더못할것같아.”


 [그래. 내 눈에도 그래 보이긴 하는구나.]

신전의 신성을 받아들이기가 무섭게 도로 빠져나가니 플러스마이너스로 결국 0이었다. 기력이 알 차게 쪽쪽 빨려 나갔다. 이대로 왕궁으로 돌아갔다간 며칠 내내 방구석 신세일 게 뻔했다. 나는 다시 기도실 바닥에 뻗었다. 한숨 섞인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저녁에 내려가야 하는데.......”

[아. 내려가는 게 오늘이었던가?]

“네에. 세르게이가 기다린다고 말하고 가 버려서.......”


약속을 안 했다면 충분히 기운을 회복하고 내일이나 모레쯤 내려가도 됐을 테지만 이미 만나기로 약속을 해 버렸으니 어쩔 수 없었다. 라울루스가 의미심장하게 탁탁 발을 굴렀다.


[시간이 맞을까?]

“네?”

[아니다. 이리 오렴, 아가. 그래서야 어디 나를 버틸 수나 있겠니?]

뭔가 요상한 말을 한 것 같은데.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몸을 굴렸다.

데구루루.

[쯧. 요 부스러기 같은 것.]

라울루스가주둥이로나를톡튕겼다.그작은동작에도몸이허공을붕날았다.그리고부드러운은 빛털위에가볍게떨어졌다.

나는 라울루스의 널따란 등 위에 빨랫감처럼 널려 기도실 천장을 멀거니 올려다보았다. 라울루스가 흡수한 신전의 기운이 내게로 고스란히 옮겨지는 것이 느껴졌다.

라울루스가 제대로 지상에 현신해서 내게 신성을 불어 넣어 주면 좋을 텐데, 애석하게도 나는 라울 루스의 현신을 불러낼 정도의 능력이 되지 못했다. 내가 자력으로 버틸 수 있는 건 끽해야 새끼 늑대 형상의 분신 정도라서.

애초에내가라울루스를소환할수있었던것도벨고트초대황제의세례명이가진힘을빌려썼기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불완전한 소환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기회는 여전히 10년마다 한 번, 벨고트의 황제가 라울루스의 현신을 소환하는 소환식에 달 려 있었다. 2년이 지났으니 이제 3년만 더 기다리면 된다.


 “내몸은왜이모양이꼴일까.......”

[새삼스러운 소리.]

“음. 그렇긴 하네요.”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어 부정적인 생각들을 몰아냈다. 한탄만 하고 있으면 뭐 해? 이 몸으로 평 생살아야하는건어쩔수없는걸.

[대강 채웠으면 일어나. 가자.] “으헉.”


몸이 다시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나는 반사적으로 신성을 꺼내다 발밑을 받쳤다. 몸이 느릿하게 바 닥으로 착지했다. 나는 서글프게 외쳤다.


“좀만 더요!”

[아니야. 그 정도면 충분해.]

“말 타고 그러면 금세 지칠 텐데! 왕궁에 도착하기도 전에 픽 쓰러질지도 모르는데요!”

[괜찮대도.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을 거야.]

뭔 소리야? 왕궁까지 가려면 그래도 반나절은 꼬박 말을 달려야 했다. 머리끝까지 찰랑찰랑 충전하 고 가도 모자랄 판에 무슨.......

[가자, 가. 얼른얼른.] 그러나주둥이로등을톡톡미는라울루스때문에나는결국울며겨자먹기로신전을나서야했다.

“여어.”

세르게이는 칼같이 시간을 맞춰 산어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신전을 나서자마자 도로 무거워

진몸을질질끌며힘없이손을들어보였다. “오랜만.” “낯빛이왜그래?어디안좋아?”

“내가 열심히 살았다는 증거야.”


 “헛소리하는 걸 보니 어디가 안 좋긴 하구나.”

불쑥. 세르게이의 손이 내 이마를 짚었다. 나는 그를 제지할 힘도 없어 인상만 살짝 찌푸리고 말았

다. 세르게이가 갸웃거렸다.

“열은 없는데.......”

“됐어. 그냥 몸살 비슷한 거야.”

“신전에서 뭘 했기에 몸살이야? 피죽도 못 먹은 것처럼 비실비실하네, 애가.”

꼬치꼬치 캐물어 오는 게 귀찮았다. 나는 이마와 볼에 닿는 세르게이의 손을 잡아 내렸다. 

“신경 쓰지 마. 배고프니까 저녁이나 먹고 돌아가자.” “사제들이 굶기던?”


“아잇, 정말.”

결국 세르게이는 내게 한 대 퍽 얻어맞고 나서야 잠잠해졌다. 불만스럽게 중얼거리긴 했지만.

“폭력쟁이.......”

“고삐로 맞아 볼래?”

내가 위협적으로 고삐를 치켜들자 세르게이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나는 상냥하게 웃어 주고는 짐 가방을 안장에 단단히 묶었다.

“또 어머니랑 아버지께 가서 일러라, 응?”

“으음.” “대답이시원찮은데?똑바로대답안하면정말고삐로때려줄거야.” “알았어. 알았다고.”

나는 세르게이를 흘겨보며 말에 훌쩍 올라탔다.

“아직 잊지 않았어. 네놈의 죄.”

내 체질에 대해 어머니와 아버지, 언니에게까지 조잘조잘 다 불어 버린 게 바로 세르게이였다. 그날 로 나는 당장 죽을 날을 받아 놓은 병약한 막내딸이 됐고, 벨고트는 사람이 발도 못 들일 만큼 시커먼 마귀들의 땅이 되었다. 나를 납치해 간 벨고트의 황제야 뭐, 우리 어머니 아버지의 머릿속에선 아마 사악한 마왕 정도로 변해 있지 않을까?


 세르게이가 잔뜩 억울한 얼굴로 꿍얼거렸다. “야.그럼그걸어떻게입을싹닫고모른척하냐......?” “됐어. 이 배신자.”

“예레니카, 후드는 써!”

나는 세르게이의 서글픈 부름을 무시하고 말의 옆구리를 찼다. 거리는 복잡했다. 수도 리브네의 외 곽 부근이긴 했지만, 신전이 위치한 마을이기도 했고, 근처에 기사들의 수련장도 있다 보니 번화가라 보기에도 모자람이 없었다.


저녁 시간이 훌쩍 지나 밤에 가까운 시간이었는데도 거리는 왁자지껄했다. “휴일이라 그런가?”


“그럴지도. 오늘도 거기 갈 거야? 아서의 술통.” “응.왜,다른데봐둔곳있어?”

“아니. 거기 가자.”

시답잖은 대화가 몇 번 오갔다. 세르게이는 기어코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더니 후드를 덮어씌웠다. 짜증을 내 봤자 별로 의미가 없다는 걸 알았기에 나는 그런가 보다 하고 그냥 내버려 두었다. 세르게 이가 내 후드를 씌우고 다시 몸을 물리는 찰나, 이상한 기시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어?” 나는눈을깜빡였다.이마를반쯤가리고있던후드가살짝뒤로미끄러져있었다.나는후드를뒤로

끌어 내리며 멍하니 고개를 돌렸다.

거리는 여전히 시끌벅적했다. 일을 마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늦은 저녁을 먹으러 나온

기사들, 마을을 지나 지방으로 내려가는 용병들. 장사를 마무리하는 상인들.

작은 산들바람이 불었다. 따듯한 여름밤의 바람이었다. 로브 자락과 머리카락이 가볍게 휘날렸다.

오른쪽 귓불에 늘어진 귀걸이가 차랑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바람....... 바람이었나?

세르게이가 툴툴거리며 다시 내게 몸을 기울였다. 조심성 없는 손길이 다시 후드를 푹 씌웠다. “후드 똑바로 쓰랬지.”


 “어....... 으응.”

“앞 똑바로 보고.”

“......응.”

시선이 한참이나 거리 저편에 머물렀다. 그러나 방금 전의 그 이상한 기시감은 다시 느껴지지 않았 다. 세르게이가 의아하게 물었다.

“뭐가 있어?” “바람이.......”


이상하게 감각이 튀었다. 그러나 그것도 정말로 순간이라서, 나는 두어 번 눈을 깜빡이다 다시 고개 를 앞으로 돌렸다.


“아무것도 아냐. 바람이 좀 불어서. 가자.”

“무슨 바람이.......”

“어, 더 늦으면 사람 많아지겠다. 주말 저녁이잖아. 얼른 가자.”

저 앞에 보이는 나와 세르게이의 단골집 앞에 사람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나는 방금 전의 그 찜찜 한기운을털어버리고얼른말을다시움직였다.

“어서 옵쇼오!”

주점으로 들어서니 주인장 아서의 우렁찬 목소리가 쩌렁쩌렁 우리를 맞이했다. 주점 안은 밖에서 본것보다더혼잡했다.나는와글와글한사람들사이를간신히헤집고가게구석의빈테이블을찾아 앉았다.

“오우. 웬 용병들이 이렇게.......”

세르게이가 중얼거리며 내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항상 먹는 거, 맞지?”

“응.”

나보다 내 취향을 더 잘 꿰고 있는 세르게이가 능숙하게 주문을 하는 사이, 나는 짐 가방의 목 부분 을 풀었다. 라울루스가 빼꼼 주둥이를 내밀었다.


 [답답해.]

“조금만 참아요. 당근 줄까요?”

[응.]

나는 서비스로 나온 생당근과 푸릇한 샐러드 조각을 하나씩 라울루스에게 건네주었다. 와사삭. 와 삭. 세르게이는 라울루스가 당근을 와삭와삭 먹는 것을 생경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늑대가 채소를 먹다니.......” “뭘, 새삼스럽게.”


“맨날봐도놀라워.대체저늑대는어디서주워온거야?” [주워 오다니. 불경하구먼.]


라울루스는 하늘색 눈으로 세르게이를 찌릿 노려보았다. 나는 허허롭게 웃었다. “몇 번을 물어, 대체? 길을 헤매고 있는 게 귀여워서 데려왔다니까. 봐, 귀엽잖아.” “늑대가 자라지도 않고....... 게다가 눈 색이 너랑 똑같아.”

하늘색 눈은 라울루스의 소환자가 나라는 증거였다. 내가 라울루스를 소환함으로써 영혼이 묶였다 는 증거라나. 왜 눈은 영혼의 창이라고들 하지 않는가? 그런 의미였다. 세르게이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으로 라울루스를 살피고 있었다.

“짐승이 왕족의 색을 띠고 있다니.......”

“자자, 주문하신 식사 나왔습니다!”

덜컹. 테이블이 흔들릴 정도로 거센 기세로 종업원이 커다란 그릇 두 개를 나와 세르게이 앞에 내려 놓았다. 세르게이의 말은 거기서 끊겼다. 김이 펄펄 나는 따끈한 고기 스튜가 순식간에 내 눈과 코를 사로잡았다.

“와, 역시 아서의 술통.”

세르게이가 눈을 빛내며 스푼과 포크를 양손에 쥐고는 신나게 외쳤다.

“잘 먹겠습- 어억.”

그러나 세르게이는 채 한 입을 먹기도 전에 누군가에게 목덜미를 붙잡혔다. “공자님! 바로 돌아가신다더니!”


 “으헉. 릭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가 세르게이가 그 괴한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보고 마음을 놓았다. 그러고 보니 그 덩치 큰 사내는 레바논 공가의 문양이 찍힌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세르게이 가 뒤쪽으로 휘휘 손을 내저었다.

“밥 먹고 있잖아, 릭스. 먹을 때는 놔두라고!”

“아이, 이런 주점에서 공자님을 뵈었는데 그냥 지나치면 섭섭하죠! 그런데 옆에 계신 분은?” “몰라도 돼. 저리...... 억.”


나는 나를 소개해야 하나 고민하다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 거의 목을 졸리던 세르게이가 안 되겠다 싶었는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어, 알겠어. 가면 되잖아. 예니, 여기서 꼼짝 말고 기다리고 있어.”

“걱정은. 다녀와.”

“누가 말 걸어도 무시...... 아악, 알겠다고. 간다고!”

저놈도 참 많이 컸다. 나는 팔을 괴고 스튜를 휘휘 저으며 세르게이가 기사들 사이로 끌려들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테이블 쪽에서 껄껄거리는 환호성이 터졌다.

그래도 나름 귀하게 자란 공자님치고는 거친 기사들과도 잘 지내는 모양이었다. 기사들 틈에 끼어 서도 왜소해 보이기는커녕 엇비슷한 체격인 것을 보고 나는 속으로 조금 놀랐다.

쟤가 언제 저렇게 컸지? “저나이대애들은정말빨리크나봐요.” [동갑 아니었냐?]

“그렇긴 하지만.”

라울루스가 가소롭다는 듯 콧김을 뿜었다. [똑같은 부스러기들끼리 무슨.]

“당신 눈에야 그렇겠죠.”

나는슬금슬금짐가방에서빠져나와내무릎위에자리를잡는라울루스를도닥이며세르게이쪽 을 계속해서 쳐다보았다. 뭔가 세르게이는 꼭꼭 챙기고 다녀야 할 남동생 같단 말이지. 아마 내 안에


 서 세르게이 레바논은 브리즈니와 알렉시오, 딱 그즈음에 있는 것 같다. 물론 내가 꼬꼬마 시절의 세 르게이를 보지는 못했지만....... 어쩐지 원래 예레니카와의 관계도 지금과 다르지 않았을 것 같고.

“그래도 가끔은 저런 게 위로도 되니까.......”

릭스라고 불린 사람이 세르게이에게 얼굴만 한 술잔을 권하는 게 보였다.

“에이, 빼지 마시고. 공자님!”

“아, 정말. 안 된다니까. 일행이 있.......”

“마셔라! 마셔라!”


세르게이는 인상을 팍 쓰면서도 결국 술잔을 받아 들었다. 아서의 술통은 가게 이름에 충실하게도 직접 담근 포도주로 유명했다. 세르게이가 인상을 쓰면서도 잔에 입을 대는 게 보였다.


하여튼, 남자들이란....... 나는 피식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주점 안은 여전히 떠들썩했다. 확실히 휴일 전이라 그런지 늦게까지 자리를 잡고 앉아 술을 마시는 사람이 많았다. 게다가 아서의 술통은 여관까지 겸하고 있어서, 아마 이 북적거림은 새벽 내내 계속될 것같았다.내무릎위에배를드러내고누워간질임을받고있던라울루스가문득물었다.

[돌멩이야.]

“왜요?”

[뭐 느껴지는 것 없니?]

웃음기 어린 음성이었다.

나는 스튜를 휘젓다 말고 라울루스를 내려다보았다. 나른하게 누워 있던 라울루스가 폴짝, 테이블 아래로 뛰어내렸다. 나는 놀라 테이블 아래로 몸을 숙였다.

“어디 가요?”

[어디안가.그냥여기가더편해서.] 이건또뭔소리야?나는고개를갸웃거리며다시허리를바로했다. “웬일이래. 언제는 밤이고 낮이고 귀찮게 안겨들더니.......”

소환자와 떨어지는 만큼 지상에 머무는 것에도 제약이 걸린다고 했다. 그래서 라울루스는 늘 내 주 변에서 도통 떨어질 생각을 않곤 했다. 오늘은 웬 변덕이지. 나는 의아하게 생각하며 다시 스튜를 끼


 적였다. 펄펄 끓어오르던 김이 한결 가셔 있었다. 그릇도 딱 알맞게 식었다.

큼직하게 썰린 소고기 조각들과 야채 건더기들이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아서의 술통의 메인 요리인

고기 스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메뉴였다.

“.......”

그러나 나는 스푼을 움직이지 못했다. 차랑. 오른쪽 귓불에 걸린 은빛 십자가 귀걸이가 달랑거렸다. 바람이 불지 않는 실내에서 귀걸이가 저 혼자 달랑거리고, 후드 밖으로 비어져 나온 머리카락이 얕게 흔들렸다.


“.......”

허공에 멈춘 스푼에서 스튜가 툭툭 떨어졌다. 나는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내가지금뭘느끼고있는거지? 내가 지금.......

“.......”

뭘보고있는거지?

스푼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챙그랑. 떨어진 스푼이 그릇과 부딪히며 듣기 싫은 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소리는내귀에닿지않았다.주점안이온통쥐죽은듯고요했다.방금까지는분명히옆사람의대 화 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시끌벅적했는데.

그런데.......

톡, 톡.

길쭉한 검지가 테이블을 톡톡, 느리고 일정하게 두드렸다. 사방이 삐- 소리와 함께 조용해진 가운데 그 소리만이 머릿속을 툭툭 두드렸다. 그것을 시작으로 멈추었던 사고가 느리게 다시 작동하기 시작 했다. 나는 일단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꿈인가?”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나는 다시 눈을 깜빡였다. 눈앞을 차지한 광경은 방금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검은 로브 자락. 눈 밑까지 덮인 후드. 얼굴 하관은 검은 복면에 전부 가려져 있었다. 날카로운 콧대서 부터 입과 턱으로 이어지는 굴곡이 밀착된 복면 위로 드러나 보였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잘게 요동치기 시작하는 몸 안의 흐름.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거의 바닥을 치


 던 몸 안의 신성이 끌어올려지고 있었다. 나는 침착하게 다시 내뱉었다.

“꿈, 인가 봐.”

이러면 으레 돌아오는 대답이 있을 거였다. 복면에 가려진 입매가 살짝 양쪽으로 끌려 올라가는 모 양이 보였다.

“아니야.” 한마디가돌아왔다.테이블위를가만히두드리던손끝이가볍게내손등위를스쳤다.잡은것이아

니었다. 단순한 접촉.


“......아.”

그러나 그 짧고 순간적인 접촉으로도 순식간에 신성이 턱 끝까지 급격하게 차올랐다. 절로 헛숨이


삼켜졌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갑작스레 나타나 내 맞은편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남자가 천천히 후드를 살짝 젖혔다. 속도 깊이도 알 수 없던 새카만 후드 아래로 붉은 자줏빛이 반짝였다. 나는 더 생각하는 것을 집어치웠다. 벌떡 몸 을 일으킴과 동시에 내 손등을 스치고 떨어지려는 손을 확 끌어 잡았다. 적당한 온기가 어린 손이 순 순히 내 손을 맞잡았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잇새로 중얼거렸다.

“......거짓말.”

“그것도 아닌데.”

이번의 답은 좀 더 빨랐다. 태연자약하게 손등에 비스듬히 턱을 괴고 있는 남자가 부드럽게 웃었다. 여전히 복면과 후드에 절반이 넘게 가려진 얼굴이었지만 입매가 그리는 호선이 더없이 익숙했다. 손 은 머리보다 빨랐다. 거침없이 뻗어진 손이 남자가 뒤집어쓴 후드를 젖혔다.

“......아.”

그리고짧은탄성.나는더볼것도없이후드를도로내렸다.잡은손을뿌리치듯놓고대신팔을잡 았다. 놓칠세라 세게 잡고 그를 자리에서 일으켰다. 대체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나는 일단우는듯웃는듯내뱉었다.

“......따라와요.”


 

“못 본 새에 좀 과격해졌.......” “조용히 해요.”


** *

쾅. 주점의 뒷문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쾅 열렸다. 갑작스럽게 찰랑찰랑 차오른 신성이 마구잡이로 몸 밖으로 넘쳐흘렀다. 그러나 그것을 컨트롤할 여유가 없었다. 문을 쾅 밀어 연 신성의 기운이 다시 문을 닫았다. 이번에도 세차게 쾅.

알싸한향이코끝에훅끼쳤다.포도주가담긴술통이벽면에차곡차곡쌓여있었다.아마포도주저 장소로 들어온 모양이었다. 아니,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내 손에 끌려온 남자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상하게이어지는목소리를더들어줄여유도없었다.나는거칠게그의로브깃을쥐고내쪽으로 끌어 내렸다. 다른 손으로 후드를 완전히 젖히자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는 은빛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내가 기억하는 길이보다 살짝 짧은 머리칼이 이마 위에 흩어져 있었다. 나는 짧게 신음하며 얼굴의 반을가린검은복면을밑으로끌어내렸다.

그러고나서야마주한사람의얼굴이완전히눈앞에드러났다.나는잠시할말을잃었다.길쭉한손 가락이 내 후드 자락을 살짝 건드렸다. 그 작은 동작에도 쓰고 있던 후드가 목 뒤로 사르륵 넘어갔다. 마침내꾹눌린목소리가튀어나온것은그가내머리카락끝에가볍게입을맞추고난뒤였다.

나는 그를 노려보며 내뱉었다.

“이거, 장난이죠?”

“아니야.이말을벌써세번째하고있군.”

하늘에서 뚝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갑작스럽게 나타난 남자가 부드럽게 웃었다. 내가 기억하는 바로 그 입매가 매끄러운 호선을 그렸다. 2년이나 지났는데도 여전히 심장에 해로운 얼굴이었다.

에우레디안 벨고트가 특유의 느슨한 얼굴로 손을 뻗었다. 손끝이 머리카락을 쓸고, 귀와 턱 언저리 를 가볍게 스쳤다. 그 깃털같이 가벼운 접촉에도 몸이 흠칫거리며 튀었다. 그가 내게로 고개를 내리며 낮게 속삭였다.

“하도답을해주지않아서직접왔지.” “무슨, 답을 안 한 건 당신이면서!”


 나는기가막혀사납게대꾸했다.그러나나오는말과는달리가슴은점점더빠르게뛰기시작했다. 얼굴이 가까웠다. 귀와 턱 언저리에 머물던 손이 뺨을 감쌌다. 끊임없이 맑고 정갈한 체향이 풍겨 오 고 있었다.

나는숨을짧게끊어쉬었다.깊게들이쉬었다가는그대로사고가당장정지할것같아서.온몸의통 제권을다놓쳐버릴것같아서.

“......정말로.”

하지만 확인해야 했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고, 지척의 불그스름한 자줏빛 눈동자를 올려다보며 물 었다.


“정말로 당신이에요? 에우레디안 벨고트?” “그럼달리누구같을까.그대에게이렇게가까이다가올수있는게.”


그는 물음에 물음으로 답했다. 인상이 저절로 구겨졌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가능한 경우들을 전 부 읊기 시작했다.

“허상. 망령. 신기루. 아니면 내가 지금 상태가 안 좋아서 선 채로 꿈을 꾸고 있다거나. 아니면.......” “아니면?”

당장 입술이 맞닿을 거리에서, 에우레디안이 부드럽게, 그러나 이상하게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면, 밤이고 낮이고 귀찮게 안겨드는 누구?”

“뭐, 무슨......?”

“아니면....... 사돈 관계라던 오랜 소꿉친구라거나.”

여전히 부드럽게 그지없는 어조였지만 분명 어딘가 날이 서 있었다. “어느 쪽이든 지나치게 친밀해 보이던데.”

“이 사람이 정말.......”

“내가 아직 이렇게 말할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기가 막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대체 어떻게 르보브니까지, 그것도 정확히 내가 있는 주점까지 찾아왔는지 모를 남자는 맘에도 없을 말을 내뱉고 있었다. 이어지는 말은 마치 허락을 기다리는 듯한 투였다.


 “키스해도 되나?”

“.......”

“안 될까?”

그리고 조금은, 조급해 보이는 얼굴이기도 했다. 어둠 속에서 더 붉게 보이는 자줏빛 눈동자에 일렁 거리는 것이 무슨 감정인지 모르지 않았다.

나는 결국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심장이 자꾸만 쿵쿵 뛰었다. 지금 나를 이렇게 뒤흔드는 게 서러움

인지 반가움인지, 아니면 왈칵 치밀어 오르는 묵은 화인지 나는 몰랐지만. 어쨌든 이 남자가 바보 같

은 소리를 하고 있다는 것만은 알았다.


결국에는 사나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나랑 장난해요, 지금?”

팔을뻗어그의목을휘어감았다.이미가깝던거리가틈없이좁혀졌다.

“미워, 진짜.......”

입술이 맞닿았다. 즉각 그리운 체향이 가느다랗게 벌어진 입술 사이를 타고 넘어왔다. 에우레디안 이그접촉에살짝굳는것이느껴졌다.내게먼저이만큼이나가까이다가온건그자신인주제에.

그러나 그것도 아주 잠시였다. 곧 온기 도는 두 손이 내 양 볼을 감쌌다. 자연히 고개가 비틀렸다. 그 대로 버거운 감각이 깊숙이 파고들었다.

술은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는데, 공기에 떠도는 알싸한 포도주의 향 때문인지 아니면 2년 만에 받아들이는 눈물 나게 그리운 기운 때문인지, 다시 만난 그 밤은 온통 취하기라도 한 것처럼 몽롱했 다.


 Ch 9. 그대는 갑작스럽게 (1)

에우레디안은 예레니카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후드를 쓰고 있건 벗고 있건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공기 중에 떠도는 신성의 흐름을 기민하게 읽어 내는 것은 그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2년전보다조금날이서있는것같긴하지만,예레니카특유의곧사라질것같은약한신성의흐름 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국경을 넘자마자 헤매지도 않고 단번에 그녀를 찾아낸 건 역시 목걸이 덕이 컸다. 은빛 십자 가 목걸이가 가슴 언저리에서 저절로 흔들렸다. 예레니카가 2년 전에 벨고트를 떠나며 그에게 건네고


은빛

십자

르보

는그

니땅

다는

어서

마자

묘한 비누 향이 감도는 신성은 정확한 길로 그를 안내했다. 꼭 짝을 찾아가려는 것처럼. 예레니카의 귀걸이에 어떤 신성이 담겨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그 이끌림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완벽히 그리운 체향이 거부할 수 있겠느냐는 듯 코끝에 자꾸만 맴도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그리고 결론적으로는, 그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르보브니 왕성에서도 한참 떨어진 수도 리브네의 외곽 지역. 휴일을 앞둔 저녁이라 유난히 북적거리는 길가 어귀에서 그는 그녀를 찾아냈다.

“오. 저기 계시는군요.”

아내의 등살에 강제로 끌려오다시피 동행한 아이벤 백작이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그러나 백작이

그렇게말했을때는이미그의사고가전부멈춰버린뒤였다.

“.......”

2년 만에 본 공주는 옛날과 같으면서도 또 달랐다. 닿으면 바로 손안에서 녹아 버릴 것처럼 달콤한 연분홍빛 머리카락은 여전했다. 맑은 하늘빛 눈동자도. 가느다란 체구도.

그러나 묘하게 현실감이 없다. 붉은 자줏빛 시선이 길가 건너편을 천천히 지나고 있는 예레니카를 좇았다. 예레니카는 말을 타고 있었다. 에우레디안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승마를 배웠나.”

그의 기억 속 그녀는 말이라면 기겁을 했는데, 멀찍이서 보이는 예레니카는 말을 타는 것에 익숙해 보였다. 편안하고 익숙한 자세로 말을 모는 것을 보니 뭐라 형언하기 힘든 이상한 감정이 솟았다.

이그

이끌었다.


 게다가 멀리서 보아도 또 다른 점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후드 밖으로 찰랑이며 떨어지는 머리카 락의 길이가 더 길어진 것 같았다. 귀와 턱 사이에서 물결치던 옆머리가 완전히 자라 귀 뒤로 넘긴 모 습이었다. 그 덕에 살짝 상기된 오른뺨이 완전히 드러나 보였다. 몇 번이고 입을 맞추었던 흰 뺨은 여 름밤의 더운 공기에 옅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러나 가장 달라진 것은 전체적으로 그녀를 이루는 분위기였다. 소녀같이 발랄하고 통통 튀던 깜 찍함은 어디로 가고, 창백한 안색에 붉은 기가 도는 분홍빛으로 반짝이는 입술. 내리깔린 긴 속눈썹. 무심한 듯 무표정한 얼굴까지. 차분하게 가라앉은 분위기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다시만나면일단끌어안기부터해야지.왜답을하지않았느냐추궁하는것은조금뒤에하고,우선 품에안아서확인하고꿈에도잘나와주지않았던그얼굴에입을맞춰줘야지.


그모든생각은예레니카가살짝고개를돌렸을때드러난얼굴정면을보는순간전부사라졌다.착 각한 것이 아니었다. 미의 기준에 둔하다는 걸 스스로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처럼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이벤 백작이 그의 생각을 정확히 입 밖에 냈다.

“그사이에 더 아름다워지셨습니다, 공주님. 이거 원, 몰라보겠는데요.”

아이벤 백작은 흐뭇한 얼굴로 연신 껄껄 웃었다. 그러나 에우레디안은 그 말에 좋아하고만 있을 수 는 없었다. 예레니카는 혼자가 아니었다. 에우레디안의 시선이 곁에서 함께 천천히 말을 몰고 있는 이 에게 꽂혔다.

“오늘도 거기 갈 거야? 아서의 술통.”

“응.왜,다른데봐둔곳있어?”

“아니. 거기 가자.”

예민하게 열린 귀에 그들의 대화 소리가 선명하게 잡혔다. 여유롭고 태평한 목소리들이었다. 그리 고 에우레디안은 그 짧은 대화 속에서도 거슬리는 단어를 몇 개나 잡아냈다.

오늘도. 술통? 설마, 주점?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던 것도 잠시, 인상이 사정없이 찌푸려졌다. 예레니카는 아무래도 그가 내내

걱정했던 것처럼 저 레바논 공자라는 이와 퍽 친밀하게 지냈던 모양이었다.

“거슬려.......”

에우레디안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사돈이랬지. 소꿉친구라고 했지. 그러나 이성적인 사고가 아주 살짝 흔들리는 순간 그대로 집중이 비틀렸다. 흔적도 없이 몸 안에 갈무리하고 있던 그 특유의 신성이공기중으로탁퍼져나갔다.


 “......!”

그리고예레니카가휙고개를돌려그가있는쪽을본것은,거의동시에일어난일이었다.

“아.”

에우레디안은 짧은 신음을 내뱉으며 재빨리 골목의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겼다. 아이벤 백작이 어 리둥절한 얼굴로 따라 구석으로 들어왔다.

“왜 숨으십니까, 폐하?” “......몰라.”


정말로 몰랐다. 일단 찾아내기만 하면 바로 손부터 뻗으리라 생각했는데 왜 스토커처럼 멀찍이서 훔쳐보고만 있는 건지. 역시 바뀐 저 분위기 때문이다. 에우레디안은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골목 너머


로흘끗시선을던졌다.예레니카는아직도그가방금까지있던자리를눈으로훑고있는것같았다.

왁자지껄하게 지나가는 용병단 무리 탓에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레바논 공자가 그녀 쪽으로 아슬아슬하게 몸을 기울이는 모습은 똑똑히 보였다. 그녀에게 후드를 씌워 주며 뭐라 속 삭인다. 예레니카는 이쪽을 잠시 훑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려 버렸다. 뭔가가 속에서 울컥했다.

“긴장을 좀 하셔야겠습니다, 폐하.”

아이벤 백작이 눈치 없이 껄껄댔다. 에우레디안은 저도 모르게 백작을 보는 시선에 날을 세웠다가,

이게대체뭐하는짓인가싶어눈을내리깔았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여유는 그녀를 따라 주점에 들어서는 순간 완전히 박살이 났다. 예레니카는 후 드를 쓰고 있기는 했지만 안 쓰느니만 못했다. 후드 밖으로 매끄럽게 흘러내린 연분홍빛 머리카락이 주점 안의 모든 시선을 전부 묶어 놓고 있었다. 에우레디안은 지끈거리는 골을 짚었다.

“......미치겠군.”

맞은편에앉아있던세르게이레바논이잠시자리를비우자예레니카쪽을향한시선들은조금더 노골적으로 변했다. 에우레디안은 그 시선들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헛웃음 을 지었다. 그의 경쟁자들은 2년 새에 무한대로 늘어 있었다.

이제 매달리는 건 정말로 내 쪽이 되어야겠구나. 딱히 그녀를 제 것이라 확신한 적도 없는데 에우레 디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생각과 동시에 몸이 자리에서 일어난 건 딱히 머리가 시킨 일은 아니었다.


 이제는 정갈하게 갈무리해 두었던 기운을 터뜨리듯 내보내는 것에도 망설임이 없었다.

“......꿈인가?”

그리고 예레니카는, 그의 눈에는 아주 태평하고 침착하게도 그렇게 말했다. 그녀 앞에 급작스럽게 들이닥친그를본직후의첫마디였다.몇번눈을깜빡이더니다시말한다.

“꿈, 인가 봐.”

“......아니야.”

결국 에우레디안은 그녀의 말을 자르듯이 내뱉었다. 조급함을 숨기려 테이블 따위나 두드리던 껍데 

기뿐인 여유는 거기에서 끝났다. 손이 먼저 나갔다. 그러나에우레디안벨고트라는남자는언제고제선안의사람에게강압적으로굴수있는남자는


아니라, 뻗은 손끝은 그녀의 손등을 살짝 스치는 것에서 그쳤다. 그 작은 접촉으로도 제 몸을 얕게 휘 돌던 신성이 그녀에게로 빨려 들어가듯 흡수되는 것이 느껴졌다.

“......거짓말.”

“그것도 아닌데.”

시종일관 침착하던 맑은 하늘빛 눈동자에 불꽃이 탁 튀었다. 마침내 마주한 감정 섞인 표정이었다. 벌떡 일어나 거침없이 그의 후드를 젖히고 얼굴을 확인한 예레니카는 사납게 다시 후드를 푹 덮어씌 웠다. 거칠게 그의 팔을 잡아챘다.

“따라와요.”

사나운 박력이었다. 그런 것치고 그의 팔을 움켜쥔 힘은 그다지 세지도 못했지만, 에우레디안은 순 순히 이끌려 갔다. 정말로 예레니카는 어딘가 바뀌기는 바뀌었다. 문짝을 부술 듯 쾅 여닫는 것도 그 렇고, 거침없이 후드며 복면을 끌어 내려 버리는 것도 그렇고.

“못 본 새에 좀 과격해졌.......”

“조용히 해요.”

소리 낮춰 버럭버럭 따지는 것조차 낯설면서도 신기했다. “이거, 장난이죠?”

예레니카는무언가묻고싶은게많은것같았다.눈앞에두고도믿어지지않는지몇번이고다시확 인했다.


 “정말로 당신이에요? 에우레디안 벨고트?” “그럼달리누구같을까?그대에게이렇게가까이다가올수있는게.”

“허상. 망령. 신기루. 아니면 내가 지금 상태가 안 좋아서 선 채로 꿈을 꾸고 있다거나. 아니면.......”

그러나 에우레디안은 예레니카가 그를 보자마자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평온하고 침착할 수는 없었 다. 아찔한 비누 향이 들이쉬는 숨결에 가득했다. 꿈에도 잘 나와 주지 않아 치졸하게 원망도 했던 낯 이바로눈앞에있었다. 2년만에만난사랑하는여자를앞에두고침착할수있는남자는세상에없을 거였다. 그의 이성과 인내심은 이미 거기에서 반쯤 끊겼다.

“아니면, 밤이고 낮이고 귀찮게 안겨드는 누구?”


“뭐, 무슨......?” 

스스로 생각해도 속 좁은 질투심이었지만 거슬려서 도무지 밖으로 내뱉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아니면....... 사돈 관계라던 오랜 소꿉친구라거나.”

사실 그것은 무언의 종용과도 다르지 않았다. 에우레디안은 부드러움을 가장한 집요함으로 말을 이 었다.

“어느 쪽이든 지나치게 친밀해 보이는데.”

내가바라는말을해줘.

“이 사람이 정말.......”

“내가 아직 이렇게 말할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말을 바라는지 모르지 않잖아. 에우레디안은 전에 그가 어떤 식으로 이런 치졸한 질투심을 해 소했는지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말이 먼저 튀어 나갔다.

“키스해도 되나?”

“.......”

“안 될까?”

2년간 해소하지 못하고 누적되기만 했던 갈증은 불안과 뒤섞여 조급함이 되었다. 그에게는 허락을 빙자한 확신이 필요했다.

변하지 않았다고 말해 줘.


 “나랑 장난해요. 지금?”

그리고 예레니카는 그가 기억하는 바로 그 얼굴로 툭 대답했다. 어조는 여전히 사나웠지만 휘어지

는 눈매와 입매가 그리는 호선이 그를 순식간에 2년 전으로 데려다 놓았다.

“미워, 진짜.......”

그가 없던 2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낮의 햇살보다 어슴푸레한 밤공기와 더 닮아 있는 여자 가망설임없이그의목을휘감았다.

곧바로 맞닿은 입술의 감촉. 호흡에 뒤섞여 뇌를 곤죽으로 만드는 아찔한 향, 비누 향이 감도는 신 성.


인내의 대가로는 차고 넘칠 만큼 달콤하고 아득한 감각이 휘몰아쳤다. 그의 몸을 휘돌던 신성이 예 레니카에게로 흡수되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에우레디안은 그 순간 진심으로, 그녀를 자신으로

전부 채워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 *

‘아서의 술통’. 포도주 양조장과 주점을 겸하고 있는 그 건물의 2층부터는 수도에서 외곽으로 넘어 가거나 반대로 수도로 넘어오는 여행자들이 한숨 돌릴 수 있도록 여관이 마련되어 있다. 레바논 공작 가의 기사들이 훈련을 마치고 피로를 푸는 용도로 사용하기도 해서, 평민들의 여관보다는 훨씬 넓고 깨끗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아이벤 백작이 이곳을 예약해 둔 이유 중 하나였다. 아무리 위장 중이 라고는 하지만 일국의 지존을 형편없는 곳에 묵게 할 수는 없으니까.

그러나아이벤백작이부인의엄청난등쌀에못이겨그의뒤를따라왔다는사실을생각해볼때,미 리 방을 잡아둔 기특한 짓은 필시 부인에게 미리 지령을 받아 왔기에 가능했으리라.

사실에우레디안은자신이어디서자든별상관없었다.민간시찰을나갈때묵을곳을가린적은없 으니까. 그러나 예레니카는 아니다.

“미쳤어. 대체 언제 르보브니까지 온 거예요? 내가 이 근방에 있는 줄은 어떻게 알고?”

“그냥 알게 됐어.”

“그게 말이 돼요? 아, 어쩐지 라리가 이상한 말을 계속한다 싶더라니!”

예레니카는 순진하게도 방까지 그에게 이끌려 오면서도 이상함을 감지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에



 게 쉼 없이 ‘언제, 어떻게, 왜 왔냐’는 질문을 던져 대다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리고는 눈을 크게 떴다. “맞다, 라리. 라리 두고 왔는데.......”

“그 새끼 늑대?”

“네. 잠깐만요. 라리 불러올게요.”

창가로 달려가 창문을 당장 열어젖히려던 그녀는 걸쇠에 손만 올린 채 흠칫 굳었다. 크고 온기 도는 손이그녀의손을덮은채그대로창문을밀었다.반쯤열리던창이도로닫혔다.

“방해꾼은 없어도 돼.”


바로 등 뒤로 다가선 남자를 느꼈는지, 예레니카의 숨소리가 조금 빨라졌다. 그녀가 조그맣게 중얼 거렸다.


“라리는 방해꾼이...... 아닌데.”

“맞아.”

에우레디안은 단호하게 답하며 가는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 자신과 예레니카를 제외한 모든 게 전 부 방해된다. 허리를 안고 몸을 밀착하자 그녀가 긴장하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평소 같았으면 그녀 가 놀라지 않도록 천천히 다가갔을 텐데 오늘은 무리였다. 그는 오래 참았고, 조금 전의 키스로 그녀 의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는 확인까지 받았다.

그러면오늘은조금욕심을내도괜찮은게아닌가.그생각보다손이먼저움직였다.예레니카가두 른 로브의 단추가 톡 풀려 나갔다. 예레니카는 작게 숨을 들이켰고, 당황해 눈을 깜빡이기는 했지만 그의 행동을 저지하지는 않았다. 로브가 아래로 툭 떨어지는 건 금방이었다.

에우레디안은 고개를 숙여 가늘고 향긋한 목선에 입을 맞추었다. 점차 빨라지기 시작하는 맥동을 느끼며 체향을 가득 들이마셨다. 그러나 부족했다. 그녀가 입은 옅은 아이보리색 드레스는 무겁고 화 려한 벨고트의 것에 비하면 간소했지만 훨씬 더 단정했다. 쇄골까지 완전히 가리는 옷깃에 애가 탔다. 옷깃을 만지작거리는 손길은 꽤나 노골적이었다. 그에게 뒤로 끌어안긴 예레니카가 조금 흐트러진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폐하.”

“응.”

그는 착실하게 대답해 주면서도 그녀의 어깨를 손끝으로 더듬었다. 예레니카가 입술 안쪽을 지그시 물며 고개를 들어 그를 돌아보았다. 하늘빛 눈동자에 떠오른 떨림을 읽기도 전에, 그녀가 고개를 돌리


 며 머리카락에 가려져 있던 단추가 드러났다. “왜 그래?”

“그.......”

“혹시나 해서 묻는데, 예니.”

편지로나 몇 번 적어 보냈던 달콤한 애칭에 그녀가 뺨을 붉히는 사이, 긴 머리카락이 옆으로 넘어가 고숨겨져있던첫번째단추가툭풀려나갔다.에우레디안은발간홍조가떠오른얼굴을내려다보며 다정하게 물었다.


“키스해도 된다고 허락한 거 잊은 건 아니지?”

키스를 입술에만 해야 한다는 법 있나. 하늘색 눈에 비친 그는 그 자신조차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표


정이었다. 다정하게 묻고는 있지만 속으로는 안달이 난 남자의 표정. 아마 그녀는 그의 눈에 떠오른 선명한 갈망을 읽었으리라.

머뭇거리던 작은 손이 이내 허리에 감긴 그의 손에 얹혔고, 떼어 내려는가 싶어 심장이 철렁한 순간 그녀가그를향해돌아섰다.그보다낮은체온의그녀가그에게다시금입술을맞대어온것으로에우 레디안은그밤의모든답을받았다.

** *

새벽녘. 다정하고 나른한 대화가 방 안을 맴돌았다.

“보고 싶었어.”

“......얼마나?”

예레니카는 못 믿겠다는 얼굴을 했다. 창백하고 투명한 유리 인형 같던 낯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대 상상 이상으로.”

“아닌 것 같은데.”

즉각적인 부정에 에우레디안은 짧게 웃었다. 그는 드러난 하얀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누르며 물었 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제가 보낸 편지, 읽지도 않았죠?”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연해졌다. 그의 품에 갇히듯이 안겨 있던 예레니카가 바르작거렸다. 가는 몸에 둘둘 휘감겨 있는 하얀 시트가 바스락거렸다.

“두 달 반. 거의 80일에 육박하네요. 그동안 뜯지도 않고 반송된 편지가 몇 통인지 알아요?”

“.......”

“일이 있었으면 있다고 편지를 보내든가!”


그래서 지금 내가 편지를 읽지도 않고 다 돌려보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 에우레디안은 기가 차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넉 달이었어.”

“뭐가요?”

맑은 하늘빛 눈동자에 의문이 들어찼다. 그는 작고 오뚝한 코끝에 꾹꾹 입술을 내리눌렀다. 꽉 눌린 중얼거림이 튀어나왔다.

“그대편지를못받은게.”

“거짓말.”

즉각 반응이 톡 튀었다. 아, 이런 면은 그대로구나. 금세 묘한 만족감이 피어올랐다. 기분은 손바닥 뒤집듯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비현실적이었다가도 금세 철렁 뚝 떨어져 내렸 다가, 다시 차오르는 만족감에 나른해졌다. 입술이 다시 입술로 옮겨 갔다. 쪽. 작고 달콤한 소리가 짧 게 울렸다.

“의심부터 하는 건 새로 생긴 습관이려나?” “넉달이라니.말도안돼.제편지가안갔단말이에요,아예?” “그런 거겠지. 그대가 제때 쓰기만 했다면.”

“썼어요! 당연하죠!”

예레니카는 억울한 얼굴로 외쳤다.

“얼마나 열심히 썼는.......”


 항변하는 목소리는 입속으로 먹혀들어 갔다. 이번 입맞춤은 조금 길었다. “......잠시만, 읍. 폐하.”

떨어질 생각을 않는 입술에 예레니카가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편지가 안 갔다니. 그럴 리가 없는, 아이, 정말.”

“편지는 상관없어, 이제.”

“저는 상관있어요. 그것 때문에 제가 얼마나.......”

“응. 내게도 별로 유쾌한 시간은 아니었지.”


“진짜로 만나면 가만 안 두겠다고.......” 

“그래서 멱살부터 잡았고?”

“그게 무슨 멱살을 잡은 거예요!”

맹점을 콕콕 찔러 주면 톡톡 반응해 오는 것도 예전과 다르지 않았다. 에우레디안은 즐겁게 생각했 다. 겉모습에서 풍기는 분위기만 조금 변했다 뿐이지 속 알맹이는 여전한 사랑스러움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예레니카는 무언가를 잠시 망설이는 것 같더니 이내 작게 중얼거렸다.

“아까는 화내서 미안해요.”

“응?”

에우레디안은 반쯤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있었다. 귀와 목줄기 사이의 곡선에서 풍기는 체 취에 사고가 흐물흐물하게 녹았다. 저와 같은 향이 나는 것이 만족스러웠다.

“내 편지도 안 갔을 줄은 몰랐어요. 몇 개씩이나 자꾸 반송되어서 오니까....... 아예 받지 못했을 줄 은 몰랐어요. 그것도 넉 달이나.”

“응.”

“......저기, 듣고 계세요?”

조곤조곤 사과하던 목소리가 결국 뾰족해졌다. “얼굴들어봐요.마주보고대화라는걸좀해보자고요.”


 “많이 했잖아, 대화.”

부드럽고 달콤한 머리카락. 유리 인형처럼 투명하지만 따스한 목덜미. 곧은 쇄골과 얇은 어깨. 장장 2년 만에 다시 끌어안은 몸인데 바로 떨어지기는 싫었다. 아이 같은 소유욕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래 도 어쩔 수 없다고 에우레디안은 생각했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참고 살았는지 그대는 몰라.”

“어.......”

편지는 안 오지. 르보브니에 보낸 구혼서에도 제대로 된 답이 돌아오지 않지. 마법구도 사용할 수가 없으니 얼굴을 볼 수도 없지. 주위에서는 그의 속도 모르고 혼사를 재촉해 대지. 그야말로 인고의 시


간이었다. 그 와중에도 마지막 한 달을 참고 또 참아 급한 일은 얼추 끝내 놓고 온 자신이 대견할 지경 이었다.


그는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오늘만 봐 줘, 예레니카.”

하얀 볼에 옅은 홍조가 피어올랐다. 그의 사랑스러운 공주는 여전히 그의 목소리로 부르는 제 이름 에 약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그의 목소리에 어린 착잡함이 먹혀들었든가.

그는 갸름한 턱 선에 촘촘하게 입을 맞추었다. 아무리 키스를 퍼부어도 모자랐다. 드러난 부분에 전 부 한 번씩은 꼭 입을 맞춰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에우레디안은 몇 시간 전에 그랬듯 이번에도 생각 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을 이유를 찾지 못했다.

“읏, 정말.......”

졸지에 키스 세례를 받은 예레니카가 어색하게 시선을 굴렸다. 은빛 십자가가 달랑거리는 귀 끝을

살짝 깨물자 가는 몸이 즉각 반응했다. 예레니카가 작게 투덜거렸다.

“괴롭히려고 오신 거 아니죠?”

“글쎄.......”

넘치는 애정은 아무리 부어도 모자랐다. 이걸 어떻게 참고 살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읏. 이제 그만.......”

간지러운 자극이 계속되자 하늘빛 눈동자에 희미한 원망이 스쳤다. 다시 이 이상은 안 될까? 안 되 겠지. 그는 한숨을 쉬며 예레니카를 살짝 놓아주었다. 예레니카는 그가 팔의 힘을 풀자마자 재빨리 뒤 로 몸을 물렸다. 거리가 벌어졌다. 그래 봐야 한 뼘 정도였지만. 절로 아쉬운 소리가 튀어나왔다.


 “지금은 이 거리도 참기가 힘든데.”

“싫어요. 나는 얼굴 보고 싶으니까. 이제는 폐하께서 좀 참으실 차례예요.”

단호하고엄한목소리였다.그러나곧장뻗어오는손길이그의두뺨을감쌌다. 2년전에도그랬듯 약간은 서늘한 손이었다. 예레니카는 그의 양 볼을 붙잡고 얼굴을 여기저기 뜯어보았다.

“머리카락, 짧아졌네요.”

“응.”

“더 잘생겨졌고.”


“그래?” “네.좀맘에안들정도로.”


“음....... 이건 무슨 심술이지.”

“그냥요. 맘고생 한 얼굴이 아닌 것 같아서.”

사랑스러운 투정이었다. 창가로 들이치는 달빛에 살짝 뾰로통한 낯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리고 그 제야 에우레디안은 그녀를 보는 순간 맨 먼저 물어봤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상기해 냈다. 심장이 순식간에 다시 밑으로 쿵 떨어졌다.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동안 별일 없었지?”

거리 한복판에서 그녀를 처음 발견했을 때 보았던 표정이 다시 머리를 스쳤다. 내리깔린 속눈썹. 무

감하게 가라앉아 있던 표정.

“음.......”

애매하게 늘어지는 대답이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그러나 예레니카는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뭐, 별일은 없었어요.”

“......대답이 시원찮은데. 몸은?”

“제 몸을 걱정하기엔 좀 늦은 거 아니에요?”

에우레디안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예레니카가 키득거리며 그의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넣어 헤집 었다. 하얀 손가락들이 결 좋은 은발 사이사이를 다정하게 쓸었다.


 “뭐, 인간 강장제가 왔으니 다시 좋아지겠죠. 사실 지금도 기운이 넘치거든요.”

“지금 말고, 그동안.......”

“괜찮았어요. 올봄까지는 편지에 썼잖아요. 나름대로 자력 생존할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고. 성과가 영 없지는 않았어요.”

예레니카는 더는 그가 그 화제에 대해 말하도록 두지 않을 셈인 모양이었다. 짧고 간지러운 입맞춤 이 그의 이마에 내려앉았다.

“다시 보니까 좋다.”


은은히 비춰 들어오는 달빛 때문인지, 아니면 이제는 밤과 좀 더 닮아 있는 분위기 때문인지 휘어지 는 눈매가 묘하게 그를 자극했다.


“나 같은 건 새카맣게 잊어버렸나 했거든요.”

“그럴 리가.”

“그래서 다시 보면 정말로 대차게 화내 줘야지, 이번에는 정말로 매달리기만 하진 말아야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별로 쓸모 있는 생각은 아니었네요.”

“.......”

“이렇게 단번에 다 괜찮아질 줄은 몰랐는데. 역시 저는 좀 쉬운가 봐요.”

“......두 번 쉬웠다가는 나를 아주 말려 죽이겠군.”

어이가 없다. 에우레디안은 헛숨을 내뱉었다. 더 불안해하고 더 조급해했던 게 누구인지 우열을 가 린다면아마자신쪽에승산이있지않을까?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의미 없는 일이었다. 어쨌거나 2년 전의 그 약속이 아직 유효하다는 걸 확인 했으니까. 우선은 그것만으로도 오늘 밤은 충분했다. 그러나 예레니카는 그에게 무언가 더 줄 것이 있 는 모양이었다.

“그때 못 했던 말이 있었죠, 아마?”

“......?”

에우레디안이 뭐라 반응할 새도 없이 불그스름한 입술이 그의 귓가로 옮겨 갔다. 작고, 비밀스럽고, 달콤한 속삭임이 흘러들었다. 에우레디안은 짧게 신음했다.

“......아.”


 “그래서, 대답은요?”

이렇게 사랑스러운데 어떻게 가만히 두지. 그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대답...... 악, 잠깐만......!”

갑자기 반전된 시야에 예레니카가 짧은 비명을 질렀다. 달콤한 색채의 머리칼이 어지럽게 흐트러졌 다.꼭새하얀설원에떨어진벚꽃잎같이.예레니카가밉지않게눈을흘겼다.

에우레디안의 입에서 떨어진 답은 짧고 간결했다. 바로 이어진 속삭임에 예레니카가 만족스럽게 웃 었다. 그 짧은 한마디 말이 쉼 없이 오간 새벽은, 그들 사이에 텅 비어 있던 2년의 시간을 전부 빠듯하

“대답이 먼저예요.” “......응. 나도.”



게 채우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어디에 있을 거예요?”

** *

나는 힘겹게 내 뒤에서 허리를 끌어안고 도무지 떨어지지 않으려는 남자를 떼어 내며 물었다.

“글쎄.......”

새벽 늦게 잠이 들어서인지 약간 잠긴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벤 백작이 알아서 하지 않을까?”

“세상에, 백작님도 함께 오셨어요?”

“응. ......급하게 돌아가야 해?”

몸이 가볍게 돌려 세워졌다. 센 힘은 아니었지만 무방비한 상태인 나를 끌어당기기엔 충분했다. 나 는로브후드의끈을조이다말고도로훌렁끌려갔다.

“조금만 더 이러고 있자.”

“밤새 이러고 있었으면서. 정말로 제가 많이 보고 싶기는 하셨나 봐요.”


 “그렇다니까.”

내 목덜미에 머리를 파묻고 허리를 끌어안은 남자에게서 꽉 막힌 듯한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2년 만 에 보는 내 남자는 그새 더 솔직한 대형견이 되어 있었다. 차갑게 나를 내치던 사람과 동일 인물인가 싶은 의심까지 들 정도였다. 역시 좀 떨어져 있어 봐야 소중함을 느끼는 걸까? 나는 시답잖게 생각하 며 반짝이는 은발을 살살 쓸어 주었다.

“저는 슬슬 돌아가 봐야죠. 세르게이가 아마 제가 없어졌다고 왕궁에서 난리를 쳤을 텐데.”

“.......”

“어머니랑 아버지도 엄청 걱정하고 계실 거고....... 이럴 줄 알았으면 세르게이한테 미리 말이라도 

해 주고 올걸.”

에우레디안은 이상할 정도로 말이 없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의 표정을 흘끗 보았다.


“음, 뭐가 마음에 안 드시는 걸까? 역시 세르게이가 문제인가?”

“.......”

무언의 긍정이었다. 나는 피식피식 웃으며 그의 어깨로 손을 올렸다. 토닥토닥. “이렇게 질투가 많은 남자인 줄은 몰랐네.”

“그냥 이대로 벨고트로 돌아가면 안 될까?”

“네?”

“나랑 결혼해 줘.”

“네에?”

뭐, 무슨 청혼이 이렇게 돌직구야! 나는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아니, 잠깐만.......”

“결혼, 해 줘.”

답지 않게 막무가내였다. 나는 완전히 당황해서 딱딱하게 굳었다. 이렇게 앞뒤 없이 굴 남자가 아닌 데......? 그런데 확고한 눈을 보니 그냥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멍청하게 눈을 깜빡이다 조심 스럽게 물었다.

“여기서 알겠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건데요......?”


 어쩐지 뒤가 불안했다. 붉은 자줏빛 눈동자가 느리게 깜빡였다. 느슨하게 풀린 낯에 짧은 미소가 스 쳤다.

“알겠다고 하면, 이대로 당장 함께 돌아가는 거고.”

“......싫다고 하면?”

“그러면, 나에게 다시 납치되어 가는 거지. 옛날처럼.”

똑같잖아! 나는 얼굴을 우스꽝스럽게 일그러뜨렸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아니, 일단 여기 앉아 봐요.”


나는 그를 질질 끌고 도로 침대에 앉혔다. 에우레디안은 순순히 내 손길에 이끌려 침대 가에 걸터앉 았다.그러나내허리를얽은팔은풀지않은채라,여전히우리사이의거리는가까웠다.나는이른아


침에도 붓기 하나 없이 잘생긴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나는 그 생각을 그대로 입으로 옮겼다.

“지금 무슨 생각 해요?”

“그대에게 키스하고 싶다는 생각?”

“......그런 거 말고!”

2년 전에 내 입으로 내뱉었던 말이 이런 뻔뻔한 위력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다. 거짓말처럼 빠르

게 볼이 달아올랐다. 에우레디안이 살짝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제대로 된 청혼은 돌아가서 할게. 그러니까 지금은 한마디만 해 줘. 알겠다고.”

“.......”

“아니면그냥고개만한번끄덕여도돼.”

이런나른한맹수같은얼굴로그런말을하니정말장난같지않았다.그리고실제로도장난이아닌 것 같았다. 나는 얼떨떨하게 중얼거렸다.

“당신이이렇게급하게,앞뒤없이이런말을할사람이못된다는걸내가아는데,윽.”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에우레디안 벨고트는 그의 인내심이 허락하는 선까지는 여유롭고 계획적인

남자였다.나는내어깨를잡고제게로끌어내리려는손을간신히붙들며말을마저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벨고트 정화 작업도 거의 다 끝났고.” “그리고?”

“그리고....... 어쩐지 자꾸 불안해져서.” “뭐가요......?”

나는 철렁하는 심정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에우레디안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신성의 씨앗이 사라져서 추적이 불가능해졌어. 그건 그대도 알지?”

“네...... 라리가, 말해 줘서.”


“그래서야.어쩐지그대를더이상혼자두면안될것같아.” 

그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지켜 줄게.”

아니, 그러니까.......

“2년 전처럼 되게는 절대로 안 할 테니까.”

그런 얼굴로, 그런 목소리로 자꾸 애원하듯이 말하지 말라고.......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홀릴 것 같단 말이야.......”

“응?”

아니다. 정신 차려라, 예레니카. 나는 입 안쪽 살을 깨물어 가며 정신을 다잡았다. 라울루스와 신전

뒤뜰에서 나눴던 짤막한 대화가 머릿속을 스쳤다.

“제 감각 믿는다고 했죠, 라리?”

[가장 정확한 감각이지.]

“이거, 아무래도 정말로 시기가 가까워져 오는 것 같은데.”

내 감이 하이데스가 들이닥칠 날이 머지않았다고 외치고 있었다. 이렇게나 폭풍 전야인데, 지금 벨 고트로 돌아가는 게 의미가 있을까? 결혼, 물론 좋지만. 지금이 이럴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이 반응은 완곡한 거절인가?”

붉은 자안이 꼭 상처 받은 것처럼 내리깔렸다. 나는 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요. 일단 당신 결혼은 보통 큰 행사가 아닐 텐데. 이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해치워 버릴 일은 아니잖아요.”

“상관없어.”

“나는 상관있어요. 아니, 애초에 황궁을 이렇게 며칠씩 비워도 되는 거예요?”

“응. 걸리적거리는 일은 전부 처리하고 왔거든.”

“저, 전부?”

“혹시라도 차였다간 이대로 눌러앉을 생각으로 온 거라서. 뭐....... 한 달쯤은 내가 없어도 잘 굴러 

가지 않을까.”

한 달이라니. 역시 치밀한 남자였다. 에우레디안이 기어이 나를 끌어당겼다. 허리를 감은 팔에 단단


히힘이들어가있는것이느껴졌다.

“당장 돌아가는 게 망설여진다면, 나를 그대 곁에 둬.”

“네?”

“혼자 두기 싫어. 불안해. 뭐가 됐든 옆에 있어야겠어. 그럴 작정으로 왔으니까 이것만큼은 그대가 거절해도 어쩔 수 없어.”

에우레디안은 정말로 작정하고 온 모양이었다. 하지만 말이 안 되는 게, 지금이 결혼하기 적절한 때 이고아니고를떠나서일국의황제와타국의왕족간의혼사는그렇게간단한문제가아니다.그걸뻔 히 아는 사람이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온다는 건, 그만큼 심적으로 불안하다는 건데.

내가느끼는것같은불안감은전혀인지하지못할사람인데도이렇게나오는걸보면그냥기본적 인감이좋은사람이다.나는그의눈썹위에흐트러진은빛머리카락을치우고입을맞춰주었다.

“같이 있으면야 나야 좋지만, 갑자기 벨고트 황제가 왕궁에 나타나면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놀라서 뒤로 넘어가실 텐데요.”

“외박, 안 돼?”

하도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폐하께서 이런 말도 다 하실 줄은 몰랐네. 보통은 구혼서를 먼저 보내지 않아요?” “아무리 보내도 소용없었으니까 그렇지.”

에우레디안이 비딱하게 내뱉었다. 가라앉아 있던 낯에 짜증스러운 기색이 휙 스쳤다.


 “그대아버지가나를순순히받아줄것같지가않아.”

“그건 무슨 말이에요?”

“이미 엄청나게 밉보인 것 같아서. 아마 수백 통의 서신을 더 보낸다고 해도 무용지물일 거야. 열어 보기나 하면 다행이겠군.”

나는 그 말을 얼른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우리 아버지가요? 왜요?”

“감히 벨고트의 주인이 보낸 구혼서를 깡그리 무시할 정도로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니까.” 

그 말을 듣자마자 이번에는 정말로 귀를 의심해야 했다. 나는 급히 숨을 들이켜며 내 쇄골에 가볍게 입을 맞추는 남자를 홱 밀어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 *

구혼서를 보냈다고 했겠다. 그것도 몇 번이나. 그런데 왜 그걸 내가 모르고 있는가! 사고가 분노로 하얗게 마비됐다.

쿵쿵쿵쿵! 나는 발을 쿵쿵 구르며 주점을 나섰다. 다리에 힘을 실으니 간밤에 시달린 허리 언저리가 찌르르하게 아파 왔다. 계단 밑에 몸을 말고 꾸벅꾸벅 졸고 있던 라울루스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이제 내려오냐? 기다리다가 늙어 죽.......]

내 표정이 형형하게 일그러져 있는 것을 보았는지 라울루스가 말을 잇다 말고 고개를 기울였다.

[좋은 시간 보낸 거 아니었니, 아가?]

“어디 있어요? 세르게이 레바논.”

[으음......?]

나는 라울루스를 홱 들어 올려 품에 안았다. 이가 절로 갈렸다. 구혼서를 보냈는데, 그것도 몇 번을 보냈는데 무시했다고? 나한테는 일언반구도 없이?


“망할. 편지도 다 아버지랑 어머니가 가로챘던 게 틀림없어.”


 [가로채?]

“아니면 언니라거나!”

설마 편지가 중간에서 가로채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라울루스를 두 동강 낼 것 처럼 꽉 끌어안았다.

“세르게이 그 자식, 모르고 있을 리가 없지.”

“예레니카.”

뒤따라 내려온 에우레디안이 내 팔을 가볍게 잡았다.


“잠깐만. 화내지 말고.”

“어떻게 화를 안 내요, 이 상황에!”


나는버럭외치며그를뿌리치고길가로빠져나왔다.분명히이주변에있을것이다.내가밤새쥐도 새도모르게사라졌으니아마이일대를쥐잡듯이뒤지고있을거라는데내손목하나정도는걸수 있었다.

“예니이이!”

그리고 내 예상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나는 저만치서 땀에 훌떡 젖은 채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

오는 세르게이를 보며 비뚤게 웃었다.

“망할 것. 너는 오늘 죽었어.”

“예레.......”

“당신은 조용히 하고 있어요.”

나는거칠게그의복면을홱올린뒤에다시뒤를돌았다.세르게이는정말로밤새나를찾으러다녔 는지 꼴이 초췌하기 그지없었다.

“이, 이....... 이 미친것아. 갑자기 그렇게 사라지면 어떻게 해!”

세르게이가 버럭 성을 내며 내 어깨를 붙들었다. 녹색 눈이 재빠르게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쭉 훑었

다.

“무슨 일 당한 건 아니지? 야, 내가 그렇게 취해 있는 걸 보면 와서 데려가든가, 아니면 기사들한테 언질이라도 좀 주든가!”


 “.......”

“정신 차려 보니 너는 없고, 널 봤다는 사람도 없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아....... 머리야.”

세르게이가 창백한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나는 식은 눈으로 세르게이를 보다 그의 손을 툭툭 털어 냈다.그러니까세르게이의꼴이이모양인건밤새나를찾으러다니느라고생해서가아니라어제가 문의 기사들에게 붙들려 과음했기 때문인 게 분명했다. 남아 있던 작은 죄책감까지 싹 증발했다. 나는 이를 갈며 상냥하게 내뱉었다.

“바른대로 말해, 세르게이 레바논.” “무슨...... 뭘?”


내 서슬 퍼런 낯에 그제야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는지, 세르게이가 흠칫 놀라며 내게서 손을 거두었 다. 나는 방긋 웃었다.


“내 편지들, 다 어쨌어?”

“어, 어......?”

녹색눈이불안하게한바퀴굴렀다.도르르.나는즉각도끼눈을떴다.

“눈알 굴러가는 소리 다 들리거든! 얼른 대답해. 내 편지들 다 어디로 빼돌렸어?”

“음, 그게. 일단 왕궁에 가서 이야기하는 게 어떨까? 전하와 형수님이 애타게 기다리시.......”

“왜, 그사이에 입을 맞춰 놓으려고?”

“그, 그, 그, 그럴 리가!”

누가 내 친구 아니랄까 봐 세르게이의 거짓말은 내가 하는 거짓말과 꽤 닮아 있었다. 다시 말해, 몹 시 티가 났다. 나는 다정하게 세르게이의 목깃을 잡고 상냥하게 탈탈 털었다.

“바른대로말안해?내가벨고트로써보낸편지,다어쨌어,이놈아!”

“그걸 왜 나한테서 찾아......!”

“왜긴?내가대신부쳐달라고네게부탁한편지만몇통인데!”

그게 다 허공으로 증발했다는 말을 하려는 거냐, 이놈! 그러나 나는 마저 세르게이를 추궁하지 못했 다.

“예니.”


 훅, 정갈한 체향이 뒤통수와 목덜미에 닿아 왔다. 그것을 느끼자마자 동작이 뚝 멈추었다. 나는 당황 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왜, 왜......?”

그대로 부드럽게 나를 제 쪽으로 당긴 에우레디안이 가볍게 나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가벼운 입맞

춤이 귀와 턱 사이에 내려앉았다.

“화내지 마.”

언제복면을다시내렸는지,닿아오는입술은부드러웠다.사납게날서있던표정이저절로풀어졌 다. 살짝 떨어져 나갔던 입술이 귀 끝에 다시 닿았다. 간지러운 자극에 몸이 흠칫 튀었다. 나는 황급히


대답했다.

“......알겠, 알겠어요.”


“너무 가까이 붙지도 말고.”

“무슨......?”

“어제도 몇 번이나 참았거든. 다른 남자에게 지나치게 친밀하게 다가가는 거.”

마지막 말은 나에게만 들릴 속삭임이었다. 결국 얼굴에 열이 올랐다. 끓어 넘치기 일보 직전이던 화 는 어디로 가고, 몸속 어딘가가 간질간질해졌다.

“누구신지......?”

그러나 그것도 잠시, 경악스러운 목소리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세르게이가 못 볼 것이라도 봤 다는 것처럼 멍하니 나와 내 뒤의 에우레디안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세르게이를 보니 잠시 사그 라졌던 화가 다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후.”

나는 흥분하지 않으려 애쓰며 우선 호흡을 골랐다. 그리고 침착하게 내뱉었다. “사랑하는 친구야.”

“‘사랑하는’?”

“......친애하는 친구야.”

뒤에서즉각들어오는지적을얌전히고치자세르게이의표정이더이상일그러질수없을만큼괴 이하게 변했다.


 “아니, 잠시만. 누구시- 에, 아니, 그 전에. 예레니카 너, 밤새 저 남자와 함께 있었던.......”

“말을 끊지 마라, 친구야. 내가 보낸 편지들, 내게 온 편지들. 가로챈 게 누구야? 나만 모르고 있었던

거지? 그렇지?”

“미쳤어, 얘가. 외박이라니, 외박이라니! 너 이거 전하와 왕비 전하가 아셨다가는 당장 쫓겨나!”

이건 제대로 된 대화가 아니다. 나는 그 판단이 섬과 동시에 가차 없이 뒤돌아섰다. 세르게이를 털 게 아니라 레바논 공작저로 가서 일단 언니부터 찾아가야겠다.

“야, 제대로 얘기는 하고 가야지. 이 남자 대체 누구......? 어.”


화를 내려는 듯 높아지던 목소리가 중간에서 뚝 끊겨 나갔다. 나는 에우레디안을 붙들고 뒤돌아 한 발짝 옮기려다가, 이어지는 기이한 침묵에 흘끗 세르게이를 돌아보았다.


“허.......”

세르게이는 몹시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시선은 내게서 조금 비켜나 있었다. “음.”

에우레디안이 곤란한 낯으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내가 그를 홱 잡아끄는 바람에 푹 눌러쓰고 있 던 후드가 반쯤 뒤로 넘어가 있었다. 반짝이는 은빛이 가볍게 흩날렸다. 지닌 색채만으로도 정체가 뻔 히 드러나 보이는 남자가 느슨하게 입을 열었다.

“뭐....... 일단은 오랜만이라고 해 둘까, 레바논 공자.”

세르게이가 조용히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미친.”

뜬금없이 르보브니 땅에 나타난 벨고트의 황제를 맞닥뜨린 자의 반응으로는, 퍽 얌전한 축에 속했 다.

“그러니까, 너를 만나러 왔다고?” “그래. 그만 좀 물어.”

** *


 나는 짜증스럽게 세르게이의 얼굴을 뒤로 쭉 밀어냈다. 왕궁으로 돌아오는 내내 세르게이는 멍청한 얼굴로 몇 번이나 똑같은 질문을 했다.

“벨고트의 황제가 직접, 호위 기사 하나 없이 르보브니까지 왔다고?”

“......그래. 내가 생각해도 좀 미친 것 같기는 한데. 그렇대.”

다시 생각해 보니 나였대도 믿지 못할 말이기는 했다. 입꼬리가 저절로 당겨 올라갔다. 세르게이는 그런 내 모습에 기가 막힌 모양이었다.

“너....... 너....... 그래도 그렇지....... 외간 남자랑.......”


“자꾸우리어머니같은말만하면진짜로꼬집어줄거야,세르게이.”

나는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말을 조금 더 빠르게 몰았다. 나와 세르게이는 레바논 공작저로 향하는


길이었다. 세르게이가 꽁무니에 가까이 따라붙으며 고래고래 외쳤다. “그래서, 설마 왕궁으로 들이려는 건 아니겠지? 예니!”

세르게이의 말에 굳이 대답해 주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정답이기 때문이지.

상식적으로, 대륙의 동부 전체를 휘어잡고 있는 대제국의 황제가 며칠씩이나 타국의 외곽에 숨어 지낼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나는 일단 왕궁에 돌아가서 에우레디안의 구혼서를 무시한 이유를 캔 뒤, 그를 왕궁으로 불러들일 생각이었다.

“아, 맞다.”

한창 땅을 파고 들어가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세르게이를 휙 돌아보았다. 내 형형한 눈빛을 받은 세

르게이가 움찔했다.

“왜, 왜......?”

나는 단단히 으름장을 놓았다.

“너, 이것까지 발설했다간 그날로 나랑 연 끊어질 줄 알아.”

내 반협박에 세르게이가 인상을 파삭 구겼다.

“그가 여기까지 왔다는 건 하늘이 무너져도 너만 알고 있어야 해. 나랑 약속해. 얼른.”

“으....... 너 진짜.”

“세르게이 너, 내가 그동안 얼마나 우울해했는지 다 봤잖아. 이 편지 절도범. 양심이 아직 남아 있으


 면 순순히 협조해.”

세르게이는 몹시 불만스러운 얼굴로 나를 찌릿 노려보다 팽 고개를 돌렸다.

“알겠어. 알겠다고. 나는 이거 모르는 일이야. 나중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난 몰라.”

조금 미심쩍기는 했지만, 나는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저놈을 믿는다 생각하기로 했다.

“편지 몇 번 가로챘기로서니....... 르보브니까지 직접 찾아오다니. 말도 안 돼.”

세르게이는 곱씹을수록 얼떨떨한 모양이었다. 돌아가는 길 내내 그는 허공에 대고 뭐라 중얼거렸다 가,고개를쭉빼서나를한번보고는또멍하니고개를끄덕이기를반복했다.


“아니, 그럴 만한가.......” “......?”


“아니지.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제혀를뽑아버리기라도할것같은얼굴로세르게이가휙고개를돌렸다.왜저래?나는그정신사

나움에 혀를 내두르며 길을 재촉했다.

몇분후,나는딱딱하게굳은얼굴로언니를마주보고있었다.

“이모오......?”

침대에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던 브리즈니가 불안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붉은 머리카락을 양 갈래로 땋아 내린 모습이 깨물어 주고 싶을 만큼 귀여웠다. 옆에서 배를 반쯤 까고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알렉시오도.

나는 입꼬리가 실실 풀어지려는 걸 간신히 참아 냈다.

“예레니카.......”

테제비아 언니는 브리즈니만큼이나 불안한 얼굴로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아기들이 있는 침 대 쪽을 바라보지 않으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얼른 줘. 내 편지들.” “어......어떻게 알았어?” “그게중요한건아닌것같아.”


 이번에는 애쓸 필요도 없이 가라앉은 목소리가 나왔다. 지난 두 달 반 동안 내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가장 잘 아는 건 다름 아닌 테제비아 언니였다. 모르는 척하고 있긴 했지만 언니도 내가 에우레디안 벨고트와 그냥 납치범과 인질 관계가 아니었다는 걸 뻔히 알 거였다.

“구혼서도 무시했다면서?”

“.......”

“언니는 알고 있었지?”

결국에는 한숨이 나왔다. 답답한 마음은 한숨 몇 번 쉰다고 가벼워지지 않았다. 나는 지끈거리는 골 을 꾹꾹 누르며 내뱉었다.


“뭘 걱정하는지는 알아. 이해는 해. 나 같아도 만약에 브리즈니가 위험한 곳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 간다, 그러면 뜯어말렸을 테니까.”


“예니.......”

“하지만 그래도 국가 간에 정식으로 오가는 구혼서를 무시하면 안 되지. 아버지가 그러시더라도 언

니는 말렸어야지.”

오죽하면한나라의주인이국사를전부미뤄놓고서거대한산맥너머의이작은왕국까지왔을까. 그러나 에우레디안이 직접 르보브니까지 왔다는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고 다 른 말을 꺼냈다.

“글루카만 협약의 수수료도 올려 주겠다고 했다면서?”

“으응.......”

“그망할협약때문에몇달을골머리썩은사람이먼저그정도의조건을제시해왔으면적어도무 시는하면안되잖아.대체뭘믿고.......”

“내가 생각이 짧았어. 미안해, 예레니카.”

테제비아 언니가 눈물을 글썽이며 내 손을 잡았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좀만 비뚤어진 사람이었으면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끝나지는 않았을 거야.......”

어째 벨고트 황제로서의 위상은 르보브니에만 오면 반감되는 것 같다. 2년 전에 글루카만을 둘러싸 고 벌였던 협상들도 그렇고, 이번에 황제의 서신을 깡그리 무시한 것도 그렇고. 나는 짧게 한숨을 쉬 었다. 어쨌든 언니에게 원망만 가득 늘어놓으려 공작저를 먼저 방문한 건 아니었다. 계획을 실행에 옮 길 때였다.


 어차피 언젠가는 당연히 벨고트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무슨 로미오와 줄리엣도 아니고, 견우와 직 녀도 아니고....... 평생 편지로만 생사를 확인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가까운 미래에 뭐가 닥쳐올지 는 아직 모르더라도, 결혼 승낙은 미리 받아 놔야지!

에우레디안을 흉포한 마귀쯤으로 생각하는 부모님을 설득할 수 있는 건 테제비아 언니뿐이었다. 나 는언니의눈치를보며슬쩍운을떼었다.

“언니, 나 믿지?”

“그럼, 당연하지.”

그 대답에 용기가 솟았다. 역시 테제비아 언니는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 중 하나였다. 나는 씩씩하 

게 말을 늘어놓았다. “나는어딜가서도잘할거야.몸간수도잘할거고,사고도안칠거고.그래서말인데,언니.”


“응, 예니.”

언니가 살포시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이미 알고 있다는 듯한 얼굴이

었다.

“역시, 정식으로 거절 답신을 보내도록 아버지께 말씀드릴게.”

“응, 바로 그거야. ......응?”

나는 신나서 고개를 끄덕이다 약간 삐끗했다. 어...... 으응. 잘못 들었나 봐. 양쪽 귀를 손으로 툭툭 친뒤다시입을열었다.

“언니, 방금 뭐라고......?”

그러나 애석하게도 내 귀는 멀쩡했고, 테제비아 언니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더없이 진지했다.

“그냥 피하기만 해서 될 문제가 아닌데. 내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한 것 같아. 당장 가서 아버지께 말 씀드리자. 정식으로 거절 의사를 보내자고.”

“.......”

“처음부터 그렇게 했으면 이렇게 질질 끌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쿠궁. 머리 위에 벼락이 내리쳤다. 이게 뭔 소리야?

“글루카만 수수료와 네 안전을 바꿀 수는 없지. 그건 당연해.”


 “어......언니. 그게 아닌데.”

“잠시만 기다려 보렴. 금세 준비하고 나올게.” “아니야, 잠깐! 스톱!”

나는 기겁해서 언니를 도로 의자에 주저앉혔다. 그리고 당장 방금까지의 생각들을 전부 철회했다. 언니는 내 속을 손톱만큼도 모르고 있는 게 분명해! 하긴 평소에 언니가 내 체질을 걱정하는 정도를 생각해 보면 당연하긴 했다. 언니가 이렇게 나온다면 아버지께는 굳이 여쭤볼 필요도 없다.

“내가 직접 가서 말씀드리지 뭐......!”


나는언니를향해활짝웃어보이며속으로이를갈았다. 2년전이나지금이나플랜 A는참쓰잘데

기가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건....... 나는 약간의 허탈함과 약간의 두근거림을

그럼 정말로 그 수밖에는 없는 건가......?

** *

하루하고도반나절만에돌아온왕궁은벼락이라도맞은듯이잔뜩어수선했다.그럴만도하지.막 내 공주가 감쪽같이 실종되었다가 다시 나타났으니. 나는 그길로 아버지와 어머니께 불려 가 몇 시간 동안이나 호된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목구멍 끝까지 하고 싶은 말이 꾸역꾸역 차올랐지만 나는 라울 루스를두동강낼것처럼끌어안으며훌륭하게참아냈다.

[아파, 요 녀석아!]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다음부터는 말도 없이 사라지지 않겠습니다. 걱정할 만한 일은 아무것도 없

었어요. 정말이에요.”

아주 살짝 양심에 찔리기는 했다. 음. 성인인데 뭐 어때. 나는 씩씩하게 다짐했다.

“이제부터는 얌전히 궁 안에만 있을게요. 정말이에요.”

그리고 바로 에우레디안을 궁 안으로 들여왔다. 마치 밀수해 오듯. 물론 밀수 품목이라기엔 좀 가치 가, 상당하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안고 생각했다. 

“이게 그대가 생각한 방법이야? 상당히...... 기발하기는 한데.”


 “조용히 해요.”

앞으로의 계획도 정비하고, 에우레디안의 불안감도 좀 달래고, 나도 오랜만에 찾은 안정감을 더 가

까이,오래느끼고.누이좋고매부좋고,님도보고뽕도따고!

“예전에도 느꼈지만 르보브니의 왕궁은 굉장히 신기하게 생겼군.”

나는 생소하다는 얼굴로 왕궁을 둘러보는 남자를 재빨리 기둥 뒤로 밀어 넣었다.

“쉿, 쉿.”

“아무도 안 듣고 있어, 예니.”


“낮말은 새가 듣는단 말이에요.”

주위 상황에 온 정신이 팔리는 바람에 헛소리가 튀어나왔다. 나는 기둥 밖으로 몸을 내밀어 주위를


살폈다.라울루스를품안에가득안고있는채라동작이굼떴다. “그때도 생각했는데, 그대는.......”

“으응. 그렇구나.”

“안 듣고 있군.”

“네에.”

아무도 없지? 나는 대강 대답해 주며 슬금슬금 걸음을 옮겼다. 라울루스를 안지 않은 다른 쪽 손으

로 더듬더듬 에우레디안의 손을 찾아 잡았다. 그가 즐거운 듯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대는숨는걸잘못해.여전히.”

“네?”

“달라지지 않은 점을 하나하나 찾아내는 것도 나쁘진 않군.”

“......?”

나는 기둥 하나를 더 넘고 나서야 그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바로 지척에서 보이는 붉은 자안에 흠칫

놀라한발뒤로물러났다.

“뭐, 뭐예요? 갑자기.......”

뒤는 기둥이었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내게로 고개를 숙여 시선을 마주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심장 이한번밑으로쿵떨어졌다가점점빠르게뛰었다.


 두근두근.

에우레디안이 나른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이쯤이었던가?”

“뭐가요......?”

이렇게 갑자기 훅 들어올 때는 신호라도 줬으면 좋겠다. 날카로운 눈매가 느슨하게 휘어지는 게 보 였다. 매번 볼 때마다 치명적으로 유해한 얼굴이었다.

분명히 부드럽다기보다는 날카로운 인상에 가까운데, 웃을 때는 심장이 녹아날 정도로 다정한 얼굴 

이 된다. 사람이 이런 모순적인 분위기를 풍길 수가 있나.......

짧은 웃음소리와 함께 코끝에 가벼운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입술이 녹아내릴 것처럼 부드러웠다.


“아닌가? 저기였나.”

에우레디안은 뭔가를 가늠하는 것처럼 고개를 돌려 옆 기둥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기둥 밖을 다시

흘끗.

“......아.”

나는 그 일련의 행동이 뭘 의미하는지 오래지 않아 깨달았다. 멍하니 주위를 돌아보았다. 르보브니 왕궁의별궁두채.서쪽궁과동쪽궁을잇는긴홀.

“와, 그렇구나. 여기서.......”

내가 테제비아 언니 대신 납치됐구나. 그날의 일이 꼭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났다. 브리즈니가 아직 테제비아 언니의 배 속에 있었고, 언제 벨고트군이 기습해 올지 몰라 전전긍긍하던 그날들. 테제 비아언니를개구멍에숨겨놓고이기둥들너머를조심조심넘어가던것.

“그때는 진짜 무서웠는데.”

나는 내 입술을 스쳐 턱으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입술의 감촉을 느끼며 피식 웃었다. 바로 이 기둥들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눈이 딱 마주쳤던 순간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멀리서도 정확히 뇌리에 콱 박히 던 불그스름한 자줏빛.

“다시 생각하니까 새삼스럽네요....... 그게 벌써 언제 적 일이지? 2년 반 전?”

에우레디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쇄골 부근이 찌릿했다. 절로 짧은 신음이 튀어 나갔다. “읏. 잠깐만.”


 나는 그의 어깨를 밀어내며 불안하게 눈을 굴렸다. 아버지께 ‘다시는 걱정하실 만한 일을 만들지 않 겠습니다’라는 약속을 하고 나온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았다. 양심이 작게 콕콕 쑤셨다.

“누가 보면.......”

“안봐.걱정마.”

즉답이 돌아왔다. 그의 말대로이긴 했다. 서쪽 궁과 동쪽 궁 사이엔 지나다니는 사람의 그림자도, 어 떤 인기척도 없었다. 하지만 아무도 안 본다기엔.......

나는 슬쩍 품에 안은 라울루스를 내려다보았다. 천만다행으로 라울루스는 내 가슴께에 머리를 기대 고 쿨쿨 잠들어 있었다.


‘라리, 자요?’ 

머릿속으로 크게 생각해 봤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으응. 자나 보다.”

“......누가?”

나는 품에서 태평하게 늘어진 라울루스를 한 번 고쳐 안으며 활짝 웃어 보였다. 에우레디안이 약간 미심쩍은 얼굴로 나를 보았다. 나는 그 시선이 슬쩍 내 입술로 내려가는 것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물 끄러미 바라보는 자줏빛 눈동자에 찰나 고민의 흔적이 엿보였다.

“흐음.”

나는그고민을직접없애주기로결정했다.나를찾아이멀리까지온남자에게뭔들못해줄까.이 남자 특유의 분위기가 내게로 옮겨 왔는지, 아니면 여름의 늦은 오후가 주는 눅진한 공기 때문인지, 눈매가 느슨하게 휘었다. 나는 내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로 흥얼거리듯 속삭였다.

“이제 키스하셔도 돼요.”

“.......”

“아니면 제가 할까요? 그런데 제가 지금 손이 없.......”

말은끝까지이어지지않았다.꼭그말을기다리고있기라도했던것처럼,길쭉한손가락이내턱을 들어 올렸다.

“그대는늘귀신같이내가원하는말만해줘.”

푹 잠긴 것처럼 낮게 가라앉은 속삭임이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입술이 맞닿았다. 꼭 우리가 만난


 첫날처럼, 가는 햇살에 은빛 머리카락이 반짝였다. 반쯤 내리깔려 있던 붉은 자안은 숨결이 깊이 섞임 과 동시에 완전히 내리깔렸다.

날붙이가 맞부딪히는 소리도, 갑주가 덜그럭거리는 소리도 군사들의 함성 소리도 없이 사위가 고요 했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수십 갈래로 나뉘어 기둥 사이로 비스듬히 내리비추는 가운데, 아찔하고 비 현실적인 감각이 엉망으로 뒤섞였다. 그 언젠가 느꼈듯 오직 이 남자밖에는 줄 수 없는 감각이었다.

** *


국경을몰래넘어온남자를내별궁에숨기는것은그리어렵지는않았다.특히서쪽궁은본궁과꽤 나떨어져있을뿐만아니라거의나홀로쓰는궁이나다름없어서,사용인들의입단속에만주의를쏟


으면얼마간은감쪽같이숨길수있을것같기는했다.

그러고 나서 보니 꼭 내가 에우레디안을 별궁에 가둬 놓은 꼴이었다. 어쩐지 내가 바리샤드의 황궁

에서옴짝달싹못하고있던날들이떠오르는건우연은아닐터였다.

“상황이 이렇게도 바뀌는구나.......”

2년 전의 역할과 위치가 완벽하게 뒤바뀌었다. 주인은 객으로, 객은 주인으로. 가둬진 사람은 가두 는 사람으로, 가두는 사람은 가둬진 사람으로. 세상은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물론 이 은밀한 감 금은 그때만큼이나 오래 지속되지는 못하겠지만.

나는 에우레디안을 서쪽 별궁에 들인 직후부터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은 참이었다. 내게 순순히 이끌 려 온 남자의 불안감은 그저 막연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에우레디안은 내가 그에게 말하지 않았던 것을 눈치채고 온 게 분명했다.

내가 비밀로 했던 것이라면 하나밖에 없었다. 솔레이아에게 붙은 삿된 것의 정체가 레모르디 아래 의 주인, 하이데스라는 것. 그리고 하이데스의 표적이 에우레디안에서 나로 바뀌었다는 것. 그것을 말 하는 순간 에우레디안이 어떤 명령을 내릴지는 너무 뻔해서 부러 말을 안 했었는데, 이미 다 알고 왔 다니 그의 의중도 자연스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서쪽 별궁에서 함께 지내게 된 지 이틀 만에 팽팽한 신경전이 시작되었다. “돌아가자.”

“돌아가요.”


 시선이 맹렬하게 맞부딪혔다. 먼저 입을 뗀 건 에우레디안이었다.

“사랑한다면서?”

묵직한 직구였다. 말문이 막혔다. 나는 더듬더듬 내뱉었다.

“그거랑 이거는 다른 문제죠. 그렇게 따지면 저도 사랑하니까 안 따라가는 거예요.” “하지만나를평생여기숨겨둘건아니잖아.”

그리고 에우레디안은 며칠째 그 특유의 집요함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중이었다. 내가 그 얼굴로 그 런어조로말하는것에약하다는걸금세파악했는지그는시도때도없이질척하게달라붙어왔다.


게다가 우리가 서로 뒤바뀐 건 그것뿐만이 아니라서....... “예레니카.”


“.......”

“나랑 결.......”

“그만, 그으만.”

나는 결국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로 몸을 뒤로 물렸다. 서쪽 궁의 오래된 장서관에는 주황빛 노을 과희미한책냄새,그리고맑고정갈한에우레디안특유의체향이가득배어있었다.

“그말,한마디만더해요.도망가버릴거니까.”

나는 들고 있던 책으로 에우레디안의 얼굴을 쭉 밀어냈다. 이마에 흩어진 짧은 은발이 살짝 헝클어 졌다. 그러나 내 손은 커다란 손에 금방 붙들렸다. 들고 있던 책을 홀랑 빼앗은 에우레디안이 입꼬리 를 끌어 올렸다.

“왜. 부끄러워서?”

다분히 장난기가 배어 있는 어조였다. 발치에 앉아 내 무릎에 팔을 올리고 비스듬히 턱을 괴고 있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2년전에는내게이런말많이했잖아.시도때도없이.”

나는한숨을내쉬며시선을피했다.그렇지않아도요새깊이반성하는중이었다.내가겁도없이내 뱉었던 청혼들이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 알았다면, 적어도 말하기 전에 한번 망설여 보기라도 할걸.

“저랑 비교하지 마세요. 파괴력이 다르니까.......”


 아마도 이 대륙에서 가장 잘났을 남자가 결혼하자고 이렇게 달라붙어 오는데 평정심을 유지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에우레디안이 피식 웃었다.

“내가 그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이제 알겠지?”

“......이익.”

나는 짧은 신음을 내뱉으며 에우레디안이 빼앗아 간 책으로 손을 뻗었다. 자연스럽게 몸 안에서 빠 져나간 신성이 반짝이며 그의 팔을 빙빙 감아 올렸다.

“어딜.”


그러나 에우레디안 벨고트는 신성을 다루는 능력으로는 나보다 스무 계단쯤 위에 있는 남자였다. 즉각 맑은 기운이 훅 퍼지며 내 신성을 부드럽지만 묵직하게 밀어냈다. 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와, 역시 대단하긴 하, 이게 아니라. 아니, 그래도.”

순수한감탄이튀어나왔다. 2년전에는몰랐는데,신성의흐름을예민하게읽어낼수있게된지금

의 눈으로 보니 에우레디안은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신성 공장이었다. 느리고차분하게몸을휘도는신성의흐름은다른힘이끼어들틈이없을정도로견고하고치밀했

다.나는손을뻗어그흐름을더듬으며감탄했다.

“신기하다.......”

“새삼스럽게 무슨.”

“옛날에는 잘 몰랐거든요. 역시 사람이 아는 만큼 보인다고.......”

이래서 지상에서 가장 강대한 신성이라는 거구나. 에우레디안은 정말로 새삼스럽다는 얼굴이었지 만 나는 개의치 않고 손가락으로 신성의 흐름을 천천히 덧그렸다.

“저당신신성의반만주면안돼요?그러면진짜세상무서울게없겠다.” “전부 다 가져가도 돼. 그러니까 나랑 결혼해 줘.”

“......언제부터 도돌이표가 되셨어요?”

결국 대화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나는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며 손을 거두었다. 아, 정말. 부끄 러워서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에우레디안은 그간 못 준 애정을 전부 쏟아붓기라도 할 것처럼 굴었다. 하루 종일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건 기본이고, 눈이 몇 초 이상 마주친다 싶으면 어김없이 입술이 닿았다.


 입술이 닿으면....... 그다음은 사실 뻔했다. 그러나 에우레디안 벨고트는 기본적으로 막무가내인 남 자는 아니었다. 그는, 굳이 말하자면, 내가 거부할 수 없게끔 행동하는 것을 잘했다.

가령 지금처럼....... “안아 줘, 예레니카.” “.......”

“키스해 줘.”

완벽히 내가 2년 전에 일삼았던 대사와 똑같았다. 불그스름한 자안에는 웃음기가 어려 있기는 했지 

만 어떻게 봐도 그것을 장난이라고 치부하기는 어려웠다. 높고 견고한 벽을 자랑하는 남자의 벽 안쪽 은 꼭 따듯하게 데운 마시멜로처럼 달고 진득했다. 나는 간신히 표정을 관리하며 내뱉었다.


“싫어요. 안 할래.” 사람을현혹하는건솔레이아가아니라이남자가한수위가아닐까싶을정도였다.정신바짝차리

고 있지 않으면 정말로 무의식중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게 생겼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된다. 왜냐하면.

“제가 허락하기만 하면 그대로 벨고트로 데려가서 가둬 놓을 심산인 거잖아요.”

에우레디안이 처음으로 대꾸 없이 입을 다물었다. 내가 읽어 낸 그의 의중이 바로 이거였다. 에우레 디안 벨고트는 하이데스의 존재를 눈치채고, 라울루스의 분신을 불러낸 내가 그자의 목표가 될 수도 있다는것까지알아낸게분명했다.그래서나를데려다가그의울타리속에넣어두고모든일이끝날 때까지 풀어주지 않을 셈이다.

물론 에우레디안이 세워둔 울타리와 보호막 안에 있으면 죽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대신 그가죽지는않을까하고걱정해야겠지.내가그가만들어놓은절대불가침의영역안에들어가고나 면, 하이데스의 목표는 자연스레 바뀔 것이다. 하이데스의 목표는 사실 ‘내’가 아니라 ‘가장 강대한 신 성’, 그뿐이기만 하면 되니까.

내가 어떻게 에우레디안 벨고트의 운명을 비틀어 놨는데.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게 둘 수는 없다. 나 는 단호하게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저를 아무리 설득해도 소용없어요. 당신의 그 계획을 철회하지 않는 이상 제가 순순히 벨고트로 따 라가는 일은 없을 테니까.”

“.......”

“책 읽을 거예요. 이리 주세요.”


 부러 딱딱하게 말하자 그의 반듯한 눈썹이 살짝 찡그려졌다. “그래.그대생각은잘알았어.그래도철회는못해.나는그대가다시는위험에내몰리지않기를바

라니까.”

“그건 저도 마찬가지고요. ‘나는 괜찮아’ 같은 말은 안 들어드릴 거예요.”

에우레디안은 나를 가만히 올려다보나 싶더니, 이내 말을 바꾸었다.

“그럼 웃어 줘.”

온기가 도는 길쭉한 검지가 내 손등을 스치듯이 톡톡 두드렸다. 뺏겼던 책이 얌전히 무릎 위에 놓였 

다. 갑작스러운 태세 전환에 나는 당황스럽게 눈을 깜빡였다. “어....... 기분 상하신 건 아니죠?”


“아니. 그럴 리가.”

그런데 어쩐지 못 할 짓을 한 것 같다. 사실 안아 주고 싶은 건 나도 마찬가진데, 그냥 모른 척 안길 걸그랬나?이런걸보면나는철벽에는소질이영없는게분명했다.나는책을창틀위에올려놓으며 슬쩍 중얼거렸다.

“저 기분 나쁜 거 아니에요. 그냥 저도 당신이 걱정되니까.”

“알아. 그래도 역시 웃는 얼굴이 좋아서.”

나는 고개를 돌려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을 살펴보았다. 일부러 딱딱하게 굳힌 얼굴이 조금 무감해 보 일 수는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생각해 보니 요즘 들어 가라앉아 있을 때마다 내 얼굴을 살피 며 눈치를 보는 사람들이 유난히 많기는 했다. 나는 창문에서 시선을 떼며 물었다.

“제가 어디가 좀 변했나요?”

“더 예뻐졌어.”

“그러니까, 깜빡이 같은 것 좀.......”

켜고 들어와 달라고, 제발! 나는 속으로 눈물을 뿌리며 절규했지만 에우레디안이 그걸 알아줄 것 같 지는 않았다. 결국 우리의 대화는 며칠간 몇 번이고 그랬듯 진득한 키스로 마무리 지어졌다.

[몸이 영혼의 영향을 받는 거지, 달리 뭐겠니?]


 “으음......?”

내 외형의 변화에 대한 정확한 답을 얻은 건 라울루스를 통해서였다.

[여전히 이질적인 기운이 더 강하기는 하지만 역시 신성에 오래 노출되어 있었으니. 불안정한 혼이 육체에 서서히 녹아들어 가고 있다는 방증이겠지.]

나는 화장대에 팔을 괴고 내 얼굴을 여기저기 뜯어보았다. 그간 딱히 관심을 두지 않아서 몰랐는데 이렇게 제대로 거울을 앞에 두고 살펴보니 확실히 달라진 점이 눈에 띄었다. 얼굴은 그대로인데 풍기 는 분위기가 살짝 달라져 있었다.

스스로알아채지못한것도당연했다. 저건예레니카가되기전 25년동안늘봐왔던 ‘나’와굉장히 

닮아 있는 분위기였으니까. 조금 차가운 인상이라 가만히 있으면 ‘어디 아프니?’ 혹은 ‘기분 안 좋은 일이 있어?’라는 소리를 듣는 게 일상이었던 옛날의 나.


“......신기하네.”

[껍데기에 혼이 녹아들기 시작했으니 어딘가 변하는 것도 당연해. 아마 저 아이 곁에 있으면 영향을

더 빨리, 많이 받을걸.]

“그렇구나. 그럼 이제 그때처럼 영혼이 몸 밖으로 튕겨 나가고 이런 일은 더는 없을까요?”

[그거야네가수련을얼마나열심히하느냐에달렸지.그런의미에서슬슬연습좀다시시작해보지 그러니? 좋은 충전기도 생겼는데.]

“아, 맞다.”

새카맣게 잊고 있었다. 나는 내 얼굴을 요리조리 뜯어보는 것을 그만두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

고보니바로곁에가장좋은선생님이쨘하고나타난것과다를바없는데.왜그생각을못했지?

** *

“자체 치유?”

에우레디안은 그런 것을 묻는 내가 의아한 모양이었다. 돌아오는 답은 영 뚱딴지같았다. “그대, 어디 아파?”

“아니요, 아픈 게 아니라....... 미래에 대한 대비랄까.”


 나는 그의 팔을 붙들고 바싹 다가앉았다. 적당한 무게감으로 그의 몸 주위를 느리게 휘도는 신성의 흐름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나는 에우레디안의 팔을 흔들며 재차 졸랐다.

“알려 주세요. 저, 이제 마력을 어느 정도 튕겨 내거나 역으로 공격하는 법은 꽤 배웠는데....... 유독 제 안에 있는 신성을 움직이는 게 어려워서.”

“글쎄....... 그건 감각이라, 뭐라 말로 설명하기가 어려운데.”

에우레디안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해 보는 기색이었다. 커다란 손이 내 손을 하나하나 얽어 맞잡았

다. “딱히체내의신성을움직이는데어려움을느낀적이없거든.그러니그대가직접느껴봐.”


“......진짜 천재가 여기 있었네.” 

“뭐?”

나는 나 스스로를 병약한 천재라고 평가했던 지난날의 과오를 반성했다. 하찮은 부스러기 주제에

무슨.나는허허롭게웃으며잠자코맞잡은손을타고느껴지는흐름을읽어내는데집중했다. “......와아.”

그리고 진심으로 감탄했다.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에우레디안의 몸 안을 휘도는 신성은 밖으로 내보내지는 신성보다 훨씬 불규칙적이고 강렬했다. 맑 고 정갈한 신성은 온데간데없고 날카롭게 들끓는 날것의 기운이 가득했다. 말이 짧게 뚝뚝 끊겨 나왔 다.

“워, 원래, 이래, 요?”

“정제하지 않으면. 아, 그대가 느끼기에는 너무 자극적인가.”

그말이떨어지기가무섭게날서있던신성이즉각뭉툭하게변하는것이느껴졌다.

“헉.......”

나는 그제야 내가 숨을 멈추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에우레디안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살 폈다.

“미안해. 신경 썼어야 하는데.” “아, 아니에요.”


 순식간에 잔잔한 물결로 변한 신성이 달래듯이 부드럽게 흘러들어 왔다. 맑고 정갈한 흐름. 딱 내게 알맞은 정도의 자극이었다. 에우레디안이 달래듯이 내 볼을 어루만졌다.

“뭐든 날것은 거칠고 불안정하기 마련이라. 보통은 갈무리하고 있는 편이지.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니 라서.”

“아하.......”

그 말이 내게는 마치 팔 굽혀 펴기 1,000개쯤은 5분이면 충분하지, 라는 말과 비슷한 뉘앙스로 들렸

다. 나는 가쁜 호흡을 가다듬으며 감탄을 흘렸다.

“제가, 후, 뭘 어떻게 읽어 볼 틈도 없네요. 대단하다, 당신.”


“내 능력이 아니야.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힘일 뿐.” 

에우레디안은 딱히 감흥 받은 낯도 아니었다. 내 숨이 완전히 고르게 돌아오는 것에만 온 신경을 집 중하고있는지내손목을짚은손은한참이나떨어지지않았다.내가괜찮다고몇번이나말한뒤에야 그는 손을 거두었다. 이어지는 목소리는 여전히 대수롭지 않다는 투였다.

“사실 마력을 인지하지 못하는 힘이라, 정작 중요할 때는 쓸모가 없어.”

“에이, 당연하죠. 그건 라울루스도 못 하는.......”

“......?”

에우레디안이 이상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밝게 웃으며 말을 슬쩍 바꾸었다. “......거니까 당신에게도 불가능한 거겠죠.”

“뭐...... 그렇겠지.”

좋아. 자연스러웠어.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제가너무과분한남자를잡고있는것같아요.”

신성을 제대로 느낄 줄 알게 되니 솔레이아와 하이데스가 에우레디안을 노렸던 이유를 절감할 수 있었다.그는이만큼거대하고밀도높은날것의신성을깔끔하게정제하여밖으로내보내는걸숨쉬 듯이 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에우레디안은 딱히 동의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가 느리게 대꾸했다.

“글쎄.그런것치고는나를안믿는것같은데.” “그게 왜 그렇게 돼요?”


 “내곁에있으면굳이신성을다루는법같은건배우지않아도되잖아.아......물론,그대가그런걸 배우는 건 당연히 그대에게 좋은 일이긴 하지만.”

“음.”

“어쩐지 좀.......”

불그스름한 자안에 미심쩍은 빛이 떠올랐다. 나는 지레 뜨끔해서 눈을 깜빡였다. 에우레디안이 한 숨을 쉬며 말을 흐렸다.

“내가 그렇게 못 미덥나 싶기도 하고.......”


못 미더운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나를 가장 안전하게 지켜 줄 수 있는 이는 에우레디안 한 명

뿐이라는 걸 알지만, 그가 하이데스에게서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인간이 홀로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니까. 하지만 그 말을 밖으로 내뱉었다간 정말 우울해할 것 같아서, 나는 얼 

른 화제를 바꾸었다. “쓸데없는소리하지마시고,폐하.다른것도더보여주세요.예를들면,정화의불같은거!” “딱히 궁금해할 만한 건 아닌데.......”

“그래도요!”

그는 늘 그렇듯이 나를 이기지는 못했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이틀이 지났다. 내가 에우레디안을 서쪽 궁에 숨긴 것도 어느새 일주일이 넘어 가고 있었다. 평화와 긴장감이 공존하는 나날들이었다.

“뭔가...... 아무 일도 없으니까 이상하게 더 불안해.......” [걱정이 태산이구나.]

“기우겠죠. 그렇죠?”

라울루스가쯧쯧혀를차며이불속으로파고들었다.어쩐지이궁에걱정이란걸하고사는건나밖 에 없는 것 같다. 에우레디안도 라울루스도 지나치게 태평했다. 하긴, 못 느끼니 당연한 건가? 나는 한 숨을푹내쉬며탁자에사정없이볼을꾹꾹눌렀다.

“왜 나만 항상 전전긍긍이야......?” 아무리잘숨겨놓고있다고는하지만소문이한번돌기시작하면퍼지는건순식간이라는걸알았


 다. 마치 내가 바리샤드 황궁에 머무른다는 게 바리샤드 사교계에 전부 퍼졌던 것처럼. 내가 왕궁에 남자를, 그것도 제국의 주인을 숨겨 놓고 있다는 게 들통나기라도 하면....... 나는 부모님과 언니의 손 에질질끌려본궁꼭대기다락방에갇히는상상따위를하다방긋웃었다.

“응. 생각하지 말자.”

그리고 지금 그런 걸 먼저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에우레디안은 정말로 내가 청혼을 받아들일 때까 지 며칠이고 몇 주고 별궁에 눌러앉아 있을 생각인 것 같았다. 게다가 ‘돌아가면 나를 숨겨 놓고 혼자 하이데스를 상대하겠다’는 고집도 전혀 꺾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웬만해선 본인의 계획을 철회하지 않을 것 같은데, 충격 요법이라도 썼어야 했나? 상처 받아서 돌아 

가도록 하게 했어야 했나!

나는 라울루스의 털을 빗겨 주며 물었다.


“그냥 거절해 버리는 편이 나았으려나요?”

[네가 잘도 그랬겠다.]

“그쵸.......”

하긴 내가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사실 벨고트로 돌아가고 싶은 건 에우레디안보다 내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테니까. 나는 혼란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라울루스를 아래위로 마구 흔들었다.

“그래도, 그래도 내가 어떻게 바꿔 놨는데! 내가 저 남자 살려 보겠다고 2년 전에 그렇게 개고생을 했는데, 다시 원상 복귀할 수는 없다고요!”

[부스러기야, 나 어지러워.] 내손에먼지털듯탈탈털린라울루스가헤롱거리며말하고나서야나는라울루스를마구흔들던

것을 멈추었다. 그리고 대신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근데....... 2년하고도거의한달반이나지났는데이렇게잠잠한걸보면,어쩌면그재수없는해

골,나같은건이미다까먹어버린건아닐까요?”

[울렁울렁거려.]

사실 제일 큰일인 건, 요새는 확고했던 내 마음조차 슬금슬금 기울고 있다는 거였다. “제대로 대답 좀 해 봐요, 라울루스. 저 이대로 벨고트로 돌아가도 되는 거예요?” [그거야 네가 판단할 일이지. 얼른 빗질이나 마저 해 줘. 헝클어졌잖아.]


 라울루스는천하태평으로그렇게말했다.나는저야속하게빛나는은빛털들을한올한올뽑아버 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활짝 웃었다.

“남 일 말하듯 한다, 진짜. 내가 이러다 어느 날 갑자기 콱 죽어 버리면 그 타격이 당신한테 안 갈 것 같아요?”

[하지만 난 어차피 느낄 수가 없는걸. 중요한 건 네 감각이야, 부스러기야.]

라울루스가 머리를 푸드득 흔들며 똑바로 몸을 일으켰다. 그래 봤자 내 팔뚝만 한 조그만 새끼의 형 태라 눈높이보다 한참 아래에 있었지만. 요새 내가 에우레디안의 신성으로 호강하고 있어서인지, 덩 달아 굉장히 상태가 좋아진 라울루스가 작은 앞발로 내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요새는 뭐 느껴지는 것 없니?]

“......그냥 똑같아요. 자꾸 뒤가 싸한 느낌이 든달까. 물리적으로 느껴지는 건 아직 없다는 게 다행


인것같기도하고.”

내가 하이데스보다 우위에 있는 건 그의 존재를 어떤 식으로든 느낄 수 있다는 체질 하나였다. 그러 니까 그냥 감에 불과하더라도 무시하면 안 되는 게 맞다. 쿵쿵. 심장이 콱 조여드는 것처럼 불안하게 뛰었다.

[무리할필요없어,아가.너는좀더어리광을부려도돼.]

“또 그 소리.”

[무서운 거잖아? 사실.]

라울루스는가끔소름돋게나를꿰뚫어보고는했다.라울루스가내팔을타고어깨와목뒤에자리 를 잡았다. 포근하고 묵직한 무게감이 목을 푹 눌렀다.

[내게까지숨길생각하지말렴,부스러기야.네마음을읽는건내겐일도아니라.]

“.......”

라울루스의 말이 맞았다. 사실 내가 정말로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면 진작 냉정하게 잘라 냈을 거였 다. 그러지 못한 이유는 물론 사랑하니까, 2년 만에 만났으니까. 그게 가장 큰 이유였고. 그리고.......

“저는...... 정말로 이제 막 돌멩이로 진화한 부스러기일 뿐인데. 사실은 그냥 안전한 곳에서 보호받 고 싶은 걸지도 몰라요.”

아늑한둥지에숨어있기만하면에우레디안이다알아서해주지않을까?그냥그가늘내게바라는 대로즐겁게놀고먹고만있으면어느날모든문제가쨘하고해결되어오는게아닐까.


 하지만 그러다가 에우레디안이 죽어 버리기라도 하면,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나’를 사랑해 주는 사 람이사라지면나는아마도못버틸텐데.

나는 그 최악의 상상 속에서도 나 자신을 먼저 걱정하는 스스로에게 환멸을 느꼈다. 머릿속이 엉망 진창이었다. 나는 목 아래로 흘러내린 새끼 늑대의 복슬복슬한 꼬리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떨구었 다.

모르겠다.

나는 그날 새벽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가고 싶다. 돌아가고 싶다. 아, 진짜 가고 싶다.......’ 

은빛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에서 사르륵 미끄러졌다. 속눈썹의 개수를 셀 수도 있을 만큼 얼굴이 가까웠다. 나는 잠든 얼굴을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얼른 돌려보내야 하는데.”

물론 잠든 사람에게서는 답이 없었다. 나는 꼼지락거리며 그 품을 파고들었다. 맨 살갗으로 온기가

전해져 왔다.

“그냥 가 줬으면 좋겠다.”

마음에도 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스스로 회의감이 들었다. 나는 뭘 어쩌고 싶은 거지? 이렇게 고민 만 거듭하는 건 좋지 않았다. 내게도, 기다리는 사람에게도. 나는 막막하게 한숨만 내쉬다 문득 이상 함을 느꼈다. 에우레디안의 몸을 따라 잔잔하게 흐르고 있던 신성이 일순간 툭 튄 것이다.

“어......?”

나는멍하니고개를들었다.그리고반쯤뜬붉은자안과눈이마주쳤다.

“......!”

그리고 시야가 홱 뒤바뀌었다. 나는 순식간에 그의 밑에 깔리다시피 누워 있었다.

“아, 안 자고 있었.......”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살짝 불그스름한 눈가는 막 잠에서 깬 사람의 것이 분명했다. 분명한 데....... 나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물었다.

“어디서부터 들었어요......?”


 “‘그냥 가 줬으면 좋겠다’.”

낮게 잠기긴 했지만 또렷한 목소리였다. 나는 당황스러운 신음을 삼켰다. 아니, 하필 들어도 그 말

을! 에우레디안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별로 달가운 말은 아닌데.”

“그건...... 그러니까....... 그, 반어법이랄까.”

헛소리였다.나는조심성없이주절댄내입을쭉찢어놓고싶어졌다.슬금슬금그의팔을잡아당겼

지만 꼼짝도 안 했다. 에우레디안은 약간 화가 났는지 눈매에 날이 서 있었다. 충분히 그럴 만했다. 뭐

라고변명이라도해보기위해벌린입술이그대로먹혀들어갔다.


“-!”


지금까지 했던 부드럽고 다정한 키스와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신성이 그대 로입술을통해흘러들어왔다.그것은오후에한차례느낀적있듯,내게는지나친자극이었다.

“윽....... 흐, 잠깐만. 폐.......”

거칠게 들끓고 회오리치며 몸 안쪽을 긁고 지나간다. 순식간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혔다. 입술은 체감상 한참이 지나서야 떨어졌다. 가쁜 숨이 터졌다.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손길은 나를 덮 친 강렬한 자극과 정반대로 여느 때처럼 다정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목소리는 그다지 다정하지는 못 했다.

“왜 나를 못 믿는지 모르겠어.”

“그게, 흣, 윽. 그게.......”

“그대가어딘가에갇혀서는행복할수없는사람이라는건알아.그래서2년전에보냈지.그런데내 가 근 2년 동안 끊임없이 생각한 거라곤 그때의 결정을 후회하는 것밖에는 없었어.”

사납게 터뜨리는 목소리는 살짝 흔들리고 있는 것도 같았다. 시야가 어두워 내 표정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이번은 나를 생각해주면 안 돼?”

“그게, 흡.......”

뭔가를 말할 수도 없게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목덜미와 등허리, 무릎 뒤쪽이 흠칫흠칫 튀었다. 너무 뜨거워서 오히려 소름 돋게 차가웠다.


 내것이아닌짧은신음이들렸다.나는아직도몸속을긁는날것의신성에적응하려안간힘을썼다. 에우레디안은 그제야 내 반응에서 위화감을 느꼈는지 짧게 숨을 들이켰다.

“아, 이런.” 몸이가볍게붕떴다.나는다시그의위로올라와있었다.눈에가득고여있던눈물이뚝뚝그의턱

언저리로 떨어졌다. 에우레디안은 엉망이 된 내 얼굴에 당황한 모양이었다. “미안....... 미안해. 내가 또 신경을 못 썼, 예레니카?”

그가 안절부절못하며 나를 달랬다. 목소리에 후회가 가득했다.


“미안해. 울지 마.”

“아니....... 흡, 내가 미안.......”


툭 터진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쏟아졌다. 꼬박 2년 만에 다시 만났을 때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었 다. 한번 물꼬가 트이자 그간 꾹꾹 눌러 놓았던 서러움이 일시에 터져 나왔다. 그 앞에서 이렇게 펑펑 운건2년전벨리룩궁에서솔레이아의악몽에당한직후이후로처음이었다.

그때는 처음부터 끝까지 생리적인 눈물이었다면 이번에는 중간부터 감정이 섞여 버렸다는 게 다를 뿐.

“나도, 정말로 같이 있고 싶.......”

“알겠어. 응. 내가 잘못했어.”

영문도 모르면서 나를 달래는 목소리와 손길이 다정해서 어쩐지 더 서러워졌다.

“많이 아팠나? 미치겠군. 울지 마, 예니.”

꼭 끌어안긴 품이 단단하고 안정감 있었다. 거짓말처럼 다시 잔잔해진 신성이 그대로 전해졌다. 그 가 갈라진 음성으로 나를 달랬다.

“얼굴 보여 줘. 응?”

아. 정말로 보내고 싶지 않다. 상태가 감쪽같이 원상태로 돌아오고 나서도 나는 한동안 그에게 안겨 엉엉 울었다. 실수를 한 건 난데 죄인이 된 건 에우레디안이었다. 이게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눈물이자꾸만나와서.결국그렇게한참을울고나서야기절하듯잠이들어버린것같았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부터 내 고민은 한 가지가 더 늘었다. 지난 며칠과 다름없이 마주 보고 대화하 고, 손을 잡고 껴안고 키스하는데....... 묘하게 느껴지는 이 찜찜한 죄책감. 이걸 대체 어떻게 해결을


 해야 하나?

사실 에우레디안의 태도는 더 조심스러워졌으면 졌지 절대 막무가내로 변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애 초에그럴수있는남자도아니었을뿐더러나를울려버린게그에게는꽤충격이었던모양이었다.무 슨 유리 인형 다루듯 살살, 조심조심. 수련도 할 겸 신성을 아주 조금만 운용할라치면 기겁을 하며 나 를 안아 들었다. 조금 과장을 보태면 정말 하루 종일 내 발로 걸을 일이 없었다. 눈물의 효과는 어마어 마했다.

“저어, 아픈 거 아닌데....... 괜찮은데.”

“그대는 안 괜찮아. 그 괜찮다는 말은 아직도 습관인가?”


진짠데.......나는슬슬그의눈치를보면서도얌전히안겼다.얼마나눌러놓은건지거의공기수준 으로 가벼워진 신성이 살랑살랑 흡수되는 게 느껴졌다.


“음.......”

며칠 내내 뜨겁기만 하던 남자가 갑자기 지나치게 조심스럽게 변하니 그건 그것대로 또 이상했다. 어쨌든 에우레디안은 딱히 기분이 상하거나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러니 내가 이렇게 찔리 는건순전히내양심의문제였다.

“저어, 폐하.”

“왜?”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는데, 아이벤 백작님이 오매불망 기다리시지 않을.......”

“누구?”

어쩐지 살짝 날카로워 보이는 붉은 자안이 가늘어졌다. 나는 지레 흠칫하며 손을 파닥파닥 흔들었 다.

“아, 아니에요.......”

에우레디안이 싱겁다는 얼굴로 고개를 돌리자마자 몰래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말을 붙이기는커 녕 정말로 눈치만 보게 됐어......! 그 와중에 어디선가 마력의 기운이 느껴지지는 않는지 신경을 곤두 세우랴, 사용인들의 입을 단속하랴. 그야말로 머리가 세 개쯤 되어서 각각 하나씩 고민을 나눠 갖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 일이 있고부터 약 이틀 후. 서쪽 궁에 머물고 있던 낯선 이방인의 존재를 가장 먼저 알아 챈 사람은, 다름 아닌 사랑스러운 내 조카였다.


 ** *

하늘이유난히구름한점없이새파란날이었다.쏟아지는햇볕이그대로쨍쨍내리쬐었다.이제세 살이 된 어린아이가 견디기에는 조금 더운 날이었다. 어깨에 닿을락 말락 하는 붉은 머리카락을 양쪽 으로 총총 땋아 내린 아이는 청명한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인상을 찡그리며 도로 고개를 내렸다. 눈이 부셨다.

“렉시.”


서툰 목소리로 친구의 이름을 부른다. 물론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지금 브리즈니는 술래였고, 친 구는 브리즈니를 피해 어딘가로 꽁꽁 숨어 있었으니까.


“어디로 갔지......?”

브리즈니는 작게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아이의 눈에 왕궁은 거대한 밀림이나 다름없었다. 크 고, 넓고, 낯설다. 어머니의 손을 붙들고 몇 번 와 보기야 했지만 그래 봤자 세 살배기 아이라, 분명 몇 번이나 지나쳤을 길도 낯설었다. 그러나 브리즈니는 원래가 새로운 장소나 낯선 것을 무서워하지 않 는 성격이었다. 게다가 친구와 함께라면 더더욱 무서울 게 없었다.

“렉시?”

브리즈니는 친구의 이름을 부르며 종종걸음을 옮겼다. 아이의 걸음은 점점 본궁 뒤 별궁 쪽으로 향 하고 있었다. 아이에게는 까마득하게 높은 기둥들 사이를 나름대로 꼼꼼하게 뒤졌다. 알렉시오는 거 기에 없었다.

“으음.......”

브리즈니의 머리 위에 커다란 물음표가 둥둥 떠올랐다. 친구가 본궁 뒤편 정원에서 아버지에게 붙 잡혀 바동거리고 있다는 사실 따위는 알지 못했으므로, 브리즈니는 계속 걸음을 옮겼다. 아이가 향하 는 곳은 서쪽이었다. 한참을 종종 걸었는데도 거대한 기둥들은 끝없이 늘어서 있었다.

“.......”

덜컥, 겁이 났다. 겁 없이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는 데 도가 튼 브리즈니였지만 역시 혼자서 낯선 곳

을 헤매는 것은 무서웠다. “힝.......”


 브리즈니는울상을지으며기둥을하나더넘어갔다.가도가도끝이없을것같던길이마침내끝이 난 건 커다란 하늘빛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차오를 즈음이었다.

“흐잉.......”

입매가 꼭 당장 와앙 울음을 쏟아 낼 것처럼 바들바들 떨렸다. 그러나 브리즈니는 입술을 꼭 앙다물

고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브리는 안 울어.”

씩씩한아이는우는거아니랬어.아이가좋아하는분홍꽃같은이모가농담처럼하던말이었다.브 리즈니는작은손을다부지게쥐고다시한걸음을떼었다.


“......와.” 

그리고 입을 헤에 벌렸다. 브리즈니는 작은 뒤뜰로 나와 있었다. 르보브니에 두 채 있는 별궁. 그중 에서도서쪽궁앞에딸린조그마한뜰이었다.사람의손길이전혀닿지않아다소들쑥날쑥하게자란 잔디가 아이의 발목을 간질였다.

브리즈니는 방금까지 무서워하던 것도 잊고 주위를 신기하게 둘러보았다. 서쪽 궁의 외벽은 제멋대 로 자란 담쟁이덩굴에 반쯤 덮여 있었다. 궁을 둘러싸듯 감싼 우거진 수풀. 커다란 아름드리나무. 튼 튼한 나뭇가지에 걸려 늘어진 꽃 그네가 불어오는 바람에 앞뒤로 흔들리고 있었다.

“.......”

늘 북적거리는 사람들 속에서 살던 아이의 눈에는 지나치게 한적하고 고요한 풍경이었다. 낯선 풍

경에 신기해하던 것도 잠시, 또다시 스멀스멀 불안감이 밀려왔다.

“히잉. 아무도 없나......?”

또다시 우는 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브리즈니는 홱홱 소리가 나도록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람에 나 뭇가지가 사각이는 소리만 이따금 들려올 뿐, 여전히 사위는 고요했다.

“제가 뭐 잘못했어요?” 막울음을와앙터뜨리기일보직전인아이의귀에사람의목소리가들린것은그때였다. “악, 읽지 마세요!”

“잘못한 게 있으면 말해 주세요. 고치도록 노력은 해 볼 테니까.”

“읽지 말라니까!”


 누군가가 옥신각신하는 소리였다. 목소리는 두 개였다. 그중 하나는 아이의 귀에도 익은 목소리였 다.

“이리줘요.아,내가미쳤지.이걸주는게아닌데!”

“왜? 어차피 내게 보내려던 편지 아닌가? 그리고 읽으라고 준 거잖아.” “내 앞에서 소리 내서 읽으라는 얘기는 아니었어요!”

언제나 다정하고 상냥한 이모의 목소리였다. 활짝 웃는 모습이 예쁜 이모. 브리즈니가 가장 좋아하

는 어른 중 하나이기도 했다. 브리즈니는 대화 소리가 들려오는 거대한 아름드리나무 쪽으로 도도도

달려갔다.


“이번에도 답장 안 해 주면 나도 더 이상 편지 안 쓸 거예요....... 음, 며칠 사이에 태도가 완전히 뒤 바뀌었군.”


“아, 정말!” 아이의걸음은얼마가지도못하고끼긱멈추었다.분명히방금까지는비어있던꽃그네쪽에두사

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는 탓이었다. 휙.

“점점 화가 나는 게 편지에서도 보이...... 윽.”

차분한 푸른빛 드레스 자락이 나무 기둥 뒤에서 얼핏 나타나는가 싶더니, 이내 달콤한 연분홍빛 머 리카락이 나무줄기 밖으로 완전히 드러났다. 아이가 좋아하는 이모, 르보브니의 막내 공주, 예레니카 는 뒤에 무언가를 숨기기라도 하듯 두 팔을 등 뒤로 감추고 있었다. 살풋 찡그린 얼굴로 예레니카가 톡 쏘아붙였다.

“자꾸 그러시면 저도 소리 내서 읽을 거예요.”

“나는 상관없는데.”

“......이익.”

브리즈니는 키 작은 나무 한 그루 뒤에서 고개를 쭉 뺐다. 곧 두꺼운 나무 기둥에 가려져 있던 뒤편 의모습이눈에담겼다.막서쪽궁앞으로빠져나왔을때보았던꽃그네가보였다.

“알겠어. 안 읽을게. 이리 와. 넘어져.” “싫어요. ......아, 정말. 또 그 표정!”


 들려오는 목소리는 무척 억울한 것 같았다. 아이는 작게 고개를 갸웃했다. 이모가 누구랑 싸우고 있 나? 그러나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잠시 투닥이던 소리는 이내 기분 좋게 터지는 웃음소리에 잦아들었 다.

“으응......?”

싸우다가, 억울해했다가, 또 웃는다. 이모가 어딘가 이상했다. 브리즈니는 옆으로 종종 걸어 다른 나

무 뒤로 쏙 숨어들었다. 그제야 아름드리나무 아래의 광경이 완전히 눈에 담겼다. “와아.”

아이의 입에서 천진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빽빽한 나뭇가지와 나뭇잎 사이로 가늘게 짓쳐들어온 

햇살에 반짝 빛나는 연분홍빛 머리카락. 그리고 르보브니에서는 찾기 힘든 불순물 없이 깨끗한 은발. “우아아.”


브리즈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쩐지 못 본 새 과격해졌다 했지. 편지에서도 조짐이 보이고 있을 줄은.......” “더이상말하면이이상손못대게할거예요.”

“알겠어. 미안해.”

대륙 어디에서도 보기 드문 두 색채가 어지럽게 섞였다. 브리즈니는 눈을 깜빡이며 낯선 남자가 팔 을 뻗어 예레니카의 허리를 휘어 감는 것을 보았다. 아이의 눈으로 보아도 그 미소가 눈이 부셨다. 날 카롭게 뻗은 눈매가 달콤하게 휘었다. 아이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예쁘다.”

예쁘다? 브리즈니는 그 말을 뱉자마자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수식어가 어울리는 것 같으면서도 묘 하게 안 어울렸다. 안 어울리는데, 이상하게 어울린다. 아이의 머리로는 그 이상을 생각하기는 어려웠 다.

“이렇게 오래 나와 있으면 안 되는데. 누가 볼지도 모르는데.......”

“감금당하는 걸 좋아하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나쁘지는 않, 윽. 예레니카.” 예레니카가 남자의 얼굴을 쭉 밀어냈다. 작은 투덜거림이 이어졌다.

“이 사람이 진짜. 감금이라니. 못 하는 말이 없어.”

또 싸우는 건가? 브리즈니는 점점 더 헷갈렸다. 그러나 남자가 곧바로 예레니카에게 고개를 숙이는


 걸로 봐서는, 그리고 투덜거리면서도 그를 밀어내지 않는 것으로 봐서는 아무래도 싸우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럼 노는 건가? 브리즈니는 작은 주먹을 꼭 쥐고 결심했다. “브리도 같이 놀래.”

[아가는저런거보는거아니다.]

“으아......?”

갑작스레 튀어나온 은빛 털 뭉치에 브리즈니는 짧게 비명을 지르며 털썩 주저앉았다. 꼭 아이의 몸 

집만한은빛늑대가아이의손을아프지않게물었다. [어른들의 연애에는 끼어드는 거 아니야.]


물론 라울루스의 중얼거림은 브리즈니에게는 닿지 못했다. 브리즈니는 멍하니 작게 그르렁거리는 늑대의 울음을 듣다 늑대에게 질질 끌려 서쪽 궁을 벗어났다.

그러나 아이의 호기심이라는 것은 그리 쉽게 꺼지는 것이 아니었다. 특히 이제 막 호기심과 고집과 소유욕이 하늘을 찌르는 세 살짜리 아이의 것이라면 더더욱.

실행력에서는 예레니카를 꼭 빼다 박은 브리즈니는 바로 다음 날도 서쪽 궁을 찾았다. 짧은 다리로 열심히 걸어 도착한 서쪽 궁 뒤뜰은 어제만큼이나 고요했다.

“이모오.”

예레니카를 부르며 종종걸음을 옮긴다. 어제 예레니카와 낯선 남자가 있던 아름드리나무 아래로 다

가가 봤지만 오늘은 아무도 없었다.

“예니 이모?”

짧은 보폭으로는 나무줄기를 한 바퀴 도는 것도 시간이 걸렸다.

“......없어.”

인형같이 오밀조밀한 얼굴에 금세 실망이 어렸다.

“힝.”

커다란 하늘빛 눈에 아롱아롱 눈물이 고였다. 브리즈니는 당장 울 것처럼 아랫입술을 쭉 내밀고 맥


 없이빈꽃그네를흔들었다.

“치....... 혼자 놀 거다.”

녹색 넝쿨과 싱그러운 색색의 꽃으로 장식된 꽃 그네는 아직 아이가 혼자 타기에는 높았다. 그러나 일단 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으면 반드시 해내야 하는 것이 아이의 성격이라, 브리즈니는 우선 그넷 줄을 잡고 아등바등 몸을 올렸다.

그네가 기우뚱 기울었다. 순식간에 눈에 보이는 풍경이 홱 뒤바뀌었다. 작은 몸이 그네 반대편으로 휙 기울어졌다. 아이는 다가올 충격을 본능적으로 예감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

그러나 충격은 없었다. 브리즈니는 꼭 감았던 눈을 살짝 떴다. 

“어?”

그리고 눈앞에서 살랑거리는 은빛 머리카락을 보았다 “아이......?”

남자는 아이의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자세를 낮추고 있었다. 그네 앞으로 고꾸라지려던 작은 몸 이 커다란 두 손에 단단히 잡혀 있었다. 브리즈니는 맹하니 큰 눈을 깜빡였다. 은빛 머리카락. 그 사람 이었다. 어제 이모와 함께 있던 사람.

“예쁘다.”

혀 짧은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그네 위에서 아등바등하다 그대로 땅에 머리를 찧을 뻔한 작은 여자 아이를안아든에우레디안은몹시생경한눈으로아이를바라보았다.맑은하늘빛눈을몇번깜빡이 던 아이가 환하게 웃었다.

“예쁜 사람!”

“.......”

“예쁜 사람, 좋은 사람.”

에우레디안은 헛웃음을 지었다. 제법 또렷하게 말을 하는 것이 야무진 아이였다.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을까.”

“이모한테서요!”


 아이의 이모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별 괴상한 것을 다 가르쳐 놓았다. 에우레디안은 가볍게 웃으며 아이를 그네 위에 제대로 앉혀 주었다. 나름 조심스럽게 내려놓는다고 했는데도 아이 는눈을크게떴다.

“......?”

그네가 타고 싶은 게 아니었나......? 그는 ‘어린아이’라는 존재에 대해 잘 몰랐다. 형제도, 동년배의 사촌도 없이 혼자 자랐으니 아주 어린아이, 혹은 아기를 본 적이 없는 탓이었다. 당연히 아이를 어떻 게 다루어야 하는지도 몰랐다.

보통 아이를 앞에 두면 무엇을 먼저 하지? 에우레디안은 잠시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한참의 고민 

끝에 나온 물음은 그리 길지도 못했다. “......이름이 뭐니?”


그러나 브리즈니는 눈앞의 남자가 얼마나 큰 혼돈에 빠져 있는지 알지 못했다. 맑은 하늘색을 담은 눈매가 천진하게 휘었다.

“브리.”

“브리?”

“응!”

지금까지 본 사람 중에 가장 수려한 사람이라, 브리즈니는 경계심을 몽땅 풀어 버리고 헤실헤실 웃 었다. 에우레디안은 애매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르보브니의 왕족인가.......”

“브리는 엄마 딸이에요.”

나름대로 또박또박 말하는 모양이 사랑스러웠다. 아이는 몹시 자연스럽게 그에게 팔을 뻗었다. “안아 주세요!”

“.......”

그리고 에우레디안은 순간적으로 몹시 생경한 기분이 되었다. 어디서 많이 듣던 대사였다. “안아 달라고?”

“네에!”


 예레니카와 닮은 구석이라고는 르보브니 왕족 특유의 맑은 하늘색 눈동자밖에 없는데. 어쩐지 하는 말이나 행동이 그녀를 빼다 박았다. 무엇이든 예레니카와 손톱만큼이라도 연관이 있다면 그게 뭐든 에우레디안으로서는 거부하기 힘들었다.

“심각한 증상인데.......”

그는 헛웃음을 지으며 아이를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 어떻게 얼마만큼의 힘을 주어 안아야 하는

지아는바가전혀없었기때문에자세는아주어정쩡했다. “헤헤.”

아이는 불편하지도 않은지 여전히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었다. 무서울 만큼 작은 몸이었다. 작고, 보 

드랍고, 따듯하다.

아이라는 건 이렇게 무해한 존재구나. 에우레디안은 몹시 당연한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으며 조심


스레 자세를 고쳤다. 척 봐도 아이를 처음 안아 본 티가 줄줄 났던 방금보다는 자세가 좀 더 자연스러 워졌다.

“여기는 어떻게 알고 왔지?”

“반짝반짝.”

아이는동문서답을하며손을뻗었다.이마위에흩어져있던은빛머리카락을잡고쭉당겼다.에우 레디안은 반사적으로 짧게 신음했다.

“아.”

“라리랑 똑같은 색!”

“......누구?”

은발은 귀한 색채였다. 벨고트 황족의 색이니 당연했다. 그러나 에우레디안은 금세 저와 똑같은 색 을 가진 존재를 하나 더 떠올려 냈다. 유감스럽게도 인간은 아니었다.

“아, 그 늑대.” 예레니카가품에끼고살다시피하는작은새끼늑대.그늑대의털색이꼭그의머리카락과같은색

이었다. 머리는 빠르게 돌아갔다. 예레니카의 늑대를 알고 있는 어린아이라면.......

에우레디안은 단박에 아이가 누구인지 알았다. 그는 제 머리카락을 쭉쭉 잡아당기는 아이의 손을 살살떼어내며입을열었다.


 “네가 그 아이구나. ‘브리즈니’.”

예레니카로부터 오는 편지의 반절이 넘는 지분을 가지고 있던 그녀의 조카. 언니의 딸이라던 붉은

머리카락의 여자아이.

“그래서 브리.......”

참 깜찍한 애칭이었다. 에우레디안은 곤란한 얼굴로 아이의 손에 몇 뽑혀 나온 제 머리카락을 털어 주었다. 장난기가 장난이 아니라고 편지에 쓰여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여기까지는 혼자서 어떻게 왔을까.”


“열심히 걸어서요!” “아....... 그래.”


그렇지. 열심히 걸어서 왔겠지. 에우레디안은 당황스러운 기색을 얼굴에 내비치지 않으려 애를 써 야 했다. 원래 아이와의 대화라는 건 이런 건가? 이만큼 어린아이를 본 적도 없었거니와 대화를 나눠 본 적은 더더욱 없으니 모르는 게 당연했다. 그래도 곧잘 재잘거리는 걸 보니 신기하기는 했다. 생글 생글웃는얼굴은꼭아기천사처럼예뻤다.

“몇 살이지?”

“세 살.”

세살이면그래도이만큼또렷하게말을할수있는모양이었다.그러나아이는그가다른생각을하 도록두지않았다.깜찍할만큼작은손가락에다시은빛머리카락이한움큼잡혔다.

“브리, 그네 타고 싶어요!”

“그네....... 그래.”

그네를 타고 싶은데 왜 머리카락을 자꾸 공격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의문은 풀리지 않고 늘어만 갔 다. 원래 이 나이대의 어린아이들은 다 이런가......?

에우레디안은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브리즈니를 조심조심 그네 위에 내려 주었다. 그러나 아이는 인상을 팍 찡그리더니, 그의 품에 꼭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네 타고 싶다면서?”

“아니, 같이!”

같이......? 에우레디안은 순간적으로 그게 무슨 말일까 따위를 생각하다 한 박자 늦게 이해했다. 혼


 자 타기는 싫은 모양이었다. “예쁜 그네 탈래요.” “.......”

“타 주세요.”

결국 에우레디안은 아이를 안은 채로 그네 위에 가볍게 걸터앉았다. 브리즈니는 꼬물꼬물 그의 다 리위에비스듬히자리를잡고앉았다.작은입에서는쉼없이혀짧은말들이쏟아져나왔다.

“타 주세요? 타세요?”


아이에 대한 기본 지식이 전혀 없는 그가 보기에도 영특한 아이였다. 그 발랄한 모습이 예레니카를 연상시켰다. 기실 브리즈니는 제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한 시간만큼이나 예레니카의 사랑을 듬뿍 받 고 자랐으니 비슷한 구석이 있는 것도 당연했다. 아이가 발랄한 목소리로 흥얼거렸다.

“동산 위에 꽃을 꺾어다 주세요. 오늘은 팬지. 내일은 달리아. 모레는.......” 가사를 잊어버렸는지 나름 진지하게 생각하더니, 발랄하게 외친다. “모레는 개꽃!”

“.......”

“예쁜 오빠는 어디서 왔어요?”

도무지 따라갈 수가 없는 흐름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아이의 인형같이 예쁘고 무해한 낯은 그의 경 계심을 흐물흐물 녹여 버리기에 충분했다. 에우레디안은 느슨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 특유의 나른하게 풀어진 낯이 아이의 하늘빛 눈동자에 담겼다.

“예쁜 오빠라....... 그것도 네 이모가 가르쳐 준 말인 것 같은데.”

“어떻게 알았어요?”

불안한예감은왜틀린적이없나.

“......대체 어디서 무슨 이상한 말을 자꾸 하고 다녔던 건지.”

에우레디안은 낮게 탄식하며 양 갈래로 땋아 내린 붉은 머리카락 꽁지를 살짝 쓰다듬었다. 제국의

“태워 주세요.” “태워 주세요.”



 주인을 향해 영 불경한 호칭을 입에 담은 어린아이는 순진무구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은 퍽 날카롭게 맹점을 찔렀다.

“이모를 데려갈 거예요?”

“응.”

그리고 에우레디안의 답도 빨랐다. 딱히 생각을 거치지도 않은 즉답이었다. 브리즈니는 고개를 갸 웃했다.

“어디로요?”


“벨고트.” 그가조금더아이를다루는데요령이있는어른이었다면그렇게순순히대답해주면안된다는것


쯤은 알았을 거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에우레디안은 아이의 호기심과 소유욕이라는 것에 대해 손 톱만큼도 알지 못했다.

“벨고트.......”

브리즈니는 그 단어를 몇 번 반복하고는 입술을 쭉 내밀었다. 벨고트가 어디인지는 몰랐다. 아이의

뇌리에 남은 건 좋아하는 사람이 한 명 사라진다는 사실뿐이었다.

“안 되는데.”

“왜안돼?”

“예니 이모가 그랬어요. 브리랑, 렉시랑 라리랑 평생 같이 살 거라고.” “.......”

“브리는 이모랑 같이 살 건데. 이모 사라지면 안 되는데.......”

저한테는그비슷한말의운도떼지않으면서그새끼늑대와어린조카들에게는잘만했던모양이 었다. 에우레디안은 묘한 박탈감을 느끼다가 세 살짜리 아이와 어린 짐승을 상대로 뭐 하는 생각인가, 하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자주볼수있을거야,네이모.”

그러나 빈말이라도 예레니카가 평생 르보브니에 있을 거라고는 말해 줄 수가 없어서, 그는 약간 순

회하는 편을 택했다. 그러자 아이의 얼굴에 대번에 화색이 돌았다. “그럼예쁜오빠도자주볼수있어요?”


 “......껄끄러운 호칭을 사용하는 건 르보브니 왕족의 특징인가?” 그가조금만일찍결혼을했다면딱이만한딸이있었을텐데딸뻘인아이에게오빠소리를듣다니.

에우레디안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예레니카에게는 호칭 교육을 절대 맡기면 안 되겠군.”

“자주 볼 수 있어요?”

“노력은 해 보...... 그래. 자주 보자.”

에우레디안은 두루뭉술하게 대답해 주다 반짝이는 하늘색 눈동자에 저도 모르게 말을 바꾸었다. 역 

시 딱 잘라 거부하기에는 죄책감이 드는 눈이었다. 브리즈니가 다리를 방방 흔들며 신나게 외쳤다. “와아, 약속했다!”


“그......래.”

“예쁜 오빠는 뭐라고 불러요?”

대화의 흐름이 또 영 뚱딴지같은 쪽으로 튀었다. 에우레디안은 아이의 해맑은 얼굴을 내려다보며 헛숨을 내쉬었다. 그간 르보브니의 사정들을 구구절절 듣지 않아도 알 것 같다. 예레니카가 얼마나 제 조카에게 꿀이 떨어지는 사랑을 퍼부어 주었는지. 반의반만큼만 내게 줘도 충분히 익사하고도 남을 텐데.

“뭐라고 불러요?”

인형같이 깜찍하고 사랑스러운 아이가 그의 양 뺨을 착 붙들고 다시 물었다.

“은색 늑대 이름은 라리예요. 오빠는 뭐라고 불러요?”

“브리즈니. 일단 나는 오빠가 아니.......”

“폐하?”

그리고 그가 가장 사랑하는 목소리가 들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에우레디안은 흘끗 뒤를 돌아보았 다. 반듯한 낯에 순식간에 걱정이 스쳤다.

“거기서 뭐 하세요? 이렇게 함부로 나오면 안 된다니까.” “그대야말로. 날이 더운데 왜 나왔어?”

“폐하를 찾으러 나왔죠, 당연히.”


 그러나또어쩔수없이입꼬리가느슨하게당겨올라간다. “누가 보기라도 하면 그날로 제 모가지가 날아가는, 응?” “미안해.”

“뭘 안고 있는 거...... 어머, 브리즈니?”

“이모!”

예레니카의 목소리를 알아들었는지 아이가 에우레디안의 어깨 너머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잠깐 멈추었던 발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오래지 않아 멈추어 있는 꽃 그네 앞으로 연분홍빛 머리카락이 불


쑥 나타났다.

“세상에, 브리. 여기까지는 어떻게 왔어?”


“예니 이모다! 안아 주세요!”

역시 저 안아 달라는 말은 습관인 모양이었다. 예레니카는 에우레디안의 무릎 위에 앉아 있던 아이 를 품으로 안아 들었다. 그가 안았을 때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능숙해 보이는 자세였다. 예레니카가 아 이의볼에쪽입을맞춰주며물었다.

“혼자 왔어, 브리?”

“응. 혼자 왔어요!”

“여기는와본적이없을텐데어떻게알고.......”

“브리, 어제도 왔어요. 어제 이모랑, 예쁜 오빠랑 봤어요!”

“.......”

예레니카가곤란한듯이웃었다.차마뭐라대답할말을찾지못했는지그의눈치를슬쩍보다또애 매하게 웃는다. 에우레디안은 짧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누구한테 또 그런 괴이한 호칭을 썼기에 아이가 이러는지 모르겠군.”

“으음. 브리. 엄마가 브리를 찾고 있지 않을까?”

예레니카는 그의 말을 듣고 있지도 않았다. 아니, 일부러 못 들은 척하는 걸 테다. 에우레디안은 예 레니카가 아이를 안은 채 슬금슬금 옆으로 물러나는 것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이렇게 혼자 다니면 엄마가 걱정하실 거야.”


 “으응, 하지만.......”

“아, 렉시. 렉시도 엄청 엄청 걱정할걸.”

렉시라는 이름을 입에 올리자 브리즈니의 표정이 단번에 흐려졌다. 아직 작고 좁은 브리즈니의 세 계에서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 이름들이 줄줄이 나왔다.

브리즈니는 예레니카가 움직일 때마다 반걸음씩 멀어지는 에우레디안을 빤히 바라보았다. 어쩐지 불안했다. 브리즈니가 본 몇 안 되는 사람 중에 단연 가장 아름다운 저 사람은, 어쩐지 사랑하는 이모 를데리고멀리멀리떠나버릴것같았다.

르보브니에 있을 리가 없는 벨고트의 황제가 눈앞에 있으니 이질감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아이는 

그 이질감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어도, 그가 이곳에, 제 곁에 오래 머무를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자주 올 거라고 약속했지만 어쩐지 아닐 것 같다. 브리즈니는 입술


을 쭉 내밀며 예레니카의 목을 끌어안았다.

“예니 이모, 브리랑 살 거라고 약속했어요!”

“응?”

뜬금없는 말에 예레니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이내 조카의 말버릇인 모양이라고 생각했는 지 꿀이 뚝뚝 떨어질 것처럼 다정하게 웃었다.

“그럼. 이모는 브리랑, 브리 엄마랑, 렉시 곁에 항상 있을 거야.”

그 말에 속이 미묘하게 뒤틀리는 건 에우레디안 쪽이었다. 그는 살풋 인상을 찌푸리다 그 모습을 그 대로 브리즈니에게 들켰다. 아이의 얼굴에 순식간에 불신이 가득 어렸다. 맑고 둥근 하늘색 눈동자가 정확히 그를 향했다. 말간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브리즈니가 또박또박 말했다.

“약속했다아.”

저건 자주 오겠다는 그와의 약속을 말하는 게 분명했다. 나름 빠릿하게 눈을 부릅뜨고 저를 보는 모 습이 맹랑하면서도 깜찍해서, 에우레디안은 결국 느슨하게 웃었다. 살짝 벌어진 거리가 두어 걸음 만 에금세좁혀졌다.그는허리를살짝숙여아이와눈을맞추었다.

“여기서 나를 봤다는 말, 누구에게도 하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약속하면...... 브리 또 그네 태워 줘요?”

“그래.”

브리즈니는 눈을 깜빡거렸다. 불그스름한 자안에 제 모습이 투명하게 비쳤다. 맑고 정갈한 체향이


 공기 중에 은은하게 떠돌았다. 아이로서는 거의 처음 느껴 보다시피 하는 신성이었다.

브리즈니는 활짝 웃었다. 아이다운 단순함은 방금의 불신을 깨끗하게 지워 냈다. 역시 이모만큼이 나예쁘고상냥한어른이었다.브리즈니는손을뻗어특히좋아하는사람에게하듯그의볼에쪽입을 맞추어 주었다. 깜찍 발랄하게 대답하면서.

“네에!”


<다음 권에서 이어집니다> 


 악당의 아빠를 꼬셔라 4

지은이:달슬 발행처및제작:연담 유통 : 삼양씨앤씨

copyright 2018. 달슬 all rights reserved. ISBN : 979-11-6509-345-7 [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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